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위지헌의 말은 측백나무 잎 사이에 한참 머물렀다. 봄빛은 잘게 부서져 내렸고, 먼 연회장의 웃음소리는 비단 몇 겹 너머처럼 흐렸다.
월령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놓지 않겠다고도, 당신을 이용하겠다고도, 당신을 믿고 싶다고도 — 모두 참이어서 어느 하나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
다정한 말이 사랑이 되고, 사랑이 약점이 되고, 약점이 끝내 죄가 되던 것을 그녀는 한 생을 바쳐 배웠다. 위지헌은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 바란 것이 대답뿐이었다면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월령의 입술보다 먼저 그녀의 숨을 보았다 — 가늘어진 목선, 소매 안으로 접히는 손끝, 속눈썹 아래 젖은 눈동자가 늦게 숨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답은 지금 내지 마라."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두고 보아도 늦지 않다."
월령은 눈을 들었다.
위명서가 했다면, 다시 생각할 틈을 주는 척 손목을 감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지헌의 말에는 끈이 없었다.
그는 대답을 끌어당기지 않았고, 다만 그 대답이 너무 이르게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전하."
월령은 아주 낮게 불렀다.
"남쪽 담의 사내는요."
"창고에는 없다."
그 말은 죽었다는 뜻도, 달아났다는 뜻도 아니었다. 위지헌의 말은 늘 문턱에 놓였고, 건너야 하는 쪽은 듣는 사람에게 남겨 두었다.
월령은 천천히 그 뜻을 짚었다. 사내가 심가 창고에 그대로 있었다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은매를 우물가로 보낼 손이라면, 묶인 사내 하나 죽이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그가 창고 안에서 죽으면 심가는 황궁의 사람을 죽인 집이 되고, 아버지의 충성은 군권을 감춘 칼로 읽힐 것이었다.
그러나 사내가 사라지면, 이야기는 닫히지 않는다. 한씨와 서윤은 아직 같은 편인지 밤새 계산할 것이고, 궁 쪽은 제 손이 닿기 전에 누가 먼저 움직였는지 찾을 것이다.
"제 아버지를 속이셨습니다."
그 말은 월령이 했다기보다, 그 안의 어린 딸이 했다.
위지헌은 피하지 않았다.
"그래."
변명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월령은 더 불편했다. 이 남자는 그녀를 구하되 허락을 구하지 않았고, 심가를 지키되 그 장군에게도 전부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 뜻에서 위지헌은 선한 남자가 아니었다. 다만 제 손을 희다고 말하지 않는 남자였다.
위명서는 모든 피를 질서라 불러 아무도 그 피를 씻지 않게 했지만, 위지헌은 더러운 일을 피하지 않는 대신 그것을 선이라 꾸미지도 않았다.
"군법으로 보면 어렵지 않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이번에는 곧장 찌르지 않았다.
"붙잡은 자가 심가의 창고에서 죽으면, 그 죽음은 심가의 죄가 되지. 살아 사라지면 —"
시선이 그녀의 눈높이로 조금 내려왔다.
"그자를 찾는 이들이 먼저 서로를 본다."
월령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바둑으로 놓아 보자."
그가 아주 희미하게 말을 낮췄다.
"잡은 돌을 바로 거두면 그 수는 끝난다. 패로 남기면, 상대가 다음 손을 내야 하지."
월령의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갔다. 죽은 증인은 판을 닫고, 사라진 증인은 사람을 움직인다.
심가의 죄를 비워 두고, 저들이 서로의 손을 보게 한다.
"그러니까…"
월령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고 부드러웠다.
"전하께서는 그 사내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하게 두신 거군요. 심가의 죄가 되지 않도록요."
위지헌의 눈빛이 아주 잠깐 멎었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그 침묵은 물러서라는 뜻이었다.
그는 대개 감송향조차 닿지 않을 만큼 사람을 멀찍이 세워 두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월령 앞에서만, 그 거리가 자꾸 무너졌다.
피 냄새 나는 창고의 일을 군법과 바둑판의 수로 옮겨 읽는 그 속도를, 위지헌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열여섯의 가는 어깨 위에 너무 오래 버틴 사람의 눈이 얹혀 있었다.
