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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틈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4 01:13:11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

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

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

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

기와가 조금 들뜬 곳, 창호지가 배어 오른 곳, 장독 뚜껑 가장자리에 물이 고이는 곳. 맑은 날에는 단정해 보이던 집도 물을 만나면 감춰 둔 약한 곳을 하나씩 드러냈다.

월령은 서고 앞에 서서 봉인을 살폈다.

붉은 봉랍은 밤새 잘 굳어 있었다. 소금을 아주 조금 섞은 자리에는 흰 점이 별처럼 박혔고, 심가의 인장은 종이 끝과 문짝을 함께 물고 있었다. 누가 문을 열고자 하면 종이가 먼저 찢어질 것이다.

문지기 늙은 하인은 양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밤새 아무도 오지 않았느냐."

"예, 아가씨. 둘째 나리께서도 오늘은 들지 않으셨습니다."

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세니 서고 앞 마루에 물이 들지 않게 해 줘. 물이 닿으면 종이가 먼저 울 테니까."

"예."

하인은 대답하면서도 눈을 아래로 내렸다.

열여섯 아가씨가 군량 장부 봉인을 살피는 일은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크게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중이라는 명분은 월령의 작은 움직임에 조용한 그늘을 씌워 주었다.

그 명분이 고마웠다.

그리고 서글펐다.

월령은 손끝으로 소매 안쪽을 눌렀다.

어머니가 아프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 집의 문틈을 이렇게 오래 보지 않았을 것이다. 장작값과 말먹이값이 왜 같은 줄에 매달리는지, 봉랍에 소금을 조금 섞으면 왜 누군가의 손이 두려워지는지, 서윤의 흰 매듭이 왜 자녕궁에서 위명서의 손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나이는 지나갔다.

그런데 몸은 아직 그 나이를 다 벗지 못했다.

청아가 달려왔다.

비를 맞지 않으려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잡고 뛰어온 탓에, 관자놀이 곁 머리칼 몇 올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가씨, 동문에 호부에서 사람이 또 왔습니다."

월령의 시선이 서고 봉인에서 떨어졌다.

"또?"

"예. 이번에는 공문 두 통이라 합니다. 둘째 나리께서 정청으로 드셨고, 둘째 부인께서도 부르셨습니다."

비 냄새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공문은 늘 종이 한 장으로 오지 않는다.

처음 온 것은 문을 두드리는 손이고, 두 번째 온 것은 그 문이 어디로 열리는지 확인하는 눈이었다.

정청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둘째 숙부는 젖은 봉서를 펼쳐 말리고 있었고, 한씨는 손수건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앉아 있었다. 서윤은 어머니 옆에 서 있었다. 어제보다 얼굴빛이 맑지 않았다. 밤새 잠을 깊이 자지 못한 아이의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앉았다.

그러나 옷차림은 누구보다 단정했다.

연한 백색 저고리에 푸른 치마.

머리에는 작은 진주 비녀 하나만 꽂았다. 너무 꾸미지 않은 조심스러움은 때로 꾸민 것보다 더 또렷했다.

월령이 들어서자 서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언니."

목소리는 곱고 얌전했다.

그러나 그 안쪽에 밤새 다듬은 듯한 단단함이 있었다. 아이는 어른처럼 보이려 애쓸 때마다 말끝을 조금 더 눌렀다.

"비가 찬데 밖에 계셨나요?"

"서고를 보러 갔어."

월령은 부드럽게 답했다.

"너는 잠을 설친 듯하구나."

서윤의 눈동자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니에요. 비 오는 소리가 조금 커서요."

한씨가 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비가 오면 원래 어린것들이 잠을 설치지요."

서윤의 손끝이 어머니 손 아래에서 가볍게 굳었다.

어린것.

그 말은 다정했으나, 서윤에게는 아픈 말일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에 들고 싶은 아이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지 않아 했다. 자녕궁의 작은 붓, 흰 매듭, 기다림. 그 모든 것이 서윤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도 쓸모가 있다고.

그 말을 들은 아이에게 다시 어린것이라 부르는 것은, 보드라운 비단으로 감싼 작은 멍이었다.

둘째 숙부가 공문을 내려놓았다.

"호부에서 봉인을 풀 필요는 없다 하였소."

그 말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풀렸다.

그러나 월령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둘째 숙부는 곧이어 두 번째 종이를 들었다.

