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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몽혼향

Penulis: moominkiller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6-10 09:53:03
오후의 빛은 흐렸다.

심가의 하루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멈추지 않았다 — 부엌에서는 저녁 장국에 넣을 무가 얇게 썰렸고, 행랑채에서는 북문군으로 보낼 마른 장작을 세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죽고 살아도 국은 끓고 장부에는 숫자가 적혔다. 그 멈추지 않음이 오히려 이상했다.

월령은 방을 준비하며 빠뜨릴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셌다.

문은 열어 둔다.

창은 반쯤 열어 둔다.

향로는 비운다.

찻잔은 둘.

청아는 문과 탁자 사이.

화장대 서랍은 아주 조금 열어, 시선이 그쪽으로 흐르게 한다. 위지헌이라면 또 무엇을 보았을까.

그 물음이 계속 따라붙었고,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불안했다. 심서윤은 작은 향주머니를 들고 왔다.

연분홍 비단에 은실 연꽃.

너무 서윤다운 물건이었다.

그녀는 월령의 얼굴을 살폈고, 월령은 살펴지는 것을 허락했다. 오늘의 미끼는 물건이 아니라, 제 약한 곳이었다.

향주머니가 탁자 위에 놓였다. 백단과 난향, 감초의 희미한 단내.

겉으로는 진정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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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8. 마르지 않은 것

    겨눈 자가 다시 손을 뻗은 것은, 살구가 열매를 굵히던 무렵이었다.이번에는, 마른 꽃이 아니었다.심가의 약방에 새 약재 한 봉지가 들었다. 어머니가 봄마다 달여 먹던 보약의 재료였다. 늘 드나들던 약재상의 이름으로 온 봉지였다.다만, 그 봉지를 받은 것은 강 서방이 붙여 둔 아는 약재상이었다.지난 열흘, 심가의 약방에는 아는 얼굴 하나가 늘 앉아 있었다. 강무진이 붙여 둔 약재상이었다. 오는 약재를 받고, 가는 약을 살피는 자리였다.늘 앉아 있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아무 일 없던 날들이, 오늘 하루를 위한 것이었다.*아는 약재상은, 그 봉지를 바로 달이지 않았다.늘 오던 약재상의 이름이었으나, 봉지를 가져온 아이가 낯설었다. 그 약방의 심부름 아이는 왼 뺨에 점이 있는 아이였는데, 이 봉지를 가져온 아이에게는 그 점이 없었다.이름은 같았으나, 심부름 온 얼굴이 달랐다.아는 사람만이 알아볼 다름이었다. 약재상은 그 봉지를 달이는 대신, 강무진에게 보냈다.작은 다름이었다. 이름은 같고, 봉지도 같았다. 겨눈 자는 아는 약방의 이름까지 훔쳐 올 만큼 촘촘했다. 그러나 심부름 아이의 얼굴 하나까지는, 훔쳐 오지 못했다.큰 것을 다 갖춘 함정이, 작은 얼굴 하나에서 어긋났다. 아는 사람을 심어 둔 값이, 거기 있었다.*강무진이 그 봉지를 왕부로 가져왔다.월령이 봉지를 열었다. 보약의 재료 사이에, 낯선 잎 몇이 섞여 있었다. 마르지 않은, 붉은 기가 도는 잎.적련초였다.마른 채로 경고를 보낸 자가, 이번에는 마르지 않은 것을 보냈다. 어머니의 약사발에, 그 잎이 들 뻔했다.전생과 같은 길이었다. 전생에 어머니는, 이런 잎이 든 약을 먹고 죽었다. 이번 생에는 그 잎이 약사발에 들기 전에, 아는 손에 걸렸다.월령은 그 붉은 잎을 오래 보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전생에는, 이 잎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어머니가 이미 없었다. 이번 생에는, 이 잎이 약사발에 들기 전에 그녀의 손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7. 벽에 기댄 것들

