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문 앞은 이미 조용한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삼황자가 왔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 사람들은 들뜨고 기뻐했다. 지금은 모두가 숨을 낮췄다.
하인들은 허리를 굽힌 채 눈을 들지 못했고, 친척들은 말을 삼킨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위지헌은 그런 사람이었다 — 그가 오면 사람들은 환호하지 않고, 숨을 세었다.
말발굽 소리가 멎었다.
검은 옷의 군사들이 먼저 들어섰다. 화려하지 않았으나 모두를 누르는 힘이 있었다.
칼집 하나, 신발 끝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뒤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월령은 숨을 조심스레 삼켰다.
위지헌.
그 밤보다 젊었으나, 이미 차가웠다. 검은 장포 위로 은실 구름무늬가 희미하게 빛났고, 허리의 장검은 장식처럼 얌전히 걸렸으나 아무도 그것을 장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 웃지 않았고,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다. 걸음은 느렸다 — 빨리 걸을 까닭이 없는 사람의 느림이었고, 절제된 그 한 걸음이 도리어 보는 이의 숨을 잡아끌었다.
깎은 듯 서늘한 이목구비, 감정을 가라앉힌 눈매, 사람을 베어 왔을 길고 단정한 손. 그 서늘함 아래로 억눌린 힘이 낮게 흘렀고, 그 힘은 위압인 동시에 —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색(色)이었다.
연회장 한쪽의 젊은 부인이 부채를 쥔 손을 멈췄다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잔을 나르던 시비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들은 그가 두려워 고개를 숙였으나, 숙이고도 곁눈으로 그를 좇았다. 그를 한 번 본 사람은, 마음에 무엇 하나를 품지 않고는 쉬이 돌아서지 못했다.
월령조차 한순간 숨이 늦었다 — 그 밤의 젖은 장포도 피 묻은 손도 아닌, 봄볕 아래 처음 보는 서늘하고 아득한 사내였다.
"섭정왕 전하를 뵙습니다."
심도윤이 예를 올렸다.
"심 장군."
위지헌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 목소리.
월령의 가슴이 아프게 조여 들었다.
칼을 치우라 명하던 소리.
늦은 게 아니라고, 되돌리겠다고 짓이기듯 낮게 말하던 그 슬픔. 월령은 자신도 모르게 반 걸음 물러났다.
위지헌의 시선이 움직였다.
곧장 그녀에게 닿았다.
너무 곧장.
마치 처음부터 다른 누구도 보지 않았던 사람처럼. 낯선 여인을 탐하는 눈도, 오래전 정인을 만난 눈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것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아무도 보지 못했다.
차갑고 고고한 섭정왕의 시선이 월령 하나를 담고 있다는 것을. 그 눈길 아래에서 월령의 심장만 세게 뛰었다.
위지헌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심 장군. 서재로."
명령은 짧았다.
심도윤이 군례로 답했다.
"모시겠습니다."
위지헌은 따라가려다 문득 멈췄다. 시선이 다시 월령에게 닿았다.
"저 아이가."
모두의 눈이 월령에게 쏠렸다.
"따님인가."
"예. 제 딸 월령입니다."
월령.
그 이름이 심도윤의 입에서 나오자, 위지헌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소리 내어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월령은 보았다 —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낯선 글자가 아니라, 오래 묻어 둔 물건처럼 더듬는 것을.
"그렇군."
그뿐이었다.
서윤은 옆에서 얼굴을 굳혔고, 한씨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눌렀다. 위명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얼굴을 했을까.
아마 더 다정하게 웃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버린 것을 누군가 아까워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 월령의 마음속에서 차가운 결론 하나가 내려앉았다. 위명서가 그녀를 붙잡으려 한다면, 그 손을 피하는 가장 빠른 길은 — 그가 함부로 빼앗지 못할 손을 잡는 것이다.
대연에서 그런 손은 하나뿐이었다.
섭정왕 위지헌.
위험했다.
너무 위험했다.
위지헌은 그녀를 아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랑이 언제나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랑은 감옥보다 깊고, 어떤 손은 칼보다 뜨겁다. 위지헌 같은 남자의 마음이라면 더욱.
그래도 월령은 이미 죽음보다 더 찬 바닥을 밟아 보았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많지 않았다.
위지헌이 심도윤과 함께 서재로 든 뒤, 연회장은 조심스럽게 소란을 되찾았다. 월령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청아가 뒤따라왔다.