"대신 심가 보관 장부의 목록본과 최근 삼월분 군량 출납 등초본을 따로 올리라 했소. 원본은 대장군이 돌아온 뒤 열어도 되나, 목록과 등초는 삼일 안에 필요하다 하오."

틈.

월령은 그 말을 보지 않고도 느꼈다.

문을 열 수 없으면 문틈으로 바람을 넣는다.

원본을 열 수 없으면 목록본을 요구하고, 장부를 만질 수 없으면 정서하는 손을 찾는다.

둘째 숙부는 말을 이었다.

"서리들이 쓰면 글씨가 거칠어 호부에 올리기 민망하오. 더구나 자녕궁에서도 심가 여식들의 손을 칭찬했다지 않소. 집안일이니 아가씨들 중 한 사람이 거들면 어떻겠소."

서윤의 숨이 아주 작게 멎었다.

칭찬.

그 한마디가 아이의 어깨를 세웠다.

한씨의 손이 딸의 손등을 한 번 더 눌렀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 손은 말보다 분명했다.

네가 할 수 있다.

네가 필요하다.

월령은 서윤의 얼굴을 보았다.

서윤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사람은 늘 약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잡고 싶은 것이 너무 가까이에 있을 때도 사람은 흔들린다. 아이는 그 가까운 빛을 보고 있었다. 궁에서 알아본 손, 집안에서 필요로 하는 손,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손.

월령이 곧장 막으면, 서윤은 자신이 빼앗겼다고 느낄 것이다.

막지 않으면, 그 손이 위명서의 문고리가 될 것이다.

월령은 손톱을 손바닥에 눌렀다.

아프지 않을 만큼만.

"서윤이가 원한다면, 맡겨도 좋을 듯합니다."

한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 손이 곱고 반듯하니까요. 큰아가씨께서는 요즘 서원당과 약방까지 살피시느라 지치셨을 테고요."

말은 월령을 위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는 서윤에게 내어 주고 있었다.

서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제가 해도 된다면..."

그 목소리에는 두려움보다 기대가 조금 더 많았다.

월령은 그 기대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래. 네 손이 고우니까."

서윤의 눈이 잠시 환해졌다.

그 빛이 너무 어린 것이라, 월령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다만 밝은 곳에서 하자. 비 오는 날은 먹이 더디 마르니, 서원당 대청이 좋겠어. 큰어머니께서도 보실 수 있고, 숙모께서도 곁에 계시니."

서윤의 얼굴에서 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언니께서도 함께 계시려고요?"

"네가 힘들면 내가 먹을 갈아 줄 수 있지."

월령의 말은 나긋했다.

"혼자 오래 앉으면 어깨가 아파."

서윤은 입술을 아주 작게 다물었다.

거절할 수 없는 다정함이었다.

그래서 더 답답할 것이다.

"언니께서는 늘 제 걱정이 많으세요."

서윤은 웃었다.

예쁜 웃음이었다.

그러나 웃음 끝이 조금 식어 있었다.

"고마워요."

월령은 그 차가운 끝을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정청을 나서려는 순간, 공문을 싸고 있던 흰 끈 하나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아무도 주워 들지 않았다.

비에 젖어 흐물흐물해진 보통의 끈처럼 보였다. 그러나 월령은 그것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

흰 실.

어제 자녕궁 칠합에 담겨 돌아갔던 것과 같은 빛이었다. 지나치게 희어서 오히려 눈에 걸리는 실. 손가락에 감기면 피가 도는 살빛 위에서 더 선명해지는 빛.

서윤도 그것을 보았다.

순간 아이의 눈동자에 아주 작은 불씨가 들어왔다.

누가 보아도 지나칠 수 있을 만큼 작고 짧았다.

그러나 월령은 보았다.

그 실은 공문에 묶인 것이 아니었다.

서윤에게 닿은 것이었다.

서원당 대청에는 젖은 바람이 들지 않도록 발이 내려졌다.

청아는 낮은 상 위에 흰 천을 깔고, 먹과 벼루를 놓았다. 먹은 새것이 아니라 심가 서고에서 쓰던 묵은 먹이었다. 새 먹은 향이 강했고, 궁에서 온 종이와 섞이면 무슨 흔적이 남을지 알 수 없었다.

"찻잔은 이쪽으로 둘게요."

청아가 말했다가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먹 옆에 찻잔을 두면 안 됩니다. 제가 지난번에 먹물이 튄 것을 닦느라 반나절을 울 뻔했어요."

