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아침 햇살은 젖은 종이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
비가 그친 다음날의 빛은 맑았으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서원당 대청 앞마당에 길게 비껴든 볕은 아직 물기를 품은 돌바닥 위에서 희게 부서졌고, 처마 끝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들은 가끔씩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
청아는 낮은 평상 셋을 대청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그 위에 흰 천을 깔고, 다시 그 위에 등초본을 베껴 쓸 때 받쳤던 흡지를 한 장씩 펼쳤다. 종이는 밤사이 눅어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말려 있었고, 먹이 스친 곳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남았다.
"젖은 종이는 그냥 두면 곰팡이가 습니다."
청아가 지나가는 하인들에게 일부러 또박또박 말했다.
"아가씨께서 한 장도 빠짐없이 말리라 하셨어요. 한 장도요."
말끝의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있었다.
월령은 대청 안쪽에서 그 모습을 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청아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다만 아주 열심히 하는 거짓말은 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원래 작은 일도 세상에서 가장 큰 일처럼 떠드는 아이였으니까.
부엌 하녀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종이도 청아 손에 걸리면 쉬이 못 숨겠구나."
청아는 순간 움찔했으나 곧 허리를 폈다.
"숨으면 더 눅습니다."
그 말이 너무 엄숙해서, 하녀들이 작게 웃었다.
월령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평상 위의 흡지는 스물여덟 장이었다.
어제 등초본을 베끼는 동안 청아가 갈아 댄 흡지는 모두 스물아홉 장이었다. 아이는 숫자를 잘못 세는 일이 잦았지만, 물건을 놓은 자리는 잘 잊지 않았다. 월령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 장이 없었다.
너무 작아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틈이었다. 그러나 월령에게는 그 자리가 대청 한가운데 난 구멍처럼 보였다. 그 안으로 바람이 들고 있었다.
청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가씨."
"응."
"한 장이..."
월령은 눈짓으로 말을 멈췄다.
청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는 잘 참았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어찌나 결연한지, 월령은 그 와중에도 마음 한편이 조금 풀렸다.
"잘 말려 줘."
월령은 부드럽게 말했다.
"오후가 되면 뒤집어야 할 거야. 가장자리가 먼저 마르니까."
"예. 가장자리부터."
청아는 그 말을 마음속에 새기듯 중얼거리고 다시 평상 쪽으로 갔다.
서원당 안에는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어제보다 더 옅었다. 약방의 종이 달인 탕약에는 감초를 조금 줄이고 배즙을 넣었다. 부엌에서는 흰죽 대신 좁쌀을 조금 섞은 죽을 끓였고, 하녀들은 그릇 가장자리에 묻은 밥풀까지 깨끗이 닦았다.
심가의 하루는 그렇게 아무 일 없는 집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 일 없는 집은 없었다.
대문 밖에는 호부 공문이 지나간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고, 서쪽 편문에는 아직 흰 실이 묶여 있었다. 자녕궁에서 온 오색실은 빈 칠합만 남겼고, 남쪽 별원에서 사라진 작은 수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월령은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
따뜻한 차가 손끝을 데웠다.
따뜻함은 이상하게 죄책감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은매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서원당 뒤 창고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낮에는 약재 자루 사이에 앉아 있고, 밤에는 청아가 가져다준 이불 한 장을 덮고 잠들었다. 먹는 것은 조금씩 늘었지만, 소리가 나는 음식은 삼키지 못했다. 죽 한 숟가락을 넘기다가도 복도 발소리가 나면 그대로 굳었다.
그런 아이에게 어미와 동생이 옮겨졌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찾고 있다고 말하면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월령은 눈을 내리깔았다.
진실은 때로 칼보다 잔인했다. 그러나 거짓은 사람을 더 오래 썩혔다.
대청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윤이었다.
하늘빛 치마 대신 오늘도 연한 회색 치마를 입었다. 어제 묻었던 흙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정성껏 털어 낸 모양이었다. 머리에는 작은 진주 비녀를 꽂았고, 눈 밑에는 얇은 분이 올라가 있었다.
서윤은 평상 위 흡지를 보자 아주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 멈춤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월령은 보았다.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굳었다가 풀리는 것까지.
"언니."
서윤은 예를 갖췄다.
목소리는 얌전했다.
어머니가 좋아할 목소리였다.
"일찍 왔구나."
월령은 나긋하게 말했다.
"어젯밤은 잘 잤니?"
"예."
거짓말은 너무 고왔다.
어린아이의 거짓말은 서툰데,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의 거짓말은 때로 지나치게 반듯했다. 금방 깨질 것처럼 반짝였다.
월령은 그 반짝임을 건드리지 않았다.
"흡지를 말리는 중이야. 비가 온 뒤라 종이가 눅었거든."
"그렇군요."
서윤의 시선이 평상 위를 스쳤다.
스물여덟 장.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듯, 종이 한 장 놓일 만큼의 햇살만 남아 있었다.
서윤이 그것을 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아이의 속눈썹이 아주 느리게 내려앉았다. 마치 눈을 감으면 숫자가 사라질 것처럼.
"도와줄까?"
서윤이 물었다.
월령은 잠시 그 아이를 보았다.
도와주겠다는 말은 도망갈 자리를 찾는 말일 수도 있고, 돌아올 자리를 더듬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래."
월령은 웃었다.
"네 손이 가벼우니 종이가 덜 울겠지."
