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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돌아온 침전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3:11:22

바닥에 떨어진 칼날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레일라는 문고리를 쥔 채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검은 털가죽 망토 아래 드러난 턱선은 기억에 남은 그대로였다. 왼쪽 뺨의 흉터만 낯설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황궁의 복도에서도 닮은 뒷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다른 얼굴이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이름부터 불러놓고 잘못 보았다는 대답을 들을까 두려웠다.

레일라는 사내가 떨어뜨린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장미가 새겨진 단검. 저 문양을 알아본 자신보다, 그가 자신의 목소리에 칼을 놓았다는 사실이 더 믿기 어려웠다.

3년 전 저택을 뒤덮었던 연기가 떠올랐다.

‘아가씨, 부디 살아서 국경을 넘으십시오!’

등 뒤에서 들렸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일라는 그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돌아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오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얼굴이 지금 창살 사이 달빛을 받고 있었다.

입안이 말라 이름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레일라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이번에는 그의 눈을 보며 불렀다.

“케일런 경.”

사내가 움찔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처음에는 거친 숨만 새어 나왔다. 레일라는 그 짧은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내내 버티게 했던 도망칠 생각을 잠시 잊었다.

“그 목소리…… 설마…….”

레일라는 낡은 리넨 두건을 벗었다. 가려져 있던 잿빛 머리칼이 어깨로 흘렀다. 케일런은 그 머리칼과 녹색 눈을 번갈아 살폈다.

“아…… 아가씨……?”

그가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짚은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얼굴을 들려다가 다시 숙이기를 반복하더니,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정녕…… 공녀님이십니까? 살아서…… 살아 계셨던 것입니까?”

레일라는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흉터가 지나간 자리에도 기억하던 윤곽이 남아 있었다. 이름을 한 번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릎을 꿇은 그의 어깨를 보고 있자 오래 묻어둔 호칭이 입안에 맴돌았다.

황궁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녀 두건 아래 감춰왔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반가워서 소리를 높였다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레일라는 입을 다물고 손부터 뻗었다. 그의 어깨에 손이 닿자 그제야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 전해졌다.

“케일런, 일어나세요. 부디 소리를 낮춰요.”

레일라는 황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어떻게…… 어떻게 경이 암시장 ‘회색 까마귀’의 상주가 된 것입니까?”

케일런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말을 하려다 목이 메어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시체 구덩이 속에서 간신히 기어 나왔습니다. 가문의 원수를 갚고 공녀님을 찾기 위해 밑바닥을 전전하다…… 황궁 쥐새끼들의 밀수 통로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레일라의 남루한 하녀복을 훑었다. 목덜미에 남은 붉은 손자국을 보자 표정이 굳었다.

“공녀님께서 어찌 황궁 침소에 계십니까? 황제가 시녀 하나를 정인으로 삼았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그 여인이 공녀님이셨습니까?”

케일런의 눈에 분노와 고통이 차올랐다.

“그 살인귀 폭군이 공녀님을 겁박한 것입니까? 당장 오늘 밤 탈출하셔야 합니다!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궁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정해요, 케일런.”

레일라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분했다.

“칼릭스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주술 독 때문에 기억이 뒤섞인 모양이에요. 나를 옛 정인으로 알고 있어요.”

“착각이요……?”

“그 착각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탈출 자금을 모을 수 있었어요.”

레일라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펼쳤다. 무색 다이아몬드 3알과 제국 중앙은행의 무기명 금표 10장이 드러났다. 금표만 1,000만 류트였다.

케일런은 금표를 확인한 뒤 보석과 함께 주머니에 다시 넣어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국경을 넘은 뒤 정착할 밑천이었다.

“남부 자유도시 연합으로 갈 신분증 2장과 마차가 필요해요.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게 마련해 주세요.”

“공녀님…….”

“황제의 기억이 돌아오면 내 목은 단두대에 걸려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케일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신분증은 2일이면 완벽히 준비됩니다. 사흘 뒤 자정, 황궁 외곽으로 나가는 건초 보급 마차에 몸을 숨기십시오. 제가 직접 국경 너머까지 호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케일런.”

레일라는 날짜를 마음속으로 되짚었다. 사흘 뒤 자정. 그때까지는 정인 행세를 버텨야 했다.

그때, 케일런이 품 안에서 검게 그을린 낡은 서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공녀님, 가문이 멸문당하던 날 밤의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비밀이라니요?”

“에스테르 공작가에 반역 누명을 씌우고 위조 서신을 황제에게 올린 것은…… 당시 황태자였던 칼릭스가 아니었습니다.”

서신을 받으려던 레일라의 손이 멈췄다.

“황태후와 헤센 후작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이 공작가를 숙청하여 황태자의 날개를 꺾고, 꼭두각시로 조종하려 했던 것입니다.”

레일라는 그을린 서신을 보았다.

칼릭스가 휘두른 칼 뒤에, 누명을 만들어 올린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은 아직 전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복수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서신을 바로 펼쳐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다른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는 종이라면, 낡고 그을렸어도 한 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글자를 하나씩 짚으며 읽을 시간은 없었다. 레일라는 문틈 너머 어둠으로 시선을 보냈다가 케일런을 다시 보았다.

