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쪽 폐예배당은 불이 꺼진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돌계단 아래에는 갓 부서진 짚과 젖은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돌아오지 않은 세탁 수레가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했다.
카시안이 손을 들자 황실 기사들이 정문 양쪽에 붙었다.
“문을 부순다.”
“열지 마세요.”
엘로이즈의 말에 그의 검이 문고리 앞에서 멎었다.
그녀는 문턱에 무릎을 굽혔다. 녹슨 경첩 아래에서 머리카락보다 가는 구리선이 돌 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 지하에 신호가 갑니다.”
데미안이 낮게 숨을 삼켰다.
“기습을 알아차리면 수로로 달아나겠군요.”
카시안은 이유를 더 묻지 않았다. 곧바로 기사들을 물렸다.
전생의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부터 부정했다. 지
황실 기록원의 마지막 등불이 꺼질 무렵, 데미안이 수위 장부를 덮었다.“남운하가 건설된 이후 칠십삼 년간의 기록입니다.”탁자 위에는 토목 보고서와 강우량 장부, 제방 보수 내역이 연도별로 쌓여 있었다.“가장 높은 수위는 이십일 년 전입니다. 구 방직 창고의 두 번째 계단 중간까지 차올랐습니다.”세 번째 계단에는 닿지 않았다.카시안은 마지막 장부까지 직접 확인했다.엘로이즈가 그은 분필선을 설명할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예측 보고서는?”“토목국에는 없습니다. 다만 폐기 문서 목록에서 이상한 번호를 찾았습니다.”데미안이 낡은 철제 함을 내밀었다. 황제와 황태자의 인장을 동시에 사용해야 열리는 봉인함이었다.안에는 건국 초기의 남운하 모형 실험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북부 제4수문의 평형 사슬이 폭우 중 끊어질 경우.수위 예상선은 구 방직 창고의 세 번째 계단.분필선과 정확히 같은 높이였다.카시안의 손이 보고서 위에서 멎었다.전생의 범람도 제4수문에서 시작됐다. 사흘째 밤, 녹슨 평형 사슬이 끊어지며 닫힌 수문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그러나 이 보고서는 실무 부서에도 배포되지 않았다.열람 기록에는 선대 황제와 당시 토목대신의 이름만 남아 있었다.“에버하르트가에서 이 문서에 접근한 흔적은?”“없습니다.”“사본은?”“세 부뿐입니다. 한 부는 화재로 소실됐고, 한 부는 대신전 토목고로 이관됐습니다. 나머지가 이것입니다.”대신전.카시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엘로이즈가
정오가 되자 남운하 창고 앞에는 검사관보다 구호소 사람들이 먼저 도착했다.노인과 아이들이 배급표를 쥔 채 줄을 섰다. 상업조합 검사관 두 명과 구호소 의사들도 창고 앞의 긴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카시안은 기사들을 뒤로 물린 채 가장 바깥에 섰다.엘로이즈가 만든 자리였다.황후의 권력과 싸우기 위해 황태자의 권력을 빌리지 않는 자리.붉은 휘장을 단 검사관이 마차에서 내렸다.“황후 폐하의 명에 따라 창고를 폐쇄하고 곡물을 압류하겠습니다.”엘로이즈가 곧바로 물었다.“검사는 하지 않습니까?”“보관 기준 위반 가능성이 확인됐습니다.”“가능성만으로 저 사람들의 식량을 가져가시겠다는 뜻이군요.”검사관의 시선이 배급 줄로 향했다. 굶주린 얼굴들이 한꺼번에 그를 바라봤다.그는 헛기침하며 서류를 펼쳤다.“바닥 습기, 환기 불량, 배수 시설 미비를 확인하겠습니다.”검사가 시작됐다.목재 받침 아래에는 마른 석회가 깔려 있었다. 창문은 양쪽으로 열려 있었고, 넓힌 배수구에는 물이 막힘없이 흘렀다. 무작위로 연 곡물 자루에서도 곰팡이나 벌레는 나오지 않았다.상업조합 검사관이 판정서에 적었다.보관 적합.황후궁 검사관의 얼굴이 굳었다.“임시 시설은 언제든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선 압류한 뒤 재심사하겠습니다.”엘로이즈가 손을 내밀었다.“압류 명령서를 공개해 주십시오.”“황후궁 문서입니다.”“공개된 검사 결과를 뒤집는 근거라면 당사자들이 확인해야 합니다.”
