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꽃샘바람
강아연은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성규연의 팔짱을 끼고 가족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 꽃길을 걸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모든 것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더니 발밑의 꽃들이 썩은 냄새를 풍기는 마른 가지로 변해버렸다.

강아연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성규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차가운 목소리가 저주처럼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강아연, 너처럼 꿍꿍이가 많은 여자는 절대 사랑하지 않아.”

강아연이 눈을 번쩍 떴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에 들어온 건 낯선 복도가 아닌 하얀 천장이었다. 귓가를 울리던 천둥소리와 빗소리도 멎었다.

창밖은 햇살이 눈 부시고 나뭇잎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이 오히려 가슴을 더욱 저릿하게 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깼어?”

누군가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성규연을 본 순간 강아연은 크게 놀랐다.

‘설마 아까 겪었던 게 다 꿈이었어?’

하지만 입술을 살짝 움직이자 얼굴에 통증이 느껴졌다. 강아연은 그 모든 일들이 현실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이 그녀를 혐오하고 아들이 엄마를 인정하지 않았던 게 모두 사실이었다.

강아연은 시선을 늘어뜨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엄마, 괜찮아요?”

바로 그때 성준서가 옆으로 달려오더니 평소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성규연이 피투성이가 된 강아연을 안고 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었다.

‘이모가 분명히 나한테 그랬어. 엄마가 납치된 건 그냥 나랑 놀이를 하는 것이고 내가 얼마나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거라고. 내가 성공하면 이모가 놀이공원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강아연을 보니 혼란스러웠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

성준서는 강아연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평소 성준서가 먼저 다가가면 강아연은 항상 기쁨과 감격에 젖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이 닿기도 전에 매정하게 손을 거두며 아이의 손길을 거부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성준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끔벅거렸다.

“엄마가 놀라서 아직 정신이 없어 그런 거니까 방에 들어가 있어.”

성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에 성준서는 아쉬운 듯 강아연을 쳐다봤다. 하지만 심소연과 놀이공원에 갈 생각에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다.

“알았어요.”

성준서가 나가자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곳엔 왜 갔어?”

성규연이 먼저 침묵을 깨고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만약 그때 강아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강아연은 지금쯤 다른 놈의 침대에 던져졌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만 하면 성규연은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프다며? 아픈 사람이 왜 함부로 돌아다녀?”

강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손만 내려다보았다.

‘이 말은 날 납치하고 팔아버린 게 규연 씨가 아니란 뜻인가? 그런데 규연 씨가 아니었다고 해도 모두 규연 씨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강아연, 내 말 듣고 있어?”

성규연은 그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다가와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동정이라도 할 줄 알았어? 자작극으로 불쌍한 척하는 역겨운 수법을 또 쓰겠다는 거야?”

분노에 찬 그의 모습에 강아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요? 규연 씨 눈에는 내가 겪은 일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꾸며낸 역겨운 수법으로 보이는군요.”

‘상처받은 사람은 분명 나인데 규연 씨한테는 그냥 자작극이었어.’

“지금까지 날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네요.”

강아연의 무덤덤한 말투가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성규연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나한테 어떻게 했었는지 잊었어?”

냉랭한 한마디에 강아연은 5년 전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5년 전, 강아연이 성준서를 임신한 지 7개월 되었을 때 성규연이 갑자기 그녀의 아버지 강명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때 잘나갔던 강 청장은 뇌물 혐의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모두에게 손가락질받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소식에 충격받은 강아연은 조산기가 있음에도 억지로 몸을 이끌고 성규연을 찾아갔다. 평소 자존심이 강한 그녀였지만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규연 씨, 내가 이렇게 빌게요. 제발 우리 아빠 좀 살려줘요...”

당시 성규연은 그녀의 부탁 따위 안중에도 없었던 터라 운전기사에게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라고 싸늘하게 지시했다.

