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
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
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
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 비가 그친 뒤에는 이상할 만큼 오래 눈에 걸렸다.
서쪽 편문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빗장 끝에 묶인 흰 실 하나.
밤새 젖었으나 끊어지지 않은 실은, 새벽빛을 받자 오히려 더 희게 떠올랐다. 회화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 곁의 흙을 작은 구멍처럼 팠고, 문밖 물웅덩이에는 누군가 멈춰 섰다가 돌아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기윤은 담장 그림자 안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밤새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일은 쉬워 보였으나, 때로는 칼을 뽑는 것보다 어려웠다. 뛰어들어 손목을 꺾는 일보다, 눈앞의 흔적을 그대로 두는 일이 더 오래 숨을 눌렀다. 특히 저 흰 실이 장군가 어린 아가씨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순간부터는 더 그랬다.
기윤은 한때 북쪽 역참 마을에서 살았다.
겨울마다 바람이 먼저 사람의 뺨을 베고 지나가던 곳이었다. 말방울 소리가 길을 알려 주고, 등불 하나가 살아 있는 집과 빈집을 갈라놓던 곳. 그곳에서 그는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기다림 끝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문이 열리지 않아도 불이 꺼질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았다.
그래서 그는 문 앞에 묶인 실을 오래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아직 아이를 죄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다만 실은 문밖을 향해 있었다.
알려 주려 했다는 흔적만으로도 사람은 이미 위험에 닿는다.
담장 밖 회화나무 아래로 이른 새벽 장정 하나가 지나갔다.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내였다. 비가 그친 뒤 물길을 보러 나온 하인처럼 보이기에는 발끝이 너무 조심스러웠고, 도둑이라 하기에는 허리의 매듭이 지나치게 단정했다.
그는 편문 앞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흰 실과 닫힌 빗장을 차례로 확인한 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채 물웅덩이 가장자리를 돌아 사라졌다.
기윤은 그 뒤를 바로 쫓지 않았다. 대신 담장 위에 앉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끝으로 아주 작은 돌멩이를 굴렸다.
돌멩이는 서쪽 담 밖 풀숲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멀리서 풀잎이 한 번 흔들렸다.
왕부의 다른 눈이 그 사내에게 붙었다는 뜻이었다.
기윤은 그제야 편문으로 다가갔다. 흰 실은 그대로 두었다. 다만 빗장 아래 진흙에 남은 얇은 발자국을 손바닥만 한 기름종이에 옮겼다. 발끝이 깊고 뒤꿈치가 얕았다. 성급한 사람이 천천히 걷는 척할 때 남는 자국이었다.
그는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다시 담장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새벽은 그 뒤에야 완전히 열렸다.
심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를 시작했다.
부엌의 하인들은 밤새 젖은 장작을 솥 밑에서 말렸고, 마구간 아이들은 말굽에 낀 진흙을 파냈다. 약방의 어린 종은 창포 묶음을 다시 햇빛 드는 쪽으로 옮기며 코끝을 훌쩍였고, 늙은 문지기는 서쪽 길은 오늘도 질다며 혀를 찼다.
"그쪽 길은 내일까지 닫아 두어야겠습니다. 회화나무 뿌리 쪽 흙이 아주 물러졌어요."
그 말은 서원당 처마 아래까지 흘러들었다.
월령은 막 어머니의 약그릇을 받아 들고 있었다.
약은 전보다 조금 묽었다. 계피를 줄이고 맥문동을 더 넣었기 때문인지, 김에는 매운 기운보다 부드러운 풀내가 먼저 섞여 올라왔다. 어머니는 밤새 기침을 두 번만 했고,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가 월령의 마음을 얇게 받쳐 주었다.
"서쪽 길이 많이 질다 하네요."
청아가 약상 곁에서 말했다.
"어제 비가 그렇게 왔으니까."
월령은 숟가락으로 약을 한 번 저었다.
"문지기에게 말해. 편문 빗장은 그대로 두고, 길만 짚으로 덮어 달라고."
청아가 눈을 깜빡였다.
"문은 닫아 두는데 길은 덮어요?"
"누군가 미끄러지면 다치잖아."
월령의 목소리는 나긋했다.
"하인들도 오가고, 약방 아이들도 뒷길을 쓰니까."
청아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그 아이는 묻는 대신 기억했다. 어제보다 덜 겁먹고, 조금 더 빠르게. 그런 모습이 고마워서 월령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청아."
"예, 아가씨."
"서윤이 방에 따뜻한 물을 보내 줘. 밤새 손이 시렸을지도 몰라."
청아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서윤 아가씨께서 밤에 나가셨어요?"
그 말은 너무 곧아서, 방 안 공기가 잠시 멈췄다.
침상에 기대 있던 어머니가 월령을 보았다.
월령은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비가 오면 잠 못 이루는 사람은 손끝부터 차가워져.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청아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소인이 말이 앞섰습니다."
"괜찮아."
월령은 약을 어머니 입가에 가져갔다.
"앞선 말도 잘 접어 두면 쓸모가 있을 때가 있어."
청아는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곧장 물러났다. 발소리가 회랑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어머니가 낮게 물었다.
"서윤이 일이니?"
월령의 손이 아주 작게 멈췄다.
어머니는 병든 사람의 얼굴로도 많은 것을 보았다. 고운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비쳤고, 입술에는 아직 피곤한 빛이 남아 있었지만, 눈만은 흐려지지 않았다.
"아직 일이라 부르기에는 작습니다."
월령은 조심스레 답했다.
"작은 것이 자라기 전에 곁을 보려 합니다."
어머니는 오래 월령을 보았다.
"네가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구나."
그 말에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밤을 건너온 것뿐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붉은 담 아래 젖어 있던 피비린내와 마지막까지 목을 조르던 비의 감각을, 어머니의 아직 따뜻한 손 앞에 꺼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월령은 고개만 숙였다.
"저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요."
말은 사실이었다.
위지헌이 왜 자신에게 그토록 가까이 다가오는지, 삼전하의 손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태후가 서윤을 어느 판 위에 올려 두려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서윤을 살리려는 자신의 손이 정말로 그 아이를 붙잡는 손인지, 아니면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 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모르는 것들은 손에 쥔 젖은 실처럼 자꾸만 서로 엉켰다.
어머니는 약을 삼킨 뒤 월령의 손목을 가만히 잡았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지 않으면, 아직 늦지 않는다."
그 말은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월령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서윤의 방에는 아침빛이 늦게 들었다.
서쪽 담장과 가까운 탓에 처마 그림자가 길었고, 비가 온 다음날에는 눅은 냄새가 오래 남았다. 금지는 창호를 반쯤 열어 두고 있었으나, 방 안에는 아직 젖은 비단 냄새와 먹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서윤은 세숫대야 앞에 앉아 있었다.
손은 씻었지만 손가락 끝은 붉었다. 밤새 흰 실을 감았던 자리였다. 실은 이제 손에 없었으나, 눌린 자국은 남았다. 아주 가늘고 희미해서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이었다. 그러나 서윤은 그 자국만 보았다.