카시안이 남운하 창고에 도착했을 때, 엘로이즈는 곡물 자루를 다시 내리고 있었다.밤새 옮겨 놓은 자루들이 바닥이 아니라 새로 짠 목재 받침 위에 올라갔다. 인부들은 벽 아래 배수구를 넓히고, 창문 틈에는 마른 석회와 천을 채웠다.단순히 비를 피하려는 작업이 아니었다.물을 견디기 위한 준비였다.“아래쪽 두 줄은 전부 비우세요.”엘로이즈가 창고 안쪽의 돌계단을 가리켰다.“곡물은 세 번째 계단보다 위에 쌓습니다.”하렌이 장부에서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높이면 보관량이 삼 할은 줄어듭니다.”“그래도 올리세요.”“이 정도 비로 운하가 넘치지는 않을 텐데요.”엘로이즈의 시선이 계단 세 번째 칸에 멎었다.“넘칠 수도 있으니까요.”카시안의 걸음이 멈췄다.전생의 남운하 범람은 지금으로부터 넉 달 뒤였다.사흘간 이어진 폭우로 제방이 무너졌고, 상업 지구의 창고 대부분이 잠겼다. 물은 정확히 저 계단의 세 번째 칸까지 차올랐다.그때 곡물을 살린 곳도 이 세 창고뿐이었다.엘로이즈는 범람 이후 이곳을 구호 거점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현재의 그녀가 그 수위를 알 방법은 없었다.“전하께서는 왜 오셨습니까?”엘로이즈가 그를 발견하고 물었다.카시안은 계단에서 시선을 거뒀다.“황후궁이 정오에 창고 검사를 보낸다.”인부들의 손이 잠시 멎었다.“검사 사유는요?”“식량 보관 기준 위반과 무허가 구호 물자 유통.”“예상보
약혼 협의회가 끝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에버하르트의 곡물 마차 스물세 대가 황실 창고 앞에서 멈췄다.“출입 허가가 취소됐습니다.”하렌이 내민 공문에는 황후궁의 붉은 봉인이 찍혀 있었다.북부와의 혼인 및 무역 협상이 황실의 군량 체계에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에버하르트가의 창고 이용권을 재심사한다.오늘 저녁 빈민 구호소로 보내야 할 곡물이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면 천막을 씌운 마차에서도 이틀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엘로이즈는 공문 아래의 발행 시각을 확인했다.약혼 협의회가 시작되기 삼십 분 전.베아트리체는 로웬이 나타나기도 전에 보복을 준비해 두었다.“마차를 돌릴까요?”“아니요. 여기서 기다리세요.”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카시안이 황태자궁 기사들과 함께 도착했다. 그의 손에는 황실 창고 이용권을 즉시 복구하는 명령서가 들려 있었다.“이것을 제출하면 문이 열린다.”엘로이즈는 문서를 받지 않았다.“전하께서 열어 주신 문은 전하의 다음 명령으로 다시 닫힐 수 있습니다.”“지금은 곡물을 살리는 일이 먼저다.”“그래서 다른 문을 찾겠습니다.”카시안의 시선이 빗방울이 맺힌 마차들을 훑었다.“저녁 배급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알고 있습니다.”“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다.”엘로이즈의 눈빛이 차갑게 굳자 카시안이 말을 멈췄다.전생에도 그는 늘 같은 방식으로 시작했다.시간이 없으니.위험하니.자신이 해결하는 편이 빠르니.그리고 모든 결정권을 가져갔다.카시안은 손에 든 복구 명령서를 천천히 내렸다. 허공을 맴돌던 커다란 손이 갈 곳을 잃고 힘없이 떨어졌다.“미안하다. 또 네 선택보다 내 해결책을 먼저 내밀었군.”엘로이즈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복구 명령서가 아니라 정지 공문의 원본을 주십시오.”“무엇을 확인하려고?”“황후궁이 막을 수 있는 범위를요.”카시안은 더 묻지 않았다. 기사에게서 원본을 받아 그녀에게 건넸다.엘로이즈는 공문의 문구를 다시 읽었다.정지된 것은 에버하르트의 곡물 운송권이