아란이 먼저 보았다.밤이 아니었다. 해가 지기 전, 심부름꾼 하나가 난향재 뒷문으로 들었다. 약방 심부름장을 들고. 유씨 마님이 시킨 약재를 가져왔다고.아란은 마당에서 당과를 세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물었다."아저씨. 아저씨는 왜 뒷문으로 와? 앞문 있는데."심부름꾼이 잠깐 멈췄다."…앞문이 그, 닫혀 있길래.""안 닫혔는데? 나 방금 거기로 나왔는데."*서윤이 그 심부름장을 받았다.열여덟의 손이 종이를 폈다. 유씨의 이름으로 된 약재 주문. 글씨가 유씨 것과 닮아 있었다."…이거, 큰어머니 글씨 아닌데요.""그럴 리가요. 마님이 손수—""첫 획이요. 첫 획이 급해요."서윤이 말했다.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그런데 그 말투 밑에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큰어머니는 첫 획을 천천히 놓으시거든요. 이건 급한 사람이 남의 글씨 흉내 낸 거예요. 저도 예전에 이런 글씨… 써 본 적이 있어서, 그래서 알아요."서윤이 종이를 접지 않고 내려놓았다. 손끝에 실 자국이 있었다. 바느질을 하다 온 손이었다."서윤아."유씨가 마루에서 말했다."네가 그걸 알아본 게 흠이냐. 흠 아니다.""…압니다.""아는 얼굴이 아닌데, 지금."서윤이 고개를 숙였다. 어른스러운 말투가 거기서 잠깐 무너졌다."큰어머니. 저 이제 그 글씨 안 써요. 안 쓴단 말이에요.""안다. 알아."*심부름꾼이 뒷문으로 돌아서려 했다.문 앞에 기윤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송란영이 그 발소리를 먼저 알아듣고, 부엌 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 도망갈 길이 하나 줄었다."아, 놓으쇼. 놓으라니까. 난 약재만 갖다준 거요, 약재만.""약재부터. 풀어 보시오."기윤이 말했다.심부름꾼이 보따리를 풀었다. 약재였다. 진짜였다. 다만 그 밑에, 작은 병이 하나 있었다.은매가 부엌에서 나와 그 병을 보았다. 뚜껑을 열지 않았다. 열지 않고도 알았다."저, 저거요. 우물에 든 거랑 냄새가 같아요. 똑같아요."*담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둘.
난향재 아침은 빗질로 시작했다.송란영이 아란의 머리를 빗겼다. 참빗으로 한 번, 얼레빗으로 한 번. 그러고는 머리채를 세 갈래로 나눠 땋았다. 땋는 손이 끝에서 한 번 더 감겼다. 남들은 안 하는 매듭이었다. 죽은 사람이 하던 매듭."어머니, 오늘도 그거 해? 그거.""뭘.""그 매듭. 다른 애들은 안 하는데, 왜 나만 해?""…그러냐."송란영이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그 매듭을 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아침상은 세 그릇이었다.송란영이 밥을 펐다. 한 그릇, 두 그릇. 그러고는 세 번째 그릇에 밥을 담다가, 멈췄다. 담긴 밥을 도로 솥에 부었다. 빈 그릇을 엎어 두었다.아란이 그것을 보았다. 매일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묻지 않았다.유씨가 난향재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친정 언니처럼."또 세 그릇이냐.""두 그릇이에요, 형님.""엎어 둔 게 하나 있는데, 저기."송란영이 답하지 않았다. 유씨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엎어 둔 그릇을 제 손으로 바로 놓고, 거기에 제 밥을 덜었다."나도 여기서 먹으마. 안채는 대감 코 고는 소리에, 아주, 밥이 안 넘어가."아란이 큭 웃었다. 송란영도 입가가 조금 풀렸다. 유씨는 그 풀린 입가를 보고, 나물을 아란 쪽으로 밀었다."형님, 그 그릇은요.""그릇이 그릇이지, 뭐. 밥 담으면 밥그릇이고 엎어 두면 빈 그릇이고."유씨가 밥을 한 술 떴다."란영아. 죽은 사람 몫을 매일 엎어 두는 거, 그거 산 사람이 매일 한 번씩 죽는 거다. 나도 해 봤어. 해 봐서 알아."송란영이 수저를 들지 못했다. 유씨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란이 제 밥을 한 술 떠서 어머니 그릇에 얹었다."어머니, 이거 먹어. 내 거."*우물가에서 은매가 물을 긷고 있었다.왕부에서 심가로 심부름을 온 참이었다. 방어멈이 혼자 약방은 안 보내도, 심가는 보냈다. 심가는 친정이었으니까.두레박을 올리다가, 은매의 손이 멎었다.물에서 냄새가 났다.옅었다. 아주 옅어서, 물 긷는 사람 대부분
