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화

Author: 귤이
다행히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면서 곤경에 처한 다인을 구해주었다.

“여보세요?”

다인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면서 허둥지둥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슈퍼모델이자 가장 친한 친구 임미연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한다인. 어제 혼인신고서 뗐으니, 밤에 곧바로 처녀 딱지도 뗐겠네?]

전화기 소리가 꽤 컸다.

시윤이 아직 근처에 있다는 걸 떠올린 다인이 급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다행히 시윤은 이미 현관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혼인신고서만 뗐어.”

다인이 안도하며 말했다.

“처녀 딱지는 안 뗐어.”

[5년이나 사귀면서 고작 해본 거라곤 서로 가볍게 입술 스치기 정도였고, 서로 애무도 못했으면서...]

한참 동안 말하던 미연이 갑자기 ‘악!’ 소리를 질렀다.

[설마 혼인신고 한 당일 밤에 새 남편 물건이 '서는' 데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한 건 아니지?]

미연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가 더 커졌다.

마침 시윤이 문을 열고 다시 들어왔다가, '남편 물건이 서는 데 문제가 있다’라는 마지막 말을 정확히 들었다.

순간, 눈꼬리를 살짝 올린 시윤이 다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안 선다고?’

인기척을 들은 다인 역시 문 쪽을 바라보았고, 시윤을 보자마자 숨이 멈춰 버렸다.

이쪽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미연이 계속 조언을 늘어놓았다.

[이건 좀 문제 있네. 얼른 병원에 가 봐야겠다.]

[만약에 고치지 못한다면, 앞으로 플라토닉한 관계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봐...]

다인은 머리가 핑 돌면서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왜 돌아왔어요?”

“시계 가지러.”

시윤은 드레스룸에서 시계 하나를 꺼내 차고 다인 앞으로 다가왔다.

시계를 다 찬 시윤이 팔을 앞으로 뻗어 화장대를 짚으면서 다인을 품속에 가볍게 가두었다.

고개를 숙이고 다인의 눈앞에 얼굴을 댄 시윤이,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말했다.

“서는지 안 서는지는, 밤에 시험해보면 알 거 아니야?”

다인은 뻣뻣하게 굳은 채, 그저 부자연스럽게 눈꺼풀만 깜빡거렸다.

“난 그런 말 안 했어요.”

시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여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와서 내가 서는지 시험해 보게.”

다인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시윤은 성큼성큼 다시 방을 나갔다.

다인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오해했어.”

[뭘 오해했다고?]

[방금 내 전화 급히 끊었는데 화났어?]

[내가 기태안 물건이 '서는' 능력이 없다고 말한 거 때문에?]

미연은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의문과 불만을 쏟아냈다.

다인이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태안이 아니고, 시윤이야.”

또 오해를 살까 봐, 다인이 얼른 덧붙였다.

“어제, 나와 혼인신고 한 사람은 시윤이었어...”

[뭐라고?]

미연이 비명을 질렀다.

10분 후...

다인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미연은 태안과 유림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심지어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욕설까지도.

한바탕 화를 낸 미연이 비로소 속이 시원해졌는지 다인을 위로했다.

[잘했어. 후회하게 내버려둬. 남편 노릇하기 싫으면 시동생이나 하라고 해.]

[다인아, 이번엔 보는 눈이 생겼네. 기시윤은 GM그룹 대표인 데다, 잘생기고 돈도 많고 스캔들도 없지. 기태안보다 백 배는 나아. 그런데...]

[기시윤도 결혼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네가 신붓감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결혼한 거잖아. 너희는 감정도 없고, 원래도 사이가 안 좋았는데. 혹시...]

미연이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다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괜찮아,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거니까.”

다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제는 홧김에 혼인신고를 했지만, 오늘은 이미 마음을 정리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으니, 언제 헤어지든 상관없었다.

[알겠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신혼 선물 보내 줄게. 기다리고 있어.]

“무슨 선물인데?”

다인이 물었다.

하지만 미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건너편에서 광고 촬영을 재촉하자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진짜 바쁘네!’

...

GM그룹 본사.

맨 윗층의 대표 집무실.

회의를 마친 시윤은 등을 곧게 펴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짙은 색 정장은 시윤의 고귀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압도적인 존재감을 더 드러냈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비서 진우빈에게 지시했다.

“결혼반지 골라 줘. 그리고 주식양도계약서도 준비해 주고.”

우빈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네, 대표님.”

하지만 말을 마친 뒤에도 떠나지 않고 자리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든 시윤이 유빈을 힐끗 보면서 물었다.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어?”

우빈이 말했다.