서윤은 그 말에 아주 희미하게 숨을 들이켰다.
칭찬인지 아닌지, 그 아이는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이었다.
청아가 얼른 마른 천을 내밀었다.
"서윤 아가씨, 이쪽은 이미 한 번 펴 두었습니다. 너무 세게 누르면 먹자국이 번질 수 있으니, 천으로 가장자리만 살짝 눌러 주세요."
"네가 나보다 더 잘 아는구나."
서윤이 작게 말했다.
청아는 당황했다.
"아니요, 그건... 제가 종이를 많이 울려 봐서요."
서윤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그 작은 웃음이 나오자, 대청의 공기가 한 번 낮게 움직였다. 웃음은 위태로웠지만 진짜였다. 월령은 그 웃음을 보며 찻잔을 들었다.
서윤은 평상 앞에 앉아 흡지 가장자리를 천천히 눌렀다.
손끝은 어제보다 덜 붉었다. 그러나 손가락 마디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자국이 남아 있었다. 흰 실을 세게 감았던 자리였다. 월령은 보았지만,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종이는 하나씩 뒤집혔다.
젖은 먹 냄새가 햇살을 만나 아주 희미하게 올라왔다. 어제의 장부가 오늘은 그저 말려야 할 종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이는 모르는 척했을 뿐,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먹이 닿았던 자리, 손이 오래 눌렀던 자리, 급히 접혔다 펴진 자리까지 모두 얇게 품고 있었다.
서윤의 손이 종이 한 장 분량으로 비어 있던 곳 앞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청아는 못 본 척 다른 평상 쪽으로 갔다. 너무 못 본 척하려 애써서 오히려 티가 났지만, 다행히 서윤은 그것을 볼 정신이 없었다.
월령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비가 오면 종이는 잘 숨지 못해."
서윤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예?"
"소매 속에 넣어도 눅고, 책갈피 사이에 넣어도 결이 남아. 그러니 젖은 종이는 빨리 말리는 게 좋아."
월령은 그 아이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눅은 종이가 나오면, 이쪽에 두렴. 다른 종이와 섞어 말리면 된다."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이 아주 작게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때 한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아이가 아침부터 부지런하구나."
한씨가 회랑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짙은 자색 치마에 옅은 분 냄새가 났다. 손에는 손수건을 쥐고 있었고, 그 모서리는 오늘도 아주 미세하게 비뚤어져 있었다. 서윤은 어머니를 보자 허리를 더 곧게 폈다.
월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숙모."
"큰아가씨는 참 꼼꼼도 하다. 종이 한 장까지 직접 말리다니."
한씨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눈은 평상 위를 지나며 종이 수를 세고 있었다. 스물여덟 장을 지나, 누구도 먼저 손대지 못하는 작은 틈 앞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한씨도 보았을까.
월령은 손끝을 소매 안에 접었다.
"젖은 종이는 나중에 말썽이 되기 쉬워서요."
"그렇지. 작은 눅음이 큰 흠이 되기도 하지."
한씨는 서윤 쪽을 보았다.
"서윤아, 네 손은 괜찮으냐. 어제 글을 오래 썼다지."
"괜찮습니다, 어머니."
서윤의 목소리는 곧았다.
"괜찮다는 말만 잘하는구나."
한씨가 웃었다.
다정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 웃음 아래에서 서윤의 손끝이 조금 더 하얘졌다.
월령은 그 손을 보았다.
어머니의 칭찬을 기다리는 손.
어머니의 실망을 두려워하는 손.
궁의 부름과 언니의 다정함 사이에서 어디에 놓여야 할지 몰라 떨리는 손.
한씨는 평상 위 흡지 하나를 집으려 했다.
월령이 먼저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덜 말랐습니다, 숙모."
한씨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렇구나."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수건으로 손끝을 눌렀다.
"나는 그저 서윤이 글씨가 남았나 보려던 참이었다."
"먹자국은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아쉽구나. 이 아이 손이 고운 편인데."
서윤의 귀 끝이 붉어졌다.
한씨는 그 붉어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딸을 아끼고 있었다. 그 마음이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그 아낌은 너무 자주 쓸모의 이름을 달고 왔다. 딸이 빛나야 자신의 자리도 빛난다고 믿는 사람의 손은, 때로 사랑으로도 아이를 밀었다.
월령은 그 손을 미워하면서도, 왜 그렇게 굳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심가의 대문 안에서 웃을 때도, 조상 제례 때 향을 올릴 때도, 손님들이 먼저 찾는 이는 늘 장군 부인이었다. 한씨의 얼굴은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손수건 모서리는 언제나 조금씩 비뚤어졌다. 그 비뚤어진 끝이 오래 쌓이면 사람 마음도 비뚤어진다.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디서부터 썩었는지 알아야 뿌리를 자를 수 있었다.
"서윤이 글씨는 고우니, 언젠가 더 좋은 자리에서 보실 날도 있겠지요."
월령은 조용히 말했다.
한씨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빛났다.
"큰아가씨가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서윤은 두 사람 사이에서 숨을 죽였다.
그 아이는 칭찬이 오가는데도 기뻐하지 못했다. 칭찬이 칼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배워 가는 얼굴이었다.
한씨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종이가 마르면 서윤이 방으로 한 장 보내 주렴. 글씨 연습에 쓴다 하더라."
그 말에 서윤의 얼굴이 굳었다.
월령은 못 들은 척 웃었다.