"…살아 있습니다. 그 아이."강무진이 말했다."어디에요.""연조 곁에 있습니다."월령이 그 이름을 잠깐 더듬었다. 연조. 왕부의 여자 암위. 낡은 치마를 입고 심가 담장 밖으로 나갔던, 딱 한 번 본 얼굴."언제부터요? 연조 곁에는.""서원당 뒤 빈 방에서 나온 날부터입니다. 정무가 데려갔습니다. 그 방은 사흘 넘게는 못 쓴다고 해서… 그래서 연조한테로.""그걸 왜 저한테는. 왜."강무진이 답하지 못했다. 답하지 못하는 얼굴로, 위지헌을 보았다.*월령도 위지헌을 보았다."…부군.""내가 시켰다.""왜 말 안 하셨어요? 저한테.""…네가 안 물었잖으냐."월령은 그 말에 잠깐 숨을 멈췄다. 맞는 말이었다. 묻지 않았다.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을까 묻고, 쉽지 않다는 답을 듣고, 그러고는 제 생 전부가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동안 그 이름을 놓았다.놓은 것은 저였다. 그런데 그 아이를 주운 것은 그였다. 말도 없이."문 열기 전에 말하마, 하셨잖아요.""그건 그 뒤 약조지. 이건 그 전 일이고.""그럼 그 전 일도요. 이제 말해 주세요, 하나씩."위지헌이 잠자코 그녀를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까딱였다."…하나씩.""오늘은 초비요. 초비부터.""오늘은 초비다."강무진이 그 사이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아주 낮게 덧붙였다."제가 마마님께 안 아뢴 건, 왕야 명이기도 했습니다만… 그 아이가 아뢰지 말라 했습니다. 마마님이 저를 보시면 또 살릴 수 있을까, 그리 물으실 거라고. 그 물음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고. 그래서."월령의 손끝이 접혔다. 접힌 채로, 풀리지 않았다.*초비는 왕부 뒤채 담 너머에 있었다.담 하나 사이였다. 세 해 동안. 월령이 그 담 앞에 섰을 때, 연조가 먼저 나왔다. 낡은 치마가 아니라 검은 옷이었다."왕비마마.""연조.""초비는 안에 있습니다. 뵙기 전에 하나만."연조가 낮게 말했다."그 아이, 이제 겁이 없습니다. 없어서 무섭고요.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마십시오."*초비는
"값이 없으면… 손으로 지우오. 손으로."독고진겸이 사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돈이 마르면 명부는 값싼 이름부터 잡는 게요. 지우는 데 돈 안 드는 이름. 상단 사람 안 붙이고, 호위도 안 붙이고, 그저 사람 하나 밤에 담 넘으면 되는, 그런 이름.""어떤 이름이요? 그게.""낮은 사람이지. 없어져도 아무도 안 찾는."월령이 사본을 다시 보았다. 붉은 표가 바랜 이름들 사이에, 아직 살아 있는 이름이 넷 있었다. 셋은 알았다. 은매. 서윤. 아란.넷째는, 오래 못 본 이름이었다.*"초비."월령이 그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이 방에 셋이었다. 월령, 청아, 그리고 강무진."살릴 수 있을까요… 하고, 제가 물었던 아이예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재 묻은 얼굴로 담을 넘어왔고요. 손등에 물집이 있었고. 서원당 뒤 빈 방에 뒀는데, 그 뒤로는 제가… 못 봤어요."청아가 소반을 든 채 굳어 있었다. 강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청아.""예, 마마님.""너는 기억하니. 그 아이.""기억해요, 기억하죠. 제가 입을 틀어막았는걸요, 손으로. 담 넘어오는 거 보고 소리 지를까 봐."청아가 소반을 놓았다. 놓는 손이 조금 서툴렀다."근데 그 뒤로는 저도 못 봤어요. 서원당 뒤에 먹을 걸 두 번 갖다줬는데, 세 번째 가니까 방이 비어 있는 거예요. 마마님한테 여쭐까 하다가… 그때 마마님이 너무 바쁘셔서, 그만.""그랬구나.""죄송해요, 마마님.""네가 왜. 네가 뭘."월령이 말했다. 그러고는 사본 위의 그 이름을 손끝으로 짚었다. 짚은 채로, 오래 두었다.*설련이 문가에서 그 이름을 보았다."마마님. 그 아이… 자녕궁에서 온 아이예요?""아니. 묵아가 보냈어. 자녕궁이 태운 데서."설련이 잠깐 말이 없었다."그럼 저랑 같네요. 자녕궁이 지우려다가… 못 지운 거."설련은 그 말을 하고 물러났다. 청아가 그 등을 보다가, 설련이 문가에 벗어 둔 겉옷을 먼저 챙겨 들고 따라
