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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길게 내리고 있었다.
밤공기를 적시는 빗방울이 건물 입구 캐노피를 두드렸다.
톡, 톡, 톡. 일정한 박자가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다정은 그 아래 서 있었다.
검은 원피스 자락이 무릎에 붙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손에는 휴대폰. 화면에는 대리 호출 앱이 켜진 채였다.
술이 꽤 올랐다.
머리는 살짝 어지러웠지만, 정신이 아주 흐린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입술을 살짝 깨물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대기 중.
주변에는 이미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회식이 끝난 시간대. 다들 택시를 잡아타거나 먼저 떠났고, 넓은 주차장에는 간간이 빗소리만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2565 차주분이십니까?”
낮고 또렷한 목소리.
이다정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시선이 멈췄다.
연예인을 수없이 봐왔다.
일이 일이니까.
행사장, 방송국, 시상식.
잘생긴 남자라면 질리도록 많이 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눈앞의 남자는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검은 셔츠. 빗물에 약간 젖어 어깨가 더 또렷해 보였다.
체격은 과하지 않게 단단했다. 모델처럼 마른 것도, 헬스장식 과장된 근육도 아니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있는 몸.
하지만 정말 눈에 들어온 건 그게 아니었다.
시선.
그는 사람을 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다정을 확인했지만, 그 눈은 곧 조용히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상대를 훑는 대신 상황을 읽는 사람처럼.
이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시동은 이미 걸어놨어요.”
남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운전석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엔진 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이다정은 조수석에 몸을 기대 앉았다.
차 안은 따뜻했다.
히터에서 나오는 공기가 술기운 오른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불필요한 말은 없었다.
와이퍼가 앞 유리를 규칙적으로 쓸어내릴 뿐이었다.
슥—
슥—
그 단조로운 소리가 오히려 이상하게 안정감을 줬다.
이다정은 창밖을 바라봤다.
빗물에 번진 도로의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신호등, 가로등,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 도시는 늘 화려했지만,
이렇게 젖은 밤의 색은 조금 달랐다. 몽롱했다.
‘집 가서 바로 자야겠다…’
고속도로에 올라선 건 그때쯤이었다.
속도가 조금 붙었다.
차는 빗길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그리고— 속도가 갑자기 줄었다.
이다정의 몸이 미묘하게 앞으로 쏠렸다.
“음…?”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차선을 바꾸고 있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이다정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이 아니었다.
“기사님?”
부른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짧게 말했다.
“고개 숙이세요.”
이다정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지금요?”
“네. 지금.”
설명은 없었다.
사과도 없고, 농담도 없었다.
그는 핸들을 부드럽게 틀어 가장 어두운 차선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
이다정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이상했다.
대리기사의 말투라고 하기엔— 너무 익숙하고 단정했다.
마치 명령처럼.
“무슨 일이죠, 이게?”
이다정이 물었다.
차분하게.
아니, 차분한 척하면서.
남자는 전방을 보며 대답했다.
“혹시 원한을 살 만한 일, 있으십니까.”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네?”
이다정은 헛웃음을 삼켰다.
“그게 무슨 소리죠?”
‘대리기사 주제에—’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꺼내지 못했다.
지금 운전석의 남자는 그런 말을 쉽게 던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는 순간, 이다정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아빠, 저 지금 집에 가고 있어요.”
괜히 밝은 목소리를 냈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넘기기엔
가슴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너 어디니!”
이다정의 눈이 커졌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이렇게 다급한 적은 없었다. 이다정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더 낮췄다.
차 안 공기가 갑자기 압박처럼 내려앉았다.
“지금 고속도로 타고 있어서요. 금방 가요.”
“차 번호 뭐야.”
이다정은 잠시 운전석을 올려다봤다. 남자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속도를 유지한 채 손은 핸들 위에서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2565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낮게 떨어진 목소리.
“지금 당장 내려. 그 차에서.”
이다정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빠?”
“지금 네가 타고 있는 그 차.”
