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결국 윤서는 제 미련을 이기지 못했다. 요새 부쩍 눈물이 심해져 눈가가 축축해진 반려견 슈슈를 품에 안아 들며,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달랬다. ‘슈슈가 아프니까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친한 오빠가 수의사라니까 가보는 것뿐이야.’ 라고.
그렇게 제 발로 그의 올가미 속을 향해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10년 전 흩어진 묵주 구슬을 주워 모으듯, 제 부서진 마음을 다 알아채 줄 유일한 구원자를 향해서. 그렇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강민준의 영역은, 지독하리만치 그 남자의 성정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검단신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라파엘 동물병원의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윤서는 저도 모르게 품에 안은 슈슈를 조금 더 바짝 끌어당겼다.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가닥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완벽하게 멸균된 메탈과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는 병원이라기보다 차라리 거대한 성전처럼 정갈하고 서늘했다. 윤서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억누르며 데스크 앞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이 신도시로 이사 온 지 이제 겨우 1년. 설마 이곳에서 오빠를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안녕하세요. 접수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 이름은 슈슈고요. 초진이에요. 요새 눈물이 부쩍 심해져서요.” “아, 안과랑 내과 쪽 보셔야겠네요. 마침 내과 전담이신 한승우 부원장님 지금 바로 진료 가능하세요. 보호자님 성함 말씀해 주시면 한 부원장님 앞으로 접수 넣어드릴게요.” “……이윤서요.” 간호사가 모니터 키보드를 톡톡 두드리며 내과 대기 명단에 ‘이윤서(슈슈)’를 막 입력해 넣은 바로 그 찰나. 원장실 안, 책상 위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전체 대기 현황을 가만히 응시하던 강민준의 짙은 눈동자가 잔인할 정도로 팽팽하게 수축했다. [내과 - 한승우 부원장 대기 : 이윤서 (슈슈)] 강민준은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머니 속, 손가락에 낀 은색 묵주 반지를 부서질 듯 꽉 쥔 민준이 내선 전화를 들어 올렸다. 짧은 신호음 끝에 내과 진료실에 있던 부원장, 한승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학 시절부터 민준의 서늘한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하는 유일한 후배이자 동업자였다. 이곳 신도시가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시장이라며 밤낮으로 민준을 설득해 함께 병원을 개원한 대외 소통 담당자이기도 했다. “한 부원장. 지금 대기열에 올라온 슈슈라는 초진 환자, 내 쪽으로 차트 돌려요.” -예? 원장님, 아니 형. 그 환자 내과 질환이라 제가 보려고 방금 접수 받았는데? 오늘 형 외과 수술 스케줄도 꽉 찼잖아. 승우가 황당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평소 ‘대신 진료 외에 다른 건 다 네가 맡으라’고 못 박았던 민준이었기에, 그동안 승우가 특유의 능글맞은 성격으로 까다로운 보호자들을 도맡아 조율해 왔다. 민준은 오직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와 수술실 장비 세팅에만 집착하며 완벽히 분업해 왔는데, 평소 공사 구분 칼 같던 형이 느닷없이 내과 초진 환자를 가로채는 월권을 행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승우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낮게 내리눌렀다. “잔말 말고 환자 내 쪽으로 돌려요.” -……아, 예. 알겠습니다. 원장님. 수화기 너머로 승우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독하게 날이 선 민준의 음성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 같았다. 승우는 영문도 모른 채 대표원장의 서늘한 압박감에 짓눌려 군말 없이 컴퓨터 차트를 넘겼다. 머릿속에는 ‘대체 저 이윤서라는 보호자가 누구길래, 여자 문제에는 평생 돌부처 같던 강민준을 이토록 이성 잃게 만드나’ 하는 강한 의문과 묘한 호기심이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전화를 끊은 민준은 유려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제 1진료실 대기열 맨 위로 이동한 ‘이윤서(슈슈)’의 전자 차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겉으로는 그 어떤 파장도 드러내지 않는 정갈한 의사의 가면을 쓴 채, 남자는 제 영역에 걸려든 첫사랑을 맞이할 완벽한 시나리오를 고르고 있었다. 한편, 아무것도 모른 채 구석진 대기석에 앉아 있던 윤서에게 데스크 간호사가 다정하게 다가왔다. “이윤서 보호자님, 한승우 부원장님께서 급한 일이 생기셔서요. 