서윤이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뜻밖에 맑았다.

청아는 웃음이 난 것을 보고 더 의기양양해졌다.

"서윤 아가씨, 손목 아래에는 이 천을 대세요. 비 오는 날에는 종이가 손김을 먹습니다. 제 손은 원래 따뜻해서 종이가 자꾸 울거든요."

"네가 종이를 울리는 것이 아니라, 네가 종이를 너무 자주 만져서 그렇겠지."

월령이 조용히 말하자 청아가 입술을 내밀었다.

"아가씨께서는 소인 편을 들어 주실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으십니다."

"네가 양쪽 말에 다 고개를 끄덕이니 그렇지."

청아가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서윤은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웃었다.

그 짧은 웃음 때문에 대청의 공기가 한 뼘쯤 느슨해졌다.

월령은 그 느슨함을 오래 붙잡고 싶었다.

서윤이 늘 이런 아이였다면.

어머니의 손에 등 떠밀리지 않고, 궁의 칭찬에 목마르지 않고, 월령의 뒤에서 자기 몫의 빛을 훔치려 애쓰지 않았더라면. 저 아이는 아마도 바느질을 잘하고, 시를 외울 때 말끝을 조금 틀리며, 청아의 엉뚱한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촌으로 남았을 것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독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오래 끓은 마음이 어느 날 쓴 냄새를 내기 시작할 뿐이었다.

월령은 젖은 창호 너머를 보았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등초본은 두 장의 목록으로 시작했다.

북문관 본창, 동령 보급고, 흑령산 제삼 초소, 남운로 경안 입고분. 이름만 보아도 먼 길의 흙냄새가 묻어나는 곳들이었다. 곡식 가마 수량, 말먹이 단, 염장 고기 통, 겨울 외투용 면포.

서윤은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썼다.

획은 곧고, 글자 사이 간격도 고왔다. 어른이 보아도 흠잡기 어려운 손이었다. 다만 너무 반듯해서 숨이 조금 모자랐다. 글자가 종이 위에서 살짝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월령은 먹을 갈며 말했다.

"서윤아."

"네, 언니."

"이 목록은 호부에서 보기 쉽게 창고의 방향 순서로 옮기자. 북쪽에서 동쪽, 그다음 남쪽으로."

서윤의 붓끝이 멈췄다.

"원래 장부 순서대로 쓰지 않아도 되나요?"

"수량은 그대로 두면 된다. 목록 순서만 대조하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니 허물은 아니야."

서윤은 월령을 바라보았다.

"언니께서는 이런 것도 아세요?"

말은 감탄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작고 날카로운 것이 있었다.

또 언니는 안다.

또 언니는 앞선다.

월령은 그 마음을 읽고도 아프게 찌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예전에 군보를 보여 주신 적이 있어."

그녀는 부드럽게 답했다.

"길은 순서가 바뀌면 다른 길이 되더라. 숫자는 그대로여도."

서윤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월령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짓 숫자가 아니었다.

다만 길목을 남기는 일이었다.

장부를 훔쳐 보는 자가 있다면 숫자보다 먼저 이 순서를 가져갈 것이다. 훗날 호부나 삼전하 쪽에서 같은 순서로 죄를 엮어 오면, 그 종이는 심가 원본이 아니라 오늘 대청에서 만든 등초본을 지나간 셈이 된다.

위지헌은 밤에 그렇게 말했다.

종이에 죄를 쓰지 마라.

종이에 길을 남겨라.

월령은 그 말뜻을 이제 알았다.

대청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청아는 약방에서 가져온 창포를 작은 주머니에 담아 종이 곁에 두었다. 침상에 기대 앉은 어머니는 이따금 기침을 삼키며 서윤의 글씨를 보았다. 한씨는 딸이 한 줄을 끝낼 때마다 눈으로 칭찬했다. 그 눈빛은 부드러웠으나, 서윤의 어깨는 줄마다 더 곧아졌다.

너는 잘하고 있다.

너는 필요하다.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사람을 오래 붙잡았다.

월령은 서윤의 손목이 조금씩 굳어 가는 것을 보았다.

"잠시 쉬자."

"아직 남았습니다."

"먹도 쉬어야 해. 너무 급히 갈면 번져."

"저는 괜찮습니다."

서윤은 웃었다.