숨이 거칠게 섞였다.
“이미 미행 붙었다.”
이다정은 숨을 삼켰다.
“…뭐라고요?”
그 순간이었다. 운전석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전화 끊지 마십시오.”
클럽 입구.검은 벨벳 로프와 형식적인 미소.예약 확인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이다정이라는 이름이 말해지는 순간 문이 열렸다.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음악이 먼저 몸을 때렸다.저음이 바닥을 타고 올라와 발목을 붙잡듯 울렸다.조명은 느리게 회전하며 사람들의 얼굴을 반쯤만 비췄다.빛. 소음. 향수와 술 냄새.이다정은 잠깐 눈을 깜빡였다.이런 공간은 익숙했다.처음 온 것도 아니고, 어색한 것도 아니었다.그녀에게 클럽은 즐기러 오는 장소가 아니었다.관계가 만들어지는 곳.그리고 정보가 흘러다니는 곳.직원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전무님, 안쪽 룸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이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조용히 두드렸다.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한 번 훑는다.누가 왔는지, 누가 누구와 앉아 있는지.습관이었다.문 하나를 지나 조금 더 안쪽.프라이빗 룸 문이 열렸다.안쪽 공기가 클럽의 소음과는 다른 밀도로 흘렀다.“다정 왔네.”소파 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오랜만이다.”익숙한 얼굴들.대기업 회장 아들, 계열사 상무 딸,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쳤던 미소들.이다정은 자연스럽게 웃었다.“다들 먼저 와 있었네.”그녀는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몸을 기대자 가죽 소파가 부드럽게 내려앉는다.직원이 샴페인 잔을 건넸다.잔을 받는 순간 유리 표면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이다정은 잔을 천천히 들어 빛에 비춰봤다.기포가 위로 떠올랐다.작고, 끊임없이.“요즘 다들 바쁘지?”그녀가 가볍게 말을 꺼냈다.“회사들 분위기도 좀 살벌해 보이고.”누군가 피식 웃었다.“살벌하긴.”“다정이네 쪽이 제일 조용한 거 아냐?”그 말에 이다정은 잔을 살짝 흔들었다.얼음이 부딪히는 소리.짤그락.“조용한 게 꼭 좋은 건 아니지.”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조용할수록.”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밑에서 뭐가 움직이는지 모르잖아.”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룸 안의 공기가 아주 미묘하게 바뀌었다.
“예은아, 나 아버지한테 다녀올게.”이다정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하지만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 자신도 알았다.지금 이 숨이 평소보다 조금 깊다는 걸.황예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녀와.”“나도 좀 알아볼게.”이다정은 짧게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숨을 천천히 들이쉰 뒤 회장실이 있는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카펫이 깔린 복도는 조용했다.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이다정의 심장 소리는 또렷했다.— 쿵.아까 국밥집 앞에서 들었던 남자의 비웃음.그리고 김다온의 차가운 눈.그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딪히고 있었다.회장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다정은 잠깐 멈췄다.손잡이를 잡은 채 숨을 한 번 더 고르고.문을 열었다.“아버지.”이회장은 창가에 서 있었다.등을 보인 채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유리창 너머로 낮의 햇빛이 기울고 있었다.“들어와.”짧은 말.이다정은 문을 닫고 천천히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말이 생각보다 빨리 튀어나왔다.“왜 계속—”숨이 잠깐 막혔다.“저한테 저런 사람들이 꼬이는 거죠?”이회장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창밖의 풍경이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쳤다.그 침묵이 이다정의 가슴을 조금씩 조여 왔다.“아버지.”그제야 이회장이 돌아섰다.“다정아.”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늘 그랬듯 낮고 차분했다.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오늘 일은우연이 아니다.”이다정의 심장이 내려앉았다.쿵.짧고 무거운 낙하감.“그럼 알고 계셨다는 거예요?”“완전히는 아니다.”이회장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하지만 예상은 했다.”“예상—?”이다정의 입에서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웃음이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다.“그럼 전요?”그녀의 눈이 흔들렸다.“저는 아버지 계획의 일부였어요?”이회장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너는 보호 대상이다.”“대상이요?”이다정의 목소리가 올라갔다.“전