대신 저희 강민준 대표원장님께서 직접 진료를 보실 거예요. 1진료실 앞으로 이동해 주시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윤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원장에게 급한 일이 생겨 원장인 민준이 대신 진료를 보게 되었다는 자연스러운 안내에, 윤서는 그것이 자신을 제 영역으로 강제 견인하기 위해 오빠가 치밀하게 설계한 시나리오라는 것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0년 동안 성당 주보를 뒤지며 그토록 그리워했던 오빠의 세계는 이토록 완벽하고 압도적인데, 기우뚱거리는 다리를 숨기기에 급급한 자신은 그의 정결한 성전에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 같아 자꾸만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서글프게 가라앉았다. 윤서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부자연스러운 왼쪽 다리에 힘을 주어 완벽하게 정돈된 1진료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이 문을 밀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시절처럼 다정하게 자신을 맞아줄 오빠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달칵'유치원 문이 열리자, 안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선생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민준을 마주한 순간, 유치원 내부에는 순간 섬뜩한 침묵이 감돌았다. 칼같이 서 있는 정장 핏. 그리고 서늘하리만치 잘생긴 무표정. “누, 누구…… 누구세요?” 선생님 한 명이 저도 모르게 겁먹은 목소리로 물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조폭이나 사채업자가 유치원에 쳐들어온 줄로만 안 동공 지진이었다. 그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 속에서, 민준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거대한 등 뒤에 가려져 있던 핑크빛 이동 가방이 앞으로 스르륵 드러났다. 귀여운 인형 키링과 함께 [이슈슈] 라는 네임택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가방 지퍼 틈새로 익숙한 곱슬 털이 보이고, 코를 킁킁거리던 슈슈가 ‘멍!’ 하고 아는 척을 하자 그제야 선생님들의 얼굴에서 경계가 풀렸다. “어……? 슈슈?”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슈슈가 이곳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로, 등하원은 언제나 보호자인 이윤서 본인이 도맡아 왔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슈슈 보호자님은 오늘 안 오셨나요? 혹시 누구시길래 슈슈를……?” “윤서가 오늘 몸이 많이 안 좋아서요. 대신 픽업해 왔습니다.” 민준의 입에서 ‘윤서’라는 친근한 이름이 나오자, 선생님들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덩치 큰 미남과 윤서의 관계가 몹시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아, 그러시구나……! 혹시 슈슈 보호자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관계. 그 단어가 민준의 귓가에 맴돌았다. 잠시 고민하던 민준의 검지 손가락이 어김없이 은색 묵주 반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것도, 망설일 것도 없었다. 민준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트리며, 세상에서 가장 당당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남자친구입니다.” 순간, 유치원 내부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 두 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로 세차게 동공 지
그 서늘한 새벽빛이 자취를 감추고, 암막 커튼 사이로 샛노란 토요일 아침 햇살이 스며들 때쯤이었다. 침대 위를 비추는 이른 햇살을 받으며 윤서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어젯밤, 제 이성을 날려버리고 사정없이 몰아쳤던 남자의 흔적은 온몸의 뻐근한 통증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눈을 뜨자 새벽녘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남자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강민준은 이미 흐트러짐 하나 없는 빳빳한 흰 셔츠와 칼같이 주름잡힌 정장 바지를 차려입고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 완벽한 옷차림과 대조적으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침대 위. "……."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쓴 채,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윤서가 있었다. 제 이성을 날려버리고 사정없이 몰아쳤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자 민준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자제했어야 했다. 아프지 않게 배려하겠다고 해놓고, 결국 거칠게 밀어붙인 건 순전히 제 욕심 때문이었다. "……미안해, 윤서야. 많이 힘들지." 낮게 가라앉은 한숨과 함께 묵주 반지를 돌리는 손길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손은 기계적으로 넥타이를 매만지며 출근 준비를 이어갔지만, 시선만큼은 단 1초도 윤서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미안함과 걱정, 그리고 묘한 소유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민준이 침대 머리맡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혹시…… 슈슈 오늘도 유치원 갈 수 있어? 