"이런 일쯤은 할 수 있어요. 저도 심가 사람이니까요."

월령의 손이 멈췄다.

한씨의 눈빛이 아주 잠깐 깊어졌다.

서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심가 사람. 그 말은 서윤에게 방패이자 칼이었다.

월령은 붓끝에 묻은 먹을 천천히 닦았다.

"그래."

그녀는 낮게 말했다.

"그러니 더 다치지 않게 해야지."

서윤의 입가가 굳었다.

"제가 다칠 일을 하는 건가요?"

한씨가 딸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서윤아."

서윤은 곧 고개를 숙였다.

"송구해요. 제가 또 말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간 말은 대청 바닥에 얇은 물기처럼 남았다.

월령은 그 위를 밟지 않았다.

비는 오후가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등초본이 반쯤 끝났을 무렵, 윤백이 서원당 바깥 회랑 끝에 나타났다.

그는 비를 거의 맞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처마 밑으로만 걸었는지, 아니면 비가 그를 피해 갔는지. 왕부 사람들은 가끔 너무 점잖게 이상한 일을 해냈다.

청아가 그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백 나리."

윤백은 손가락 하나를 입술 앞에 세우고, 예를 갖췄다.

"잠시만."

그는 월령에게 작게 접은 밀지를 건넸다.

"왕야께서 살펴보라 하셨습니다. 급히 펼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남들이 보기 전이면 됩니다."

그 말은 급하다는 뜻이었다.

월령은 밀지를 소매 안에 넣었다.

서윤의 시선이 아주 짧게 그곳을 스쳤다.

윤백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청아에게 말했다.

"창포는 젖으면 향이 죽습니다. 처마 왼쪽보다 오른쪽이 바람이 덜 듭니다."

청아가 작게 투덜거렸다.

"나리께서는 왜 늘 장독과 창포 자리를 그렇게 잘 아세요?"

윤백은 잠시 생각하더니 엄숙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길을 잃지 않으려면 장독과 창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청아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강무진이 회랑 아래 어둑한 곳에서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윤백의 말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순간, 눈썹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월령은 웃음을 삼켰다.

윤백은 곧 물러났다.

그가 사라진 뒤, 서윤이 낮게 물었다.

"왕부에서는 자주 언니께 전갈을 보내나요?"

대청 안이 조용해졌다.

월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윤의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조금 전 청아를 보며 웃던 것과 달랐다.

"심가 장부가 흔들리고 있으니, 섭정왕 전하께서도 살피시는 모양이야."

월령은 차분히 말했다.

"북문군 일이잖아."

"네."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나라의 일이니까요."

그 아이는 믿는 척을 했다.

월령도 모르는 척을 했다.

접힌 종이 안에는 아주 짧은 글이 들어 있었다.

문이 막히면 종이는 사람 손으로 간다.

사람 손을 막지 마라.

글자는 죄가 없게 두고, 줄의 순서만 기억하라.

맨 아래에는 작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검은 점.

바둑판 위에 첫 돌을 놓은 것처럼.

월령은 그 글을 오래 보았다.

밤이 되기 전, 등초본은 완성되었다.

서윤의 손목은 뻣뻣해졌고, 손가락 끝에는 먹빛이 조금 묻었다. 청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왔지만 서윤은 바로 씻지 않았다. 글씨가 마르는 동안 계속 종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이름이 그 종이 어딘가에 적혀 있기라도 한 듯이.

월령은 마지막 장의 끝을 확인했다.

수량은 원장과 같았다.

창고명 순서만 달랐다.

북쪽에서 동쪽, 다시 남쪽.

그 길은 오늘 서원당 대청에서만 열린 길이었다.

"잘 썼어."

월령이 말했다.

서윤의 눈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정말요?"

"응. 네 글씨는 곧고 깨끗해."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서윤은 칭찬을 받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언니께서 옆에서 살펴 주셔서 그래요."

공손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주 작은 거리가 있었다.

월령은 그 거리를 억지로 좁히지 않았다.

그날 밤, 월령은 다시 측백나무 아래로 갔다.

비는 약해졌으나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나뭇잎 끝마다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흙은 낮 동안 밟힌 발자국을 검게 품고 있었다. 등불은 멀리 있었다. 후원 끝은 세상에서 한 걸음 비켜난 곳처럼 조용했다.

위지헌은 오늘도 먼저 와 있었다.