"마른 뒤에 보겠습니다. 눅은 종이는 손을 상하게 하니까요."
"큰아가씨는 늘 몸 걱정이 많구나."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그 말은 부드러웠으나, 한씨의 미소가 아주 잠깐 굳었다.
심가의 안채에서 가장 오래 첫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한씨는 곧 웃음을 되찾고 물러났다. 치맛자락 끝에서 자색 비단 냄새가 희미하게 남았다.
서윤은 어머니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윤아."
월령이 낮게 불렀다.
"예."
"손이 아프면 쉬어."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그 말이 조금 작았다.
월령은 더 묻지 않았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없던 한 장이 돌아왔다.
아무도 그것을 들고 오지 않았다.
청아가 뒤집어 놓은 흡지 사이에, 처음에는 없던 종이가 끼어 있었다. 가장자리는 다른 종이보다 조금 더 눅었고, 접혔다 펴진 자국이 대각선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청아는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숨을 멈췄다.
월령은 천천히 다가갔다.
서윤은 그때 대청 맞은편에서 마른 천을 접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귀 끝이 아주 희게 질려 있었다.
월령은 돌아온 흡지를 집지 않았다.
손끝이 닿으면 아이의 마음이 또 굳을 것 같았다.
"청아."
"예."
"이 종이는 아직 덜 마른 것 같구나. 그늘 쪽에 따로 두자."
"예."
청아는 너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월령은 서윤을 보지 않았다.
"젖은 종이가 제 자리를 찾아와 다행이야."
그 말에 서윤의 손이 멈췄다.
얇은 천이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다.
월령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고백은 얼굴을 마주 보지 않을 때 더 쉽게 숨을 쉰다.
흡지를 따로 둔 뒤, 월령은 청아에게 바람이 덜 드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 두어. 볕이 너무 세면 먹자국이 먼저 살아날 수 있어."
청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먹자국이 살아나요?"
"종이는 죽은 척을 잘하거든."
월령은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물과 볕을 만나면 숨긴 것을 조금씩 내놓아."
청아는 흡지를 내려놓으며 아주 조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 아이는 이제 종이를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을 너무 많이 주는 것이 청아의 약점이자 장점이었다.
서윤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청을 떠나기 전, 그녀는 흡지가 놓인 그늘 쪽을 한 번 보았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있었고, 조금의 안도도 있었다.
월령은 그 안도를 놓치지 않았다.
돌아올 자리는 아주 좁았지만,
일단 돌아왔다.
오후가 되자 서원당 뒤 창고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은매는 빛을 보자 먼저 눈을 감았다. 한동안 어둠에 익숙해진 탓에, 회랑 끝에서 들어오는 햇살도 너무 밝은 모양이었다. 얼굴은 전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뺨은 여전히 말랐고, 손목은 약재 자루 끈보다 가늘어 보였다.
청아가 뒤에서 작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묽은 죽과 삶은 배 한 조각, 따뜻한 물이 담긴 작은 사발이 있었다.
"천천히 먹어."
월령은 문턱 안쪽에 앉았다.
은매는 바로 먹지 않았다.
그 아이는 월령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아가씨."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말해도 됩니까."
"응."
은매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손톱 밑의 검푸른 가루는 이제 거의 사라졌으나, 월령의 눈에는 아직 그 흔적이 보이는 듯했다. 적련초의 냄새, 약방 바닥, 엎드린 이마.
"제 어미와 동생은..."
청아의 손이 쟁반 아래에서 굳었다.
월령은 숨을 아주 조용히 들이켰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찾고 있어."
은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가에 계신 것이 아닙니까."
"아직 데려오지 못했어."
은매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바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서 피가 먼저 빠졌다. 사람은 너무 무서우면 울지 못한다. 월령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가..."
은매의 목소리가 끊겼다.
"제가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네 가족을 미끼로 삼은 사람이 죄를 지은 거야."
월령은 천천히 말했다.
위지헌의 말이 입 안에서 조금 달라져 나왔다. 그의 단단한 말보다 더 부드럽게, 은매가 삼킬 수 있을 만큼 낮게.
"너를 탓하려고 부른 게 아니야."
"하지만 제가 약을..."
"그래. 네가 약을 들었지."
월령은 피하지 않았다.
"그건 사라지지 않아."
은매의 어깨가 떨렸다.
"그래도 그 죄 때문에 네 어미와 동생이 죽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죄는 네가 갚아야 할 것이고, 벌은 죄지은 사람이 받아야 해. 가족을 미끼로 잡은 사람은 따로 있어."
은매는 그제야 눈물을 떨어뜨렸다.
눈물은 아주 조용히 턱 아래로 흘렀다.
청아가 급히 소매를 뒤지다 손수건을 꺼냈다. 너무 빨리 꺼내는 바람에 함께 넣어 두었던 작은 실꾸리까지 굴러 나왔다. 청아는 그것을 주워 넣으려다, 은매의 눈치를 보고 멈칫했다.
은매가 그 실꾸리를 보았다.
"그 색..."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월령이 시선을 내렸다.
실꾸리는 옅은 회색이었다.
"아는 색이니?"
은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제 동생이 손목에 묶고 다니던 실과 비슷합니다. 어미가 낡은 속곳 자락을 꼬아 만든 거라... 색이 꼭 저렇습니다.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고."
청아가 바로 실꾸리를 들어 보였다.
"이건 제 바느질함에 있던 겁니다. 하지만 비슷하다면..."