"아가씨, 서원당에서 따뜻한 물을 보내셨습니다."
금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가?"
서윤의 목소리는 맑았다.
너무 맑아서 오히려 건조했다.
"청아가 가져왔습니다."
금지는 대야를 내려놓으며 눈을 피했다. 남쪽 연못의 밤 이후, 금지는 서윤 앞에서도 완전히 편하지 못했다. 예전처럼 가까운 시녀인 척 웃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모른 척 물러나기에는 아직 목숨줄이 이 집 안에 있었다.
서윤은 물 위로 손을 담갔다.
따뜻했다.
손끝의 붉은 자국이 물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청아가 뭐라고 했니?"
"비가 그친 뒤에는 손끝이 시리니 담그시라 했습니다."
"청아가 그런 말을?"
"아마 큰아가씨께서 일러 주신 듯합니다."
서윤은 손을 물속에서 빼지 않았다.
언니는 알까.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걸까.
알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다정한 걸까.
어느 쪽이든 서윤은 숨이 막혔다. 들켰다면 무서웠고, 들키지 않았다면 더 서러웠다. 제 마음은 밤새 젖은 흙처럼 질고 어두운데, 언니는 여전히 따뜻한 물을 보냈다. 그 다정함은 때로 꾸짖음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금지가 낮게 말했다.
"아가씨."
"왜."
"어젯밤 일은..."
서윤의 시선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금지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방 안에 어젯밤이라는 말이 놓였고, 그 말은 젖은 옷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서윤은 손수건을 집어 손끝을 닦았다.
"너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어른의 말투였다.
그러나 목소리 끝은 조금 떨렸다.
금지는 그 떨림을 듣고도 고개를 숙였다.
"예, 아가씨."
서윤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은 믿기 어려웠고, 묻는 사람은 더 두려웠다. 그녀는 손수건을 너무 세게 쥐었다가, 곧 풀었다.
"어머니께서는 일어나셨니?"
"예. 둘째 부인께서는 아침부터 둘째 나리 처소로 드셨습니다. 호부 공문 일로..."
금지는 말끝을 흐렸다.
서윤은 고개를 돌려 화장대를 보았다.
어젯밤 접었던 종이는 없었다. 흰 실도 없었다. 그런데도 방 안 어딘가에 그 세 줄이 남아 있는 듯했다.
반듯한 매듭을 보았다.
기다리는 손은 오래 버려두지 않는다.
서쪽 편문, 비 그친 뒤.
서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금지야."
"예."
"사람이 실을 묶어 두고 다시 풀지 않으면, 그건 약속일까?"
금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린 시녀가 알기에는 너무 위험한 질문이었다.
서윤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됐어. 머리를 묶어 줘."
금지는 급히 빗을 들었다. 빗살이 머리카락을 지날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서윤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눈 밑에 밤의 그늘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분을 조금 더 얇게 발랐다. 너무 희면 아파 보이고, 너무 붉으면 들떠 보인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얼굴은 늘 그 사이에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은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옷깃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필요할 때 곁에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손을 가져야 했다.
서윤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거울 속 아이는 그 모든 조건을 외운 사람처럼 어른의 얼굴을 흉내 냈다.
서쪽 편문은 오전 내내 닫혀 있었다.
그러나 닫힌 문도 사람을 불러 모았다.
늙은 문지기는 월령의 말대로 길 위에 짚을 깔았고, 약방의 어린 종은 물러진 흙을 피해 창포 묶음을 들고 지나갔다. 부엌 하인 하나는 장독대에서 가져온 소금을 작은 단지에 담아 가다가 발을 헛디뎌 욕을 삼켰고, 청아는 그 곁에서 "욕을 삼키면 배가 아픕니다"라고 너무 진지하게 말해 하인들을 웃게 했다.
그 웃음은 낮고 짧았지만, 심가의 아침을 조금 사람답게 만들었다.
월령은 회랑 끝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흰 실은 아직 빗장 끝에 묶여 있었다.
누구나 볼 수 있을 만큼 드러나 있지 않았고, 누구나 지나칠 만큼 숨겨져 있지도 않았다. 묶은 사람의 마음처럼 어중간한 자리였다.
청아가 다가와 아주 낮게 물었다.
"아가씨, 저 실은 떼어 낼까요?"
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럼 그대로 두어요?"
"응."
월령은 실을 보았다.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할 실도 있어."
청아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서윤 아가씨께서 묶으신 겁니까?"
너무 곧은 말.
이번에는 월령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청아는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놀란 숨이 새어 나왔다.
"소인이 또..."
"괜찮아."
월령은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오늘은 눈으로 본 것도 입에 바로 올리지 마. 말이 먼저 가면 사람 마음이 뒤따라가지 못해."
청아는 고개를 세 번이나 끄덕였다.
"예. 말은 천천히, 발은 빠르게 하겠습니다."
월령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웃었다.
"그건 누가 가르쳐 줬니?"
"정 호위장께서요. 발이 느리면 맞고, 말이 빠르면 또 맞는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워낙 엄숙해서 월령은 웃음을 삼키느라 잠시 눈을 내렸다.
정무다운 말이었다.
심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말보다 먼저 문을 닫고, 웃음보다 먼저 짐을 들고, 겁을 먹어도 열쇠를 끝까지 품는 사람들. 큰일은 늘 높은 자리의 명으로만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집을 살리는 것은 그런 작은 손들이었다.
월령은 그 손들을 지켜야 했다. 서윤의 손도 아직은 그 안에 있었다.
정오 무렵, 동쪽 대문으로 포목점 심부름꾼이 들어왔다.
비가 그친 뒤라 시장은 조금 늦게 열렸고, 남운로에서 들어온 비단 꾸러미도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했다. 심부름꾼은 젖은 신발을 문밖에서 털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둘째 부인께서 지난번 고르신 청색 능라입니다. 비가 와서 조금 늦었습니다."
꾸러미는 한씨의 처소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 뒤를 따라 작은 죽통 하나가 굴러 들어왔다.
아무도 처음에는 보지 못했다. 심부름꾼의 짐에서 떨어진 장식인 줄 알았고, 행랑채 아이는 그것을 발끝으로 밀어 치우려 했다. 청아가 먼저 멈췄다.
"그거 만지지 마."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행랑채 아이가 놀라 발을 거두었다.
청아는 얼른 죽통을 천으로 감싸 들고 월령에게 달려왔다. 달려오면서도 두 손으로 꼭 감싸 쥔 모양이 어찌나 야무진지, 평소라면 쏟았을 숨소리마저 반듯하게 접어 둔 듯했다.
"아가씨."
월령은 죽통을 보자 바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어디서 났니."
"포목 꾸러미 뒤에서 굴러 나왔습니다. 소인이 만지지는 않았고요. 천으로만 감쌌습니다."
"잘했어."
청아의 눈이 순간 밝아졌다.
