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스물세 살 현민호의 촬영은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어느새 창밖은 어두움이 내렸다.
현민호의 화보 컨셉은 남자다운 섹시함이었다.
드라마에서 인기를 얻은 왕의 무사 역할의 이미지를 이어가는 촬영이었다.
감독은 회사와 논의한 사진 방향이 못내 아쉬워 추가 컷을 더하기로 했다.
“마스크가 컨셉에도 잘 어울리고 사진도 잘 나왔는데, 실물이 더 좋네.”
감독의 의견에 스태프도 동의했다.
“실물은 청량미, 소년미가 넘치네요.
저도 드라마 이미지하고 실물이 많이 달라서 건의해 볼까 했어요.”
“그럼, 이번에는 청순 소년미로 가보자. 옷은 새깅 스타일로 입혀.”
스태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새깅스타일이라고? 청량한 컨셉 아니었나.’
“자, 이번에는 청량하게 가자. 나이답게.”
감독의 요구에 현민호는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옷을 이렇게 입혀 놓고 뭐라는 거야.’
하지만 프로답게 촬영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 연기를 시작했다.
민호는 머릿속에 그 날을 떠올렸다.
‘처음 고등학교 시절 다니와 자전거를 타던 날처럼.등뒤에서 기대 우는 너를 어색하게 안아 주려 했던 날처럼.’
눈은 편안하게 뜨고. 엷은 미소로 살짝 벌어진 입술이 아름다웠다.
입대를 앞둔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눈이 젖어왔다.
연기인지 아닌지 그의 무해한 슬픈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다.
‘딱 2년만, 너와 나의 긴 시간 중에 2년만’
젖은 눈을 간직한 채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도 훌륭했다.
촬영을 드디어 마치고 다 같이 박수를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피디와 매니저 그리고 스태프들이 촬영된 작품을 같이 보았다.
“어우야, 재능, 외모 다 있네.”
“아깝네. 너무 일찍 루머가.”
감독이 안타까운 듯 다가와 민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군대 갔다고 끝 아니야. 재능 있으니까 잘 견뎌.”
“네. 감사합니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달랐다. 악수하며 마주치는 시선들이 동정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었다.
스물세 살, 만으로는 이제 스물한 살인 어린 모델은 감독 스태프들에게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 다녀와요.”
“수고하셨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인사를 하고 나오는 어린 모델에게, 기어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박혔다.
복도를 채우고 그를 보러 온 사람들 사이에 여러 말들이 들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여자들하고 소문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바람둥이겠어.”
“어우, 아까 촬영할 때 봤지. 부럽네.”
“그래도 소문이 좀, 그게 다가 아냐. 김지욱 알아. 걔가 쟤랑 술 마시러 가는 거 봤다고 해.”
“저 다리를 보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덤볐겠지.”
자신의 속마음이 얼굴로 나오지 않도록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민호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자, 매니저가 나섰다.
“우리 민호 순하고 착한 애예요. 이상한 글 다 고소했어요.”
민호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시선을 돌려 창을 보았다.
다니말고는 여자라고는 없었다.
친구들도 사내들뿐이었다. 일주일 전까지 동정이었던 자신이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
매니저는 아파트 단지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하지만 민호는 집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지하를 눌렀다.
집은 애초에 들를 계획이 없었다.
고급 아파트 단지였고 이 단지의 몇 안 되는 펜트하우스가 민호의 집이었다.
현성화학의 대표 집으로는 과하지 않은 정도였다.
중견 기업으로 탄탄한 재무를 가지고 있어 현금이 많은 알짜 회사였다.
민호는 어머니가 40세에 겨우 낳은 늦둥이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기에 모델 일도 끝까지 반대하지 못했고, 아들을 위해 회사를 차려줄 계획도 있었다.
부모의 바람은 가업에서 일을 배우길 원했지만, 태어나는 것도 지금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현민호는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 명의는 이미 다니 앞으로 돌려놓았다.
연인의 집까지 30분, 내비게이션을 보며 보험증 그리고 조수석 아래의 쇼핑백을 가방에 넣었다.
현금과 보석 케이스였다.
민호는 건강미가 넘치며 멋있는 다리를 가진 운동 마니아 모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데뷔한 지 1년 6개월, 문제의 드라마까지 참여할 수 있었다.
왕의 무사로 조연이었고 대사도 많지 않았다.
무사에 잘 어울리는 콧대와 얼굴선이 찬사받았고,
그가 심문 후 구출되어 물을 삼키는 장면이 SNS 퍼지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국내 기사까지 점령하던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갑자기 루머들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민호의 차가 미끄러지듯 다니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아. 기분 정말 나쁘다.’
