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한 달 뒤, 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미현은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을 틈타 혜원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름도 채 지어주지 못한 아이를 그 집 앞에 유기했다.빈손으로 돌아왔을 땐, 미현이 사라진 걸 알아챈 지담이 사찰 앞을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결국.. 뜻대로 하신 겁니까.”“그 아이도 분명 미래를 볼 거예요. 핏줄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요.”“주소라도 알려주시죠. 그래야 지켜보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비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미현은 품 안에서 연주옥을 꺼내 지담에게 전해주었다.주소를 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스님, 염치없지만.. 부디 이 연주옥에 정성스러운 기도를 올려주세요.”“이게 그.. 어머니의 유품이라던..”“네. 저도 결국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평범한 물건은 아닌 듯합니다.”연주옥을 품고 잔 날 그런 신통한 꿈을 꾸었으니 한시도 놓질 못하는 게 당연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품 안에 지니고 다녔지만, 더 이상 미래를 보여주는 꿈은 찾아오지 않았다. 연주옥을 전해받은 지담이 눈을 좁혔다.“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예?”“만약 연이 닿아 이 연주옥을 그 아이에게 전해주게 된다면..”“이미현 씨.”“품은 내내 행복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디 행복하라고. 이 말 만은 꼭 전해주세요, 스님.”***법당 안, 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영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준호는 달랐다. 스님이 전해준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영이의 어머니 이미현.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가난한 목수였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고?그럼.. 영이는...? 내 동생이 아닌 거잖아.“스님, 영이의 아버지가 정말.. 그 목수였다는 자가 맞습니까?”“그 여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지.”영이도, 준호도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영
큰돈을 들여 수술을 하고도 지한의 다리는 낫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붓고, 고통스러운 통증에 하루하루 몸부림쳤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에 응급실로 실려간 지한의 숨이 맥없이 끊겨버렸다.사인은 혈전이 동맥을 막은 폐색전증.슬픔에 못 이겨 신당 문을 열 수 없었다.게다가 무당이라는 자가 한순간에 미망인이 되어버렸으니, 손님들의 발길도 삽시간에 뚝 끊겨버렸다.그제야 깨달았다.남의 미래를 보는 능력. 아무리 급했어도, 그걸로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조급함이 더해진 욕심이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갔다는 생각을 한시도 지울 수 없었다.뱃속에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하루하루가 불행함의 연속이었다.자신 때문에 지한이 세상을 떠났다는 죄책감, 아빠 없이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두려움. 문제는 미현을 덮친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처음엔 입덧이 오래가는 줄 알았다. 무슨 음식을 먹어도 넘어가질 않아 게워내길 반복했고, 몸은 점점 더 말라만 갔다. 아이가 걱정돼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위암 말기라는 사실을 들어버렸다.그날 밤, 미현은 먼지 쌓인 신당 안을 전부 제 손으로 박살 냈다. 하늘이 미웠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처음부터 아이를 위한 욕심이었다.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근데, 이 순간에도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아이에게 하나 남은 엄마까지 빼앗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신? 신이 정말 있어? 지랄하지 마!”“누가 그딴 능력이 필요하댔어? 맘대로 줄 땐 언제고, 왜 맘대로 쓰지는 못하게 하는 거냐고!” 한참을 울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물건 하나.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건네주신 유일한 유품, 연주옥.노란 연주옥을 손바닥에 쥐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날, 너무나도 생생한 꿈 하나를 꾸었다.피부가 하얀, 너무나도 예쁜 여자아이와 그 여자아이를 지켜주는 남자아이 하나. 남자아이의 교복 명찰엔 ‘신준호’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그 장면만으로 알 수 있었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법상으로 향했다. 향과 초로 가득한 곳.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오더니 테이블 위에 보란 듯이 내려놓았다. 꼭 낡아빠진 옥 같기도, 혹은 유리 같기도 한 노란빛의 구슬 하나가 가죽끈에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이게 뭡니까?”“영이 어머니의 유품입니다.”순간, 모두가 말을 잃었다. 영이는 기억조차 없는 어머니란 단어를 듣자마자 돌처럼 굳어버렸고, 준호는 아버지의 외도 상대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떠올려버렸다. 