은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기침을 심하게 하면 손목을 긁습니다. 그래서 어미가 실을 묶어 주었어요. 긁지 말라고. 매듭이 작게 두 번 들어갑니다. 한 번은 약하게, 한 번은 세게."
월령의 가슴이 조용히 조여 왔다.
"두 번."
"예."
은매는 죽 사발을 보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동생은 밤에 기침을 참을 때 혀끝으로 이를 칩니다. 딱, 딱, 하고요. 소리를 내면 혼날까 봐."
월령은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았다.
작은 실.
두 번 매듭.
기침을 참는 소리.
사람을 찾는 데에는 이름보다 이런 것들이 더 오래 남는다. 권력자들은 이름을 바꾸고, 장부를 고치고, 수레를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기침 버릇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고마워."
월령이 말했다.
은매는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은 나중에 따지자."
월령은 죽 사발을 은매 쪽으로 조금 밀었다.
"지금은 먹어. 네가 쓰러지면 네 가족을 찾았을 때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없어."
은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말은 잔인한 위로였지만, 필요한 말이었다.
은매는 결국 숟가락을 들었다.
첫 숟가락은 거의 삼키지 못했다. 두 번째 숟가락에서야 목울대가 움직였다. 청아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청아."
월령이 낮게 부르자 청아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예."
"울면 죽이 짜져."
청아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은 안 넣었습니다."
은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울음 사이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월령은 그 웃음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자신이 먼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왕부의 전갈은 평소보다 늦게 왔다.
윤백이 아니라 강무진이었다.
강무진은 대청 그림자 안에 서 있었다. 몸집이 커서 그림자마저 무거워 보였다. 그는 예를 올릴 때도 필요 이상으로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무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어디까지 숙여지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청아는 그를 보자마자 한 걸음 물러섰다.
강무진이 내려다보았다.
"놀라지 마라."
목소리는 낮았고, 말은 짧았다.
청아는 더 놀랐다.
"예. 안 놀랐습니다."
완전히 놀란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강무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윤백의 목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들렸다.
"무진은 위로가 서툽니다."
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
"윤백 나리도 오셨어요?"
"저는 지나가던 중입니다."
"늘 지나가시네요."
"길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강무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윤백은 담장 너머에서 더 말하지 않았다.
월령은 그 짧은 소란 덕에 조금 숨을 돌렸다.
강무진은 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낡은 회색 천이었다. 끝에는 두 번 묶은 실매듭이 있었다. 한 번은 약하고, 한 번은 세게.
월령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어디서 찾았습니까."
"남쪽 길목."
강무진은 천 조각을 내려놓았다.
"수레는 놓쳤습니다."
청아가 숨을 삼켰다.
강무진은 변명하지 않았다.
"아이 기침 소리를 들은 자가 있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그 말에 월령은 눈을 감을 뻔했다.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 방 안의 숨을 붙들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지, 그곳에 선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왕야께서는요."
월령이 물었다.
강무진의 시선이 아주 잠깐 움직였다.
"남운로 쪽을 보고 계십니다."
남운로.
등초본의 마지막 동그라미가 찍혔던 곳.
은매 가족을 옮긴 수레와 심가 장부의 함정이 같은 길목으로 모이고 있었다.
월령은 손수건을 접었다.
"왕야께 전해 주세요. 은매 동생은 기침을 참을 때 혀끝으로 이를 친다고 합니다. 딱, 딱, 하고요."
강무진의 눈이 아주 작게 변했다.
아마 그에게는 그것이 이름보다 쓸모 있는 정보일 것이다.
"전하겠습니다."
그는 곧 물러나려 했다.
월령은 그를 불렀다.
"강 호위."
강무진이 멈췄다.
"고맙습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그에게는 긴 대답인 듯했다.
강무진이 사라지자 청아가 숨을 내쉬었다.
"무섭지만 좋은 분 같아요."
"둘 다 맞을 거야."
월령이 말했다.
담장 너머에서 윤백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대체로 그렇습니다."
청아가 담장 쪽을 홱 보았다.
"아직 계셨어요?"
"이제 정말 지나갑니다."
이번에는 강무진의 낮은 목소리가 뒤따랐다.
"윤백."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청아는 한참 담장 쪽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부 사람들은 왜 다 조금씩 이상할까요."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천 조각을 보았다.
두 번 묶인 매듭.
약하게 한 번, 세게 한 번.
아이의 손목에 묶여 있었을 작은 자리.
그 자리까지 적의 손이 닿았다.
밤이 내리고, 월령은 다시 측백나무 아래로 갔다.
오늘의 밤은 맑았다. 비가 씻고 간 하늘에 별이 몇 개 떠 있었고, 젖은 잎들은 달빛을 받아 검은 비단처럼 빛났다. 후원 끝 살구나무에는 작은 열매가 더 또렷해져 있었다. 꽃이 지고 남은 것들은 처음에는 보잘것없어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 더 단단해진다.
위지헌은 작은 바둑판을 들고 있었다.
월령은 걸음을 멈췄다.
"정말 가져오셨습니까."
묻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놀란 목소리를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지헌의 눈빛이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말로 하면 네가 정치라 오해한다 하지 않았나."
"제가 오해한다고 하신 건 왕야십니다."
"그럼 내가 바로잡을 책임도 있겠지."
월령은 대답을 잃었다.