등원해도 된다고 하면, 슈슈는 내가 데려다줄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했지만, 그가 내뱉은 다정한 제안은 허리가 말 그대로 박살 나 버린 윤서에게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우웅…… 유치원에 연락해 볼게. 잠시만……."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윤서는 바들바들 떨리는 허리를 붙잡고 간신히 핸드폰을 찾아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오늘도 등원이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으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윤서가 슈슈의 이동 가방과
민준은 그녀의 손길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위로 올라와 그녀를 깊이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뜨거운 피부가 완전히 밀착되며, 숨결과 심장 소리까지 뒤섞였다. "윤서야… 나 지금 꿈 꾸는 것 같아." 그녀의 귀에 대고 숨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이렇게… 품에 안고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 민준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더 깊이, 더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그는 제 하체를 가두던 마지막 경계를 거칠게 풀어내렸다. 오랜 절제로 단련된 그의 단단한 나신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직 그녀만을 향한 갈망만이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윤서는 순간 숨을 멈췄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민준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아주 가까이에서 깊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강렬한 욕망과 함께 그녀를 아끼는 걱정, 사랑이 가득했다. "윤서야… 내가 처음이라서..." 그가 떨리는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많이 아플 수도 있어… 미안해. 그래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꼭 기억해줘. 알았지?" 민준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바라는 마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윤서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를 향한 믿음이 더 컸다. "응… 오빠만 믿을게."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체온이 믿기지 않았다. 열네 살. 교리실 바닥에 할머니가 선물해 준 묵주팔찌가 끊어졌던 날이었다. "다 찾았다." 그 순간이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윤서의 시선이 처음으로 강민준을 향한 순간. 그리고 그 마음은 열여섯의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1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민준은 그녀의 대답을 듣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그녀의 가장 깊은 곳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민준의 빳빳한 흰 셔츠을 움켜쥐었다. 제 손에 의해 구겨지는 셔츠를 끌어내려 자신의 눈높이에 맞춘 뒤, 절뚝이는 다리로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10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진심을 꺼내 놓았다. "좋아해.10년 전부터...오빠만 바라봤어." 윤서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못 한 채 떨리는 목소리를 이었다. "전례단에 들어간 것도...오빠 때문이었어. 해설자가 계속 제대를 바라봐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잖아." 윤서가 울음을 삼키며 작게 웃었다. "...내 처음, 오빠한테 주고 싶어." 그 애달픈 한마디가 강민준의 세계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윤서야, 너..."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윤서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민준에게 닿았다. 떨리는 숨결과 함께, 그녀는 조심스레 혀를 밀어 넣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윤서의 가녀린 어깨를 감쌌다. 평소 동물들을 다루듯 부드럽고 정성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이번엔 그 손끝에 간절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 "……윤서야."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민준은, 한참 동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마치 꿈이 깨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나도… 처음이야." 그가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누굴 이렇게… 만져보는 것도, 이렇게 가까워지는 것도… 다 처음이야. 너만 기다렸어.." 윤서는 순간 숨을 멈췄다. 자신만 10년을 붙들고 살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민준 역시 같은 시간을 견뎌왔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준은 그녀의 얇은 가디건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이 순간을 망칠까 봐 최대한 서두르지 않았다. 단추가 풀릴 때마다 그의 거칠어진 숨결이 윤서의 목덜미를 적셨다. 가디건을 벗겨 소파 옆으로 내려놓은 그는, 티셔츠 밑단으로 손을 넣었다. 불에 데일것처럼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부드러운 옆구리와 허리