“대표님이 돌아오신 걸 회장님께서 아시고 제게 전화하셨습니다. 오늘 저녁 본가에서 식사하라고요.”

시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나가 봐.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우빈이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시윤은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

인사도 하기 전에, 전화기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젠 자립했다 이거냐? 귀국했으면서 나한테도 말 한마디 없고,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이제 네 얼굴 보려면 예약해야 할 판이구나?]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어제는 시차 적응하느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거예요.”

시윤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기철민은 코웃음을 쳤다.

[변명하지 마라. 3년 동안 내가 너한테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귀국하면 꼭 정착할 사람을 찾아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라고...]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던 시윤의 눈에 뭔가 떠오른 듯 부드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 안심하세요. 잘 기억하고 있어요”

시윤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제가 꼭 만족시켜 드릴게요.”

...

태안은 마침내 술이 깼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침대 위를 이리저리 더듬더듬하다가 마침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였다.

그 순간 잠이 싹 달아난 태안이 벌떡 일어나서 앉았다.

오전에 회의가 있었는데, 다인이 전화로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그때 비서가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오던 비서가, 태안이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왜 이제야 왔어?”

태안이 책임을 추궁하듯 물었다. 핸드폰에는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는데, 모두 비서에게서 온 것이었다.

“대표님께서 무슨 중요한 일이 있으신 줄 알고,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서가 변명했다. 지금 온 것도 사실은 시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테안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다인은 어디 있어?”

비서는 잠시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개 비서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지난 5년 동안 중요 회의가 있을 때마다 비서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다인이 직접 태안에게 알려줬고, 태안은 이미 이런 점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일과는 언제나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심지어 다인이 아플 때조차도, 항상 한 시간 전에 태안에게 전화를 걸어 깨워주곤 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도, 다인은 태안에게 실망을 안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작 혼인신고를 안 했다는 이유로 일부러 나 엿 먹이는 거야?’

‘내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해 준 모양이네.’

태안은 어두운 표정으로 다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는 한 번 울린 후 자동으로 끊겼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건 전화번호를 차단한 거야!’

태안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다인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더니, 화면에 메시지가 거부되었다는 표시와 함께 빨간색 느낌표가 나타났다.

‘좋아!’

‘아주 좋아!’

태안의 눈에 냉랭한 분노가 스쳤다.

‘이번엔 내가 오냐오냐해주나 봐라!’

‘나랑 다시 만나고 싶으면, 공주병을 고쳐야 할 거야!’

...

해가 지고 있었다.

캐룬 베어 별장의 침실. 창가에 양반다리로 앉은 다인은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어디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대본을 구상하고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다인의 대본은 두 번이나 웹드라마로 제작된 적이 있었지만, 조회수는 평범했다.

히트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망작도 아닌 수준이었다.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걸려 온 전화번호를 힐끗 본 다인이 순순히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얘야, 너 어쩜 할아버지 보러 도통 오지를 않니? 어제 혼인신고 했지? 시간 내서 할아버지 보러 오너라. 태안이 그 자식도 데리고...]

다인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 태안이랑 헤어졌어요.”

전화 건너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몇 번 들렸다. 한민수는 이런 일을 흔한 일로 여기는 듯했다.

[왜 그러니? 그 자식이 또 장난쳐서 너 화나게 했어?]

할아버지의 태도가 문득 다인에게 지난날의 일들을 생각나게 했고, 가슴이 찌릿하게 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이번엔 정말이에요.”

잠시 숨을 돌린 뒤, 다인이 말을 이었다.

“저 태안이랑 헤어지고, 시윤 오빠랑 혼인신고 했어요.”

침실 문 밖에서 다인의 말소리가 들리자, 반쯤 뻗은 시윤의 손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곧이어 시윤의 눈빛은 깊은 심연처럼 어두워졌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100화