다시 한번 촬영 생각에 속으로 욕하며 차에서 내렸다.
‘삐빅’
20층을 누르고 다니의 집이 가까워지니 여자친구가 더 보고 싶었다.
2002호, 민호는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자신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해 놓은 다니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무섭게 다니가 달려와 안겼다,
“민호야, 왔어.”
자신의 품에 안긴 다니의 밝은 머리칼과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천천히 바라봤다.
뛰어오른 다니를 안아 올리며,
힘들게 마음을 얻은 이 여자를 힘주어 안았다.
자기 가슴에 닿는 풍만한 가슴과 향긋한 꽃 내음이 어지러웠다.
민호는 다니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니야, 사랑해.”
사랑하는 연인의 붉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러고는 뺨을 맞대고 속삭였다.
“예쁘다.”
현민호는 감탄하며 귓불에 입술을 가져갔다.
다니는 민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그의 체취를 맡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향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너무 사랑해. 너 없이 견딜 수 있을까?’
“오늘 어땠어? 촬영 잘했어?”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민호의 얼굴이 어둡자, 걱정이 밀려왔다. 루머 속에서 촬영했을 그가 걱정이 되었다.
대답 없이 그는 입술을 내려 다니의 입술에 가까이 가져갔다.
사랑스러운 연인을 조심히 안은 채 다시 입술을 포갰다.
민호의 도톰한 분홍 입술에 자기 숨을 불어 넣으며 다니는 눈을 감았다.
현민호는 다니에게 문자도 보냈고, 바람도 쐬었으니 호텔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그의 시야에 윤세나의 동생 윤세헌이 들어왔다.잠시 전화를 하러 나온 것 같았다.윤세헌은 지나가는 모델들을 보느라 쉴 새 없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그런 윤세헌을 보며 현민호는 피식 웃었다.‘본인이 저러니 나도 그런 줄 알고 형수 될 누나를 꼬셨다고 생각했겠지.’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싱가포르 포럼 이후 처음이었다.현민호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아, 현 대표님. 말씀 들었습니다. 대표 되신 거요.”“아, 네. 잘 지냈어요?”“네. 잘 지냈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여기서 먼저 뵙게 돼서.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현민호가 갑작스러운 사과에 세헌의 얼굴을 살폈다.“형, 10년 전 일을 누나가 다 고해성사했어요.누나가 결혼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심통 부렸었다는 거요. 형하고 전혀 상관없었다고요.”“하하. 그랬군요.”“그리고 순전히 외모가 이상형이라 결혼하겠다고 했다고요. 시간도 벌고 싶었다고요.형이 어리니까 대학 졸업하면 보자고. 우리 누나지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원.”“세나 누나가 고맙네요. 이제라도 말해 주니.”“현일두 형은 배경도 모르고 만날 만큼 이상형이니 궁금하네요. 그리고 말 놓으세요, 형.”“그래, 일두 형 보면 세나 누나 취향이 어떤 스타일인지 바로 알 거야. 하하.”“그렇게 잘생기셨어요? 하하하. 궁금하네요.”“세헌이는 지금 어디서 일해?”“선진생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은 아직 공부하고 있고요.”“그래. 기회 되면 가끔 보자고.”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선진생명 대표 내외와 세헌, 그리고 상견례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러 귀국한 세나의 언니 미나도 있었다.선진건설 대표인 작은아버지 내외와 사촌 오빠들까지 참석했다.일두의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부부, 단우와 단하, 기정준도 함께 들어와 있었다.할아버지는 이미 세나와 일두를 따로 만났다고 했다.현성의 작은아버지는 건강상의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하고 현민호는 새로 받은 커피의 향을 맡았다.‘동양호텔?’어젯밤까지 동양그룹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오늘은 형의 상견례까지 그 호텔에서 하게 생겼다.현성은 동양과의 오랜 친분 덕분에 늘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받았다.새로 받은 커피는 그나마 마실 만했지만, 입이 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지난 일이지만 세나 누나도 대단하네. 나 보기 민망하지 않나? 취향은 확실하군.’…현민호는 옷을 갈아입으러 청담동 집으로 향했다. 최민주는 없었다.비밀 번호를 모르니 문앞에서 무작정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는 브라운 계열의 양복을 입고 금색 넥타이를 맸다.호텔앞에서 내린 현민호는 어느새 따뜻해진 바람을 맞았다. 부서지는 햇살도 좋아서 그는 호텔 앞에 잠시 서서 휴대전화를 꺼냈다.‘다니는 요즘 왜 그렇게… 미행을 하지를 않나. 아줌마처럼 바가지를 긁지 않나.’어제 현민호는 다니 품에서 쉬고 싶었지만 다니에게 맞은 가슴만 저릿하게 아팠다.호텔앞은 모델대회를 앞둔 모델들이 모여 있었다.현민호의 앞을 지나가며 모델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서로 빙긋 웃었다.