"서재 뒤뜰."
청아의 얼굴이 하얘졌다.
"대장군과 섭정왕 전하께서 계신 곳 아닙니까? 그곳은 함부로 가시면…"
"함부로 가는 거 아니에요."
월령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찾아가는 거예요."
청아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소매 안의 먹끈을 만지고, 월령의 치맛자락이 돌길에 끌리지 않도록 한 번 접어 올렸다. 겁은 눈에 있었고, 손은 여전히 야무졌다.
등잔이 문턱에 놓여 있었다.삼황자부 침전 문 앞에 주란이 흰 옷을 입고 그 등잔을 놓고 서 있었다. 위명서가 회랑 끝에서 그것을 보았다. 편전에서 아비 곁에 열흘 넘게 앉아 있다가 상복 한 벌을 갈아입으러 온 걸음이었다. 상복은 사흘에 한 번 갈아입는 것이 법도였다."들어오지 마라.""알고 있습니다, 삼전하. 새 상복은 서안 옆에 두었습니다."주란이 문을 열고 물러섰다. 위명서가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주란은 등잔 곁, 문 밖에 남았다.안에서 접힌 종이를 펴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붓 소리가 났다. 먹 가는 소리는 나지 않았으니, 마른 먹에 물을 부어 쓴 것이었다. 붓이 두 줄을 짧게 지나가고 멈췄다. 그러고는 종이를 반, 또 반 접는 소리가 났다.문이 열렸을 때 상복은 갈려 있었다. 주란이 벗은 삼베 상복을 받았고, 위명서는 아무 말 없이 회랑을 걸어 나갔다.주란이 그 삼베를 안고 서 있었다. 소맷단에서 마른 먹에 물을 부은 냄새가 났다. 주란은 냄새를 안 맡은 얼굴로 상복을 접었다.*빈전 앞 저녁 곡에서 숙비가 앞에 서고, 위명서가 그 뒤 황자의 자리에 섰다.병풍 없는 어미의 등이 열흘째 앞에 있었다. 곡이 세 번 길게 가고 끊기고, 다시 세 번 가는 것을 위명서가 흠 없이 따라 했다. 배운 적이 없는데도 어미의 음과 제 음이 같았다.곡이 끝나자 숙비가 돌아서서 아들을 보았다."아바마마 곁에 있어라. 짐이 자다 깨면 네 얼굴이 보이게 하라고 하셨다지.""예, 어머니. 곡이 끝나면 바로 돌아갑니다.""어미 곁은 흰 천이 지킨다. 스무이레 동안은 그렇다. 네가 여기 서 있을 까닭이 없다."숙비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첫날 한 번 내밀어 잡은 손을 두 번 내밀지 않았다. 위명서가 절하고 편전으로 돌아섰다. 어미의 눈이 제 등에 있다는 것을 등으로 알았다.*발 안에서 아비가 눈을 떴다."명서냐.""예, 아바마마.""거기 앉아라."위명서가 앉자 머리맡에 꼭지가 오른쪽인 잔이 있었다. 아비의 숨이 그 잔 곁을 지나갔다. 드는
곡이 세 번 길게 갔다.끊고 세 번, 다시 끊고 세 번이었다. 빈전 앞 아침 곡은 흰 천 앞 상주 자리에 선 숙비의 것이었다. 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기침이 끼지 않았다. 담 밖에서 초비만 듣던 그 곡을 오늘은 종실이 다 들었다.월령은 비빈 뒤, 종실 여인들 줄에 섰다. 법도가 정해 준 자리였다. 앞에 선 숙비의 등은 병풍보다 얇았고, 월령은 그 등을 보면서 곡을 따라 했다. 따라 해야 하는 자리라 소리를 냈다. 흰 천은 황후의 것이고 곡은 저 사람의 것이었다. 저는 그 사이에 서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남자들 줄에는 위지헌이 위명서 옆에 섰다. 숙부와 조카가 나란히 선 자리였다. 위명서는 흠 없이 곡을 했고 위지헌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열면 곡이 아니라 다른 소리가 날 것 같아서였다.*왕부에 돌아왔을 때는 해가 아직 남아 있었다.방어멈이 요를 옮긴 뒤로 늘 그러듯 오른쪽에 앉아, 봄을 마루에 앉혀 놓고 있었다. 청아가 상중이라 고기를 안 넣은 국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국에서 김이 올랐다."마마님, 국 먼저 드세요. 아침 곡 하고 오시면 늘 아무것도 못 드시잖아요.""두어라. 부군 오시면 같이 먹겠다."위지헌이 흰 옷으로 마루에 올랐다. 아이는 마루 끝에 앉아 저녁 볕을 보고 있었다."봄아."그가 왼쪽에서 불렀다. 걸어 들어온 쪽이 왼쪽이었고, 열 해 동안 전장에서 왼쪽에 서던 사람의 버릇이었다.