    유조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시윤의 눈빛을 제대로 마주치자 등줄기까지 서늘해졌다.‘설마... 뭘 아는 건가?’하지만 유조영은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유조영은 애써 표정을 굳히고, 다시 날 선 목소리로 몰아붙였다.“시윤아, 네가 능력이 있는 건 나도 알아. 지금 기씨 가문이 사실상 네 손에 달려 있는 것도 맞지.”“그래도 태안이한테 잘못이 있다 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망가뜨릴 만큼 손을 써야 했니? 형제 사이 정은 조금도 생각 안 했어?”유조영의 말에는 원망과 질책이 가득했다.방금 전 시윤이 던진 말의 뜻을... 병실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태안은 이를 악문 채 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형, 아무리 그래도 나랑 다인이는 원래 결혼하기로 했던 사이였어. 내가 방법을 잘못 썼을 수는 있어도 다인은 어차피 언젠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이었어. 난 그냥 그걸 조금 앞당기려 했을 뿐이야.”유림은 태안보다도 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맞아요. 태안 오빠랑 다인이는 원래 만나던 사이였잖아요. 다인이도 태안 오빠를 많이 좋아했고요. 어쩌면 이번 일만 지나가면 다인이 화도 풀려서, 괜히 고집부린 걸 그만둘 수도 있죠.”“할 말 다 했어?”시윤은 원래부터 눈매에 싸늘한 기운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그런 시윤이 시선을 들어 세 사람을 훑는 순간, 병실 안 공기마저 차갑게 식어 버렸다.“다인이는 이미 먼저 파혼 의사를 밝혔습니다. 태안이와의 혼인은 이미 끝난 일이나 마찬가지예요. 남은 건 양가가 앉아서 형식만 정리하는 것뿐입니다.”시윤의 시선이 곧장 태안에게 향했다.눈빛은 날이 서 있었다.“그리고 너...”시윤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상대 동의 없이도 약을 쓰고, 강제로 범하려고 한 건 명백한 성범죄야. 최소 형량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굳이 설명해 줘야 하나?”태안은 눈을 크게 떴다.“형, 다인이 때문에 날 경찰에 넘기겠다는 거야? 내가 그래도 형 친동생인데?”‘친동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99화

    “고작 여섯 살 차이잖아요. 무슨 나이 차가 엄청 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그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시윤은 원래도 생활 방식이 꽤나 단정하고 올드한 편이었다. 스물아홉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단 한 번도 스캔들 없이 지냈고, 가벼운 소문조차 붙은 적이 없었다. 유흥가를 드나든다는 이야기도, 여자 문제로 입에 오른 적도 없었다.그쪽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들 알고 있었다.시윤은 자기관리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철저했고, 생활도 반듯했다. 그래서 오히려 누군가를 오래 마음에 둔 채 혼자 지켜 온 것 아니냐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너보다 나이가 많으면 그걸로 된 거지.”시윤은 입가의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그리고 넌 너무 말랐어. 바람 좀 불면 날아갈 것 같거든. 딱 아이 체격이야.”“어디가요? 나... 발육은 잘 됐거든요.”다인은 발끈하며 가슴을 살짝 내밀었다.“못 믿겠으면 보세요...”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다인은 자기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내가 왜 그걸 굳이 보여 주려는 거야?’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민망해진 다인은 몸을 돌려서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하지만 시윤이 순순히 놓아줄 리 없었다.시윤은 곧바로 다인의 허리를 감고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자기 품 안에 가뒀다.“뭘 보라고?”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다인의 얼굴 가까이 닿았다.다인의 얼굴은 금세 터질 듯 뜨거워졌다.방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다인은 후회막심했다.‘보라고 하다니, 뭘?’‘정말로...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직접 보여 주겠다는 뜻처럼 들렸을 거 아니야?’다인은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차마 시윤을 마주 보지 못했다.“내가... 방금 한 말은...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시윤의 눈빛이 뜨겁게 가라앉으면서 손끝으로 다인의 턱을 들어 올렸다.“난 아까 네가 더 좋았는데.”시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떨어졌다.“가령... 한 번 더 보여 준다든지.”다인의 얼굴은 더 붉어져서 귀 끝까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98화

    어제 일로 충격을 받은 다인이 악몽을 꾸는 듯했다.표정은 몹시 괴로워 보였고, 몸도 자꾸만 가늘게 떨렸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릴 만큼 위태로웠다.시윤은 서둘러 다인을 품에 안았다.그리고 다인의 이마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낮게 달랬다.“내가 있잖아. 무서워하지 마. 이제 괜찮아.”깊고 어두운 시윤의 눈빛에는 애써 눌러 참은 감정이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윤은 다인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시윤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마치 겁먹은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럽고도 끈질기게.다인은 마치 매서운 추위 속을 헤매다 따뜻한 화롯가로 파고든 사람처럼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시윤의 품 안에서 다인의 떨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작고 여린 몸이 시윤의 품 안에 꼭 들어왔다.가볍고 부드러운 다인의 손은 시윤의 가슴팍 옷자락을 꼭 붙잡고 있었다. 시윤의 체온과 익숙한 향을 느끼면서, 다인은 그렇게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시윤은 마음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시윤은 다인을 안은 팔에 더 단단히 힘을 주고, 고개를 숙여서 다인의 이마에 다시 한번, 또 한 번 입을 맞췄다....다인은 푹 자고 나서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어제는 기운이 완전히 빠져 있었는지, 거의 내내 잠만 잔 셈이었다.자리에서 일어난 다인이 씻고 나왔지만, 시윤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시윤이 이미 회사에 간 줄 알았다.그런데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시윤은 거실 소파 뒤쪽, 통유리창 앞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따뜻한 햇살이 시윤의 몸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원래도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이었는데, 햇빛까지 더해지자 그 얼굴이 햇빛보다도 더 눈에 띄었다.다인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봤다.시윤이 통화 중인 걸 보고. 다인은 가까이 가지 않고 멈춰 섰다.그 사이에 상주댁이 다인에게 몸보신을 하라면서 보양식을 내왔다. 아침을 먹고 이것도 꼭 먹으라고 다정하게 권했다.다인은 얌전히 상주댁 말대로 보양식을 먹었다.그러다 문득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97화