“You must be a model.”“I used to be. Good luck.”현민호는 그녀들이 다가 오려하자,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았다.다니의 짧은 문자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렇게 나를 못 믿고, 서운하게...’[다니야,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뻐.지금 호텔에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모델 대회가 있어서 여러 나라에서 모델들이 와 있어.그런데 다니, 너보다 예쁜 여자는 한 명도 없어.내 눈에 너보다 아름답고 청초하면서도 섹시한 여자는 없어.너와 닮은 것은 내 아들과 하얀 도자기 인형뿐이야.나 그 도자기 인형을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본가 장식장에서 가지고 나왔어.나무 상자를 맞춰서 깨지지 않게 금고에 넣어 두었어.아무도 손댈 수 없게.내가 악당들에게서 지킬 수 있을 때, 나의 소중하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다니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소파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아무렇게나 던져진 민호의 양말이 보였다.깨끗하고 깔끔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양말도 세탁물 통에 넣고, 머리도 젖은 상태로 눕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수건을 깔고 누워 있었다.민호의 가슴을 때린 것은 충동적이었다.그가 아파하자 당황해 아무 말도 못했다.다니는 리나에 대한 일에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민호도 정우를 이렇게 질투했지만 동하가 정우의 아들이라고 해도 품어 주려고 했었다.‘사랑하니까 상대를 이해해야 하는데...’다니는 벌떡 일어나 민호를 쫓아 나갔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휴대전화로 민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민호의 휴대전화는 무음이었다.다니는 아무것도 걸치지 못하고 슬리퍼를 신은 채 민호를 쫓았다.‘술도 마셨고 운전도 못 할 텐데…택시 부르겠지.그럼 내 전화도 확인하겠지.’가까운 호텔 앞에 택시 승강장이 있었다. 그곳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다니는 현민호가 어디로 갔든 따라가고 싶었지만 혼자 있는 동하를 두고 움직일 수 없었다.“민호야, 미안해. 때린 것도 미안하고.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하는데.네가 결혼하자고 말도 안 해도 난 너 못 떠나잖아.내가 왜 그랬을까.”눈물범벅이 된 다니는 문자를 보냈다.[잘 자고 내일 봐. 오늘은 내가 미안해. 네 아픈 거, 네 슬픔 다 사랑해.]다니는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걸었다....현민호는 집 앞 호텔에 방을 잡았다.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침대에 누웠다.수술한 왼쪽 몸통이 욱신거렸다.‘하아, 정말 힘드네.’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내려놓았다.다니에게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눈을 감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 햇살에 현민호가 눈을 떴다.몇 시인지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떠 있었다.[잘 자고 내일 봐. 오늘은 내가 미안해. 네 아픈 거, 네 슬픔 다 사랑
현민호가 눈을 감자 다니는 작은 수면등을 켠 채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그럼 우리 방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오늘은 그냥 좀 자자.”다니가 민호의 티셔츠를 잡아당기며 인상을 썼다.현민호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하.”[최여사]한쪽에서는 휴대전화가 반짝이고 있었다.민호는 조용히 동하의 얼굴을 잠시 보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발끝을 디뎠다.샤워 후 덜 마른 머리 때문에 깔아 둔 수건에 휴대전화를 싸서 동하가 깨지 않게 방을 나왔다.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다니는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거실 시계는 아직 10시도 안 된,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현민호는 터벅터벅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작은 위스키병을 따 한 모금 마시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자야 해. 나 한계야.’현민호는 갑자기 등장한 생모와 형 때문에 주변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아버지, 최 여사, 생모까지 작당해서 자신을 속였다.세상이 뒤틀리고 있었고, 감정이 사라져 약을 먹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을 지경이었다.머릿속이 텅 비고, 가슴은 수술 후처럼 텅 비어 가는 느낌을 견디고 있었다.그 상태로 돌아가면 회사 일도, 동하도, 그리고 다니도 지킬 수가 없었다.폐 수술로 피우지 않던 담배라도 배워 볼까 생각 중이었다.그 와중에 휴대전화는 계속 반짝였다.‘하, 나 좀 그냥 두면 안 되나.’현민호는 최민주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한 번도 통화하거나 만나지 않았다.‘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내 마음도 모르겠는데.’주변에서 재촉하는 사람들이 싫었다.[최여사]“흠.”그의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민호, 너 지금 어디야?“왜 그러시는데요?”-내가 전화한 게 몇 번째인지 알아? 왜 안 받아?“바빴어요.”-바빠? 내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지내는지 알기나 해?현민호는 입을 다문 채 피곤한 듯 벽에 기대 섰다.-너 정말 이럴 거야?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내가 너를