칭찬은 청아에게 늘 사탕보다 먼저 겁을 주었지만, 그래도 기쁜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월령은 천째로 죽통을 받아 들었다.
가볍다.
안쪽에는 종이가 아니라 아주 얇은 대나무 조각이 들어 있었다. 글은 없었다. 대신 대나무 겉면에 바늘끝으로 긁은 듯한 작은 선이 세 개 있었다.
북.
동.
남.
월령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어제 등초본의 순서였다.
숫자도, 창고명도 없었다. 다만 길의 방향만 있었다. 그런데도 충분했다. 누군가 대청 안에서 만든 그 작은 순서를 이미 문밖으로 가져가려 했다.
월령은 죽통을 다시 천으로 감쌌다.
"청아."
"예."
"이걸 본 사람은?"
"행랑채 아이 하나요. 하지만 글자는 못 보았을 겁니다. 아니, 글자가 없어서..."
청아의 말끝이 흐려졌다.
글자가 없다는 것이 더 무서울 때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그 아이도 조금 알았다.
"그 아이에게는 포목점 장식이 떨어진 것이라 말해 줘. 그리고 포목 꾸러미는 바로 풀지 말고 서원당으로 가져오게 해."
"둘째 부인께서 찾으시면요?"
"내가 먼저 살펴본 뒤 보내겠다 해."
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서윤 아가씨께 말씀드릴까요?"
월령은 잠시 침묵했다.
죽통의 가벼운 무게가 손안에서 이상하게 무거웠다.
서윤이 밤에 묶은 실.
문밖의 발자국.
대나무에 새겨진 세 방향.
선은 너무 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급히 잡아당기면 끊어진다. 위지헌의 말이 떠올랐다.
살릴 돌은 몰아붙이지 않는다.
그가 아직 그런 말을 직접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월령은 이상하게 그의 목소리로 그 말을 들었다. 낮고, 차분하고,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 일부러 쉬운 비유를 고르는 목소리.
월령은 소매 안쪽을 눌렀다.
"아니."
그녀는 부드럽게 답했다.
"지금은 말하지 마."
"예."
"대신 서윤이에게 점심을 함께 먹자고 전해 줘. 어머니 방이 아니라 후원 정자에서."
청아가 눈을 깜빡였다.
"후원 정자는 아직 바닥이 조금 젖었는데요."
"그늘이 덜하고 바람이 들어. 그리고..."
월령은 서쪽 담 쪽을 보았다.
"서쪽 편문도 보이지."
청아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배워 가는 아이답게,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후원 정자는 비가 그친 뒤라 나무 냄새가 짙었다.
젖은 기둥에서 오래된 송진 냄새가 올라왔고, 바닥 사이사이에는 물기가 아직 가늘게 남아 있었다. 청아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마른 천으로 몇 번이나 닦았다. 그 옆에서 약방 종은 창포 주머니를 매달았고, 부엌 하녀들은 묽은 닭죽과 절인 매실, 데친 푸른 나물을 작은 상에 올렸다.
일이 깊어질수록 밥상은 오히려 사소해졌다. 닭죽 위로 떠오른 김, 매실의 새큼한 냄새, 젖은 나무 바닥을 닦는 청아의 손끝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사소한 것으로 버텼다.
아득한 비의 끝에서 마지막까지 떠오른 것도 화려한 연회가 아니었다. 어린 아란이 밥알을 흘리고 웃던 얼굴, 어머니가 식은 탕약을 손등으로 가늠하던 손, 심가 부엌의 밥 짓는 냄새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큰 이름으로 무너져도, 작은 냄새로 오래 남았다.
서윤은 조금 늦게 왔다.
하늘빛 치마 대신 연한 회색 치마를 입었다. 치맛자락 아래쪽에는 아주 작게 마른 흙이 남아 있었다. 잘 털어 냈으나, 비 온 뒤의 진흙은 한 번 닿으면 섬유 안쪽에 얇게 숨어 있었다.
월령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보지 않은 사람처럼 웃었다.
"왔구나."
"언니께서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서윤은 공손하게 앉았다.
등이 곧았다. 너무 곧아서 어깨가 아파 보일 만큼이었다.
"아침은 먹었니?"
"조금요."
"조금이면 배고프겠다."
월령은 닭죽 그릇을 서윤 쪽으로 밀었다.
"비 온 뒤에는 속이 차가워져. 따뜻할 때 먹어."
서윤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언니께서는 늘 제 몸을 먼저 걱정하시네요."
말은 얌전했다.
그러나 안쪽에는 아주 작은 가시가 있었다.
월령은 그 가시를 빼내려 하지 않았다.
"네 몸이 네 마음보다 먼저 아플 때가 있거든."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 마음이 아프다고 누가 그랬나요?"
"아프지 않으면 다행이고."
월령은 매실 하나를 작은 접시에 덜었다.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은 너무 곧았다.
서윤은 숨을 고르지 못했다.
싸우려던 사람이 품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들면, 사람은 어디를 밀어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서윤은 그릇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만졌다. 손가락 끝에 남은 실 자국을 숨기려는 듯했다.
월령은 그 손을 보았다.
"손이 붉네."
서윤이 얼른 손을 거두었다.
"밤에 잠을 설쳐서요."
"실을 너무 세게 잡아도 손이 붉어져."
정자 안의 공기가 얇게 멎었다.
청아는 멀찍이 서 있다가 숨을 삼켰다. 삼킨 숨이 너무 커서, 곧장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서윤의 얼굴이 하얘졌다.
"언니."
"응."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투는 또 어른스러웠다.
너무 공손하고,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아이의 겁이 더 드러났다.
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모르면 됐어."
"언니께서는..."
서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늘 그렇게 말씀하세요. 제가 모르는 것처럼. 제가 아직 어린 것처럼."
월령의 가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아.
그곳이구나.
위지헌이 말했던 기다림과 칭찬 사이에, 또 하나가 있었다.
어리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어머니에게도, 궁에도, 언니에게도.
월령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쇠가 작은 접시에 닿는 소리가 낮게 났다.
"서윤아."
그녀의 목소리는 더 부드러워졌다.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서윤의 눈이 조금 젖었다.
"그럼요."
"네가 너무 빨리 알게 될까 봐 그래."
바람이 정자 안으로 지나갔다.
젖은 창포 향이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월령은 서두르지 않았다.
"알아 버린 뒤에는 모르는 때로 돌아가기 어렵더라. 어떤 말은 듣고 나면 귀에서 빠지지 않고, 어떤 손짓은 보고 나면 눈꺼풀 안쪽에 남아. 그러니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정말 네 것인지, 누군가 네 손에 쥐여 주고 싶은 것인지 한 번만 더 보라는 말이야."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니는 제가 또 남의 말에 흔들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사람은 누구나 흔들려."
월령은 웃지 않았다.
"나도 흔들려."
그 말에 서윤의 눈동자가 아주 크게 흔들렸다.
언니도.