검은 우산이 그의 어깨 위에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산살 끝에서 떨어지는 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땅을 두드렸다. 그는 젖지 않았다. 비조차 그의 곁에서는 허락을 받고 내리는 듯했다.

월령은 그 생각을 하자 스스로 놀랐다.

이런 생각은 위험했다.

"순서를 바꾸었느냐."

위지헌이 물었다.

"예. 숫자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잘했다."

그는 늘 짧게 말했다.

그런데 그 짧은 말이 오늘은 어쩐지 뜨겁게 느껴졌다.

월령은 손을 소매 안에 숨겼다.

"정말로 이것만으로 알 수 있습니까?"

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

"정말? 묻고 싶은 것이 그것뿐인가."

그가 되물었다.

월령은 숨을 고르다 말했다.

"예?"

"네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지."

위지헌은 우산을 조금 기울였다. 그제야 월령은 자신의 어깨 끝에 비가 닿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산의 그늘이 그녀 쪽으로 넘어왔다.

감송향이 비 냄새 사이로 낮게 번졌다.

"묻고 싶은 것은, 서윤을 다치게 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느냐는 것 아닌가."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너무 쉽게 짚었다.

월령이 숨긴 말까지.

월령은 그것이 무서웠다. 누군가 마음을 알아본다는 것은 다정한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숨을 곳이 줄어드는 일이었다.

"정말?"

위지헌이 낮게 물었다.

"내가 틀렸나."

월령의 귀 끝이 아주 조금 뜨거워졌다.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이렇게 보아라."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오늘 만든 종이는 서윤의 죄가 아니다. 숫자를 바꾸지 않았고, 없는 것을 적지 않았고, 봉인을 풀지 않았다. 그 아이가 한 일은 집안 공문을 정서한 것뿐이다."

월령은 그 말에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종이의 길을 훔쳐 가면요."

"그때는 훔쳐 간 자의 죄다."

위지헌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칼을 쥔 손과 칼집을 닦은 손은 다르다. 네가 구분해야 하는 것은 그 차이다."

월령은 고개를 들었다.

"그 차이를 모두가 알아줄까요?"

그 질문은 너무 어린 것 같았다.

그러나 위지헌은 웃지 않았다.

"모두가 알아주기를 기다리면 늦는다."

그는 아주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월령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더 낮게 말했다.

"군법은 먼저 길을 막고, 나중에 죄를 묻는다. 지금은 길을 막는 중이다. 네가 서윤을 살리고 싶다면, 그 아이가 어느 길에 섰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월령은 빗소리를 들었다.

서윤이 흰 실을 보던 눈.

공문 앞에서 어른스럽게 굳던 어깨.

저도 심가 사람이니까요, 하고 말하던 목소리.

모두 떠올랐다.

"서윤이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월령이 아주 낮게 말했다.

"누군가 자기를 불러 주기를요."

"안다."

"그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이 밉습니다."

"미워해도 된다."

그 대답이 너무 단순해 월령은 그를 보았다.

위지헌은 그녀에게 더 어려운 도리를 들이밀지 않았다.

"다만 미워하는 손으로 그 아이를 잡지는 마라. 손에 힘이 들어간다."

월령의 목이 막혔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가장 무서운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들을 수 있는 말로 낮췄다. 군법, 바둑, 문, 길. 오늘은 손이었다.

월령은 그 쉬운 말이 오히려 더 견디기 어려웠다.

다정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이 판을 반드시 이겨야 하니, 그녀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심가의 딸이 흔들리면 장부도 흔들리고, 장부가 흔들리면 북문군도 흔들린다.

그것뿐이어야 했다.

"왕야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위지헌의 눈이 아주 고요하게 내려왔다.

비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묻고 싶은가."

월령은 입술을 다물었다.

묻고 싶었다.

두려웠다.

그의 대답이 정치라면 서러울 것이고, 정치가 아니라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아직은 아닙니다."

위지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거기까지 두어라."

그는 그녀가 피할 자리를 남겼다.

"대신 오늘은 이것만 기억해라. 문틈은 바람이 먼저 찾는다. 사람도 그렇다. 아픈 곳을 들여다보는 자가 먼저 들어온다."

월령은 숨을 삼켰다.

"그럼 서윤이의 아픈 곳은..."

"기다림."

위지헌의 답은 짧았다.

"그리고 칭찬."

그 두 단어가 월령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서윤의 모든 하루가 그 안에 있었다.

