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친구 수진이 집이 가까워 다행이었다.
수진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다니의 오피스텔에 자주 놀러 왔다.
집 근처에 공원도 있고 지하철도 가까워 마음에 든다고 엄마에게 말했었다.
수진이의 말을 듣고는 공인중개사였던 어머니가 진짜 이사를 했다. 다니의 오피스텔 근처 큰 아파트 단지였다.
그 인연으로 시간이 흐른 뒤, 다니의 아이를 봐주시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디자이너로서의 첫 출근이었다.
유니폼이 없으니 미리 꺼내 둔 연두색 시폰 원피스를 입었다.
거울에 비춰보니 처음 이 옷을 입었을 때보다 나이는 들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11층에서 내리지 않고 14층까지 올라가니 첫 출근이 실감 났다.
사람들에게 밀려 내리며 좌우를 보았다.
동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는데 디자인 부서는 서쪽이었고, 엘리베이터는 앞은 총괄기획부였다.
다니는 기대와 긴장으로 14층의 긴 복도를 걸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 나 드디어 좋은 자리 가는 것 같아.’
다니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혼자 엄마에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오늘은 자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신다니엘입니다. 그냥 다니라고 불러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턴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니 씨라고 부르라고 하네요.”
이태하 팀장이 소개하자 직원들이 가만히 쳐다보고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김 주임님, 옆에 자리 안내해 주세요. 일단 원단 관리와 주문부터 빨리 인수받으세요.”
“안녕하세요, 김 주임님.”
다니는 책상을 정리하면서 다섯 살 동하의 사진을 책상 한편에 두었다.
자기 아들은 유일한 가족이고, 아이를 숨기지 않았다.
사무실은 개인 책상이 있고 넓은 회의실과 작업실이 있었다.
14층은 총괄 기획부와 디자인부가 나누어 썼고 디자인 부서 쪽에 휴게실로도 보이는 탕비실까지 있었다.
직원들은 총괄 기획부로 바뀌기 전 이름인 ‘총무부’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여직원끼리 탕비실에서 담소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넓었고, 테이블도 여러 개 있었다.
좋은 회사라 역시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다니는 김 주임 옆에서 커피와 차를 나르며 그들의 이야기를 뒤에서 조용히 들었다.
임 주임은 총괄기획부 직원인데 디자이너들과 친하게 웃고 떠들었다.
그녀가 주로 대화를 주도하고 다른 직원들은 주로 듣는 편인것 같았다.
분위기를 파악한 다니도 임 주임이 말하면 귀를 세우고 들었다.
회사에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분위기 파악도 하려 애썼다.
이태하 팀장은 원단 관리를 인수 받으라고 했는데, 정작 담당자는 이미 그만둔 상황이었다.
‘정규직을 향해 가즈아.’
속으로 다니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외쳤다.
…
인턴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직원 될 때까지는 야근이든 무엇이든 빠지면 안 된다.
다행히 경력직이라서 인턴 과정은 6개월이었다.
거울을 보며 차림새를 한번 살폈다.
정규직이 될 만해 보이도록 검은색 통 넓은 바지와 시원해 보이는 푸른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오호, 아직 괜찮은데.’
디자인부 사람들은 정시에 다 같이 일어났다.
“다니 씨, 이리 와. 엘리베이터 왔어.” 김 주임과 노 대리가 다니를 불렀다.
29살인데도 디자이너 중에는 자신이 제일 어렸고 눈치껏 할 일을 찾아서 하니 다들 잘 챙겨주었다.
회식 장소는 대영빌딩의 가장 큰 고깃집이었다.
“1차는 필수, 2차는 선택” 디자인부의 구호였다.
이상한 구호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시즌 마감을 앞두고 하는 회식이고 명분은 인턴 환영회라고 했다.
주인공이라며 사람들 사이에 가운데에 앉히자, 불편해지려는 찰나 고기가 나왔다.
다니는 바로 집게를 들었다.