그 짧은 말이 아이에게 닿는 것이 보였다. 월령은 일부러 더 많은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흔들렸고, 어떤 손을 붙잡았다가 어디까지 끌려갔는지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손끝으로 매실 접시를 조금 밀었다.
"오늘은 밥부터 먹자."
서윤은 한참 뒤에야 숟가락을 들었다.
닭죽은 많이 식지 않았다.
첫 숟가락을 삼키는 동안, 서윤의 목울대가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너무 어려서 월령은 잠시 시선을 돌렸다. 정자 밖에서는 청아가 약방 종에게 조용히 손짓하며 젖은 발자국을 닦게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입으로는 늘 앞서도 손은 누구보다 빠르게 사람을 살폈다.
평온한 점심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자 아래 돌계단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행랑채 아이 하나가 포목 꾸러미를 들고 오다 미끄러질 뻔했고, 그 틈에 비단 한 자락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청색 능라였다. 물빛이 도는 고운 비단은 젖은 돌 위에 닿자 금세 어두워졌다.
서윤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조심해."
월령의 말보다 빠르게 서윤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 아이였다.
비단이 더럽혀지면 어머니가 속상해할 것을 먼저 떠올리고, 하인이 혼날 것을 알아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 아이.
월령은 그 모습을 보며 숨을 삼켰다.
서윤은 비단을 집어 들다 멈췄다.
비단 사이에서 작은 종이 조각이 떨어졌다.
아주 얇았다.
비에 젖지 않게 밀랍을 살짝 먹인 종이였다. 겉에는 글자가 없었다. 그러나 접힌 모서리에 흰 실 한 올이 끼워져 있었다.
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청아가 달려오려 하자 월령이 손짓으로 멈췄다.
"서윤아."
월령은 정자 위에서 조용히 불렀다.
"그 비단은 숙모께 올릴 것이니, 젖은 데를 먼저 보아야겠다. 종이는 내가 보마."
서윤은 종이를 집은 채 굳어 있었다.
"언니..."
"손이 젖었잖아."
월령의 말은 부드러웠다.
"종이는 물을 먹으면 바로 운다."
그 말에 서윤의 눈이 흔들렸다.
월령은 혼내지도, 묻지도 않았다. 다만 젖은 종이를 핑계 삼아 아이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 다정한 수가, 서윤에게는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윤은 천천히 종이를 내밀었다.
월령은 그것을 받았다.
종이는 가벼웠다.
그러나 손바닥 위에 놓이자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월령은 바로 펼치지 않았다. 서윤이 보는 앞에서 열면 그 아이의 얼굴이 먼저 증거가 된다. 그러면 돌이킬 수 없다.
"청아."
"예."
"비단을 마른 천에 펴. 서윤이 손에는 따뜻한 물을 다시 가져다주고."
"예, 아가씨."
청아는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서윤은 월령을 보았다.
그 눈 안에는 공포와 서운함, 안도와 수치가 한꺼번에 있었다. 아직 그 감정들에 이름을 붙일 줄 몰라, 아이는 그저 숨만 얕게 쉬었다.
월령은 종이를 소매 안에 넣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먹자."
"언니께서는..."
서윤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제게 물어보지 않으시나요?"
월령은 잠시 그 아이를 보았다.
"네가 말하고 싶을 때 물을게."
서윤의 입술이 떨렸다.
"제가 끝까지 말하지 않으면요."
"그러면 기다릴게."
그 말은 쉽게 나왔다.
그러나 월령의 안쪽에서는 피가 조금 마르는 것 같았다. 기다리는 사이에 무엇이 더 나빠질지 알고 있었다. 기다림이 늘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기다리는 사이 누군가 죽고, 종이가 바뀌고, 죄가 완성된다.
그런데도 지금은 기다려야 했다.
서윤을 죄의 이름으로 불러 버리기 전에.
서윤이 아직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월령은 그 길을 남겨 두어야 했다.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정자를 내려갔다. 금지가 급히 따라붙었고, 청아는 따뜻한 물그릇을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월령의 눈짓을 보고 서윤 뒤를 따랐다.
정자에 혼자 남은 뒤에야 월령은 소매 안의 종이를 펼쳤다.
글자는 없었다.
이번에도 선뿐이었다.
그러나 대나무 조각의 세 방향과 달리, 이번 종이에는 작은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남쪽 끝에 찍힌 동그라미.
남운로 경안 입고분.
월령은 숨을 멈췄다.
어제 등초본의 순서를 누군가 이미 맞춰 보았다. 북, 동, 남. 그 끝에 남운로를 찍었다. 심가가 바꾼 순서를 가져갔을 뿐 아니라, 그 순서가 함정인지 아닌지도 재고 있었다.
상대는 서윤을 그저 글씨 쓰는 손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어디까지 가져올 수 있는지, 얼마나 빨리 흔들리는지, 작은 매듭 하나로 어느 문 앞까지 걸어 나오는지 시험하고 있었다.
월령은 종이를 접었다.
살구꽃은 이미 졌지만, 후원 끝 살구나무에서는 아직 연한 열매 냄새가 났다. 봄의 단 향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떫고 푸른 냄새. 월령은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서윤아.
너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어.
그 말만은 마음속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그날 저녁, 측백나무 아래에는 비 냄새 대신 젖은 흙이 마르는 냄새가 있었다.
달은 구름 뒤에 숨어 있었고, 후원 끝 등불은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 걸려 있었다. 월령은 정자에서 받은 종이와 대나무 조각을 얇은 비단 주머니에 넣어 품었다. 청아에게는 서원당에 남아 어머니 곁을 지키라 했다.
청아는 처음에는 입술을 달싹였다.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어머니 곁을 지키겠습니다."
월령은 그 아이의 머리 위를 한 번 바라보았다.
"고마워."
청아는 그 한마디에 귀 끝이 붉어졌다.
측백나무 아래에는 위지헌이 서 있었다.
오늘은 우산이 없었다.
검은 장포는 밤빛과 거의 같은 색이라,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무 그림자와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공기가 달라졌다. 비 뒤의 흙내와 측백의 서늘한 향 사이로, 낮고 마른 감송향이 천천히 번졌다.
월령은 그 향을 알아차린 순간 숨을 아주 작게 들이켰다.
알아차리지 않은 척하고 싶었다.
그런데 몸은 늘 마음보다 먼저 반응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위지헌이 먼저 말했다.
월령은 걸음을 멈췄다.
"아셨습니까."
"기윤이 보았다."
위지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서윤은 문을 열지 않았다. 흰 실만 묶었다. 문밖에서 그것을 본 자가 있었고, 뒤를 붙였다."
월령은 품 안의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그 뒤에 이것들이 왔습니다."
위지헌은 바로 받지 않았다.
그는 먼저 월령의 손을 보았다.
"네 손에 닿았나."
"천으로 감쌌습니다."
"잘했다."
짧은 칭찬이었다.
그런데도 월령의 손끝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위지헌은 비단 주머니를 받아 열었다. 대나무 조각과 얇은 종이를 차례로 보았다.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주변 공기가 낮아졌다.