강아연은 성규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성규연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피가 쏟아지는 걸 보고서는 그제야 강명우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강아연은 그 일로 조산과 과다 출혈을 겪었고 온몸의 피를 거의 갈아치울 정도로 수혈받으면서 성준서를 힘겹게 낳았다.

그런데 그녀의 간절한 애원이 성규연의 눈에는 불쌍한 척하는 역겨운 수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강아연은 웃고 싶었지만 상처 입은 얼굴의 통증이 심해 결국 포기했다.

“피곤해. 할 일 없으면 그냥 가.”

성규연은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얗던 피부에 생긴 붉은 손자국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리 강아연을 싫어한다 해도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놈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의 말에 강아연은 그를 힐끗 쳐다봤다. 예전 같았으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만 지금 그녀의 눈은 더없이 차분했다.

필요할 땐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베푸는 호의는 받고 싶지 않았다.

강아연이 아무 말이 없자 성규연은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강아연은 긴장했던 등을 침대에 기대고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있었다.

“사모님.”

도우미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는데 쟁반 위에 연고가 놓여 있었다.

“대표님이 의사 선생님한테 가장 좋은 약으로 사모님의 상처를 치료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강아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모님께서 쓰러지신 지난 이틀 동안 대표님은 회사도 나가지 않으셨어요. 집에서 근무하면서 사모님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셨어요.”

도우미 장미진이 강아연의 표정을 살피면서 기쁘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대표님 사실 사모님을 많이 걱정하세요...”

‘이제 와서? 전에는 뭐 하고? 아, 그땐 심소연의 품에 안겨 있었겠지.’

강아연이 속으로 비웃더니 갑자기 물었다.

“요 며칠 심소연 씨도 여기 있었나요?”

“그게...”

장미진은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심소연 씨가 요즘 이사해야 하는데 머물 곳이 없고 또 도련님도 심소연 씨를 많이 따라서 대표님이 며칠만 머물라고 하셨어요.”

‘역시 결국에는 이 집에 들어왔어.’

“대표님이 그래도 심소연 씨한테는 2층에 있는 게스트룸을 내주셨어요. 3층이 아니라...”

장미진이 뭔가를 더 설명하려 했지만 강아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2층 게스트룸에 묵고 있다면 다음에는 3층 안방 옆의 게스트룸, 그다음에는 안방에 들어올 것이다.

강아연은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으나 웬일인지 그리 아프지 않았다. 성규연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후에는 고통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야.’

강아연이 시선을 늘어뜨렸다. 이곳에 곧 새로운 안주인이 올 테니 눈치껏 미리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장미진을 내보낸 후 강아연은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혼 합의서.]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나를 버린 그들에게   제168화

    “자기야, 넌 늙지 않았어.”박경준은 부드러운 뺨을 꼬집었다.“겨우 스물일곱이잖아. 한창 예쁠 나이야.”“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렇게 해?”정도희가 갑자기 물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박경준은 잠시 멈췄다.“다른 여자들?”‘그 여자들이 기쁘게 해 주면 다 자기라고 불러?’정도희는 마음속으로만 물었다. 괜히 상처받을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뜨거웠던 뺨은 정신을 차리자 천천히 식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며 재촉했다.“왜 아직도 안 움직여?”하지만 박경준은 입꼬리만 올릴 뿐 산처럼 몸 위를 누른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귓가에 몸을 숙여 얇은 입술로 속삭였다.“조금 더 오래 있어야 성공 확률이 높아지지.”정도희는 할 말을 잃었다.박경준은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하는 일에 몹시 집착하는 듯했다.예전에는 늘 피임했고, 일이 끝난 뒤에도 흔적을 깨끗이 정리했다. 자신에게 골칫거리를 남기지 않으려 무척 조심스러웠다.하지만 그날 밤 정도희가 그의 요구를 받아들인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그는 더는 어떤 피임도 하지 않았다. 매번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며 더 오래 함께 있으려 했다.성공에 도움이 된다는 다양한 자세를 찾아보고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지금 정도희의 허리 아래에 받쳐 둔 베개도 박경준이 놓은 것이었다.‘그렇게 아이를 원하는 걸까?’정도희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다시 아이를 갖기 어려웠다.그래서 그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었다.그가 원하는 대로 협조할 뿐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다.박경준이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속였으니 자신도 그를 한 번 이용하는 셈이었다. 공평했다.그래도 상황이 달라질까 걱정돼 한마디 물었다.“성규연이 아연이 행방을 물어본 적 있어?”박경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물론 물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성규연의 힘으로 강아연이 연성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할 리 없었다.박경준이 계속 일부러 감추