지글지글 소리를 들으며 고기를 구웠다.
냄새가 안주가 되는지 구우면서 먹는 술도 달았다.
다 좋을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좋은 동료 선배들 같았다.
“선배님들, 한 잔씩 올리겠습니다.”
“대학은 어디 나왔어요?”
“연희대 서양화와 패션디자인을 복수전공했습니다.”
“미인 직원이 들어와서 남직원들 설레겠네.”
중년의 여직원이 다니를 보면서 부러운 듯 웃었다. 여성복 디자이너 노대리였다.
그 말을 들은 옆자리 김 주임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경쟁자를 한 명 쳐내는 신속한 반응이었다.
“데스크 팀에 있는 분들이 남자아이 엄마라고 했어요. 유부녀니 꿈 깨세요.”
다니는 오히려 좋았다. 적응해야 하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불편해질 것이다.
“아 그래요. 아이 몇 살이에요?”
아이 엄마인 노 대리가 물었다.
“다섯 살이요.”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구나. 우리 애가 8살인데 작은 옷 중 좋은 옷 줄까요?”
“네,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고르지 마시고 다 주세요.”
다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남편은 없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자기 입으로 미혼모인 것을 밝히는 것이 창피한 것은 아니지만 유쾌한 일도 아니었다.
회식이 길어지자, 밤 열 시 다니가 문자를 수진이 어머니에게 보냈다.
[어머니, 회식이 안 끝나요. 죄송해요.]
[동하 자니까 걱정하지 마. 내일 데리고 있다가 어린이집도 보내줄게.]
[어머니 감사해요.]
친구 어머니라서인지 다니는 어머니를 의지했고 수진이 어머니도 그렇게 대해주었다.
회식은 멀리 가지 않고 회사 건물의 식당에서 주로 하는 것 같았다.
맥주를 즐기기는 하지만 술이 약한 다니는 오늘은 소주까지 몇 잔 했다.
화장실에 가서 정신을 차리려 세수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나오는 길이었다.
찬물로 세수했건만 여전히 어지러웠다.
화장실에서 복도로 나서는 순간,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니의 앞을 지나쳐 갔다.
순식간에 민호의 체취와 어울리던 익숙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기억의 저편에 아득한 순간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양복 입은 남자들이 무리로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키 큰 남자가 민호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를 둘러 싼 사람들이 많아 잘 보이지 않았다. 다니는 술에 취한 상태로 눈만 다시 감았다 떴다.
다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곧 사람들에 밀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남자는 사라졌다.
다니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다음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확인했다.
대로변 인도를 헤집고 다니며 그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어디에도 민호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었겠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술이 깨지 않아 겨우 샤워를 끝냈다.
샤워를 마치고 옷장 안쪽에 손을 밀어 넣어 몇 년을 잊고 있던 물건을 꺼냈다.
옷장 제일 안쪽에서 민호의 티셔츠를 꺼냈다. 하얀 티셔츠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지러워서 매트리스에 누우면서도 민호의 티셔츠에 얼굴을 묻었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프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슴이 조여왔다.
‘민호야, 보고 싶어.’