국밥집 앞의 공기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점심시간의 소음은 그대로였지만, 방금 전의 긴장감이 바닥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뒤에 계신 분은왜 차에서 안 내리십니까.”김다온의 말은 조용했지만 정확했다.남자의 얼굴이 아주 짧게 굳었다.정말 짧은 순간이었다.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뭐가 그렇게 의심스러우세요?”남자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그냥 인사 좀 하러 왔—”“미행 거리 일정.”김다온이 말을 끊었다.“번호판 가림.”잠깐의 정적.“그리고 둘이서 움직이는 방식.”그의 시선은 남자를 지나회색 세단 쪽에 닿아 있었다.“일반인은 아닙니다.”그 순간 회색 세단 문이 벌컥 열렸다.두 번째 남자가 튀어나왔다.그리고 그대로 골목 쪽으로 달렸다.“야—!”황예은의 놀란 목소리가 터졌다.도망치는 발소리.첫 번째 남자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그 찰나.김다온의 손이 움직였다.손목을 잡아 비틀고 몸의 중심을 아래로 꺾었다.기술 같지도 않았다.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 남자가 스스로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윽—!”짧은 충격음과 함께 남자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이다정은 숨을 삼켰다.너무 빨라서 과정이 보이지도 않았다.김다온은 남자의 등을 눌러 꼼짝 못 하게 만든 채 물었다.“누가 보냈지.”남자는 웃었다.이 상황에서.“몰라.”“아니, 알아도 말 안 해.”이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보통 사람이라면 지금쯤 겁을 먹어야 했다.그런데 이 남자는 아니었다.김다온의 눈빛이 조용히 식어 내려갔다.“말하는 게 좋을 텐데.”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나, 깜빵에 넣어.”입가에 묘한 비웃음이 걸렸다.“어차피 상관도 없는데.”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김다온의 손에아주 잠깐 힘이 들어갔다.손등 위로 힘줄이 떠올랐다.그리고 스쳐 지나갔다.어떤 얼굴이. 어떤 눈.그때도 이런 눈이었지.말하지 않는 사람의 눈.김다온은 눈을 내리깔았다.그리고 힘을 풀었다.“경찰 부르겠습니다.”잠시 뒤.차
국밥집 앞은 늘 붐볐다.뚝배기에서 올라오는 김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섞여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문이 열릴 때마다 뜨거운 국물 냄새가 바람처럼 흘러나왔다.이다정은 차에서 내리며 습관처럼 주변을 훑었다.사람들. 줄 서 있는 직장인들.배달 오토바이 하나가 좁은 골목을 비집고 지나갔다.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적어도 그녀의 시선에는.“여기 맞지?”황예은이 간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이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때였다.“아가씨.”낮고 느릿한 목소리.이다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다.처음부터 거기 서 있었던 것처럼.“전무님이시죠?”남자가 웃으며 말했다.“TV에서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네.”말투는 가벼웠다.하지만 눈빛이 그렇지 않았다.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렀다.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는 눈이었다.“지금 뭐 하시는—”이다정이 한 발 물러섰다.그러나 남자는 그만큼 다가왔다.“잠깐만요.”“밥 먹으러 가는 길 아니에요?”그 순간.차 안에서 김다온의 시선이 백미러를 스쳤다.이미 보고 있었다. 남자의 접근 속도.이다정의 동선. 거리.그는 조용히 주차 브레이크를 당겼다.차 문이 닫히는 소리.구두가 바닥을 딛는 소리.“다정아?”황예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기사님?”이다정이 돌아봤을 때 김다온은 이미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움직임이 빠른 것 같지도 않았다.하지만 언제 그 거리를 채웠는지 알 수 없었다.“한 발 뒤로.”낮은 목소리.그 말은 이다정이 아니라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남자가 웃었다.“뭐야, 기사님이세요?”“잠깐 인사 좀 하겠다는데—”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다온의 손이 움직였다.손목. 중심. 무게.잡는 순간, 남자의 중심이 비틀렸다.과하지 않았다. 급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확했다.남자의 몸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꺾였다.“윽—!”둔탁한 소리가 바닥에서 울렸다.김다온은 남자의 팔을 꺾은 채 낮게 말했