    다행이었다.정말, 시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이번엔 잘했어.”시윤은 다인의 눈물을 닦아준 뒤,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다인을 바라봤다.“앞으로도 불안한 일이 생기면 혼자 끌어안지 말고 나한테 물어. 아니면 나랑 먼저 상의해.”다인은 시윤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걱정과 낯설면서도 요즘 들어 자주 마주하게 된 다정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는 사이에 다인의 가슴 한쪽으로 따뜻한 온기가 천천히 번져 갔다.무엇보다도, 가까이에서 마주한 시윤의 얼굴은 시선을 떼기 어려울 만큼 또렷하고 잘생겼다.그 탓에 다인의 심장은 더 세게 뛰기 시작했다.이번은 전과 달랐다.지금까지 어느 때보다도 더 선명했다.‘이게 정말, 마음이 움직이는 감정일까?’다인 스스로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다인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는 걸 본 시윤은, 다인이 아직도 오후 일을 떠올리며 겁에 질려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더 다그치지 않았다.“배고프지? 뭐 먹고 싶어? 내가 해 줄게.”“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알겠어. 일어나서 얼굴만 좀 씻고 와. 금방 준비할게.”시윤은 가볍게 다인의 어깨를 두드렸다.다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뒤에야 시윤은 안방을 나갔다.30분쯤 지나서, 세수를 하고 내려온 다인은 식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식탁 위에는 소고기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위에는 계란이 올려져 있었고, 잘게 썬 파가 살짝 뿌려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다인은 놀란 눈으로 시윤을 바라봤다.“이거... 오빠가 만드신 거예요?”시윤은 짧게 대답했다.“응. 외국에 있을 때 3년 동안 자주 해먹었어.”따끈한 국물 냄새가 퍼지자, 비어 있던 다인의 위장도 금세 반응했다.다인은 젓가락을 들고 급히 한 입을 먹었다.“맛있어요.”다인은 놀란 기색으로 시윤을 올려다봤다.진심으로 나온 말이었다.그 한마디를 뱉고 나자, 태안 때문에 남아 있던 불쾌한 기분도 절반쯤은 걷혀 나가는 것 같았다.“마음에 들면 더 먹어. 잘 먹어야, 이제 일도 할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96화

    지금까지 시윤에게는 후회되는 일이 딱 두 번 있었다.한 번은 5년 전의 일이었고, 또 한 번은 바로 지금이었다. 시윤은 다인의 뜻을 존중해서, 다인이 직접 태안과의 관계를 매듭짓고 나서야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기로 한 걸 뒤늦게 후회했다.처음부터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드러냈다면, 누가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었겠는가?건민은 잠시 말을 잃었다.“너희... 결혼했다고?”시윤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이상해?”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다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안의 여자친구였다.건민이 아는 시윤은 늘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는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렇다면 결국 시윤은 다인에게...건민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이건 또 엄청난데.’건민은 그제야 뭔가 큰 걸 알아차린 사람처럼 속으로 혀를 찼다.이건 단순히 늦바람이 난 게 아니었다.오히려 오래전부터 마음이 있었고, 오래도록 참고 지켜보다가 결국 여기까지 온 쪽에 가까웠다.건민은 속으로 충분히 놀랄 만큼 놀란 뒤, 돌아가기 전에 시윤에게 만족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남겼다.다인의 몸 상태만이 아니라 마음 상태도 잘 살피라고.밤이 깊어 어느덧 열 시가 가까워졌을 때, 다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다인의 눈빛은 아직 좀 흐릿했다.낯선 듯 방 안을 한참 둘러보던 다인의 머릿속에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하나씩 떠올랐다.“깼어?”그때 시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시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인에게 다가갔다.그런데 시윤의 손이 다인의 어깨에 닿는 순간이었다.다인의 온몸이 갑자기 크게 움찔했다. 마치 팽팽하던 신경이 한꺼번에 끊어지기라도 한 듯, 다인의 표정이 곧장 일그러졌다.“안 돼, 안 돼... 날 만지지 마!”“저리 가... 날 건드리지 마...”다인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 머리맡으로 몸을 웅크렸다.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깊게 파묻은 채 떨고 있었다. 흐릿하게 젖은 눈에는 공포가 가득 차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95화