현민호는 다니에게 문자도 보냈고, 바람도 쐬었으니 호텔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그의 시야에 윤세나의 동생 윤세헌이 들어왔다.잠시 전화를 하러 나온 것 같았다.윤세헌은 지나가는 모델들을 보느라 쉴 새 없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그런 윤세헌을 보며 현민호는 피식 웃었다.‘본인이 저러니 나도 그런 줄 알고 형수 될 누나를 꼬셨다고 생각했겠지.’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싱가포르 포럼 이후 처음이었다.현민호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아, 현 대표님. 말씀 들었습니다. 대표 되신 거요.”“아, 네. 잘 지냈어요?”“네. 잘 지냈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여기서 먼저 뵙게 돼서.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현민호가 갑작스러운 사과에 세헌의 얼굴을 살폈다.“형, 10년 전 일을 누나가 다 고해성사했어요.누나가 결혼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심통 부렸었다는 거요. 형하고 전혀 상관없었다고요.”“하하. 그랬군요.”“그리고 순전히 외모가 이상형이라 결혼하겠다고 했다고요. 시간도 벌고 싶었다고요.형이 어리니까 대학 졸업하면 보자고. 우리 누나지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원.”“세나 누나가 고맙네요. 이제라도 말해 주니.”“현일두 형은 배경도 모르고 만날 만큼 이상형이니 궁금하네요. 그리고 말 놓으세요, 형.”“그래, 일두 형 보면 세나 누나 취향이 어떤 스타일인지 바로 알 거야. 하하.”“그렇게 잘생기셨어요? 하하하. 궁금하네요.”“세헌이는 지금 어디서 일해?”“선진생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은 아직 공부하고 있고요.”“그래. 기회 되면 가끔 보자고.”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선진생명 대표 내외와 세헌, 그리고 상견례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러 귀국한 세나의 언니 미나도 있었다.선진건설 대표인 작은아버지 내외와 사촌 오빠들까지 참석했다.일두의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부부, 단우와 단하, 기정준도 함께 들어와 있었다.할아버지는 이미 세나와 일두를 따로 만났다고 했다.현성의 작은아버지는 건강상의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하고 현민호는 새로 받은 커피의 향을 맡았다.‘동양호텔?’어젯밤까지 동양그룹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오늘은 형의 상견례까지 그 호텔에서 하게 생겼다.현성은 동양과의 오랜 친분 덕분에 늘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받았다.새로 받은 커피는 그나마 마실 만했지만, 입이 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지난 일이지만 세나 누나도 대단하네. 나 보기 민망하지 않나? 취향은 확실하군.’…현민호는 옷을 갈아입으러 청담동 집으로 향했다. 최민주는 없었다.비밀 번호를 모르니 문앞에서 무작정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는 브라운 계열의 양복을 입고 금색 넥타이를 맸다.호텔앞에서 내린 현민호는 어느새 따뜻해진 바람을 맞았다. 부서지는 햇살도 좋아서 그는 호텔 앞에 잠시 서서 휴대전화를 꺼냈다.‘다니는 요즘 왜 그렇게… 미행을 하지를 않나. 아줌마처럼 바가지를 긁지 않나.’어제 현민호는 다니 품에서 쉬고 싶었지만 다니에게 맞은 가슴만 저릿하게 아팠다.호텔앞은 모델대회를 앞둔 모델들이 모여 있었다.현민호의 앞을 지나가며 모델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서로 빙긋 웃었다.“You must be a model.”“I used to be. Good luck.”현민호는 그녀들이 다가 오려하자,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았다.다니의 짧은 문자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렇게 나를 못 믿고, 서운하게...’[다니야,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뻐.지금 호텔에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모델 대회가 있어서 여러 나라에서 모델들이 와 있어.그런데 다니, 너보다 예쁜 여자는 한 명도 없어.내 눈에 너보다 아름답고 청초하면서도 섹시한 여자는 없어.너와 닮은 것은 내 아들과 하얀 도자기 인형뿐이야.나 그 도자기 인형을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본가 장식장에서 가지고 나왔어.나무 상자를 맞춰서 깨지지 않게 금고에 넣어 두었어.아무도 손댈 수 없게.