그는 바둑판을 측백나무 아래 낮은 돌 위에 놓았다. 작은 여행용 판이었다. 격자는 손바닥 두 개를 붙인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흑돌과 백돌은 작은 주머니에 나뉘어 담겨 있었다.
감송향이 밤공기 속에서 낮게 번졌다.
월령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가까이 갔다.
"앉아라."
위지헌이 말했다.
명령처럼 짧았지만, 손은 먼저 돌 위의 물기를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월령은 그 손끝을 보았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돌 표면의 물기를 천천히 걷어 냈다. 다른 사람에게는 칼을 쥘 손이, 지금은 그녀가 앉을 자리를 닦고 있었다.
월령은 그 생각이 너무 위험해 얼른 눈을 내렸다.
"괜찮습니다."
"젖은 자리에 앉으면 청아가 또 운다."
"청아 핑계를 자주 대십니다."
말이 나간 뒤, 월령은 스스로 놀랐다.
위지헌은 그녀를 보았다.
"그럼 네 핑계를 대도 되나?"
월령의 숨이 멎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 사람처럼 바둑돌 주머니를 열었다. 그러나 월령의 귀 끝은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왕야."
"앉아라. 돌이 젖는다."
돌이 젖는다는 말은 핑계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월령은 결국 앉았다.
위지헌은 흑돌 하나를 판 위에 놓았다.
"이것이 서윤이다."
그는 곧 백돌 셋을 멀찍이 놓았다.
"자녕궁, 호부, 문밖의 손."
월령은 판을 내려다보았다.
"셋이 모두 서윤이를 향하고 있군요."
"그래."
"그러면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위지헌은 곧장 막지 않았다. 대신 흑돌 옆 한 칸을 비워 두고, 그 너머에 다른 흑돌 하나를 놓았다.
"이것은 너다."
월령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제가 너무 멀지 않습니까?"
"가까우면 그 아이가 숨을 못 쉰다."
그는 아주 차분히 말했다.
"멀면 손이 닿지 않고."
월령은 판 위의 빈 칸을 보았다.
서윤과 자신 사이에 남은 자리.
딱 한 칸.
"오늘 네가 만든 자리가 여기다."
위지헌은 그 빈 칸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흡지를 말리는 자리."
월령의 숨이 낮아졌다.
"돌아왔습니다."
"안다."
"보셨습니까?"
"너의 얼굴을 보았다."
월령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들었다.
위지헌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종이가 돌아왔을 때, 네가 울지 않은 얼굴을 했겠지."
월령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보지 않았는데도 보았다.
언제부터 이 사람은 자신을 이렇게 읽었을까.
아니, 읽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월령은 다시 그 생각에 매달렸다. 섭정왕은 사람의 얼굴을 읽고, 판의 흐름을 보고, 필요한 수를 둔다. 자신도 그 판 위의 돌일 뿐이라고.
그런데 왜.
그의 목소리는 이렇게 조용한가.
"정말?"
위지헌이 낮게 물었다.
월령은 놀라 눈을 들었다.
"지금 또 같은 생각을 했나."
"무슨..."
"내가 너를 돌로 본다고."
월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위지헌은 웃지 않았다.
그는 백돌 하나를 집어 판 밖에 놓았다.
"돌은 내가 손으로 옮긴다. 너는 아니다."
목소리는 낮고 분명했다.
"너는 네가 어디에 설지 스스로 고른다. 그래서 내가 묻고, 설명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월령은 숨을 삼켰다.
말이 너무 쉬웠다.
그래서 도망칠 틈이 없었다.
"제가 틀린 곳에 서면요."
"그러면 말하겠다."
"그래도 제가 듣지 않으면요."
위지헌의 시선이 아주 깊어졌다.
"그때는 네가 들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다시 찾겠다."
달빛이 바둑판 위에 고였다.
월령은 손끝으로 소매를 쥐었다. 숨이 자꾸 얕아졌다. 그는 매번 이렇게 말한다. 무섭지 않은 말로 무서운 것을 설명하고, 다정하지 않은 얼굴로 다정한 일을 한다. 그래서 월령은 더 혼란스러웠다.
"왕야께서는..."
월령은 말을 삼켰다.
왜 제게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 질문은 아직 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위지헌은 기다렸다.
마치 질문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멀리서 윤백이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강무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 더 멀리 보내졌을 것이다. 남운로 쪽으로.
위지헌은 바둑돌을 하나 더 놓았다.
"은매 가족 쪽은 무진이 쫓고 있다."
월령은 곧장 정신을 붙잡았다.
"살릴 수 있습니까."
"살릴 것이다."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차갑게 들리지 않았다.
위지헌은 이어 말했다.
"다만 적도 네가 은매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미끼를 흔들 것이다."
"제가 흔들리면..."
"흔들려도 된다."
월령이 그를 보았다.
위지헌은 백돌 하나를 손끝으로 굴렸다.
"돌이 흔들린다고 판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흔들리는 것을 숨기려 하면 손이 늦는다."
"왕야께 말씀드리라는 뜻입니까."
"그래."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에게 말해라."
감송향이 가까웠다.
월령은 그 향 안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답답하지 않았다. 답답하지 않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제가 왕야를 믿어도 됩니까."
말은 거의 숨처럼 나왔다.
위지헌의 손이 멈췄다.
그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월령의 가슴을 조였다. 너무 긴 침묵이라, 그녀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지헌은 아주 천천히 말했다.