  • 나를 버린 그들에게   제167화

    “당연히 아니야.”정도희는 빈틈없는 얼굴로 웃었다.“내가 약속을 어길 사람처럼 보여? 아직 임신하지 않았으니 임신한 뒤에 일을 그만둬도 늦지 않잖아.”“내 능력을 의심하는 거야?”박경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정도희는 어떻게 생각이 갑자기 그쪽으로 튀었는지 몰라 멈칫했다.박경준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손을 뻗어 뺨을 꼬집으며 작게 웃었다.“내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확실히 알려 주지.”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자 시선을 돌리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는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아파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박경준이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더니 턱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덮쳤다.“읏...”정도희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쳤지만 곧 그의 입맞춤에 응했다.분위기는 갈수록 뜨거워졌다. 거세고 끈질긴 입맞춤에 숨이 막혔다. 아직 문 앞이라는 걸 깨달은 정도희는 그의 가슴을 밀며 간신히 숨을 골랐다.“먼저... 들어가.”“정도희, 한 층에 한 집뿐인데 뭘 부끄러워해?”박경준은 대수롭지 않게 다시 입술을 덮치려 했다.“그래도 안 돼!”정도희는 얼굴을 돌렸다. 흰 뺨이 살짝 붉어졌다.“서 있으면 불편해.”박경준은 입꼬리를 당겼다.“유난스럽기는.”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다른 손으로 문을 열었다.지문 인식 잠금장치가 풀리자 정도희를 현관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쾅 닫았다.정도희는 곁눈질로 집 안을 훑었다.검은색과 흰색, 회색으로 꾸민 집은 간결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박경준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 건 처음이었다.수납장 위에 립스틱 하나가 놓여 있는 거로 보아, 다른 여자도 집에 데려왔던 모양이었다.정도희의 눈에 복잡한 빛이 스쳤다.“딴생각은 왜 해?”박경준은 거슬리는 안경을 벗으며 그녀의 단추를 풀어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정도희는 눈앞의 남자에게 다시 시선을 맞췄다.잘생긴 얼굴은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지만 언제나 속을 알 수 없었다.자신이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몰랐다. 박경준도 말

  • 나를 버린 그들에게   제166화

    정도희가 이번 작품 촬영을 마친 뒤 가장 편안한 순간이었다.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검은 벤틀리를 발견하는 순간, 내려놓았던 마음이 다시 긴장했다. 강아연의 팔을 안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왜 그래?”강아연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하게 물었다.“아연아, 갑자기 처리하지 않은 일이 떠올랐어. 얼른 다녀와야 할 것 같아.”정도희의 목소리는 조금 부자연스러웠다.하지만 강아연은 정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정도희의 직업 특성상 일정이 갑자기 생길 때도 있었다.“그럼 다녀와. 리아의 사인펜은 내가 사 갈게.”“그리고 리아를 집에 데려가 줄래?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 줘.”정도희는 강아연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사생팬 중에는 무서운 사람도 있잖아. 내가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걱정하지 마. 알아.”강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있다가 리아를 집으로 데려가 돌볼게. 밖에 못 나가게 하고.”그 아파트는 병원보다도 보안이 훨씬 철저했다.“고마워, 아연아.”정도희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벤틀리 주인의 시선을 최대한 멀리 끌어내려고 병원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나중에는 거의 달리기 시작했다.하지만 두 다리로 네 바퀴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검은 벤틀리가 곁을 빠르게 스쳐 가더니 방향을 틀어 바로 앞을 가로막았다.운전석 창문이 반쯤 내려가며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은테 안경을 쓴 모습은 점잖고 부드러워, 우아한 선비 같은 분위기였다.하지만 정도희만은 잘 알았다. 반듯하게 다린 정장 아래 얼마나 단단한 근육이 숨겨져 있는지, 예의 바른 겉모습 안에 사람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이 감춰져 있는지를.“나를 보자마자 도망쳐?”박경준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안경알 위로 차가운 빛이 스쳤다.“내가 그렇게 무서워? 양심도 없는 정 톱스타님.”정도희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뒤쪽은 병원이었다. 그쪽으로 가 박경준까지 병원으로 끌고 갈 수는 없었다.그녀는 숨을 내쉬고 매혹적으로