내가 악당들에게서 지킬 수 있을 때, 나의 소중하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다니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소파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아무렇게나 던져진 민호의 양말이 보였다.깨끗하고 깔끔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양말도 세탁물 통에 넣고, 머리도 젖은 상태로 눕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수건을 깔고 누워 있었다.민호의 가슴을 때린 것은 충동적이었다.그가 아파하자 당황해 아무 말도 못했다.다니는 리나에 대한 일에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민호도 정우를 이렇게 질투했지만 동하가 정우의 아들이라고 해도 품어 주려고 했었다.‘사랑하니까 상대를 이해해야 하는데...’다니는 벌떡 일어나 민호를 쫓아 나갔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휴대전화로 민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민호의 휴대전화는 무음이었다.다니는 아무것도 걸치지 못하고 슬리퍼를 신은 채 민호를 쫓았다.‘술도 마셨고 운전도 못 할 텐데…택시 부르겠지.그럼 내 전화도 확인하겠지.’가까운 호텔 앞에 택시 승강장이 있었다. 그곳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다니는 현민호가 어디로 갔든 따라가고 싶었지만 혼자 있는 동하를 두고 움직일 수 없었다.“민호야, 미안해. 때린 것도 미안하고.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하는데.네가 결혼하자고 말도 안 해도 난 너 못 떠나잖아.내가 왜 그랬을까.”눈물범벅이 된 다니는 문자를 보냈다.[잘 자고 내일 봐. 오늘은 내가 미안해. 네 아픈 거, 네 슬픔 다 사랑해.]다니는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걸었다....현민호는 집 앞 호텔에 방을 잡았다.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침대에 누웠다.수술한 왼쪽 몸통이 욱신거렸다.‘하아, 정말 힘드네.’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내려놓았다.다니에게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눈을 감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 햇살에 현민호가 눈을 떴다.몇 시인지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떠 있었다.[잘 자고 내일 봐. 오늘은 내가 미안해. 네 아픈 거, 네 슬픔 다 사랑
현민호가 눈을 감자 다니는 작은 수면등을 켠 채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그럼 우리 방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오늘은 그냥 좀 자자.”다니가 민호의 티셔츠를 잡아당기며 인상을 썼다.현민호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하.”[최여사]한쪽에서는 휴대전화가 반짝이고 있었다.민호는 조용히 동하의 얼굴을 잠시 보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발끝을 디뎠다.샤워 후 덜 마른 머리 때문에 깔아 둔 수건에 휴대전화를 싸서 동하가 깨지 않게 방을 나왔다.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다니는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거실 시계는 아직 10시도 안 된,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현민호는 터벅터벅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작은 위스키병을 따 한 모금 마시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자야 해. 나 한계야.’현민호는 갑자기 등장한 생모와 형 때문에 주변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아버지, 최 여사, 생모까지 작당해서 자신을 속였다.세상이 뒤틀리고 있었고, 감정이 사라져 약을 먹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을 지경이었다.머릿속이 텅 비고, 가슴은 수술 후처럼 텅 비어 가는 느낌을 견디고 있었다.그 상태로 돌아가면 회사 일도, 동하도, 그리고 다니도 지킬 수가 없었다.폐 수술로 피우지 않던 담배라도 배워 볼까 생각 중이었다.그 와중에 휴대전화는 계속 반짝였다.‘하, 나 좀 그냥 두면 안 되나.’현민호는 최민주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한 번도 통화하거나 만나지 않았다.‘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내 마음도 모르겠는데.’주변에서 재촉하는 사람들이 싫었다.[최여사]“흠.”그의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민호, 너 지금 어디야?“왜 그러시는데요?”-내가 전화한 게 몇 번째인지 알아? 왜 안 받아?“바빴어요.”-바빠? 내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지내는지 알기나 해?현민호는 입을 다문 채 피곤한 듯 벽에 기대 섰다.-너 정말 이럴 거야?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내가 너를
