“마음에 들어.”강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쥔 상표를 내려놓았다.“누나, 앞으로 내가 수천수만 벌의 스웨터 사 줄게. ““수천수만 벌의 스웨터를 내가 다 어떻게 입어.”임유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 이리 와봐. 손 크기를 재야겠어.”그리고 유진은 지혁의 손을 잡아당겨 줄자로 지혁의 손 크기를 재기 시작했다.맞닿은 두 손에 지혁은 유진의 손이 아주 차갑다는 게 느껴져 인상을 썼다.“뜨개질 그만 해요. 손이 너무 차잖아요.”“난 괜찮아. 아, 손 좀 그만 움직여. 지금 크기 재고 있잖아.”유진은 중얼거리며 다시 지혁의 손을 잡아당겨 유진이 원하는 방향으로 고정시켰다.“이 정도면 너무 차가운 편도 아니야. 지금은 그래도 방 안에 있잖아. 전에 새벽이랑 밤에 길거리 청소하는 일을 했을 땐 장갑을 껴도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차가웠어.”유진의 말에 지혁은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핑 도는 눈물이 지혁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사실 지혁은 얼마든지 유진의 고달픈 생활을 반전시켜 줄 수 있었다.처음에는 그저 호기심 뿐이었다. 그래서 유진을 자신의 옆에 두고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지만 이젠 그런 호기심을 넘어선 감정이 찾아왔다. 지혁은 유진을 자신의 옆자리에 두고 싶어졌고 힘든 일 궂은일은 다시 하지 않게 하고 싶어 졌다.“자, 이제 됐어.”유진은 손 크기를 재고 나서 다시 뜨개질로 주의를 돌렸다. 하지만 전에 다쳤던 손가락 때문인지 유진의 손은 조금 굼떴고 뜨개질 속도도 아주 느렸다.“누나, 오늘 소민준과 진세령이 약혼하는 날이래.”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돌아오는 길에 길이 막혀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다들 약혼식 때문에 그쪽 길로 몰려든 거래.”“나도 알아. 아까 검색하다가 기사 읽었어. 약혼식 시작 전에도 사람들로 꽉 찼더라고.”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누나는 서운하지 않아?”지혁은 고개를 살짝 올려 유진의 반응을 살폈다.“서운하냐고?”유진의 손이 뚝 멈춰 섰다.“만약 누나가 소민준이랑 헤
임유진은 이 말을 꺼냈을 때 강지혁의 몸이 조금 뻣뻣해진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누나는 강지혁을 만나보고 싶어요?”지혁이 물었다.“만나보고 싶긴. 애초에 나와 다른 세상 속 사람인 걸 뭐.”유진이 말을 이었다.“그런데 슈트 입은 강지혁의 뒷모습이 왠지 네 뒷모습이랑 비슷해 보였어. 그러니까 우리 혁이가 슈트를 입으면 얼마나 예쁠지 상상이 가더라고.”지혁은 몰래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돈 좀 모아서 봄이 되면 정장 한 벌 사자. 면접에서 정장 입으면 얼마나 좋아.”“누나, 언젠가 강지혁을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지혁이 뜬금없는 물음을 했다.유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유진은 한참이 지나서야 픽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날 이만 놓아 달라고 할 거야.”그 말에 지혁이 조금 멍하니 유진을 바라보았다.“그것 뿐이야?”“그래.”유진이 대답했다.“누나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강지혁에게 사실을 알려야지.”“소용없어. 한지영이 나를 돕겠다고 회사까지 찾아가 하루 종일 애원해도 만나주지 않았고 내가 수감 중일 때 매일 같이 편지를 써서 약혼녀의 죽음은 나와 상관이 없으니 제발 나를 놓아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어. 깊은 바다에 조약돌을 던져봤자 가라앉을 뿐이야.”유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지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혁의 눈빛도 한층 차가워졌는데 표정으로는 지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아니다. 이미 지난 일은 그만 말하자. 적어도 출소 후에는 강지혁이 나한테 그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는걸. 그게 아니라면 난 지금 미화원 일도 하지 못하겠지.”유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지혁은 갑자기 굳은 살 가득 배긴 유진의 손을 자기 손 위로 올려 체온을 나눴다.이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유진이 억울하게 감옥에 가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들이 감옥에서 유진을 공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언젠가 지혁의 정체를 밝히는 날이 온다고 해도