"빠르군."
"누가 보낸 것입니까."
"아직은 모른다."
그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믿기 어려웠다.
월령은 자신이 그 말을 믿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위지헌은 대나무 조각을 달빛 쪽으로 기울였다.
"북, 동, 남. 네가 남긴 길을 읽었다."
"함정이라는 것도 알았을까요?"
"의심은 했겠지."
그는 종이의 동그라미를 보았다.
"그래서 남쪽 끝을 다시 눌렀다. 길의 끝이 맞는지 보려고."
월령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서윤이를 더 부를 겁니다."
"그래."
"제가 막아야 합니다."
"막을 수 있다."
위지헌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덧붙였다.
"다만 막는 모양을 잘 골라야 한다."
월령은 그를 보았다.
위지헌은 그녀가 알아들을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침묵했다. 달빛이 그의 눈 아래를 차갑게 지나갔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령에게 향한 침묵은 이상하게 기다림에 가까웠다.
그는 곧 낮게 말했다.
"바둑에서 잡고 싶은 돌이 있을 때, 처음부터 숨통을 모두 막지는 않는다."
월령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왜입니까."
"몰리면 달아난다. 달아날 길이 없어지면, 죽은 돌처럼 보이다가도 상대의 패가 된다."
위지헌은 검지로 허공에 작은 선을 그었다.
"살릴 돌은 한 칸을 비워 둔다. 그 돌이 어느 쪽으로 숨을 쉬려 하는지 보아야, 손이 늦지 않는다."
월령은 천천히 그 말을 삼켰다.
"서윤이에게 도망칠 길을 남기라는 뜻이군요."
위지헌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정말?"
그가 낮게 물었다.
"그렇게 빨리 알아듣고도, 자신은 모르는 것이 많다 생각하나."
월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말투는 꾸짖음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서 웃음을 아주 얇게 숨긴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래서 월령은 또 헷갈렸다.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 칭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수를 잘 읽는 사람을 평가하는 것인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왕야께서 쉽게 말씀해 주셨으니 알아들은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두가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위지헌의 대답은 낮았다.
월령은 더 대꾸하지 못했다.
감송향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는 어느새 월령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과는 결코 나누지 않을 거리였다. 월령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뒤에는 젖은 측백나무 줄기가 있었다.
위지헌은 그녀의 앞을 막지 않았다.
다만 바람이 그녀의 소매를 지나가지 못할 만큼 가까이 서 있었다.
"월령."
그가 이름을 불렀다.
낮고 조용했다.
월령은 그 두 글자에 목 안쪽이 이상하게 아팠다.
"예."
"서윤을 살리고 싶으면, 그 아이에게 네가 모두 알고 있다는 얼굴을 보이지 마라. 들킨 죄는 사람을 더 깊이 숨게 한다."
"하지만 모른 척만 하면..."
"모른 척하라는 말이 아니다."
위지헌은 곧바로 받았다.
그는 그녀를 불안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설명했다.
"그 아이가 돌아올 자리를 먼저 만들어라. 잘못을 고백하면 죽는 자리와, 고백해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자리는 다르다."
월령은 눈을 들었다.
"그런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네가 만들고 있지 않나."
"제가요?"
"따뜻한 물을 보냈고, 밥을 먹였고, 종이를 그 아이 앞에서 펼치지 않았다."
위지헌은 모두 알고 있었다.
월령은 가슴이 철렁했다.
"왕야께서는..."
"감시한 것이냐고 묻고 싶다면, 답은 그렇다."
그의 대답은 빠르고 담백했다.
월령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그랬다. 정치적 보호이고, 감시망이며, 심가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배치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차가워졌다. 차가워져야 했다. 그래야 숨이 쉬어졌다.
그런데 위지헌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불쾌해도 조금만 견뎌라."
그 말은 명령처럼 들렸으나, 곧바로 이어진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네 뒤를 보지 않으면, 너는 계속 혼자 돌아보게 된다. 그러다 앞을 놓친다."
월령은 숨을 멈췄다.
"나는 네 앞을 대신 보겠다는 말이 아니다. 네가 앞을 볼 수 있게, 뒤에서 오는 칼을 먼저 보겠다는 말이다."
말뜻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월령은 그 말을 정치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는 섭정왕이고, 심가는 북문군을 가진 장군가이며, 장부는 대연의 군량과 황권의 균형에 닿아 있다. 그녀가 앞을 보아야 심가가 산다. 심가가 살아야 북문군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뿐이다.
그것뿐이어야 했다.
"왕야께 폐가 많습니다."
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위지헌의 눈빛이 아주 잠깐 식었다.
그러나 그는 화내지 않았다.
"그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월령의 어깨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위지헌은 곧장 목소리를 낮췄다.
"겁주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내게 폐가 된 적은 없다. 그러니 그런 말로 자신을 낮추지 마라."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곧았다.
돌려 말하지도 않았고, 어렵지도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서늘한 위엄과는 너무 달라서, 월령은 오히려 차갑게 느끼려 애썼다. 저 정도로 분명히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렸다.
멀리서 윤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야."
강무진의 낮은 기척이 그 뒤를 막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윤백이 물러서지 않았다.
"기윤이 돌아왔습니다."
위지헌의 시선이 월령에게서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들라 해라."
기윤은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는 젖은 흙냄새를 조금 묻히고 있었다. 옷자락에는 풀씨가 하나 붙어 있었고, 손등에는 얕은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편문 밖을 본 자는 외궁의 손입니다."
기윤의 보고는 짧았다.
"사복을 입었으나 발목 끈이 궁 안 매듭입니다. 성급합니다. 천천히 걷는 척했지만 발끝이 깊었습니다."
월령은 조계를 떠올렸다.
남쪽 연못가의 얇고 눌린 목소리.
첫 음절이 걸리던 말버릇.
입을 막으라 하던 명령.
궁은 사람을 갈아 쓰는 곳이었다. 하나가 잡히면 다른 하나가 왔다. 다른 하나가 흔들리면 또 다른 손이 내려왔다. 그러니 궁의 손은 늘 많아 보이고, 한 사람의 목숨은 늘 가벼워졌다.
기윤은 품에서 작은 기름종이를 꺼냈다.
"발자국을 떴습니다."
위지헌이 받았다.
기윤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그리고 남쪽 별원 쪽도 움직였습니다."
월령의 숨이 멎었다.
남쪽 별원.
은매의 어미와 동생이 있는 곳.
위지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해라."
기윤은 고개를 낮췄다.
"약값을 대던 사람이 끊겼고, 어젯밤 작은 수레가 하나 나갔습니다. 사람을 태운 흔적은 있으나, 피는 없었습니다."
월령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살아 있다는 뜻입니까."
기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만으로도 월령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위지헌이 대신 말했다.
"죽였으면 숨기지 않는다. 옮긴 것이다."
그는 월령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 늦었다고 단정하지 마라."
월령은 입술을 눌렀다.
은매.
창고 안에서 젖은 눈으로 엎드리던 아이.