윤서는 제 숨통을 막아설 듯 눈앞을 가득 채운 거대한 피지컬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정갈했던 신학생 오빠를 완벽한 체격을 가진 남자로 바꾸어 놓았다. 의사 가운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음영과 위압감에 윤서의 온몸이 잘게 떨려왔다. “오, 오빠가…… 왜 여기에…….” 10년을 참았는데, 여기서 서두르다 첫사랑을 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민준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윤서에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서슬 퍼렇게 뒤집혔던 눈동자와 날 선 소유욕을 완벽하게 가면 뒤로 갈무리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10년 전 전례실에서 보여주던 그 정갈하고 다정한 미소가 그의 수려한 얼굴 위로 매끄럽게 떠올랐다. “미안해, 윤서야.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갔지. 많이 놀랐겠네.” 조금 전의 위압감은 온데간데없이,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민준은 윤서의 어색하게 굳어 있는 왼쪽 다리로 향했던 시선을 자연스럽게 거두며, 그녀가 방금 전까지 만지던 사료 포대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여기 봉사하러 온 거야? 혹시…… 집에서 동물 키우니?” “아…… 네. 강아지 키워요. 말티푸인데, 이름은 슈슈라고…….” 예전의 다정한 오빠의 태도로 돌아오자 윤서가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동물을 지독하게 사랑하던 아이였으니 분명 무언가 키우고 있을 거라던 10년 전의 확신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민준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어트리며, 가볍게 안부를 묻듯 아주 자연스러운 어조로 다음 질문을 툭 던졌다. "아직 성당도 계속 다니고 있어?” "…응. 아라동 성당 다녀. 1년전에 이사왔어.밤샘 마감이 많아서 보통 주일 저녁 미사로 가지만…….” 쿵. 아라동 성당, 그리고 주일 저녁 미사.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믿기지 않는 동네 이름과 미사 시간대에 강민준의 전신으로 소름 돋는 전율이 내달렸다. 10년 동안 전국의 보호소와 병원을 미친 듯이 뒤지며
그 세례명을 제 입술로 직접 베어 문 순간, 민준의 뇌리 너머로 12년 전 그토록 찬란하고 지독했던 부활 대축일의 미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의 본당은 죽음을 이긴 부활의 기쁨을 맞아 제대 위를 장식한 백합의 진한 향기가 향연의 연기와 섞여 성전 전체를 감싸던 일요일 낮 중고등부 미사. 당시 신부님을 보필하던 열여섯의 복사단장 강민준은 티 없이 빳빳하게 풀이 죽은 하얀 복사 옷을 입고 있었다. 매주 교구 성소 모임—본당 사람들이 친근하게 '예비 신부반'이라 부르던 그곳에 나가며 장래 신학생 후보로 본당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시절이었다. 본래 복사단장인 그가 이 자리에 서서 기억해야 할 마음가짐은 지극히 숭고해야 했다. 신부님의 손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 그 기적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감사해하는 것. 거룩한 변화의 순간에 마음속 깊이 흠숭의 기도를 바치며, 성체 분배를 보조할 때 성체 조각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지극한 사랑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 엄숙한 규칙들이 소년 민준이 평생 배워온 복사단의 전부였다. 성찬 전례가 끝나고 영성체 시간이 되자, 그는 신부님을 보필하며 제대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제대와 신자석 사이, 성체 분배를 위해 자리를 잡은 민준은 두 손을 가슴 앞에 정갈하게 모아 기도 손을 한 채, 영성체 줄을 향해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바로 그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서는 그 모든 거룩한 의무가 단 한 톨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윤서.’ 성체를 모시러 나오는 다른 신자는 민준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제 주변의 모든 인간이 뿌옇게 블러 처리되어 지워지는 감각 속에서, 오직 부활 대축일을 맞아 전례단 단복 위에 하얀색 어깨띠를 바르게 두르고 머리 위에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레이스 미사포를 쓴 이윤서만이 온 우주에 단독으로 초점이 맞춘 듯 선명하게 박혀왔다. 어깨띠도, 가운도, 정결하게 늘어뜨린 미사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