칼릭스가 직접 누명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가 쥔 칼이 가족을 죽였고, 지금 자신의 목숨도 그의 착각에 달려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에 일어난 질문을 일단 접었다. 그날 일을 따져 묻기 전에 이 창고에서 무사히 돌아가야 했다.

“알겠어요. 그 진실은 살아남은 뒤에 밝혀도 늦지 않아요. 사흘 뒤 자정, 이곳에서 다시 만나요.”

레일라는 신분증 약속을 확인한 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두건을 다시 쓰자 익숙한 거친 천이 이마를 눌렀다. 케일런을 뒤에 남기고 돌아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를 오래 바라볼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흔들렸다.

***

돌아오는 길에 레일라는 약재실 쪽으로 돌아갔다. 행여 외출을 추궁당하면 내놓을 구실이 있어야 했다. 밤마다 어의가 찾던 은청초의 보관장은 알았다. 잠긴 문을 돌로 깨는 동안 손가락을 다쳤지만, 통증을 살필 여유는 없었다.

박하 향이 나는 잎을 모직 주머니에 넣고 침전으로 돌아왔다. 약초는 바로 꺼낼 수 있는 곳에, 금표는 치맛단 안쪽에 따로 두었다. 옷깃이 부풀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누른 뒤 경비병의 시선을 피해 문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다.

신분증을 받을 약속은 잡혔고, 금표도 그대로 품에 있었다. 사흘 뒤 자정까지는 버틸 수 있을까. 레일라는 두건을 깊이 당긴 뒤 침전 문을 밀었다.

끼이익-

불이 꺼진 방에서 피 냄새가 났다. 레일라는 문고리를 놓지 못한 채 눈이 어둠에 익기를 기다렸다.

레일라의 시선이 침대로 향했다.

비어 있었다.

침대보는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은대야는 찌그러진 채 핏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쿵!

등 뒤의 문이 굳게 닫혔다.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문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레일라는 문고리를 찾던 손을 멈췄다. 황제가 서 있는 곳을 미처 보지 못했다.

천천히 돌아보자 칼릭스가 보였다. 그는 맨발로 대리석을 딛고 서 있었다. 손에 쥔 장검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레일라.”

칼릭스가 다가왔다. 레일라는 검과 문고리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문을 다시 열 틈은 없었다.

그의 억센 손아귀가 레일라의 턱을 으스러지도록 낚아채 벽으로 내리꽂았다.

콰앙!

“폐, 폐하…… 윽!”

칼릭스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짐이 잠든 사이…… 이 깊은 밤에 홀로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그의 거친 숨결이 레일라의 차가운 뺨을 태울 듯 적셨다.

“짐을 두고…… 감히 나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것인가?”

빠져나갈 틈조차 없는 살인귀의 서늘한 추궁.

레일라의 치맛단 안쪽에서, 금표를 넣은 가죽 주머니가 다리에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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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첫사랑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는데.”창틀에 올린 레일라의 발이 멎었다. 칼릭스의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소매 밖으로 나오려던 전송석을 다시 손안에 감췄다.칼릭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일라는 창틀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그의 걸음을 세었다. 첫사랑의 다른 이름을 들었다는 말보다 지금 입고 있는 외투를 먼저 설명해야 했다. 이 방에서 밤바람을 쐰다고 둘러대기에는 신발까지 갖춰 신은 모습이었다.“……폐하.”레일라는 전송석을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이 야밤에 창틀을 넘어가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칼릭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폐하.”“바람이라?”칼릭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렸다.“외투에 신발까지 갖춰 신었더구나. 창밖에서 누구를 만나려 했지?”“혼자 있었습니다.”“그걸 묻지 않았다. 내 눈을 보아라.”레일라는 전송석을 쥔 손을 창틀 아래로 내렸다. 그가 이름을 의심하는 동안 물건까지 보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칼릭스의 시선은 이미 외투 앞섶을 훑고 있었다.칼릭스가 손을 뻗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레일라의 등이 창틀에 부딪혔다. 발끝이 바닥을 더듬는 동안, 전송석을 감춘 소매가 두 사람 사이에서 눌렸다.“대답해라. 너는 누구지?”“……폐, 하…… 쿨럭!”“너는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폐하의…… 정인입니다……!”“정인? 뻔뻔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칼릭스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등등하게 희번덕거렸다.“네 잿빛 머리칼, 서늘한 녹안……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과 닮았기에 눈이 멀었다.”“폐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입 닥쳐라! 방금 내 머릿속을 스친 기억 속에서, 내 첫사랑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그 아이의 이름은 레일라가 아니었다! 결코 레일라 에스테르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다!”칼릭스의 포효가 침전을 뒤흔들었다.목뼈를 으스러뜨릴 듯 조여오는 손아귀.“말해라! 짐의 눈을 멀게 하고 내 침소로 기어든 네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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