리나는 계속 울리는 문자에 인상을 썼다.[맥주창고로 와. 기다리고 있어.][리나야, 난 괜찮아. 너만 있으면 버틸 수 있어.]메시지가 쌓이자 무음으로 돌린 리나가 휴대전화를 백 안에 넣었다.남자들끼리의 대화가 이어지자 조용히 먼저 일어나기로 했다. 같은 빌딩에 있으니 김정호를 돌려보낼 요량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이야기가 마무리되고 현 대표도 기정준 실장과 더 이야기할 것 같아 리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왔다.맥주창고에 들어서자 맥주를 마시고 있던 김정호가 손을 들었다.“정호 오빠, 왜 왔어. 지금 아버지와 오빠가 근처에 있어.”“보고 싶어서. 주말이니까 우리 집에 가자. 내가 너 주려고 이것저것 장도 봐 두었어.”“오빠, 우리 오빠 만났었다며? 뭐라 그래?”“뭐라든 상관없어. 백주대낮에 납치라도 하겠나. 괜찮아. 그리고 대영은 아직 현 대표가 있는데 나를 자르기라도 하겠어.”민리나는 막상 김정호를 마주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올라왔다.정호가 손을 잡고 손등에 부드러운 키스를 하자 리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곧 손을 뺐다. 주말이라도 회사 근처였다.그리고 공부만 열심히 하고 회사 일만 한 김정호가 나이에 비해 순진한 것도 왠지 부담이 되었다.우연히 집에서 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연애를 한다고 했지 결혼할 마음도 없는데 오빠들이 너무 오버였다. 하지만 현민호라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아무리 훈남인 정호도 현민호를 마주한 뒤에 보면 왕자와 집사를 보는 느낌이었다.속물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명품이 겉돌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사람은 현민호였다.‘오빠, 그냥 좀 조용히 사귀자.’…어른들까지 접대해야 하는 긴장된 술자리는 8시 정도에 끝났다.아침에 만진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현 대표의 자세는 여전히 반듯하고 예의 바른 자세였다. 민 회장이 연로해서 그 정도에 끝난 것이었다.기정준은 동양의 제안에 나름 호의가 담겨 있다며 친분이 중요하다고 현민호에게 다시 가르쳤다.현민호는
택시를 기다리며 다니는 민호의 얼굴을 떠올렸다.나답고 싶다며 완벽하고 고급스러운 아우라로 서 있던 그가 눈에 선했다.하지만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대영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옷으로 자신이 대표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일까.화려한 옷과 고급 제품들이 잘 어울리는 타고난 몸을 가진 남자.‘민호가 움직이던 사람들이 대영빌딩을 돌아보는 것 같던데, 건물까지 같이 인수하나? 대영몰까지 인수하면 동양은 꿩 먹고 알 먹고네.’동양은 강남에 건물이 없었다. 호텔과 백화점 모두 구도심에 위치해 있었다.'5555.'택시 번호를 확인하고 다니가 차 문을 열었다.‘앗, 김 과장님?’김정호가 다니를 알아보지 못한 채 곁을 지나갔다.‘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거지.’다니는 그를 돌아보며 택시에 올라탔다.정신없이 걸어가는 김정호는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초라해 보였다.‘현민호에게 맞서려고 하지 말고 리나를 잡아요.’다니는 쇼핑몰로 들어서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대영빌딩까지 함께 매각하는 방안을 동양 측에서 준비해 왔다.동양백화점이 빌딩을 인수하고, 별도로 대영어패럴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이었다.현민호에게도 좋은 거래였다.대표의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방안도 제시되었다.인수후 1년 만에 늘어난 가치의 3퍼센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 부분은 동양의 사모님이 가지고 있는 현성 지분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제안되었다.빌딩 매각으로 대영의 현금이 늘고 부채비율이 낮아지면, 지분 60%를 보유한 현성화학에도 유리했다.동양은 호텔과 리조트, 백화점과 쇼핑센터에 집중하기로 한 상황이었다.민리나는 오랜만에 화려하게 꾸미고 높은 힐을 신었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유능한 남자 옆에 있었다.대화를 하며 까닥거리는 그의 긴 손가락을 생각없이 지켜보니 가슴 가득 행복이 차올랐다.‘나 민리나야, 지금 일 배우느라 그렇게 있는 거지. 세상 물정 몰라서 구박당한 거 서러워도 이제 직원들도 나 좋아해. 민호 오빠 덕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