"제… 제 것을 봅니다, 어머니."위명서가 답했다. 돌아보지 않은 채."제 문양이 달렸으니 제 것이지요. 그리 말씀하신 것은, 어머니셨습니다."숙비가 창고 안으로 한 걸음 들었다. 느린 걸음이었다. 그 느림이, 오늘은 병 때문인지 셈 때문인지 위명서는 알 수 없었다."그 종이를 내려놓거라, 명서야.""내려놓으면… 안 본 것이 됩니까.""안 본 것이 된다. 이 어미가 그리 만들어 주마."위명서가 그제야 돌아섰다. 어머니를 보았다. 야윈 얼굴. 핏기 없는 입술. 그런데 눈이 야위지 않았다. 그 눈이 아들을 읽고 있었다. 물건을 읽는 눈으로."어머니는 저도 읽으시는군요. 물건처럼."*숙비가 손을 내밀었다.종이를 달라는 손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 손에 무엇이든 놓았다. 붓도, 매화 가지도, 처음 쓴 글씨도. 놓으면 어머니가 웃었다.위명서는 놓지 않았다.대신 셋째 궤를 닫았다. 첫 궤와 둘째 궤도. 그러고는 그 세 궤를 제 발치로 끌어당겼다."이것은 제 것이니, 제가 처분하겠습니다.""어디로 말이냐.""아바마마께 올립니다."숙비의 손이, 멎었다. 아주 잠깐. 그러고는 도로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네가 어미를 고하겠다는 말이냐. 이 어미를.""고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위명서가 낮게 말했다."제 창고에서 나온 제 것을 제가 아바마마께 올릴 뿐입니다. 어머니 이름은 어디에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아무것도 안 하신 것입니다. 늘 그러셨듯이."*숙비는 오래 말이 없었다.그러다, 웃었다. 옅게. 오래 안 웃던 얼굴의 웃음이었다."너도 셈을 할 줄 아는구나, 명서야.""어머니께서 가르치셨습니다."숙비가 돌아섰다. 낮은 발소리가 창고를 나갔다. 회랑 끝까지. 그러고는 들리지 않았다.위명서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종이를 쥔 손이 아직 떨렸다. 떨리는 채로, 그는 그 종이를 접었다. 접어서 품에 넣었다. 궤와 함께 올릴 것이 아니었다. 이것만은.*편전에, 궤 셋이 놓였다.경화제는 옥필을 굴리지 않았다. 아들
창고 안은 향이 없었다.위명서는 그것부터 알았다. 어머니의 처소는 늘 무향이었다. 정갈하게, 아무 냄새도 없이. 이 창고가 그랬다. 제 살림살이를 둔 곳이라면 먼지 냄새라도 나야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등잔을 들어 올렸다.궤가 있었다. 셋. 살림살이 궤가 아니었다. 자물쇠가 달린 옻칠 궤. 그 자물쇠에도 매화가 찍혀 있었다.*첫 궤는 돌로 열었다.금이었다. 옥이었다. 값이 안 변하는 것들. 위명서는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 만질 까닭이 없었다.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만지기 전에 알았다.둘째 궤에는 종이가 있었다.물표 묶음. 삼황자부 도장이 찍힌 것들. 제가 찍은 적 없는 제 도장. 그 도장을 누가 쥐고 있는지, 이제 물을 필요가 없었다.그 밑에, 명단이 하나 있었다.호위. 내관. 침소 나인. 삼황자부 사람 열둘의 이름. 이름 옆에 작은 표. 자녕궁에서 보낸 사람이라는 표. 열두 살 때부터 문 앞에 서 있던 그 얼굴이, 첫 줄에 있었다.주란의 이름은, 없었다.위명서는 그 명단을 두 번 읽었다. 있어야 할 이름이 없어서. 침소 나인은 셋이 올라 있었다. 주란만 없었다. 어머니가 심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면, 심었으나 셈에서 뺐다는 뜻이거나.어느 쪽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창고에서 처음으로 그를 조금 살렸다.