"믿으라 강요하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다만 네가 믿지 못하는 동안에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월령의 눈이 뜨거워졌다.
그 말은 맹세처럼 들렸다.
그런데 맹세라 믿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위지헌은 그녀의 눈가를 보았으나,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바둑돌 하나를 빈 칸에 놓았다.
"이 자리는 비워 두려 했다."
월령은 판을 보았다.
서윤과 월령 사이, 비어 있던 한 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돌이 있으면, 비워 둔 곳도 이름을 얻는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용서가 아니다."
위지헌은 바로 말했다.
"아직은 아니다."
월령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요."
"기회."
말은 조용했다.
"용서는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돌아올 기회다."
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자신이 서윤에게 주고 싶었던 것.
은매에게도 주고 싶었던 것.
어쩌면 자신에게도 필요했던 것.
기회.
그 작은 단어가 바둑판 위에 놓인 흑돌 하나처럼 밤의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그때 담장 밖에서 아주 작은 새소리가 났다.
한 번.
다시 한 번.
위지헌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윤백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왕야."
"말해라."
"남운로에서 연기가 올랐습니다."
월령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수레입니까."
윤백은 월령을 보지 않고 위지헌에게 말했다.
"강무진이 따라붙었습니다. 다만..."
말끝이 끊겼다.
위지헌의 눈이 아주 낮게 가라앉았다.
"다만?"
윤백은 이번에도 짧게 답했다.
"아이 기침 소리가 둘로 갈라졌답니다."
월령은 그 뜻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위지헌이 설명했다.
"미끼를 둘로 나눈 것이다."
바둑판 위의 돌들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하나의 수레가 아니었다.
아이의 기침 소리를 따라가면,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적은 은매 가족을 숨기는 데 그치지 않고, 찾는 사람의 손까지 둘로 찢으려 하고 있었다.
월령은 숨을 삼켰다.
"어느 쪽을..."
위지헌은 이미 일어서고 있었다.
"둘 다."
"하지만 사람이..."
"있다."
그는 월령을 보았다.
"너는 심가에 남아라."
월령의 입술이 벌어졌다.
"저는..."
"은매를 지켜라."
그 말에 월령은 멈췄다.
위지헌은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주 짧게 덧붙였다.
"밖의 미끼를 흔드는 동안, 안의 증인을 노릴 수 있다."
월령의 손이 소매 안에서 굳었다.
은매.
서윤.
흡지.
서쪽 편문.
모든 자리가 한꺼번에 흔들렸다.
위지헌은 바둑돌 주머니를 닫지 않았다. 판 위에는 아직 돌들이 놓여 있었다. 비워 둔 곳과 돌아온 자리, 막아야 할 길과 열어 두어야 할 길이 모두 그대로였다.
"월령."
그가 낮게 불렀다.
월령은 고개를 들었다.
"판은 그대로 두어라."
그 말은 차가웠다.
그러나 이어진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돌아와서 마저 설명하겠다."
그는 바둑판을 남겨 두고 돌아섰다.
감송향이 빠르게 멀어졌다.
월령은 그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못했다. 바둑판 위에는 서윤을 뜻하는 흑돌 하나와, 자신을 뜻한다던 흑돌 하나,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작은 기회 하나가 남아 있었다.
달빛이 그 돌 위에 걸렸다.
멀리 서원당 쪽에서 청아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월령은 일어섰다.
청아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달려왔다.
"은매가... 은매가 없어졌습니다."
순간 밤이 조용해졌다.
바둑판 위의 돌 하나가,
보이지 않는 손에 밀린 것처럼 싸늘하게 빛났다.
한씨는 해가 뜰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서원당 옆 작은 방에는 따뜻한 물이 놓였고, 청아가 급히 데운 죽도 한 그릇 놓였다. 이번 죽은 타지 않았다. 청아는 그것을 세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상 위에 올렸다."이번에는 바닥까지 살아 있습니다."그녀가 낮게 말했다.은호가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제가 봐도 됩니까.""너는 이제 감별관이니?""어제 제가 맞았습니다."청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은매가 아주 작게 웃었다.그 웃음은 눈물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월령은 그 작은 소리를 마음에 담았다. 밤새 편문 앞에서 본 것들, 한씨의 무너진 얼굴, 서윤의 떨리던 손, 잘린 붓끝에 묻은 예부의 붉은 실이 아직 방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청아는 죽의 바닥을 확인했고, 은호는 그 확인을 다시 확인하려 했다.그 사소함 덕분에 아침은 겨우 아침다웠다.서윤은 한씨 곁에 앉아 있었다.어머니의 손을 잡지는 못했다. 대신 이불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붙잡고 있었다. 한씨는 그 손을 보았고, 보지 못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서윤아."한씨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서윤의 어깨가 움찔했다."예, 어머니."그 말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어제와 달랐다. 어머니 마음에 들려고 꾸민 어른의 말이 아니라, 다칠까 봐 조심하는 딸의 말이었다.한씨는 오래 침묵했다."어미가 너를 아낀다."서윤의 눈가가 붉어졌다."예.""그 말로 네가 다친 것이 없어지지는 않겠지."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한씨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밤새 울지 않은 눈은 오히려 더 붉었다."나는 네가 뒤에 서는 것이 싫었다. 내가 평생 그렇게 서 있었으니, 너는 앞으로 가길 바랐다."그녀의 시선이 월령을 향했다가 곧 떨어졌다."그러다 네 등을 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서윤의 손이 이불을 더 세게 쥐었다.한씨는 그 손을 보았다."어젯밤 네가 월령이를 사람이라 했지."서윤은 고개를 숙였다."예.""어미는 너도 사람이라는 걸 자꾸 잊었다."방 안이 조용