스님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하게 승려복 옷깃을 정리하며 말투를 바꿨다.“지금부터 말을 좀 편히 하도록 하지. 괜찮으신가들.”“....”“눈이 참 많이도 내리셨던 겨울이었네.”스님의 입에서 지난날의 이야기가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혜원사 입구에 소복히 내린 눈을 쓸어내던 지담.그의 눈에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터무니없이 얇은 옷, 헝클어진 머리칼과 어두운 표정까지.무슨 힘든 일이 있어 산 위를 올랐나 싶어 빗자루질을 멈추고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기도를 올리러 오신 겁니까.”“아니요, 죽기 위해 왔습니다.” 이리도 끔찍한 말을 담담하게 내뱉는다는 건, 지내온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날이 춥습니다.”따뜻한 공간과 차를 내어주고, 두터운 담요 하나를 무릎에 덮어주었다. 바닥만 응시하던 여인의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저는.. '이미현'이라 합니다.”“이곳에서 수행 중인 지담입니다.”“마르지 않는 지혜라. 좋은 법명이군요.”“무거운 마음은 이곳에 내려놓으시지요.”미현은 따뜻한 찻잔을 한참 동안 손에 쥐고는, 따뜻해진 손바닥으로 배를 감쌌다. 이제야 제대로 살펴본 배는 꽤나 많이 불러 있었다. “배 속에 아이가 있습니다. 헌데 저는...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미현의 눈동자가 지담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스님, 한 달 뒤. 이곳에 국회의원 한 분이 오실
차 안에서 감정이 부딪힌 이후, 두 사람은 대화라곤 일절 없는 남매사이로 돌아가버렸다.그나마 회사에서는 필요한 말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입을 다물고.석현은 그런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영이를 챙겼다. 몸까지 섞은 이후 커져버린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영아, 퇴근하고 한강라면 콜?""네.""오케이!"하지만 호텔만큼은 더이상 가지 않았다.석현은 누구보다 영이와의 섹스를 원했지만, 영이는 아니었다.그런 낌새만 보이면,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얼버무렸다."오빠, 저 오늘은....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응?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랬어? 왜 이제 말해.""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집에가서 푹 쉬면 나을 것 같아요."석현은 갑자기 달라진 영이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정말로 몸이 좋지 않아 그런거라며 애써 자기 합리화로 불안함을 덮어버렸다.***1층 안내 데스크의 연락을 받은 영이가 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대표님. ‘김휘’라는 분께서 찾아오셨다고 합니다.”“김휘? 처음 듣는 이름인데.”“혜원사에서 나오셨다고...”혜원사라면 아버지가 예전부터 가끔 찾던 사찰이다. TF팀의 보고에 따르면 얼마 전에도 다녀오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또... 아버지가 움직이신 건가.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이는 수화기를 향해 “지금 내려가십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로비로 향하자 말끔한 인상의 남성이 준호를 향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신준호 대표님.”“김휘 씨?”“네.”“잠시 카페테리아로 가시죠.”휘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단지 전할 말이 있어 왔다는 것처럼.“괜찮습니다. 잠시면 됩니다.”“혜원사에서 저를 왜 찾으십니까.”“지담 스님께서 직접 만나 뵙길 청하십니다.” “혹시, 아버지 때문입니까.”“아닙니다. 다만.. 반드시 유영 씨와 같이 오시라 전하셨습니다.”엥? 영이는 왜? 아니, 그보다.. 영이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고? 난데없는 요청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퇴근 후, 함께 집으로 향하는 영이와 준호는 말이 없었다.영이는 준호의 얼굴을 이상하게 바라볼 수 없었고, 준호는 묻고 싶은 말들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전방만을 주시했다."오빠..""응.""어, 어제는... 일찍 잤어?""어."너무나도 무뚝뚝한 대답이었다.회사에서도 하루종일 이런 식이었는데, 설마 석현 오빠랑 호텔을 다녀왔다는 걸 알기라도 한 걸까.문득, 준호를 향해 서슴없이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섹스는 오빠랑만 하겠다던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의 자신.진심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 말이 지켜질 줄 알았었는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자꾸만 고개가 숙여졌다."몇 시에 들어왔는데?""조금.... 늦게.""좋은 데 다녀왔나 봐."스스로 내뱉고도 곧바로 후회했다. 입을 꾹 다문 영이의 반응이 그렇다는 대답을 대신해서 전해주고 있었으니까.정말 잤구나, 강석현이랑 몸을 섞었구나."하..."묵직하게 튀어나온 화살이 비수처럼 영이의 심장에 박혀버렸다.이미 남매로 돌아가기로 한 지금,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눠야 정상적인 건지. 장난기 넘치고, 석현 오빠와 함께 투닥거리던 준호의 모습이 사뭇 그리워졌다."영아.""으응...""눈치보지 마.""그게 무슨 뜻이야?""그냥. 몸정이랑 사랑쯤은 구분했으면 좋겠어."몸정이라고 하기엔 단 한번의 추락같은 것이었다. 억지로라도 마음을 끌어다가 붙여놓고 싶은 발악이었다.그리고, 침대 위에서 허덕이는 내내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그런 창피한 말을 어떻게 내뱉을 수 있을까.게다가 오빠는 진짜 바보다. 세상 천치 멍청이 바보가 틀림없었다. 내가 석현 오빠랑 무슨 짓까지 했는데, 어떻게 아직도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거지?"나 석현오빠랑 호텔 갔었어. 오빠도 다 아니까 몸정이라는 단어까지 꺼낸 거 아니야?""그래서 어쩌라고 씨발.""...."그때부터 차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거칠어졌다.몇몇 신호는 깡그리 무시한 채 핸들이 휙휙 꺾였고, 영이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스커트 자락만 쥐