*셋째 궤는 작았다.위명서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열지 않으면, 아직 아무것도 안 본 사람으로 남았다. 어머니가 보지 말라 한 것을 안 본 아들로.돌을 들었다.놋쇠가 울렸다. 한 번. 두 번.*종이 한 장이었다.붉은 실로 묶은, 낡은 종이. 사본이었다. 원본은 다른 데 있고, 이건 어머니가 아들 처소에 감춰 둔 것. 사람 이름이 세로로 적혀 있었다. 이름 옆에 값. 값 옆에 붉은 표.위명서는 그 이름들을 읽었다.모르는 이름이 많았다. 아는 이름이 몇 있었다. 향방 궁녀. 침방 것. 고향에서 편지가 안 온다던 이름들.그리고 아랫줄.섭정왕가의 여아.
허도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른 때에 왔다.아침 안개가 아직 대문 밖 버드나무 잎에 걸려 있을 때였다. 심가의 하인들은 물을 뿌린 마당을 쓸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찹쌀을 씻는 소리가 낮게 났다. 심 부인의 약을 달이는 냄새가 서원당 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집은 깨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하루의 얼굴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그 틈에 온 사람은 늘 급한 일을 품고 있다.허도겸은 정청이 아니라 서고 앞 작은 툇마루에서 월령을 보겠다고 했다. 둘째 숙부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으나, 호부 낭중의 말은 예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은호였다.은매가 처음 그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는 거의 소리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은호야. 그 두 글자가 입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은매는 다시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동생이 깰까 봐 참는 울음이었다.은호는 작았다.일곱 살이라 들었지만, 마른 몸은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손목에는 회색 실이 묶여 있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기침을 참을 때마다 혀끝으로 이를 쳤다. 딱, 딱. 작은 소리는 방 안 사람들의 숨을 매번 붙잡았다.왕부 의원은 은호의 맥을 짚고 오래 말이 없었다.청아는
회색 실은 따뜻한 물 위에 놓이자 조금씩 풀어졌다.청아는 작은 사기 대접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물이 식지 않도록 대접 아래에 천을 두 겹 깔았고, 옆에는 깨끗한 마른 수건을 세 장이나 준비해 두었다. 평소 같으면 필요보다 많은 준비라며 스스로 민망해했을 아이가,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매는 그 앞에서 숨만 쉬었다.실은 동생의 손목에 있던 것과 같았다. 어미가 낡은 속곳 자락을 꼬아 만들었다던 빛.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 약하게 한 번, 세게 한 번 묶는 버릇까지 같았다.하지만 손은 없었다.그 사실이 방 안
북문으로 가는 역참길은 대연의 목처럼 길고 단단했다.경성에서 북쪽 변경까지 이어지는 길은 처음에는 넓고 평평했다. 황실의 마차와 호부의 군량 수레가 오가야 했으므로, 돌은 깊게 박혔고 길가에는 관목이 낮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올라가면 길은 곧 좁아졌다. 산기슭이 다가오고, 바람은 말의 갈기 사이로 칼끝처럼 스며들었다.그 길을 아는 사람들은 북문로라 불렀고, 장부를 쓰는 사람들은 병량 제삼로라 적었다.같은 길이었다.누구에게는 남편과 아들을 삼키는 길이었고, 누구에게는 창고의 숫자가 줄어드는 줄이었다.은매의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