리나는 계속 울리는 문자에 인상을 썼다.[맥주창고로 와. 기다리고 있어.][리나야, 난 괜찮아. 너만 있으면 버틸 수 있어.]메시지가 쌓이자 무음으로 돌린 리나가 휴대전화를 백 안에 넣었다.남자들끼리의 대화가 이어지자 조용히 먼저 일어나기로 했다. 같은 빌딩에 있으니 김정호를 돌려보낼 요량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이야기가 마무리되고 현 대표도 기정준 실장과 더 이야기할 것 같아 리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왔다.맥주창고에 들어서자 맥주를 마시고 있던 김정호가 손을 들었다.“정호 오빠, 왜 왔어. 지금 아버지와 오빠가 근처에 있어.”“보고 싶어서. 주말이니까 우리 집에 가자. 내가 너 주려고 이것저것 장도 봐 두었어.”“오빠, 우리 오빠 만났었다며? 뭐라 그래?”“뭐라든 상관없어. 백주대낮에 납치라도 하겠나. 괜찮아. 그리고 대영은 아직 현 대표가 있는데 나를 자르기라도 하겠어.”민리나는 막상 김정호를 마주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올라왔다.정호가 손을 잡고 손등에 부드러운 키스를 하자 리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곧 손을 뺐다. 주말이라도 회사 근처였다.그리고 공부만 열심히 하고 회사 일만 한 김정호가 나이에 비해 순진한 것도 왠지 부담이 되었다.우연히 집에서 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연애를 한다고 했지 결혼할 마음도 없는데 오빠들이 너무 오버였다. 하지만 현민호라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아무리 훈남인 정호도 현민호를 마주한 뒤에 보면 왕자와 집사를 보는 느낌이었다.속물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명품이 겉돌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사람은 현민호였다.‘오빠, 그냥 좀 조용히 사귀자.’…어른들까지 접대해야 하는 긴장된 술자리는 8시 정도에 끝났다.아침에 만진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현 대표의 자세는 여전히 반듯하고 예의 바른 자세였다. 민 회장이 연로해서 그 정도에 끝난 것이었다.기정준은 동양의 제안에 나름 호의가 담겨 있다며 친분이 중요하다고 현민호에게 다시 가르쳤다.현민호는
택시를 기다리며 다니는 민호의 얼굴을 떠올렸다.나답고 싶다며 완벽하고 고급스러운 아우라로 서 있던 그가 눈에 선했다.하지만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대영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옷으로 자신이 대표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일까.화려한 옷과 고급 제품들이 잘 어울리는 타고난 몸을 가진 남자.‘민호가 움직이던 사람들이 대영빌딩을 돌아보는 것 같던데, 건물까지 같이 인수하나? 대영몰까지 인수하면 동양은 꿩 먹고 알 먹고네.’동양은 강남에 건물이 없었다. 호텔과 백화점 모두 구도심에 위치해 있었다.'5555.'택시 번호를 확인하고 다니가 차 문을 열었다.‘앗, 김 과장님?’김정호가 다니를 알아보지 못한 채 곁을 지나갔다.‘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거지.’다니는 그를 돌아보며 택시에 올라탔다.정신없이 걸어가는 김정호는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초라해 보였다.‘현민호에게 맞서려고 하지 말고 리나를 잡아요.’다니는 쇼핑몰로 들어서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대영빌딩까지 함께 매각하는 방안을 동양 측에서 준비해 왔다.동양백화점이 빌딩을 인수하고, 별도로 대영어패럴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이었다.현민호에게도 좋은 거래였다.대표의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방안도 제시되었다.인수후 1년 만에 늘어난 가치의 3퍼센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 부분은 동양의 사모님이 가지고 있는 현성 지분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제안되었다.빌딩 매각으로 대영의 현금이 늘고 부채비율이 낮아지면, 지분 60%를 보유한 현성화학에도 유리했다.동양은 호텔과 리조트, 백화점과 쇼핑센터에 집중하기로 한 상황이었다.민리나는 오랜만에 화려하게 꾸미고 높은 힐을 신었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유능한 남자 옆에 있었다.대화를 하며 까닥거리는 그의 긴 손가락을 생각없이 지켜보니 가슴 가득 행복이 차올랐다.‘나 민리나야, 지금 일 배우느라 그렇게 있는 거지. 세상 물정 몰라서 구박당한 거 서러워도 이제 직원들도 나 좋아해. 민호 오빠 덕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