병든 어미와 어린 동생을 살리려 독을 들었던 손.
월령은 그 아이를 살려 두었다. 진실을 말하면 살 길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담장 밖의 식솔까지 잡아당기기에는 밤이 너무 깊었고, 적의 손은 너무 빨랐다.
죄책감은 차갑게 왔다.
날카롭기보다 둔했다.
천천히 사람 속을 눌러 부수는 것처럼.
"제가 더 빨리..."
"아니다."
위지헌의 말이 조용히 잘랐다.
월령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차갑게 보였다.
너무 차가워서, 순간 월령은 꾸짖음을 받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러나 곧 이어진 말은 달랐다.
"네 손이 짧아서가 아니다. 적이 먼저 그 집의 문턱을 잡고 있었을 뿐이다."
위지헌은 어려운 위로를 하지 않았다.
"은매를 탓하지도 마라. 그 아이가 독을 든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가족을 미끼로 삼은 자가 죄를 지은 것이다."
월령의 눈이 뜨거워졌다.
"은매에게는..."
"아직 말하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확실한가?"
월령이 아주 작게 물었다.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뒤에야, 그녀는 한 박자 늦게 숨을 삼켰다.
위지헌의 눈빛이 잠시 멈췄다.
아주 희미한, 거의 보이지 않는 빛이 그 안에 스쳤다. 그는 그것을 웃음으로 만들지 않았다. 다만 조금 더 가까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확실해질 때까지 내가 찾겠다."
월령은 숨을 삼켰다.
내가.
그 두 글자가 너무 조용해서 더 무거웠다. 왕부도, 섭정왕의 사람들도 아닌 그 자신이 찾겠다고 했다.
월령은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남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알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위지헌은 기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매의 가족 쪽은 무진에게 붙여라. 서쪽 편문은 네가 계속 본다."
"예."
"서윤은 건드리지 마라."
기윤의 눈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
위지헌은 짧게 답했다.
"그 아이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월령의 손이 소매 안에서 떨렸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마음속에서 붙들었던 말과.
위지헌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런데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두려웠다.
기윤은 곧 사라졌다. 윤백은 이번에도 어딘가에서 소리를 죽이고 있었고, 강무진은 밤의 가장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부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만 나타나고, 필요한 만큼만 사라졌다. 그 절제가 오히려 더 큰 그물처럼 느껴졌다.
월령은 비단 주머니를 다시 품었다.
"왕야."
"말해라."
"내일 서윤이에게 길을 하나 남기겠습니다."
위지헌의 눈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어떤 길이지."
"등초본의 흡지를 모두 모아 말리게 할 겁니다. 집안일이라는 명목으로요. 서윤이가 가져간 흡지가 있다면, 돌아올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위지헌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월령은 그 침묵을 꾸짖음으로 받아들일 뻔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달랐다.
낯설게 깊었다.
"너는..."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사람을 몰지 않고도 길을 막는구나."
월령은 그 말이 칭찬인지 판단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입니까?"
"아니다."
위지헌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수다."
그 짧은 말이 밤공기 속에 오래 남았다.
월령은 고개를 숙였다.
"왕야께서 바둑으로 말씀해 주신 덕입니다."
"바둑을 좋아하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월령은 잠시 멈췄다.
"어릴 때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잘 두나."
"잘 두지는 못합니다."
"정말?"
그가 낮게 되물었다.
월령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보았다.
위지헌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한마디는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마치 그가 이미 그녀의 거짓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한 수를 더 두는 사람처럼.
"조금은 둡니다."
월령이 결국 작게 답했다.
위지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그럼 다음에는 바둑판으로 말하지."
"예?"
"말로 하면 네가 자꾸 정치라 오해하니."
월령의 숨이 멎었다.
그가 알아차렸나.
자신이 그의 모든 배려를 정치로 돌려놓고 있다는 것을.
월령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위지헌은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피할 곳을 남기듯 한 걸음 물러섰다. 감송향이 아주 조금 멀어졌다. 그러자 월령은 이상하게 숨이 트이면서도, 그 향이 멀어진 자리를 의식하게 되었다.
"들어가라."
그가 말했다.
"오늘 밤은 길다."
"왕야께서는요."
묻고 나서 월령은 바로 후회했다.
위지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내가 걱정되나."
그 말은 낮았다.
너무 낮아서 오히려 귓가가 뜨거워졌다.
"아닙니다. 그저..."
"그저?"
위지헌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았다.
월령은 결국 눈을 내리깔았다.
"왕야께서 밤마다 이곳에 계시면, 심가 안팎의 눈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건 걱정이군."
"정치적인..."
"정치라는 말로 물러서지 마라."
위지헌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으나, 이번에는 조금 단단했다.
월령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곧 더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들키지 않는다. 들킨다면 내가 들키기로 한 때일 것이다."
"그런 때가 있습니까."
"있다."
위지헌은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월령은 그 말뜻을 다 알지 못했다.
다만 언젠가 그가 일부러 드러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아마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생각은 이유 없이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그녀는 예를 올렸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위지헌은 아주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게 답했다.
"너도."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월령은 돌아서는 동안에도 그 말이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너도.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인데, 이상하게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말처럼 들렸다.
서원당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살구나무 아래 흙이 아직 젖어 있었다. 꽃은 없고 열매만 남은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월령은 그 아래를 지나며 소매 안의 손을 꼭 쥐었다.
내일은 서윤에게 돌아올 길을 만들어야 하고, 은매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아야 하며, 어머니에게는 걱정을 덜어 드려야 했다. 장부는 호부로 가고, 호부의 종이는 삼전하의 손을 지나갈 수 있다. 자녕궁은 기다림을 미끼로 삼고, 문밖의 손은 서윤의 작은 매듭을 길로 읽는다.
생각할 것이 많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에는 자꾸 다른 말이 남았다.
말로 하면 네가 자꾸 정치라 오해하니.
월령은 걸음을 멈췄다.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 사람은 정말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왜 그가 알아차리는 것이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닐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원당 안에서는 청아가 졸린 눈으로 등잔을 살피고 있었다. 어머니는 잠든 듯했고, 약그릇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 작은 평온이 월령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아가씨."
청아가 벌떡 일어났다.
"조용히."
월령은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웠다.
청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야무져서 월령은 아주 작게 웃었다.
"내일 아침에 등초본을 쓸 때 썼던 흡지를 모두 모아 말릴 거야. 젖은 종이는 곰팡이가 슬기 쉽다고 해."
청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췄다.
"흡지요?"
"응. 한 장도 빠지지 않게."
청아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한 장이 빠져 있으면요?"
"그럼 누군가 가져간 거겠지."
월령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찾는 얼굴을 하면 안 돼. 빠진 종이가 스스로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야 해."
청아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소인이 잘 말려 보겠습니다. 종이가 스스로 돌아오고 싶을 만큼요."
엉뚱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월령은 웃지 않았다.
"그래. 부탁할게."
청아는 그 한마디에 다시 귀 끝이 붉어졌다.