  • 나를 버린 그들에게   제165화

    강아연 자신도 놀라웠다. 아이가 있다는 걸 몰랐을 때는 임신 반응이 그렇게 심했는데,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점점 줄었다. 특히 경성을 떠난 뒤로는 거의 사라졌다.성준서를 임신했을 때는 세상이 뒤집힐 만큼 토했다. 입덧이 너무 심해 몇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고, 특히 임신 후반에는 아이가 배 속에서 집이라도 무너뜨릴 듯 날뛰었다.임신 7개월 이후에는 거의 침대에서 지내며 걸어 다니지도 못했다.그에 비하면 이번 아이는 훨씬 얌전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게 여자아이 같았다.정도희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이 정리아를 임신했을 때도 거의 고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정도희는 강아연의 배를 보며 웃었다.“아이도 엄마가 힘든 걸 아나 봐.”잠시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이렇게 얌전하고 천사 같은 아이인데 정말 포기할 거야?”아무리 자연스럽게 말하려 해도 강아연은 곧바로 눈치챘다.“엄마가 나를 설득해 달라고 했지?”들킨 정도희는 더 돌려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모는 네가 계속 혼자 외롭게 지내는 걸 원하지 않으셔. 이 아이와 네가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강아연은 어머니가 바라는 마음을 잘 알았다. 앞으로 기댈 가족이 생기고, 아이 덕분에 상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하지만...”강아연은 갈등 어린 눈으로 마음속 걱정을 털어놨다.“같은 일을 또 겪을까 봐 무서워.”이 아이도 두 번째 성준서가 되어 가슴을 찢어 놓을까 두려웠다.“그럴 리가 없잖아!”정도희가 곧바로 부인했다.“성준서는 어릴 때부터 성씨 집안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어. 네 시어머니가 평소에도 아이 앞에서 둘 사이를 계속 이간질했을지 몰라. 그래서 너와 멀어진 거겠지. 이번 아이를 처음부터 네 곁에서 키우면 결과는 분명 달라.”강아연도 그 사실을 알았다. 당시에는 성규연을 사랑했기에 반항할 용기도 힘도 없었고 서영란의 결정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힘이 부족하더라도 성규연에게 아무 감정이 남지 않았다. 더는 부당한 대우를