아이가 돌아보지 않았다.방어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청아는 국을 든 채 멈춰 섰다. 위지헌은 제가 부른 자리, 아이의 안 들리는 왼쪽에 그대로 서 있었다.오른쪽으로 세 걸음만 돌아가면 되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지 못했다. 형장 계단 앞에서 박혔던 것처럼 발이 거기 박혀 있었다."왕야. 오른쪽이에요. 어제도 말씀드렸잖아요. 오른쪽으로 가서 부르시면 애가 돌아봐요."방어멈이 말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월령이 그의 오른팔을 잡아 당겼다. 아이는 방어멈에게 두고, 그를 안채로 데려갔다.*월령이 문을 닫았다.등잔을 켜지
초비가 마지막으로 담에서 내려왔다.북경군이 황명으로 자녕궁 담 밖에서 물러났다. 봉쇄가 풀린 담 밖에 군을 세워 둘 명분이 없어서, 정무가 줄을 거두었다. 초비가 기와에서 뛰어내려 협도에 서서, 한 달 반 동안 앉아 있던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묵아는 더 감을 데가 없어진 실패를 소매에 넣었다."마마님, 땅이 이상해요.""뭐가 이상하냐.""발이요. 기와 위에 있다가 내려오니까 땅이 흔들려요. 흔들릴 리가 없는데 흔들려요.""한 달 반을 담 위에서 살았으니 그렇다. 며칠 걸으면 땅이 도로 땅이 된다."월령이 초비의 어깨를 한 번 짚어 주었다. 담 안에서는 물 긷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설련은 열린 문 안에 있었고 나오지 않았다.*왕부에 고 내관의 전갈이 왔다.별궁 건은 보류한다는 한 줄이었다. 폐하께서 눈을 뜨지 않으신 채로 그리 말씀하셨다고 했다.월령이 그 종이를 보았다. 보류라는 두 자가 이번에는 저를 지켰다. 대황자 때는 그 두 자가 사람을 못 지켰는데, 이번에는 같은 두 자가 별궁 문을 막았다.방어멈이 마루에서 그것을 보고도 묻지 않았다. 봄의 오른쪽에 앉아, 유씨가 지어 온 저고리 소매를 걷어 주고 있었다. 크게 지어야 오래 입는다고 크게 지어서 소매가 손을 다 덮었다."아씨, 궁에서 온 종이가 좋은 종이예요, 나쁜 종이예요.""오늘은 좋은 종이다.""그럼 됐어요. 얘 소매나 좀 보세요. 사돈마님이 이걸 세 해 입히실 셈으로 지으셨어요."*위지헌이 해가 진 뒤에 흰 옷으로 궁에서 돌아왔다.방어멈이 왼 어깨의 붕대를 갈아 주고 나갔다. 안채에는 등잔 하나만 켜 있었다.월령이 서안 위에 종이 봉지를 놓고 풀었다. 열 해 넘게 마른 살구꽃잎 넷이 나왔다. 그가 그것을 보았다."왼쪽 소매에 있는 것도 꺼내 주세요."그가 오른손으로 제 왼쪽 소매를 눌렀으나, 손이 하나뿐이라 안에 든 것을 꺼내지 못했다. 월령이 그 소매 안으로 손을 넣었다. 실 한 올이 든 자리 옆에서 꽃잎 한 장이 나왔고, 월령이 그것을 넷 옆에 놓았다.다
봉인지가 찢어졌다.고 내관이 제 손으로 반쪽 남은 봉인지를 마저 떼어 냈다. 붉은 문 앞에서 병사 여섯이 창을 세웠다가 내렸다. 고 내관이 황명이 적힌 종이를 문에 대고 읽었다."황명이다. 자녕궁의 봉쇄를 푼다. 숙비는 빈전 앞에 나와 내명부의 상주로 서라."읽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늘 옥필을 굴리던 손이 오늘은 굴리지 않고 종이를 접었다.초비가 담 위에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묵아는 담 밑에서 실을 감다가 손을 멈췄다."진짜 열어? 한 달 반을 닫아 놓고?""황명이라잖아. 우리가 막을 문이 아니야."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았다. 병사 둘이 밖에서 밀자, 한 달 반 동안 닫혀 있던 문이 긴 소리를 내며 열렸다.*그 황명이 내리기 전에 편전에서 오간 말이 있었다.발 안에서 경화제의 숨이 들고 났다. 드는 숨은 짧고 나는 숨은 길었다. 머리맡에는 뚜껑 꼭지가 오른쪽을 향한 잔 하나가 놓여 있었고, 위지헌이 그 곁에 꿇어앉아 있었다. 월령은 발 밖에 있었다."형님. 그 문을 여시면 안 됩니다.""종친부가 사흘째 같은 종이를 올린다. 내명부에 상주가 없다고. 스무이레 국상에 상주 없는 빈전은 없다고. 배중곤이 지당하오나를 세 번이나 썼더구나.""증좌가 있습니다. 