밤이 깊어졌다.
심가의 서쪽 편문에서는 흰 실이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밖 회화나무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웅덩이 가장자리의 발자국은 서서히 마르고 있었고, 짚이 깔린 길에는 새벽을 기다리는 눅은 냄새가 앉았다.
담장 너머 아주 먼 곳,
경안 남쪽의 좁은 골목에서는 작은 수레 하나가 삐걱이며 멈췄다.
수레 위에는 낡은 짚자리가 덮여 있었다.
그 아래에서 어린아이가 기침을 삼켰다.
옆에 앉은 여인은 그 입을 급히 막았다. 손은 마르고 뜨거웠다. 병든 사람의 손이었다.
수레를 끌던 사내가 뒤돌아보았다.
"소리 내면 안 된다 했지."
그의 목소리는 얇고 성급했다.
첫 음절이 목 안에서 한 번 걸렸다가 나왔다.
"다, 다시 말하게 하지 마라."
어린아이는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짜증스레 혀를 찼다.
"심가 계집종 하나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어."
그는 어둠 속 골목 끝을 보았다.
"하지만 아직 줄은 끊기지 않았다."
수레는 다시 움직였다.
낡은 바퀴가 젖은 돌길 위를 지나며 낮게 울었다.
그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밤은 때로 그런 작은 소리부터 기억했다.
한씨는 해가 뜰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서원당 옆 작은 방에는 따뜻한 물이 놓였고, 청아가 급히 데운 죽도 한 그릇 놓였다. 이번 죽은 타지 않았다. 청아는 그것을 세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상 위에 올렸다."이번에는 바닥까지 살아 있습니다."그녀가 낮게 말했다.은호가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제가 봐도 됩니까.""너는 이제 감별관이니?""어제 제가 맞았습니다."청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은매가 아주 작게 웃었다.그 웃음은 눈물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월령은 그 작은 소리를 마음에 담았다. 밤새 편문 앞에서 본 것들, 한씨의 무너진 얼굴, 서윤의 떨리던 손, 잘린 붓끝에 묻은 예부의 붉은 실이 아직 방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청아는 죽의 바닥을 확인했고, 은호는 그 확인을 다시 확인하려 했다.그 사소함 덕분에 아침은 겨우 아침다웠다.서윤은 한씨 곁에 앉아 있었다.어머니의 손을 잡지는 못했다. 대신 이불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붙잡고 있었다. 한씨는 그 손을 보았고, 보지 못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서윤아."한씨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서윤의 어깨가 움찔했다."예, 어머니."그 말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어제와 달랐다. 어머니 마음에 들려고 꾸민 어른의 말이 아니라, 다칠까 봐 조심하는 딸의 말이었다.한씨는 오래 침묵했다."어미가 너를 아낀다."서윤의 눈가가 붉어졌다."예.""그 말로 네가 다친 것이 없어지지는 않겠지."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한씨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밤새 울지 않은 눈은 오히려 더 붉었다."나는 네가 뒤에 서는 것이 싫었다. 내가 평생 그렇게 서 있었으니, 너는 앞으로 가길 바랐다."그녀의 시선이 월령을 향했다가 곧 떨어졌다."그러다 네 등을 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서윤의 손이 이불을 더 세게 쥐었다.한씨는 그 손을 보았다."어젯밤 네가 월령이를 사람이라 했지."서윤은 고개를 숙였다."예.""어미는 너도 사람이라는 걸 자꾸 잊었다."방 안이 조용
남쪽 편문은 낮에도 어두운 곳이었다.담장이 높고, 늙은 측백나무가 길게 그늘을 드리웠으며, 문 아래 돌계단에는 햇빛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그곳의 흙은 늘 조금 눅었다. 집 안에서 버린 물이 몰래 흘러드는 자리라 했다.밤에는 그 어둠이 더 깊어졌다.등불 하나가 멀리 회랑 끝에서 흔들렸고, 편문 앞에는 사람 그림자 셋이 서 있었다.월령은 걸음을 늦췄다.위지헌의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뛰지 마라.혼자 앞서지 마라.그 말을 정치적 수로 이해하려 애썼지만, 몸은 그보다 먼저 기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불안을 꾸짖는 소리가 아니라, 넘치는 물을 손바닥으로 눌러 주는 듯한 소리였다.월령은 숨을 고르게 했다.서윤은 편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잠옷 위에 급히 걸친 외투가 어깨에서 조금 흘러내려 있었다. 머리도 제대로 묶지 못했다. 어른스럽게 꾸민 얼굴이 아닌, 잠을 잃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옆에 한씨가 서 있었고, 문밖에는 검은 장옷을 뒤집어쓴 여인이 있었다.금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떨고 있었다.문밖의 여인은 고개를 숙였지만, 손은 숙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굳어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이 아니라, 비단 끈과 열쇠를 오래 다룬 손이었다.궁녀의 손.문상궁의 사람."숙모."월령의 목소리는 낮았다.한씨의 어깨가 움찔했다.서윤은 돌아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언니."그 한마디에 죄책감이 먼저 묻어났다.월령은 서윤을 보았다."춥겠다."서윤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예?""밤공기가 차. 외투를 여미렴."서윤은 손을 들어 외투를 여몄다. 손이 떨렸다.한씨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오늘도 단정했다. 급히 나온 사람치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 단정함이 오히려 더 절박해 보였다. 무너질 사람은 때로 가장 반듯하게 앉아 무너진다."큰아가씨."한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밤중에 여기까지 오다니, 몸이 상합니다.""숙모께서도 밤중
새벽이 오기 전의 집은 가장 솔직했다.낮에는 예법이 사람을 세우고, 밤에는 두려움이 사람을 눕힌다. 그러나 새벽 직전의 어둠에는 누구도 완전히 서 있지도 눕지도 못한다. 닫힌 문 안쪽에서는 잠든 척하는 숨이 얇아지고, 깨어 있는 등불은 심지를 낮춘 채 오래 버틴다.월령은 서원당 곁 작은 서실에 앉아 있었다.등불은 낮췄고, 탁자 위에는 서윤의 오래된 글과 허도겸이 보낸 등초, 문상궁의 먹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종이와 먹과 사람의 손. 전부 말이 없는데도, 방 안은 너무 많은 말로 가득 찬 듯했다.그녀는 위조된 글의 마지막 획을 다시 보았다.받겠다.그 끝이 유난히 무거웠다.서윤은 끝을 그렇게 누르지 않는다. 서윤의 글은 끝에 이르면 오히려 가벼워졌다.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손은 마지막에서 긴장이 풀린다. 그러나 이 글은 마지막에서 힘이 들어갔다.누군가 결말을 꼭 눌러 닫은 것이다.마치 도망갈 문을 막듯이."잠을 자지 않았군."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월령은 숨을 멈추었다가, 곧 자신을 꾸짖듯 천천히 내쉬었다.위지헌이었다.그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먹색 대창포 자락에는 새벽 안개가 아주 희미하게 묻어 있었고, 젖은 돌을 밟고 온 듯 신 끝이 어두웠다. 감송향이 서실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월령은 일어나 예를 갖췄다."왕야.""앉아 있어라."말은 낮았지만 딱딱하지 않았다.그는 곧 자신이 너무 짧게 말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덧붙였다."네가 일어서면 종이가 날린다."월령은 잠시 멈췄다.그 말이 명령인지 배려인지 구별하지 못했다.위지헌은 문턱을 넘었다.그는 탁자 가까이 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면 그녀가 숨을 더 조심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감송향은 이미 가까웠다. 월령은 그 향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먹을 보았느냐.""예.""무슨 생각을 했지."월령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자녕궁의 종이, 서윤의 글씨, 문상궁의 먹. 세 가지가