  • 나를 버린 그들에게   제164화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붉은 연꽃과 차가운 칼날이 동시에 피어난 듯했다.통증은 욕망에 불을 붙이는 가장 강한 도화선이었다. 한순간에 남자의 본성 깊이 잠든 살기까지 모조리 깨웠다.“강. 아. 연.”그는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세 글자를 씹어 삼키듯 불렀다. 쓰라린 맛에 심장 끝이 떨리는데도 눈에는 집착이 점점 짙어졌다.강아연을 향한 집착이었다.“네가 어디로 숨든, 나 성규연은 끝까지 쫓아갈 거야. 절대로... 절대로 널 놓아주지 않아!”...“에취...”연성에서 꽃꽂이를 하던 강아연이 갑자기 재채기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왜 그래? 감기 걸렸어?”주정애가 걱정하며 휴지를 한 장 뽑아 건넸다.“아니에요. 누가 제 생각을 하나 봐요.”강아연은 웃으며 휴지를 받고 가볍게 농담했다.“맞혔어요!”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아연이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한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멋진 펑크스타일 가죽 치마를 입고 들어와 신나게 외쳤다.“아연 엄마!”강아연의 눈이 반짝였다. 하던 일을 곧장 내려놓고 몸을 낮춰 두 팔을 벌렸다.“리아야!”정리아는 쪼르르 달려와 강아연의 품에 안겼다.뒤이어 들어온 정도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리아야, 조심하라고 했잖아. 아연 엄마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정리아는 얼른 조금 물러났다. 어린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아연 엄마, 미안해요. 너무 오래 못 봐서 보고 싶었어요.”“괜찮아.”강아연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정도희에게 입술을 삐죽였다.“아이 하나가 안긴다고 얼마나 다치겠어? 너무 긴장하지 마.”“그래도 조심해야지.”정도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않았다.“이미 수술을 예약했어도 받기 전까지는 주의해야 해.”주정애도 고개를 끄덕였다.“도희 말이 맞아. 몸이 제일 중요하니 친구 말을 들어.”“네, 알았어요.”강아연은 웃으며 대답하고 장난감을 가져와 정리아와 놀았다.정도희는 주정애와 강아연에게 줄 건강식품도 가져왔

  • 나를 버린 그들에게   제163화

    강아연의 얼굴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그 웃음이 유난히 거슬린다고 생각했다.그녀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그리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강아연, 목적을 이뤘으니 기쁘겠네?”그 말에 강아연의 웃음이 서서히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면서도 우스울 만큼 통쾌한 복수심까지 느꼈다.그녀의 기쁨을 함께 느끼지 못했으니 자신의 분노라도 강아연에게 떠넘기려 했다.이제야 성규연은 당시 자신이 얼마나 나쁘고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죄 없는 사람을 자신과 같은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리려고 그런 상처뿐인 말을 했다.결국 강아연의 가슴에 꽂았던 말들은 모두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심장에 되돌아와 박혔다.성규연은 참을 수 없는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었다.몸이 비틀거리며 거의 서 있지 못 할 뻔했다.휴대전화가 바닥에 무겁게 떨어졌다.“성 대표님!”진 비서가 급히 그를 부축했다.“괜찮으세요? 사내 의사를 부를까요?”성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진 비서의 손을 뿌리치고 한 손으로 책상을 짚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시선은 책상 위 꽃병에 꽂힌 탐스러운 장미에 고정돼 있었다.진 비서가 피로를 덜어 주겠다며 가져다 놓은 꽃이었다.꽃은 아름다웠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맑아지고 사람의 얼굴까지 환하게 만들어 줄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성규연의 안색을 더욱 어둡고 무섭게 보이게 할 뿐이었다.진 비서는 손을 뻗고도 감히 그에게 닿지 못했다. 초조함과 걱정에 다리만 떨며 불렀다.“성 대표님...”다음 순간, 성규연이 갑자기 손을 뻗어 꽃병 안의 장미 한 다발을 움켜쥐었다.쌓여 있던 서류가 와르르 무너지고 장미가 크게 흔들리며 꽃잎 두 장이 떨어졌다.성규연은 오른손으로 아픈 심장을 누르고 왼손에는 장미를 힘껏 쥐었다.줄기의 가시가 하나하나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 피부가 찢어지며 순식간에 피가 쏟아졌다.진 비서가 눈을 크게 떴다.“성 대표님!”피는 장미 줄기를 따라 흘러 투명한 꽃병 속 물까지 붉게 물들였다.하지만 성규연은 통증을 느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