    경화제가 '오래 기댄 벽'이라 부른 자리는, 봄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얇아졌다.순검이 섭정왕에게 온전히 돌아가고, 채운 상궁이 물러나고, 방준이 변방으로 옮겨 간 뒤였다. 자녕궁에 기대어 있던 것들이, 하나씩 벽에서 떨어져 나갔다.숙비는 그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옥반지 없는 손으로 식은 차를 만졌다.자녕궁의 봄은, 여느 처소보다 조용했다. 드나드는 발이 줄었고, 향도 예전처럼 사르지 않았다. 오래 권세를 두르던 처소가, 권세를 하나씩 벗고 있었다. 식은 차에서는 향이 오르지 않았다. 향을 사르지 않는 처소의 차는, 오래 두어도 향이 없었다.그러나 벗은 자리마다, 숙비는 무엇을 남길지 골랐다. 다 벗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옷이었다.*숙비는 무너지지 않았다.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붙잡지도 않았다. 붙잡으면, 붙잡는 손까지 함께 떨어졌다. 대신, 남은 것을 더 깊이 감췄다."고모님."설련이 오랜만에 자녕궁에 들었다. 제 발로 든 걸음이었다.숙비는 그 조카를 오래 보았다."넘어졌느냐.""아니요."설련이 낮게 답했다."넘어지지 않아서 왔습니다. 고모님이 넘어지실까 봐."숙비의 손이, 찻잔 위에서 잠깐 멎었다.지난겨울 손을 놓겠다던 조카였다. 붙잡지 않고 놓아주었더니, 제 발로 서서 도로 걸어 들어왔다. 놓아준 것이 잃은 것이 아니었다. 숙비는 그것을, 뒤늦게 알았다.*월령은 그 무렵, 한 가지를 다시 헤아렸다.'연'은 자녕궁에 기대어 있었으나, 자녕궁이 곧 '연'은 아니었다.숙비의 손이 하는 일은 눈에 보였다. 내명부의 문, 옥반지, 향. 그러나 '연'의 손은 보이지 않았다. 성 밖 절터에서 향을 대고, 북의 흑령에게 셈을 쥐여 주고, 남쪽 약밭에서 독을 길렀다.숙비가 벽이라면, '연'은 그 벽 뒤에 숨은 무엇이었다.벽을 무너뜨려도, 그 뒤의 무엇은 다른 벽을 찾아 옮겨 갈 것이었다.월령이 '연'을 처음 장부에 적을 때는, 그것이 자녕궁의 다른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을 따라갈수록, 자녕궁은 '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6. 아는 손으로

    봄비가 그친 이튿날부터, 월령은 심가의 손을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어머니 곁의 손이었다. 부엌에 드는 손, 약을 달이는 손, 대문을 여닫는 손.내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심가를 지킨 사람들은 그대로 두고, 그 곁에 아는 사람을 하나씩 더 붙였다. 낯선 손이 끼어들 자리를, 미리 채워 두는 것이었다.*이번에는, 위지헌도 함께 움직였다.순검이 온전히 돌아온 뒤였다. 지난겨울처럼 그림자로만 지킬 필요가 없었다. 그는 심가가 드나드는 약방과 곡식전을, 순검의 이름으로 조용히 살피게 했다."밭을 덮치지 않고도, 길을 지킬 수 있다."위지헌이 말했다."네가 남에서 홀로 세던 것을, 이제 순검이 함께 센다."월령은 그 말에 잠깐, 지난겨울을 떠올렸다.지난겨울, 그녀는 순검 없는 왕부에서 홀로 길을 지켰다. 이번 봄에는, 순검이 그 길을 함께 지켰다. 같은 길인데, 지키는 사람이 늘어 있었다.지난겨울에는, 그녀가 세는 것을 아무도 함께 세지 않았다. 강무진이 그림자로 도왔으나, 결정은 늘 그녀 혼자의 몫이었다. 이번 봄에는, 그 결정 곁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혼자 지던 무게가,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월령은 어머니에게, 이번에도 다는 말하지 않았다.다만, 심가에 새로 든 사람들을 어머니께 인사시켰다."어머니, 이 아이는 청아의 사촌이에요. 부엌 일을 도울 거예요.""이 사람은, 강 서방이 아는 약재상이고요."유씨는 딸이 왜 사람을 이렇게 붙이는지, 이제 어렴풋이 알았다. 무언가로부터 딸이 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네가 애쓴다."유씨가 낮게 말했다."애쓰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계셔야, 제가 봄을 세니까요."유씨는 그 말끝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딸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두 생을 건너 살아 있는, 어머니의 손이었다.유씨는 새로 든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물었다. 이름을 알면, 낯선 사람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월령은 그 물음을 막지 않았다. 어머니가 곁의 사람들 이름을 다 알수록, 낯선 얼굴 하나가 더 도드라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5. 오래된 봄

    위지헌은 오래 말을 골랐다.그녀가 두 생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 용기가 필요했듯, 그에게도 오래 묻어 둔 이야기 하나를 꺼내는 데 숨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빗소리가,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경화 칠년의 봄이었다."위지헌이 낮게 말했다."나는 그때, 진북 관문에서 첫 전장을 치르고 있었다. 어렸고, 이겼으나 외로웠다. 이긴 자리에서도,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경화 칠년. 밀서에 그녀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함께 적힌, 그해였다.그해 봄을, 월령도 어렴풋이 알았다. 지난가을 국청에서 밀서가 열리던 날, 예부 상서가 '경화 칠년 내봉'이라 읽었다. 그때 월령은 제 이름이 왜 그렇게 어린 해에 함 안에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이제, 그 까닭을 듣고 있었다.*"전장 근방의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말발굽에 짓이겨진 살구꽃잎 하나가 내 소매에 붙어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떼어 주지 않았다. 다들, 나를 무서워했으니까."위지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런데 아주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겁도 없이 다가와 그 꽃잎을 떼어 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는, 외로운 사람이네.'"월령의 숨이 멎었다."…그 아이가.""너였다."그 말을 하는 위지헌의 목소리에, 오래된 것이 실려 있었다. 여러 해를 홀로 품어 온 봄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저 혼자 꺼내 보던 봄.월령은 두 생을 혼자 삼켰고, 위지헌은 한 생을 혼자 품었다. 두 사람 다, 오래 혼자였던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봄을 기억하지 못했다.너무 어렸다. 전장 근방의 마을과 일찍 진 살구꽃, 아버지의 말안장에 붙은 진흙만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검은 갑주의 젊은 장수가 있었다는 것은, 기억에 없었다.그러나 위지헌은, 그 봄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나는 그 뒤로, 오래 너를 지켰다. 네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밀서에 네 이름이 적힌 것도, 내가 청한 일이었다. 외로운 사람이라고 불러 준 아이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4. 말하지 못한 것