임유진은 벌써 몇 번째 혁이가 남자친구가 아니라 동생이라고 해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혈연관계가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아예 남자친구라고 단정을 지으셨다.“지금은 아니더라도 앞으로는 그렇게 될 사이이지. 누나 동생은 다 잠깐일 뿐이야.”어르신이 웃으면서 말했다.이에 유진은 대꾸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다만 강지혁은 어르신들이 남자친구라고 말할 때 슬쩍 미소를 지었었다.지혁은 유진을 공원 벤치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쌀쌀한 것 같아. 내가 외투 가지고 올게, 누나.”“그래.”유진이 대답했다.그러나 외투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지혁은 유진이 동네 아줌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발견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유진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지혁은 발개진 유진의 볼을 보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마치 순수한 고양이 같은 유진의 모습에 지혁은 마음이 설레 왔다.동네 아줌마들은 지혁이 돌아오자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떠나기 전까지도 그들은 유진을 향해 눈짓했고 유진은 볼을 더 붉혔다.“왜 그래?”지혁이 다가가 외투를 유진의 어깨에 걸쳐주며 물었다.유진의 까만 눈동자는 쑥스러워 하며 지혁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두 볼은 발그레한게 마치 잘 익은 사과 같아 한 입 베어 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지혁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내가 점점 더 임유진을 좋아하는 것 같아. 발그레한 볼만 보아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아주머니들은…… 네가 내 남자친구인 줄 알고.”유진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 네가 너무 잘생겼다고.”유진은 쑥스러운 탓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그래서?”지혁이 물었다.“네가 너무 잘생겨서 나한테 남자를 사로잡는 노하우 같은 걸 말씀해 주셨어.”노하우를 일일이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그래? 나한테 한번 해 봐봐. 그 노하우가 통하는지.”지혁이 말했다.
“돌아가 보려고?”강지혁이 묻자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넌…….”유진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나랑 같이 갈래?”그 말에 지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누나 설 연휴 기간에는 월급이 3배라고 했어. 아니면 누나가 외가 주소를 남겨줄래? 내가 설 전날에 누나 보러 갈게.”“그래.”유진이 대답하며 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런데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친척들이 눈치를 줄 텐데 그건 하나도 신경 쓰지 마!”지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 신경 쓰지 않을게.”‘지금 신경 쓰이는 건 누나뿐이니까.’설 연휴가 가까워질수록 거리에는 사람들이 적어졌다. 이 동네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고향으로 내려갔다.유진의 외가는 S 시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고 차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라 버스 예매에는 큰 애를 먹지 않았다.유진은 버스표를 예매하며 지혁에게 말했다.“혁아, 내가 차표 예매해 줄게. 신분증 줘봐.”그러고 보니 유진은 아직 지혁의 신분증을 본 적이 없었다.“이미 예매해 뒀어.”지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그 말에 유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며칠 동안 뜨개질한 목도리를 지혁의 목에 걸쳐주었다.“좀 짧지 않아?”유진이 목도리를 살피며 물었다.“아니, 딱 좋아.”지혁은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목도리에서 유진의 향이 났다. 목도리를 하고 있으면 온통 유진의 향에 잠긴 것 같았다.“그래, 그럼 목도리 마지막 부분을 마무리하고 다시 줄게. 목도리는 설 기간동안 하면 되겠다. 장갑은 아직도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 내가 설 연휴 동안 열심히 해볼게.”한지영은 설 연휴 동안 유진이 사는 전셋집에 놀러 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유진이 외가로 간다는 말에 오히려 걱정하기 시작했다.“혼자 가는 거야?”“혁이 설 전날 내려온다고 했어.”유진이 말했다.“그래도 외가 친척들이…….”지영은 외가 친척들이 얼마나 매정한 사람들인지를 알고 있었다.이득을 취할 때는 좋은 얼굴이었다가
