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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4화. 내쫓긴 상담자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2:26:00

자기 몸을 조금도 느슨하게 놓아두지 않는 남자였다. 도희는 방금 보았던 엄격한 자기 관리와 자신을 향해 드러내는 경멸을 구별하려 애썼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해 저렇게까지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제 진료 기록을 끝까지 읽어주기만을 바랐다.

남자의 턱짓에 비서가 서류 한 뭉치를 공손히 바쳤다. 도희가 사전에 넘겨두었던 서울대병원 진단서와 체성분 분석표였다. 종이를 받아 든 태혁의 서늘한 시선이 여백을 미끄러지듯 훑어 내렸다.

“윤도희. 28세. 키 164cm, 체중 74kg. 체지방률 39.2%.”

태혁은 생물학적 표본을 분류하듯 무감각한 어조로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 코앞에 서 있는 살아 있는 인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혈관 위험도 경고. 일과성 뇌허혈 발작 의심. 높은 간 수치와 지방간 소견.”

탁, 소리와 함께 종이 뭉치가 협탁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태혁이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자, 거대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도희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삼켜버렸다. 갓 뿜어낸 남자의 뜨거운 체열과 땀 냄새가 도희의 호흡을 틀어막았다. 물러서려는 본능을 억누르며 도희는 힘겹게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위아래로 그녀의 굴곡을 훑어내리는 태혁의 입꼬리가 역겨움을 감추지 못하고 비틀렸다.

“사람의 육체가 아니군. 기름 찌꺼기와 조미료를 주워 담은 음식물 쓰레기통이지.”

순식간에 피가 빠져나간 도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저, 저는…… 살고 싶어서 왔어요. 대표님이 시키는 운동이라면 뭐든……”

“입 닥쳐.”

얼음장을 쪼개는 듯한 음성이 도희의 말을 단칼에 베어냈다.

“여긴 방송용 다이어트 캠프가 아니다. 카메라 앞에서 각오만 외치는 사람은 받지 않아. 네 기록에는 폭식한 양밖에 없군. 멈춰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실제로 뭘 바꿨지?”

퇴원 후 단 한 번도 방송 카메라를 켜지 못했다는 변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태혁의 시선은 이미 그녀를 지나쳐 출입문을 향해 있었다.

협탁 위의 검사지를 붙잡으려던 도희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초면에 살갗을 찢고 들어오는 이런 모욕까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억울함에 입을 떼려 했으나 가슴을 짓누르는 거친 호흡을 억누르는 것이 먼저였다.

태혁은 일말의 가치도 없다는 듯 차갑게 몸을 돌리며 문가에 버티고 선 거구의 사내들에게 턱짓을 날렸다.

“끌어내. 두 번 다시 이 문턱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해.”

검은 정장의 경호원들이 도희를 향해 위압적인 보폭으로 좁혀오기 시작했다.

도희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공포 속에서 피가 배어 나오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그땐 영영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던 의사의 경고가 생생했다. 여기서 내쳐진다고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얻어내지 못한 채 이대로 개처럼 쫓겨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응급실의 차가운 백색 천장이 시야에 겹쳐졌다. 핏줄이 터진 손등에서 링거 바늘을 거칠게 뽑아내던 감각을 떠올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방송이 망가질까 두려워 발버둥 치며 여기까지 기어와 놓고, 이제 와서 이 오만한 남자의 폭언이 두려워 꼬리를 내릴 셈인가. 적어도 제 목소리를 이 남자의 귓속에 처박아 넣어야 했다.

저 문밖으로 밀려나는 순간 모든 문은 영원히 닫힌다. 도희는 끝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남자의 단단하고 거대한 등판을 향해 핏발 선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잠깐만요. 제 얘기 아직 안 끝났어요. 방송도 쉬기로 했고, 병원에서 하라는 진료도 받을 거예요. 할 수 있는 운동부터 시작하겠다는 게 그렇게 우스워요?”

“내가 네 사정까지 들어야 하나.”

태혁의 서늘한 음성이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는 경호원들을 바라본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얼마나 버틸지는 두고 봐야지. 살고 싶다는 말은 여기 오는 사람마다 한다. 그 말을 지키는 사람이 드물 뿐이야.”

도희는 떨리는 손으로 검사지 모서리를 그러쥐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바스락거리며 종이 끝이 흉하게 구겨졌다. 오기 전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두었던 수많은 질문은 단 하나도 꺼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쓰레기처럼 내팽개쳐진 제 절박함의 기록마저 두고 나갈 수는 없었다. 수백만의 시선을 사로잡던 언변도, 오직 차가운 숫자의 잣대로 자신을 벌거벗겨 버리는 이 남자 앞에서는 굳어버린 혀처럼 마비될 뿐이었다.

태혁은 더 이상의 숨소리조차 섞기 싫다는 듯, 완전히 도희를 시야에서 지워버리며 입구의 사내들에게 다시 손을 까딱였다.

“끌어내. 입구에서 막아. 두 번 다시 내 짐에 들이지 마. 잡상인 취급해서 쫓아내.”

이번에는 문 앞에 있던 경호원들이 곧장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발걸음에 도희는 접힌 검사지 모서리를 펴다 멈췄다. 이대로 문을 향해 등을 보이면, 끝내 자기 말 한마디 못 하고 쫓겨날 것만 같았다.

문 쪽으로 끌려나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도희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도 목은 풀리지 않았고, 목숨을 살려달라는 말이 혀끝에서 다시 엉켰다.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나가시죠, 윤도희 씨.”

검은 수트를 갖춰 입은 거구 둘이 양옆에서 도희의 가녀린 팔을 우악스럽게 옭아맸다.

구두 뒤축이 미끄러운 바닥을 사납게 긁어댔다. 버티려고 기를 쓸수록 뼈마디를 으스러뜨릴 듯한 통증만이 팔목을 파고들었다. 눈앞에 번쩍이는 육중한 출입문이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에서는 서울대병원 박 교수의 서늘한 경고가 귓전을 사정없이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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