약혼 협의회장은 숨이 막힐 만큼 조용했다.카시안의 오른편에는 베아트리체가, 맞은편에는 엘로이즈와 에버하르트 공작이 앉아 있었다. 상석의 황제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약혼 문서를 내려다봤다.“발표 연기는 황태자의 요청이었다.”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오늘은 새 조건을 정하면 되겠군.”베아트리체가 미소 지었다.“조건을 더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두 가문의 결합은 이미 합의된 일입니다.”엘로이즈가 입을 열려던 순간, 회의장 밖이 소란스러워졌다.문이 열렸다.검은 늑대 문장이 새겨진 회색 제복의 남자가 붉은 접수증을 들고 들어왔다.“노르카인 자치공국의 로웬 카르시온입니다.”그가 황제에게 서류를 올렸다.“에버하르트 영애와의 공식 구혼 및 무역 조정 신청을 심리해 주십시오.”카시안의 손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로웬의 이름도, 엘로이즈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자신 없는 미래를 문서로 만들고 다른 남자를 이 자리까지 불러들인 광경은 전혀 다른 고통이었다.검집 안에서 쇠가 미세하게 울렸다.엘로이즈의 시선이 그의 손에 닿았다. 그 눈에는 놀람보다 경계가 먼저 떠올라 있었다.카시안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약혼 협의회에 난입한 죄부터 물어야겠군요. 근위대.”문 앞의 기사들이 움직였다.카시안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멈춰라.”“카시안.”“중립공증원에 접수된 외교 조정의
로웬 카르시온과의 만남은 도주가 아니라 절차로 이루어졌다.엘로이즈는 에버하르트가와 노르카인 상단 사이의 곡물 운송 분쟁을 제국 중립공증원에 접수했다. 외국 귀족이 당사자인 비공개 조정에는 황실 기사도, 황후궁 시종도 들어올 수 없었다.카시안에게는 한 줄만 보냈다.가문의 외교 거래를 위해 중립공증원에 갑니다. 공조와 무관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답장은 짧았다.알겠다.행선지를 묻지도, 사람을 붙이겠다고 통보하지도 않았다.그 점이 오히려 엘로이즈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공증원 앞에는 황후궁의 마차가 서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이미 그녀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시자는 조정실 앞까지만 따라올 수 있었다.철문이 닫히자 바깥의 시선도 끊겼다.창가에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로웬 카르시온.북부식 회색 제복 위로 검은 늑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형식적인 인사 대신 엘로이즈가 든 서류철부터 바라보았다.“황태자의 약혼녀가 북부 후계자에게 비공개 조정을 신청했군요.”“아직 약혼녀가 아닙니다.”“그래서 더 위험하겠군.”로웬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편지에는 거래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엘로이즈는 앉지 않았다.품에서 구김 하나 없는 서류 세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탄환처럼 나란히 내려놓았다.첫 번째는 에버하르트의 곡물 수송로.두 번째는 노르카인에서 몰수된 서부 항구의 옛 세관 기록.마지막은 아스트라 결계의 공명도 표식이었다.로웬의 눈빛이 처음으로 변했다.“이 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