명부 뒤쪽 스무 장이 그 여자 글씨입니다.""명부는 짐이 봉했다. 짐의 인으로. 황후 잔에 손댄 것은 하가 옷 입은 셈방 손이고, 그 손이 제 손가락 셋을 내주며 그리 말했다. 그 여자 손이 아니다. 그 여자 아비의 손이지."경화제가 한참 숨을 고르고 발 밖을 향해 불렀다."섭정왕비.""예, 폐하.""황후가 마지막에 뭐라 했느냐.""보류하지 말라 하셨사옵니다. 대황자 때처럼은 미루지 말라고요.""그래. 그러니 보류하지 않는다. 세운다. 빈전 앞에, 흰 천 앞에 세운다. 스무이레 동안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게 한다. 그 여자가 제일 잘하는 것을 제일 오래 시키는 것이다. 누워 있는 짐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다.""형님.""지헌아. 짐이 죽으면 명서는 저 여자 아
자가 종이 위에 놓였다.옥에서 빼앗겼다가 돌아온 허도겸의 자였다. 편전 곁방이었고, 발 하나 너머 침방에서 경화제의 숨소리가 났다. 허도겸은 그 숨소리를 들으면서 종이에 자를 댔다.원본 명부는 경화제의 인이 찍힌 봉인을 고 내관이 풀자 스물여섯 장이었다. 첫 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실이 끊긴 자국만 남아 있었다. 월령이 소매에서 첫 장을 꺼내 반, 또 반 펴서 그 앞에 놓았다.허도겸이 첫 장 안쪽 귀와 원본 둘째 장 귀를 나란히 놓고 쟀다. 양쪽에 실이 지나간 구멍이 셋씩 있었다."맞습니다. 구멍 사이가 같습니다."허도겸이 자를 든 채로 이어 갔다."같은 실로 한 번에 맨 책이면 구멍 사이가 같습니다. 첫 장은 이 책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맞습니다. 소신이 자로 잰 것이니 틀리지 않습니다."*방 안에 넷이 있었다.위지헌과 월령과 위명서와 허도겸이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고, 고 내관은 문가에 서 있었다. 위명서는 사흘 만에 매화 소맷단을 벗어서, 흰 소매에 매화가 없었다. 그는 그 없는 자리를 자꾸 내려다보았다.허도겸이 자로 글씨를 짚어 가며 말했다."첫 장 앞면의 두 이름과 뒷면의 소연화 세 자는 가늘고 젊은 글씨입니다. 값 칸 일곱 자와 인장은 굵고 느린 늙은 글씨입니다. 셈방 글씨이고, 인장은 독고 상단 초대 셈방의 인입니다. 둘째 장부터 여섯째 장까지가 같은 손입니다. 일곱째 장에서 손이 바뀝니다. 가늘고, 곱게 다 맺는 글씨입니다. 이 글씨가 스물여섯째 장까지 갑니다.""어머니 글씨입니다."위명서가 그 글씨를 알아보았다. 허도겸은 그를 보지 않고 자만 보았다."예, 삼전하. 그런데 그 사이에 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섯째 장 뒤 귀에 아주 작게 적혀 있습니다. 일곱째 장부터의 가는 글씨와 같은 손인데 획이 스무 해 젊습니다. 붓 쥔 늙은 손 곁에서 이름을 불러 주던 사람이, 제 손으로 한 번 적어 본 것입니다."월령이 그 작은 글씨를 보았다. 어머니 유씨가 젊은 날 비단 한 필을 들고 자녕궁 안쪽 방에 잘못 들었다가 본
왕부 별채에 흰 천이 하나 더 걸렸다.창 하나 있는 방에 독고진겸이 상단 옷 그대로 누워 있었다. 옆구리를 싸맨 천은 붉다가 검게 말랐다. 강무진이 셈방에서 왕부까지 업고 왔는데, 대문 앞에서 내려놓고서야 오는 길에 숨이 끊어진 것을 알았다.강무진이 마루 아래에 서서 아뢰었다. 흰 옷 등판에 남의 피가 말라 있었다."왕야, 수로를 건널 때까지는 등에서 숨소리가 났습니다. 대문에서 내려놓고 보니 이미 가 계셨습니다. 어디서 가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장부는.""여기 있습니다. 어른이 손바닥으로 누르신 자리가 그대로입니다."윤백이 그 장부를 받아 마루에 펴 놓고는 붓을 들지 않았다."이 장은 못 베낍니다. 잔액 칸에 아가씨 이름이 있던 자리인데, 붉은 것만 남고 획이 없습니다."기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소매 끝이 수로 물에 젖어 있었다."배수문까지 쫓았습니다. 그 안은 궁성 밑으로 드는 물길이라 배는 들어가고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위지헌은 옥대 매듭에 손을 얹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어멈이 부엌에 불을 넣었다.