강지혁은 임유진이 떠난 좁은 전세방을 보며 허전한 마음을 느꼈다.지혁은 유진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목도리를 다시 목에 두르며 입꼬리를 올렸다.지혁이 전세방을 나서자 보이는 건 이미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이준이었다. 이준은 자기 대표가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지혁은 평소 목도리를 자주 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대표님이 지금…… 베이지색 목도리를 하는 거지?’지혁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준은 목도리를 찬찬히 살폈다. 털실과 무늬를 보았을 때 이 목도리는 누군가 직접 뜨개질한 목도리임을 알 수 있었다.‘뜨개질한 목도리라……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아마 임유진 씨가 만든 목도리일 테지!’“대표님, 지금 어디로 갈까요?”“병원으로 가. 오늘 할아버지와 식사라도 함께 해야지.”지혁이 말했다.“네.”이준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병원으로 운전했다.-유진이 탄 버스는 작은 마을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 큰길에 정차했고 유진은 차에서 내렸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작은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진흙 길이던 이 길도 어느새 넓은 도로가 되어있었다.외가로 돌아가는 길에 이웃 사는 사람들은 유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지만, 유진은 이런 것에 이미 무뎌졌다.출소한 유진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외가에 도착하자 집안에 친척들이 가득 들어서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둘째 삼촌이 유진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이구나. 자자, 빨리 들어와 앉거라. 온종일 너만 기다렸지 뭐니.”유진은 조금 의아해졌다. 유진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둘째 삼촌은 유진에게 자신까지 연루시키지 말라고 선을 그었었다.“그래, 빨리 들어와 앉거라.”셋째 숙모도 반갑게 유진을 맞으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이어 큰삼촌, 작은삼촌, 셋째 이모부까지…… 모두 유진을 반갑게 맞았다.유진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외할머니부터 찾았다.“외할머니는요?”“지금 낮잠 주무시고 계셔. 조금 있다가 일어나시면 인
셋째 숙모는 일전에 제 아버지와 형제를 설득해 5천만 원에서 5백만 원을 가지기로 했었다.5백만 원은 셋째 숙모의 일 년 치 월급이었다!그러나 셋째 숙모와 임유진의 외할아버지가 김애순을 아무리 설득해도 애순은 절대로 이 일을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셋째 숙모는 끝끝내 심한 말을 뱉고 말았다.“엄마, 큰오빠랑 작은오빠가 그랬는데 이 일을 망쳐서 자식들이 집을 사지 못해 장가를 못 가게 된다면 평생 엄마를 원망할 거라고 했어요.”애순은 그 말에 화가 나 펄쩍 뛰었다.“너희들…… 양심이 있는 인간들인 게냐! 유진이가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벌써 다 잊었어?”셋째 숙모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에요, 엄마. 그 애 좋자고 우리 가족 미래를 망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지금 큰손주와 작은 손주가 돈이 없어 장가를 못 가는 건 고사하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아이가 감옥을 다녀왔다고 하면 누가 유진이와 만나주겠어요? 거기에 모아둔 돈도 없으면 앞으로 결혼은 다 갔다고 해야죠!”애순은 화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너…… 너 앞으로 네 동생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러는 게냐.”셋째 숙모는 그 말에도 대수롭지 않은 듯해 보였다. 자기 동생은 이미 죽은 지 한참이나 지났고 얼마 없던 정도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사라져갔지만 돈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닌가!유진은 거실에서 여러 조카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촌 언니인 배여진이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할아버지한테서 말 들었어. 지금 미화원 일 하고 있다며?”여진은 유진보다 한 살 많다 보니 어릴 때부터 둘은 늘 비교당하며 자랐다. 유진은 공부를 잘해 그야말로 엄친아 신세였고 여진은 대학도 못 나왔으며 대장간에서 일하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다.여진이 시집을 가던 해에 유진은 소민준을 만나고 있었고 민준은 재벌가의 도련님이었으니 여진은 자기 남편과 유진의 남자친구를 비교해 가며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했었다.오늘날 유진이 이 모양 이 꼴이 나자 가장 고소해하는