    봄비가 오는 밤이었다.월령은 그 비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빗소리는, 전생의 어떤 밤을 자꾸 불러왔다.형장의 밤도, 비가 왔다. 붉은 옷을 입고 끌려가던 길에, 빗물이 옷을 적셨다. 그 붉은 옷은, 비에 젖어 더 붉었다.이번 생의 봄비는 그저 봄비였다.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들으면, 월령은 자꾸 붉은 옷의 무게를 떠올렸다.전생의 그 밤을, 월령은 오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두 생을 살았다는 것은 입 밖에 내는 순간, 미친 사람의 말이 되었다.그래서 그녀는 늘, 무서운 밤이면 혼자 삼켰다. 삼킨 것이 몸 어딘가에 쌓여, 봄비 오는 밤마다 무겁게 가라앉았다.*위지헌이 그 곁에서 깨어 있었다."비가, 무섭느냐.""…비가 아니라, 비 오는 밤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위지헌은 그녀를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다친 왼팔이 아니라, 성한 오른팔로."말하지 않아도 된다."그가 낮게 말했다."그러나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된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너를 다르게 보지 않는다."월령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빗소리가, 창밖에서 계속 내렸다. 그 소리 아래에서, 오래 삼켜 온 이야기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위지헌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넉 달을 북에 있다 돌아온 사람의 팔에서는, 아직 찬 바람 냄새가 옅게 났다. 그 냄새가 이상하게, 월령의 마음을 가라앉혔다.무서운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그 팔이 충분히 단단했다.*"…왕야.""말해라.""제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해도 될까요.""들으마."월령은 한참 숨을 골랐다. 목 안이 말라, 첫 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이 이야기를 하면, 위지헌이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지도 몰랐다. 두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믿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믿었다가 아니면, 남는 것은 더 큰 외로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3. 순검이 돌아오다

    북의 승전이 조정에 오른 지 며칠 뒤, 경화제가 섭정왕의 순검을 온전히 돌려주었다.봄 한 철 반쯤 나누어 두었던 도성 순검이, 이제 다시 섭정왕의 것이 되었다. 이번에는 지나가듯 가볍게 돌려주는 말이 아니었다. 어전에서, 백관이 보는 앞에서였다.위지헌은 그 순검패를 두 손으로 받았다.*정무가 끝난 뒤, 경화제가 위지헌을 사석으로 불렀다.황제와 섭정왕이 아니라, 형과 아우가 마주 앉는 자리였다."북은, 걷었느냐.""창은 걷었습니다. 그러나 그 창을 쥐여 준 손은, 남에 있습니다."경화제는 차를 한 모금 들었다."안다."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에, 지난봄 어전이 비워 둔 결재 칸의 뜻이 다 들어 있었다."짐이 순검을 나누어 둔 것도, 결재를 미룬 것도, 그 손을 낚으려는 미끼였다. 네가 없는 동안, 그 손이 어디까지 뻗는지 보았다."위지헌은 형의 얼굴을 보았다.보고도 움직이지 않던 침묵이, 게으름이 아니라 낚싯대였다. 형은 오래, 그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그 손의 이름을, 폐하께서는 아십니까."위지헌이 물었다.경화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봄을 잠깐 보았다."이름은,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이 오래 기댄 벽은 안다."자녕궁이었다.경화제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댄 벽'이라는 말로, 그 자리를 가리켰다. 황제조차 그 벽을 함부로 무너뜨리지 못했다. 벽을 무너뜨리면, 벽에 기댄 다른 것들도 함께 무너졌다."서두르지 마라."경화제가 말했다."벽은 한 번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기댄 것을 하나씩 떼어 내는 것이다. 네 부인이, 그 떼어 내는 일을 잘하더구나."위지헌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형은, 월령이 남에서 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같은 무렵, 삼황자부의 등잔은 여전히 늦도록 켜져 있었다.위명서는 자녕궁의 셈에서 반걸음 물러선 뒤로,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고모의 그늘을 벗었으나, 아직 스스로 무엇을 쥘지 정하지 못했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 뼘

    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한때의 월령도 몰랐다.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이제는 안다.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사람 하나를 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 틈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그때의 월령은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촌이라 믿었고, 어머니의 방 앞에 흰 천이 걸린 뒤에는 서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운 적도 있었다. 등을 토닥이던 작은 손의 감촉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리고 황후전의 어느 밤, 비녀함 안쪽에서 밀서를 꺼내던 그 손도.그 손등에 비치던 차가운 등불도.그래도 월령은 그 손을 기억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 향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 흰

    비가 내렸다.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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