남쪽 편문은 낮에도 어두운 곳이었다.담장이 높고, 늙은 측백나무가 길게 그늘을 드리웠으며, 문 아래 돌계단에는 햇빛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그곳의 흙은 늘 조금 눅었다. 집 안에서 버린 물이 몰래 흘러드는 자리라 했다.밤에는 그 어둠이 더 깊어졌다.등불 하나가 멀리 회랑 끝에서 흔들렸고, 편문 앞에는 사람 그림자 셋이 서 있었다.월령은 걸음을 늦췄다.위지헌의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뛰지 마라.혼자 앞서지 마라.그 말을 정치적 수로 이해하려 애썼지만, 몸은 그보다 먼저 기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불안을 꾸짖는 소리가 아니라, 넘치는 물을 손바닥으로 눌러 주는 듯한 소리였다.월령은 숨을 고르게 했다.서윤은 편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잠옷 위에 급히 걸친 외투가 어깨에서 조금 흘러내려 있었다. 머리도 제대로 묶지 못했다. 어른스럽게 꾸민 얼굴이 아닌, 잠을 잃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옆에 한씨가 서 있었고, 문밖에는 검은 장옷을 뒤집어쓴 여인이 있었다.금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떨고 있었다.문밖의 여인은 고개를 숙였지만, 손은 숙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굳어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이 아니라, 비단 끈과 열쇠를 오래 다룬 손이었다.궁녀의 손.문상궁의 사람."숙모."월령의 목소리는 낮았다.한씨의 어깨가 움찔했다.서윤은 돌아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언니."그 한마디에 죄책감이 먼저 묻어났다.월령은 서윤을 보았다."춥겠다."서윤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예?""밤공기가 차. 외투를 여미렴."서윤은 손을 들어 외투를 여몄다. 손이 떨렸다.한씨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오늘도 단정했다. 급히 나온 사람치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 단정함이 오히려 더 절박해 보였다. 무너질 사람은 때로 가장 반듯하게 앉아 무너진다."큰아가씨."한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밤중에 여기까지 오다니, 몸이 상합니다.""숙모께서도 밤중
새벽이 오기 전의 집은 가장 솔직했다.낮에는 예법이 사람을 세우고, 밤에는 두려움이 사람을 눕힌다. 그러나 새벽 직전의 어둠에는 누구도 완전히 서 있지도 눕지도 못한다. 닫힌 문 안쪽에서는 잠든 척하는 숨이 얇아지고, 깨어 있는 등불은 심지를 낮춘 채 오래 버틴다.월령은 서원당 곁 작은 서실에 앉아 있었다.등불은 낮췄고, 탁자 위에는 서윤의 오래된 글과 허도겸이 보낸 등초, 문상궁의 먹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종이와 먹과 사람의 손. 전부 말이 없는데도, 방 안은 너무 많은 말로 가득 찬 듯했다.그녀는 위조된 글의 마지막 획을 다시 보았다.받겠다.그 끝이 유난히 무거웠다.서윤은 끝을 그렇게 누르지 않는다. 서윤의 글은 끝에 이르면 오히려 가벼워졌다.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손은 마지막에서 긴장이 풀린다. 그러나 이 글은 마지막에서 힘이 들어갔다.누군가 결말을 꼭 눌러 닫은 것이다.마치 도망갈 문을 막듯이."잠을 자지 않았군."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월령은 숨을 멈추었다가, 곧 자신을 꾸짖듯 천천히 내쉬었다.위지헌이었다.그가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먹색 대창포 자락에는 새벽 안개가 아주 희미하게 묻어 있었고, 젖은 돌을 밟고 온 듯 신 끝이 어두웠다. 감송향이 서실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월령은 일어나 예를 갖췄다."왕야.""앉아 있어라."말은 낮았지만 딱딱하지 않았다.그는 곧 자신이 너무 짧게 말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덧붙였다."네가 일어서면 종이가 날린다."월령은 잠시 멈췄다.그 말이 명령인지 배려인지 구별하지 못했다.위지헌은 문턱을 넘었다.그는 탁자 가까이 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면 그녀가 숨을 더 조심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감송향은 이미 가까웠다. 월령은 그 향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먹을 보았느냐.""예.""무슨 생각을 했지."월령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자녕궁의 종이, 서윤의 글씨, 문상궁의 먹. 세 가지가
밤은 쉽게 깊어지지 않았다.심가의 안채에는 등불이 오래 남았다. 서원당 처마 아래 작은 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약방 쪽에도 낮은 불빛이 흔들렸다. 하인들은 평소보다 발소리를 낮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집 전체가 숨을 작게 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월령은 목갑 속 먹을 다시 닫았다.문상궁이 두고 간 먹과 같은 냄새.그 말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궁의 물건은 여러 손을 지난다. 문상궁이 들고 왔다고 해서 문상궁이 썼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태후의 뜻이라 해도 태후가 직접 먹을 갈았을 리 없고, 위명서가 필요로 했다고 해서 그가 손끝에 먹을 묻혔을 리 없다.궁의 명은 대개 남의 손끝에 묻어 왔다.손끝은 씻기 쉽고, 명은 더 쉽게 사라졌다."언니."서윤이 아주 낮게 불렀다.월령은 고개를 돌렸다.서윤은 아직 붓함 곁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들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에 아이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얇게 놓여 있었다. 