누가 먹을지도 정하지 않고 국을 끓였다. 월령이 문턱에 서자 어멈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산 사람은 먹어야지요. 초상집도 국은 끓입니다. 애 열병 때도 끓였고 황후마마 가셨을 때도 끓였어요. 이번엔 누가 먹을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끓여요, 아씨.""어멈, 한 그릇은 따로 담아 다오.""누구 것인데요.""설련이 것이다."청아가 그 국을 그릇에 담고 뚜껑을 덮어 보자기에 쌌다."마마님, 설련 언니한테 가져가는 거지요? 문은 아직 안 열렸는데요.""문 앞까지만 가면 된다. 그다음은 그 아이가 정할 일이다."*붉은 문에는 봉인지 반쪽이 남아 있고, 병사 여섯이 창을 세우고 있었다.월령이 흰 옷으로 그 앞에 섰다. 초비는 담 위에, 청아는 국을 든 채 뒤에 있었다. 협도 어귀에 독고진겸이 날마다 서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월령이 문을 세 번 두드렸다.안에서 발소리가 났다. 물통을 든 걸음이 아니라 빈손의
아침빛은 얇았다.밤새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지 방 안에는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꽃 향도, 난향도, 사람의 판단을 늦추던 희미한 쓴내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대신 창가에는 말린 살구꽃 한 줌이 놓여 있었다.누가 두고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청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과 울음을 참는 얼굴이 이상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월령은 그때 처음 알았다."왕부에서 보낸 거예요."청아는 아주 작게 말했다.왕부.그 두 글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낮아지는 듯했다. 월령은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이번에는.내 손을 놓지 마라.위지헌의 말은 한참 동안 측백나무 잎 사이에 머물렀다.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려왔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얇은 비단 몇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렸다.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놓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다시는 다른 손을 잡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심가를 살리겠다고,당신을 이용하겠다고,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는,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모두 참이었다.그래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말은 입
해시가 가까워질 무렵, 남쪽 연못에는 안개가 내려앉았다.봄밤의 안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얇고 희어서, 손을 뻗으면 손바닥 위에서 곧장 풀어질 듯했다.그러나 그 안에 오래 서 있으면 숨이 조금씩 낮아졌다.물 위의 달도,버드나무 아래 그림자도,멀리 별채 처마에 걸린 등불도 한 겹씩 지워졌다.소리가 먼저 숨었다.벌레 우는 소리는 물가의 돌 틈으로 잦아들었고, 회랑 아래 고인 밤공기는 젖은 약재처럼 싸늘했다.월령은 회랑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흰 장삼 위에 짙은 남색 겉옷을 걸쳤다. 밤 안으로 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