임유진은 여전히 생긋 웃으며 말했다.“셋째 숙모, 저 술 끊은 걸 아시잖아요. 제가 음주 운전으로 감옥도 갔다 왔는데 어떻게 또 술을 마실 수 있겠어요.”유진의 말에 셋째 숙모는 헛헛해서 마른기침했다.그러자 큰삼촌이 이어 말했다.“유진아, 오늘은 설날이잖니. 운전도 하지 않을 것이고 한 잔만 마셔.”“그래, 삼촌들 얼굴 보아서라도 마셔!”둘째 삼촌도 말을 보탰다.“그만하거라!”김애순이 호통을 쳤다.“너희들 양심을 어디에 팔아먹은 게냐! 정말 지옥 불에 떨어질 것들!”그 말에 식사 자리는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유진만이 깜짝 놀라 외할머니를 바라보았다.애순이 유진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유진아, 네 삼촌들 지금 이러는 거 절대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거 아니란다. 박씨 가문의 바보 아들에게 널 팔아 5천만을 가지려고 저러는 게다…….”애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준태가 소리쳤다.“박씨 가문이 어디가 어때서? 유진이는 또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감옥 갔다 온 흠도 괜찮다고 받아준 가문이야. 유진이 어딜 가면 이렇게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가겠냐고!”“그래 그 5천만 원으로 큰오빠와 작은오빠가 집도 사고 얼마나 좋아. 이건 네가 우리 집에 빚진 거잖아. 네가 감옥만 가지 않았어도 오빠들은 진작 장가를 갔을 텐데.”배여진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전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유진이 몸을 벌떡 일어 세우고 차갑게 주위의 친척들을 바라보았다.“내가 빚진 게 있다고 해도 댁들한테 빚진 건 하나도 없어요!”그리고 유진은 애순을 바라보며 말했다.“외할머니, 제가 다음에 또 보러올게요.”말을 마치고 유진은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큰삼촌과 작은삼촌이 막아섰다.“가긴 어딜 가.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건 이미 결정된 일이야!”큰삼촌이 호통쳤다.유진은 멀리 떨어져 않은 큰 사촌 오빠와 작은 사촌 오빠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땐 함께 놀기도 하고 좋은 추억이 많았었다.“오빠들도 제가 바보한테 시집가길 바라는 거예요?”큰
휴게실에서는 밥 먹는 소리 외 다른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음식만 삼켰다.어르신의 간병인은 둘의 관계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감히 묻지는 못했다. 어쨌든 S 시에서 그들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으니.어르신이 식사를 거의 마치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요즘 별장에서 지내지 않는다고 들었다.”“네.”강지혁은 짧게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아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 할아버지가 심어 놓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어디에서 지내는 거니?”“밖에서요.”지혁이 대답했다.“왜 갑자기 밖에서 지내는 게냐?”강문철이 물었다.“별장이 너무 커서요.”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새우 하나를 집고 천천히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네 나이면 여자친구도 사귈 때가 되었지. 비서한테 S 시에서 걸맞은 여자를 찾아 두라고 시킬 테니 그중에서 한 명 고르거라.”문철은 옷을 고르듯 간단하게 말했다. 그 말에 지혁은 새우를 까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괜찮습니다.”문철이 되물었다.“왜 그러는 게냐?”“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걸 바라시는 거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예전의 지혁은 어쨌든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가정을 꾸려야 하는 거면 아무 여자라도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지혁은 반드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아이의 엄마는 임유진이 되길 바랐다.유진이 낳은 아이가 자신을 똑 닮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퍽 좋아졌다.“알아서 한다라…….”문철이 조금 놀란 듯 말했다.“너 설마…….”바로 그때 지혁의 전화가 진동했다. 지혁은 조금 표정을 굳히더니 주머니에서 액정이 다 깨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신자를 확인한 지혁은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워 전화를 받았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지혁의 얼굴빛이 차갑게 변했다.“혁아…… 살…… 살려줘…….”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지혁은 유진의 목소리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지혁이 되묻기도 전에 통화는 끊겼고 다시 걸었을 때는 받는 이가 없었다.‘설마 임유진에게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