    태안은 더는 따질 여유가 없어서 이를 악문 채 변명처럼 쏟아냈다.“난 한다인이 좋아. 파혼은 절대 안 돼! 엄마도 절대 안 된다고 했어!”“다인이 원하면, 그 결혼은 끝난 거야.”시윤의 기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시윤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태안을 똑바로 바라봤다.“선택해. 하나, 얌전히 파혼을 받아들여. 둘, 여기서 끝까지 가든가.”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윤은 태안의 손을 붙잡은 채 힘을 더했다.짧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태안의 비명이 터졌다.“아악!”태안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쏟았다. 손끝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목소리까지 떨렸다.“형, 진짜 나 죽일 생각이야? 나 형 친동생이잖아!”시윤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쓸데없는 말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선택하라고.”태안은 시윤의 눈빛에 담긴 기세를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지금 시윤은 지난번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화가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다인이 시윤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받아들일게! 파혼 받아들이겠다고! 그렇게 할게!”태안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급히 외쳤다.지금은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워서, 태안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꺼져.”시윤은 태안을 거칠게 밀어냈다.그리고 곧장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침대 위의 다인을 바라보는 시윤의 눈빛은 깊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방금 전까지 서려 있던 거친 기운은 다인을 보는 사이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태안은 겨우 풀려난 사람처럼 급히 욕실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었다.침대 위의 다인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작은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보기만 해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시윤의 가슴이 꽉 조여 들었다.그나마 다인을 바라보면서 안도할 수 있었다.‘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어.’시윤은 재빨리 다인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10화

    다음 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깬 다인은, 자기 몸 전체가 시윤에게 매달리는 듯이 꼭 붙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문어처럼 손과 발을 시윤에게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을 보자,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다인은 멍해졌다.‘내 수면 자세가 왜 이렇게 화려한 거지?’그나마 다행인 건, 시윤은 아직 깨어 있지 않았다.시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손발을 거둬들인 다인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숨도 쉬지 못했다.그때 문득,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시윤이 농담했던 게 생각났다.“여보, 나랑 잘 준비는 됐어?”다인은 바로 얼굴이 빨개지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17화

    그러나 이 말은 시윤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5년 전, 17살이던 다인은 대놓고 선언하며, 태안과 연애를 시작했다.곱게 자란 명문가의 외동딸은 얼굴에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결국 23살이던 시윤은 말없이, 원래 다인에게 생일 선물로 주려던 손목시계를 평범한 목걸이로 바꾸었다.3년 전 19살이던 다인은 기철민 앞에서 태안과 결혼하겠다고 하며, 법정 연령이 되자마자 혼인신고 하러 가겠다고 선언했다.그때, 25살이던 시윤은 말없이 다음 날 항공권을 예매한 뒤 출국했다.그 이별은 3년이었다.시윤이 마음 깊이 숨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12화

    ‘이상하네.’마음이 아플 줄 알았는데 등허리에서 전해지는 고통 외에, 가슴이 좀 답답할 뿐 전혀 아프지 않았다.아마 5년 동안 아파서, 무감각해진 걸지도 모른다.다인은 하옇게 질린 얼굴로 갑자기 냉소를 흘렸다. 고통을 참고 허리를 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런 모습에 태안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금 내 말이 너무 심했나?'“다인아, 나...”태안의 마음이 약해지는 걸 감지한 유림이 옆에서 울먹였다.“오빠, 오빠가 와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다인이가 날 얼마나 망가

  • 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   제9화

    ‘보아하니 다인은 여전히 태안을 신경 쓰는 모양이네.’“헤어졌다며?” 시윤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차가운 눈빛으로 태안을 노려보았다.태안은 그 사실이 시윤의 귀에 들어갔다는 걸 예상치 못했다.‘이번엔 한다인이 너무 지나쳤어!’“다인이 성질이 좀 더러워서, 뭐만 해도 헤어지자고 난리야. 내가 유림이 환영 파티해 주느라고 혼인신고 하러 안 가서 이렇게 난리 친 거야.”태안은 창피한지, 얼굴에 언짢은 기색을 띠었다. “애가 워낙 계산적이고, 마음이 좁거든. 이 점은 내가 잘 이야기해서 고치도록 할게. 나중에 유림이가 또 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