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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작가: 꽃샘바람
강아연은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성규연의 팔짱을 끼고 가족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 꽃길을 걸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모든 것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더니 발밑의 꽃들이 썩은 냄새를 풍기는 마른 가지로 변해버렸다.

강아연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성규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차가운 목소리가 저주처럼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강아연, 너처럼 꿍꿍이가 많은 여자는 절대 사랑하지 않아.”

강아연이 눈을 번쩍 떴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에 들어온 건 낯선 복도가 아닌 하얀 천장이었다. 귓가를 울리던 천둥소리와 빗소리도 멎었다.

창밖은 햇살이 눈 부시고 나뭇잎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이 오히려 가슴을 더욱 저릿하게 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깼어?”

누군가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성규연을 본 순간 강아연은 크게 놀랐다.

‘설마 아까 겪었던 게 다 꿈이었어?’

하지만 입술을 살짝 움직이자 얼굴에 통증이 느껴졌다. 강아연은 그 모든 일들이 현실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이 그녀를 혐오하고 아들이 엄마를 인정하지 않았던 게 모두 사실이었다.

강아연은 시선을 늘어뜨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엄마, 괜찮아요?”

바로 그때 성준서가 옆으로 달려오더니 평소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성규연이 피투성이가 된 강아연을 안고 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었다.

‘이모가 분명히 나한테 그랬어. 엄마가 납치된 건 그냥 나랑 놀이를 하는 것이고 내가 얼마나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거라고. 내가 성공하면 이모가 놀이공원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강아연을 보니 혼란스러웠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

성준서는 강아연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평소 성준서가 먼저 다가가면 강아연은 항상 기쁨과 감격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이 닿기도 전에 매정하게 손을 거두며 아이의 손길을 거부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성준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끔벅거렸다.

“엄마가 놀라서 아직 정신이 없어 그런 거니까 방에 들어가 있어.”

성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에 성준서는 아쉬운 듯 강아연을 쳐다봤다. 하지만 심소연과 놀이공원에 갈 생각에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다.

“알았어요.”

성준서가 나가자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곳엔 왜 갔어?”

성규연이 먼저 침묵을 깨고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만약 그때 강아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강아연은 지금쯤 다른 놈의 침대에 던져졌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만 하면 성규연은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프다며? 아픈 사람이 왜 함부로 돌아다녀?”

강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손만 내려다보았다.

‘이 말은 날 납치하고 팔아버린 게 규연 씨가 아니란 뜻인가? 그런데 규연 씨가 아니었다고 해도 모두 규연 씨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강아연, 내 말 듣고 있어?”

성규연은 그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다가와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동정이라도 할 줄 알았어? 자작극으로 불쌍한 척하는 역겨운 수법을 또 쓰겠다는 거야?”

분노에 찬 그의 모습에 강아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요? 규연 씨 눈에는 내가 겪은 일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꾸며낸 역겨운 수법으로 보이는군요.”

‘상처받은 사람은 분명 나인데 규연 씨한테는 그냥 자작극이었어.’

“지금까지 날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네요.”

강아연의 무덤덤한 말투가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성규연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나한테 어떻게 했었는지 잊었어?”

냉랭한 한마디에 강아연은 5년 전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5년 전, 강아연이 성준서를 임신한 지 7개월 되었을 때 성규연이 갑자기 그녀의 아버지 강명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때 잘나갔던 강 청장은 뇌물 혐의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모두에게 손가락질받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소식에 충격받은 강아연은 조산기가 있음에도 억지로 몸을 이끌고 성규연을 찾아갔다. 평소 자존심이 강한 그녀였지만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규연 씨, 내가 이렇게 빌게요. 제발 우리 아빠 좀 살려줘요...”

당시 성규연은 그녀의 부탁 따위 안중에도 없었던 터라 운전기사에게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라고 싸늘하게 지시했다.

강아연은 성규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성규연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피가 쏟아지는 걸 보고서는 그제야 강명우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강아연은 그 일로 조산과 과다 출혈을 겪었고 온몸의 피를 거의 갈아치울 정도로 수혈받으면서 성준서를 힘겹게 낳았다.

그런데 그녀의 간절한 애원이 성규연의 눈에는 불쌍한 척하는 역겨운 수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강아연은 웃고 싶었지만 상처 입은 얼굴의 통증이 심해 결국 포기했다.

“피곤해. 할 일 없으면 그냥 가.”

성규연은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얗던 피부에 생긴 붉은 손자국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리 강아연을 싫어한다 해도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놈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의 말에 강아연은 그를 힐끗 쳐다봤다. 예전 같았으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만 지금 그녀의 눈은 더없이 차분했다.

필요할 땐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베푸는 호의는 받고 싶지 않았다.

강아연이 아무 말이 없자 성규연은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강아연은 긴장했던 등을 침대에 기대고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있었다.

“사모님.”

도우미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는데 쟁반 위에 연고가 놓여 있었다.

“대표님이 의사 선생님한테 가장 좋은 약으로 사모님의 상처를 치료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강아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모님께서 쓰러지신 지난 이틀 동안 대표님은 회사도 나가지 않으셨어요. 집에서 근무하면서 사모님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셨어요.”

도우미 장미진이 강아연의 표정을 살피면서 기쁘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대표님 사실 사모님을 많이 걱정하세요...”

‘이제 와서? 전에는 뭐 하고? 아, 그땐 심소연의 품에 안겨 있었겠지.’

강아연이 속으로 비웃더니 갑자기 물었다.

“요 며칠 심소연 씨도 여기 있었나요?”

“그게...”

장미진은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심소연 씨가 요즘 이사해야 하는데 머물 곳이 없고 또 도련님도 심소연 씨를 많이 따라서 대표님이 며칠만 머물라고 하셨어요.”

‘역시 결국에는 이 집에 들어왔어.’

“대표님이 그래도 심소연 씨한테는 2층에 있는 게스트룸을 내주셨어요. 3층이 아니라...”

장미진이 뭔가를 더 설명하려 했지만 강아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2층 게스트룸에 묵고 있다면 다음에는 3층 안방 옆의 게스트룸, 그다음에는 안방에 들어올 것이다.

강아연은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으나 웬일인지 그리 아프지 않았다. 성규연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후에는 고통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야.’

강아연이 시선을 늘어뜨렸다. 이곳에 곧 새로운 안주인이 올 테니 눈치껏 미리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장미진을 내보낸 후 강아연은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혼 합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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