“예은아, 왜?”“또 뭐 말하려고?”이다정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황예은은 문을 닫자마자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딸깍.“이다정.”예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기사 뭐야.”그 말에 이다정의 펜 끝이 잠깐 멈췄다.“아침에 봤는데.”예은은 일부러 천천히 말을 끌었다.“너무 잘생겼는데?”이다정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거 말하려고 들어왔어?”“지금 회사야.”그러자 예은이 어깨를 으쓱했다.“회사 이전에—”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이다정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우리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야.”“이 정도 질문은 할 수 있는 사이 아니야?”이다정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눈빛이 가늘어졌다.“때와 장소를 가리지도 않고?”“응.”예은은 아주 당당했다.“왜냐면.”그녀가 다정을 똑바로 바라봤다.“너 표정이 이상했거든.”이다정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무슨 표정.”“기사 얘기 나왔을 때 표정.”그 순간, 이다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흘렀다.아침의 장면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차 문을 열어주던 손.흰 장갑 위로 보이던 단정한 손목.필요한 말만 꺼내는 목소리.룸미러 속에서 끝내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던 눈.이다정은 짧게 말했다.“별거 아니야.”“그냥… 대리기사였어.”“였어?”예은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지금은?”“지금은 운전기사.”“와.”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인생 드라마네.”이다정은 펜을 내려놓았다.종이 위에서 펜이 굴러갔다.이유 없이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그만해.”그러자 예은이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조금 더 조용해진 목소리였다.“근데.”“너 요즘.”잠깐 멈췄다.“누가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이다정의 심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아주 짧은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무슨 소리야.”“그냥 느낌.”예은은 웃어 보였다.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네 주변에 사람이 늘어난 느낌.”이다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똑똑.“올라오시면 됩니다.”문 너머로 들린 비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김다온은 짧게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네, 비서님. 알겠습니다.”문을 열자, 넓은 회장실이 한눈에 들어왔다.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심과 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이다정의 아버지, 이회장이었다.그는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마치 김다온이 들어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문 닫게.”김다온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았다.찰칵—이회장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손에는 태블릿 하나가 들려 있었다.“출근 첫날은 어땠나.”“무사히 마쳤습니다.”“그래.”이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다정이가 자네 번호를 저장했더군.”김다온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하지만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업무상 필요한 절차입니다.”“절차.”이회장은 그 단어를 되뇌었다.그리고 낮게 웃었다.“그날 밤 이후, 내 딸은 잠을 설친다.”김다온의 손가락이 눈에 띄지 않게 굳었다.“자네 때문은 아니네.”이회장은 곧바로 덧붙였다.마치 미리 준비해둔 문장처럼.“하지만 자네가그 밤의 중심에 있었던 건 사실이지.”이회장은 창가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김다온 씨.”이번엔, 이름 뒤에 호칭이 붙었다.“내 딸은 내가 지켜온 전부다.”김다온은 대답하지 않았다.이 말은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러니 명확히 하겠네.”이회장이 돌아섰다.눈빛이 이전보다 훨씬 차가워져 있었다.“자네는 기사다. 운전하고, 지키고,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그는 한 박자 쉬었다.“감정은— 더더욱 허락되지 않아.”김다온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건 회장님께서 정하실 영역이 아닙니다.”공기가 멎었다.비서가 문 밖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만큼.이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뭐라고 했나.”김다온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저는 맡은 일을 합니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잠시 후—이회장은 웃었다. 이번엔 분명한 웃음이었다.“좋아.”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