위지헌은 우산을 그녀 쪽으로 더 기울였다. 그의 어깨 끝이 비에 젖기 시작했다.

월령은 그것을 보고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위지헌이 낮게 말했다.

"조금만 그대로 있어라."

명령처럼 들렸으나, 목소리는 조용했다.

"네가 젖으면 청아가 먼저 운다."

월령은 순간 대답을 잃었다.

그 말이 너무 엉뚱하게 다정해서.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멀리서 윤백이 헛기침을 했다.

강무진의 낮은 목소리가 그 뒤를 눌렀다.

"조용히."

윤백은 즉시 조용해졌다.

월령은 이번에는 정말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웃음은 입술 끝까지 왔다가, 빗물처럼 조용히 내려앉았다.

측백나무의 밤은 그렇게 조금 덜 무서웠다.

그러나 심가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손을 씻었다.

따뜻한 물이 손끝의 먹빛을 천천히 풀었다. 검은 물이 그릇 안에서 얇게 번졌다. 서윤은 그 물을 오래 보았다. 아무리 문질러도 손톱 밑에는 아주 작은 먹빛이 남았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오늘 자신의 손은 집안일을 했다.

어머니가 보았고, 둘째 숙부가 보았고, 언니도 칭찬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은 비어 있었다.

칭찬을 받았는데도, 누군가의 눈은 여전히 언니를 먼저 보았다. 왕부의 사람은 언니에게만 접은 종이를 전했고, 언니는 자신이 모르는 말을 알고 있었다. 심가의 장부도, 궁의 종이도, 왕부의 소식도 모두 언니의 손끝을 지나갔다.

서윤은 젖은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때 화장대 위에서 흰 실이 보였다.

아침 정청에서 바닥에 떨어졌던 것과 같은 빛의 실이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실은 작게 접힌 종이 조각을 묶고 있었다. 종이는 너무 얇아 빗물 한 방울에도 찢어질 것 같았다.

서윤은 방문 쪽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실을 풀었다.

종이 안에는 글자가 세 줄뿐이었다.

반듯한 매듭을 보았다.

기다리는 손은 오래 버려두지 않는다.

서쪽 편문, 비 그친 뒤.

서윤의 손끝이 떨렸다.

삼전하의 이름은 없었다.

자녕궁의 인장도 없었다.

그러나 이름이 없어서 더 깊이 들어왔다. 칭찬은 출처가 없어도 따뜻했고, 기다림은 답이 없어도 사람을 끌었다.

서윤은 종이를 접었다.

한씨에게 말해야 한다.

언니에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언니에게 말하면 언니는 부드럽게 막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말하면 어머니는 기뻐하면서도 겁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또 누군가의 뒤에 서게 될 것이다.

서윤은 흰 실을 손가락에 감았다.

너무 세게 감아 손끝이 조금 붉어졌다.

비는 자정 무렵에야 그쳤다.

심가의 서쪽 편문은 평소 거의 쓰지 않는 문이었다. 담장 밖에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었고, 비가 오면 뿌리 근처에 물이 고였다. 하인들은 그 길을 싫어했다. 흙이 질어 발이 빠지고, 밤에는 등불이 닿지 않았다.

서윤은 그 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등초본을 들고 오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는 없었다.

다만 오늘 글을 쓰다 남은 먹 묻은 흡지 한 장을 품에 넣고 있었다. 수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창고명의 순서가 희미하게 눌려 있었다. 글자는 뚜렷하지 않았지만, 눈이 좋은 사람이라면 따라 읽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서윤은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아직 몰랐다.

아니,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그저 누군가 자신의 손을 알아보았고, 자신을 오래 버려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 달았다.

서윤은 서쪽 편문의 빗장을 손끝으로 만졌다.

차가웠다.

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 대신 흰 실을 빗장 끝에 묶었다.

매듭은 반듯했다.

너무 반듯해서, 밤눈에도 잘 보였다.

서윤은 한 걸음 물러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했고, 처음으로 자기 뜻대로 무언가를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급히 돌아섰다.

치맛자락이 젖은 흙을 스쳤다.

서윤이 사라진 뒤에도 흰 실은 편문에 남아 있었다.

담장 위의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기윤이 고개를 아주 조금 들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직 들어온 사람도 없었다.

다만 빗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는 흰 실 하나가, 밤의 손끝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틈은 그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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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5.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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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4.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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