밤은 쉽게 깊어지지 않았다.심가의 안채에는 등불이 오래 남았다. 서원당 처마 아래 작은 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약방 쪽에도 낮은 불빛이 흔들렸다. 하인들은 평소보다 발소리를 낮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집 전체가 숨을 작게 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월령은 목갑 속 먹을 다시 닫았다.문상궁이 두고 간 먹과 같은 냄새.그 말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궁의 물건은 여러 손을 지난다. 문상궁이 들고 왔다고 해서 문상궁이 썼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태후의 뜻이라 해도 태후가 직접 먹을 갈았을 리 없고, 위명서가 필요로 했다고 해서 그가 손끝에 먹을 묻혔을 리 없다.궁의 명은 대개 남의 손끝에 묻어 왔다.손끝은 씻기 쉽고, 명은 더 쉽게 사라졌다."언니."서윤이 아주 낮게 불렀다.월령은 고개를 돌렸다.서윤은 아직 붓함 곁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들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에 아이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얇게 놓여 있었다. 서윤은 그것들을 다시 접지 못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걸,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요.""있었겠지."월령은 거짓말하지 않았다.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래서 월령은 말을 낮췄다."하녀가 보았을 수도 있고, 숙모께서 보셨을 수도 있고, 글씨를 가르치던 사람이 기억했을 수도 있어.""그럼 제가...""아니야."월령은 서윤의 말을 부드럽게 막았다."네가 누군가에게 칼을 준 것이 아니야. 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칼로 갈았을 뿐이야."서윤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하지만 조금 덜 무너진 얼굴이었다.월령은 더 묻지 않았다.그때 청아가 조심스럽게 낮은 상 위에 찻잔을 올렸다."차는 아니고 보리물입니다.""왜 그렇게 작게 말하니.""궁에서 차가 나오면 늘 일이 생겨서요."청아는 아주 진지했다."소인은 당분간 차를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은호가 작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보리도 볶으면 검습니다."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런 말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을 잃은 아이의 얼굴은 이상하게 어려 보였다. 조금 전까지 찹쌀떡 접시를 들고 어른스러운 말을 고르던 입술은 이제 색을 잃었고,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렸다.방 안에는 눌어붙은 죽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창을 열었는데도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불에 닿은 곡식의 냄새는 사람의 옷자락보다 오래 방 안에 머문다. 궁에서 온 글 한 줄도 그랬다. 읽히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 쉬는 곳마다 얇게 달라붙었다.심월령은 기윤이 전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심월령은 황실의 은혜를 달게 받겠다.그 글씨가 서윤의 손과 닮았다고 했다.닮았다.같다고 못 박지 않으면서도, 다르다고도 놓아주지 않았다. 칼보다 얇은 말이었다.서윤의 손끝이 떨렸다."저는 쓰지 않았어요."목소리가 작았다."언니, 저는 정말...""알아."월령은 너무 빨리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급한 믿음은 때로 믿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그녀는 서윤의 손을 보았다. 찹쌀가루가 아직 손톱 가장자리에 희게 끼어 있었다. 궁의 종이를 만진 손이라기보다, 부엌에서 반죽을 조금 망친 아이의 손이었다."네가 쓰지 않은 것 알아."서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런데 왜 제 글씨와 닮았을까요."그 물음에는 두려움보다 더 깊은 부끄러움이 있었다.월령은 그 부끄러움을 알아보았다.서윤은 늘 남의 마음에 드는 법을 먼저 배웠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말투, 어른들이 기특하다 여기는 자세, 태후가 눈길을 줄 만한 글씨. 자기 이름을 쓰기 전에 남의 눈이 좋아하는 선을 익힌 아이였다."혹시."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적이 있어요."방 안이 조용해졌다.청아는 놀라 숨을 삼켰고, 은매는 은호의 어깨를 조금 더 감쌌다. 기윤은 문가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으나, 그 침묵도 들은 사람의 침묵이었다.월령은 서윤을 재촉하지 않았다."어릴 때요. 큰어머니께서 언니 글씨가 곱다 하셨고, 아버지
심월령.그 이름이 자녕궁 안에 떨어진 순간, 향로의 연기마저 잠시 길을 잃은 듯했다.궁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낮췄고, 내관은 두루마리를 든 손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붉은 비단 끝에 매달린 금실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창밖으로 들어오던 봄빛은 바닥의 옥돌 위에서 차갑게 식어, 사람의 얼굴마다 다른 그늘을 얹었다.독고 태후는 웃지 않았다.웃지 않는 얼굴이 더 온화해 보일 때가 있다.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누구의 목숨을 조르는 덫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마땅히 놓아야 할 비단끈이라는 듯했다.월령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손끝은 소매 안에서 차가웠으나 떨리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너무 큰 파도가 오면 사람은 먼저 젖는 대신 굳는다. 숨도, 눈물도, 두려움도 한 박자 늦게 온다.문밖에서 위지헌의 그림자가 길게 들어왔다.감송향이 자녕궁의 단 향을 조용히 밀어냈다. 마른 흙과 오래된 나무, 차갑게 말린 약재의 향. 그 향은 소리 없이 다가왔으나, 자녕궁 안의 누구도 모른 척하지 못했다."그 교서를 멈추십시오."위지헌의 목소리는 낮았다.낮은데도 먼 기둥까지 닿았다.태후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이미 읽혔습니다, 섭정왕.""읽힌 것과 행해지는 것은 다릅니다."위지헌은 문턱을 넘었다.궁녀 하나가 본능적으로 물러났고, 내관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길을 비켰다. 그는 누구에게도 소리치지 않았다. 칼을 뽑지도 않았다. 다만 걸어 들어왔다. 그 한 걸음마다 자녕궁의 공기가 뒤로 밀렸다.태후의 눈빛이 아주 작게 깊어졌다."황제의 어보가 찍힌 교서입니다.""그러므로 더더욱 예를 갖춰야 합니다."위지헌은 두루마리를 보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태후에게 있었다. 황제의 숙부이자 섭정왕인 자가 태후를 향해 예를 잃지 않는 거리. 그러나 그 예의 아래에는 누구도 밟을 수 없는 선이 있었다."심가 여식은 지금 예부와 호부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궁중 내지 유출과 군량 장부 조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