주지스님은 그 말도 안 되는 질문에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태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거사님.”“예.”“수락산 중턱에 위치한 집. 그곳에 대한 소문은 진작에 들었습니다.”태호의 손에 들린 찻잔이 파르르 떨렸다. 지담 스님이 정재계 인물들과 깊게 얽혀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았지만, 그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상담까지 알고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설마, 유영을 억지로 산속에 가둬둔 파렴치한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성적인 도구로 삼았던 건? 아니, 성매매는?그건 곤란한데. 그것만은 안 되는데.“스님.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그 아이를 만났다는 분들은 늘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미래를 예견한다는 건, 참으로 신비한 능력이라고.”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상담을 하지 못하게 된 VIP들.그들은 뻔뻔하게도 혜원사를 찾아 치성을 드리고, 지담 스님을 찾았다. 덕망 높은 스님에게 그간 겪어온 기묘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을 돈으로 사들인 이들은 물론 그 일에 대해서는 함구했고 말이다.“저는.. 그 아이를 보호했을 뿐입니다.”“무엇으로부터 말입니까.”“세상에 드러나면 위험한 아이지 않습니까. 미래를 본다는 건, 평범한 능력이 아니니까요.”“그래서, 수락산을 떠난 지금. 그 아이는 위험해졌습니까.”또다시 입이 다물렸다.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들, 신준호의 보호 속에서 너무도 평범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며, 넥사이드의 비서로 취업까지 했다.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밤마다 그 보드라운 살결과 야릇한 신음소리가 자꾸만 떠올라서.마음껏 그 아이를 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이미 제 손을 떠난 아이입니다.”“헌데, 왜 이토록 불안해 보이십니까.”정중하고 부드러운 말투가 자꾸만 정곡을 찔렀다. 게다가 제 마음속을 훤히
지하실이라는 공간은 소리가 없다기보단 억눌린 공간 같았다.벽과 바닥에 스며든 습기, 낮은 천장,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지는 공기.먼지 쌓인 테이블 위,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자 담요 사이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작았다. 모든 게 너무 작고 여려서 이런 공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다시 한번 자신의 결정을 되짚었다. 6개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정리하기에 가장 안전한 기간.그때, 아이의 눈꺼풀이 열렸다. 형광등 불빛에
몇 시간 전, 하늘이 유독 흐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낮게 가라앉은 아침이었다.번듯한 제복을 차려입은 ‘신태호’의 어깨엔 오늘도 반짝이는 은색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1성 장군(將軍), 준장을 의미하는 별.그의 아내 ‘이숙경’이 견장 위를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손길엔 오래된 습관 같은 온도가 섞여 있었다.“여보,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오실 거죠?”“응.”숙경은 더 묻지 않겠다는 듯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건,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태호가 익숙한 듯 현관문을 열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중, 침대 옆에 높인 협탁. 그 서랍을 무심코 열어보았다. 안에는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에 담긴 핸드폰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충전기는 연결되어 있었고, 화면은 어두웠다. 문제는 상자에 보란 듯이 채워진 자물쇠였다. 외부와의 소통을 아예 선택지에서 지워버린 방식임이 분명했다.“아....”그래서 스마트워치를 채운 거였구나. 그저 수신되는 전화만 받게 하려고.전화가 오면 지시를 듣고, 그 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 하나를 세상에서 완벽하게 고립시킨 거였다.준호는 다시 한번 영이의
묶는 걸 좋아한다니?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준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이성을 잃어버린듯 방 안을 헤집기 시작했고, 붙박이장 문을 여는 순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안에는 수많은 성인 용품들이 즐비했고, 종류와 수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영이는 입양된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이 곳에 가둬지고, 끔찍한 시간을 견뎌가며 죽지 못해 살아온 것이다.그리고, 준호는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오빠, 준호 오빠....!”욕설이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차마 내뱉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