서윤은 그것들을 다시 접지 못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걸,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요.""있었겠지."월령은 거짓말하지 않았다.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래서 월령은 말을 낮췄다."하녀가 보았을 수도 있고, 숙모께서 보셨을 수도 있고, 글씨를 가르치던 사람이 기억했을 수도 있어.""그럼 제가...""아니야."월령은 서윤의 말을 부드럽게 막았다."네가 누군가에게 칼을 준 것이 아니야. 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칼로 갈았을 뿐이야."서윤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하지만 조금 덜 무너진 얼굴이었다.월령은 더 묻지 않았다.그때 청아가 조심스럽게 낮은 상 위에 찻잔을 올렸다."차는 아니고 보리물입니다.""왜 그렇게 작게 말하니.""궁에서 차가 나오면 늘 일이 생겨서요."청아는 아주 진지했다."소인은 당분간 차를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은호가 작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보리도 볶으면 검습니다."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런 말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을 잃은 아이의 얼굴은 이상하게 어려 보였다. 조금 전까지 찹쌀떡 접시를 들고 어른스러운 말을 고르던 입술은 이제 색을 잃었고,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렸다.방 안에는 눌어붙은 죽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창을 열었는데도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불에 닿은 곡식의 냄새는 사람의 옷자락보다 오래 방 안에 머문다. 궁에서 온 글 한 줄도 그랬다. 읽히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 쉬는 곳마다 얇게 달라붙었다.심월령은 기윤이 전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심월령은 황실의 은혜를 달게 받겠다.그 글씨가 서윤의 손과 닮았다고 했다.닮았다.같다고 못 박지 않으면서도, 다르다고도 놓아주지 않았다. 칼보다 얇은 말이었다.서윤의 손끝이 떨렸다."저는 쓰지 않았어요."목소리가 작았다."언니, 저는 정말...""알아."월령은 너무 빨리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급한 믿음은 때로 믿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그녀는 서윤의 손을 보았다. 찹쌀가루가 아직 손톱 가장자리에 희게 끼어 있었다. 궁의 종이를 만진 손이라기보다, 부엌에서 반죽을 조금 망친 아이의 손이었다."네가 쓰지 않은 것 알아."서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런데 왜 제 글씨와 닮았을까요."그 물음에는 두려움보다 더 깊은 부끄러움이 있었다.월령은 그 부끄러움을 알아보았다.서윤은 늘 남의 마음에 드는 법을 먼저 배웠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말투, 어른들이 기특하다 여기는 자세, 태후가 눈길을 줄 만한 글씨. 자기 이름을 쓰기 전에 남의 눈이 좋아하는 선을 익힌 아이였다."혹시."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적이 있어요."방 안이 조용해졌다.청아는 놀라 숨을 삼켰고, 은매는 은호의 어깨를 조금 더 감쌌다. 기윤은 문가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으나, 그 침묵도 들은 사람의 침묵이었다.월령은 서윤을 재촉하지 않았다."어릴 때요. 큰어머니께서 언니 글씨가 곱다 하셨고, 아버지
심월령.그 이름이 자녕궁 안에 떨어진 순간, 향로의 연기마저 잠시 길을 잃은 듯했다.궁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낮췄고, 내관은 두루마리를 든 손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붉은 비단 끝에 매달린 금실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창밖으로 들어오던 봄빛은 바닥의 옥돌 위에서 차갑게 식어, 사람의 얼굴마다 다른 그늘을 얹었다.독고 태후는 웃지 않았다.웃지 않는 얼굴이 더 온화해 보일 때가 있다.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누구의 목숨을 조르는 덫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마땅히 놓아야 할 비단끈이라는 듯했다.월령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손끝은 소매 안에서 차가웠으나 떨리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너무 큰 파도가 오면 사람은 먼저 젖는 대신 굳는다. 숨도, 눈물도, 두려움도 한 박자 늦게 온다.문밖에서 위지헌의 그림자가 길게 들어왔다.감송향이 자녕궁의 단 향을 조용히 밀어냈다. 마른 흙과 오래된 나무, 차갑게 말린 약재의 향. 그 향은 소리 없이 다가왔으나, 자녕궁 안의 누구도 모른 척하지 못했다."그 교서를 멈추십시오."위지헌의 목소리는 낮았다.낮은데도 먼 기둥까지 닿았다.태후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이미 읽혔습니다, 섭정왕.""읽힌 것과 행해지는 것은 다릅니다."위지헌은 문턱을 넘었다.궁녀 하나가 본능적으로 물러났고, 내관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길을 비켰다. 그는 누구에게도 소리치지 않았다. 칼을 뽑지도 않았다. 다만 걸어 들어왔다. 그 한 걸음마다 자녕궁의 공기가 뒤로 밀렸다.태후의 눈빛이 아주 작게 깊어졌다."황제의 어보가 찍힌 교서입니다.""그러므로 더더욱 예를 갖춰야 합니다."위지헌은 두루마리를 보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태후에게 있었다. 황제의 숙부이자 섭정왕인 자가 태후를 향해 예를 잃지 않는 거리. 그러나 그 예의 아래에는 누구도 밟을 수 없는 선이 있었다."심가 여식은 지금 예부와 호부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궁중 내지 유출과 군량 장부 조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