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혁의 목소리는 조금 전 자신에게 말할 때와 달랐다."밥은 먹었어?"그는 상대방의 대답을 듣고 짧게 웃었다."그럼 내가 데리러 갈게."하윤은 문손잡이를 붙잡았다.자신에게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한 남자가, 백유리에게는 밥을 먹었는지 묻고 있었다.그녀는 문을 열지 못했다.시혁이 현관을 나서는 소리가 들린 뒤에도 하윤은 한동안 화실에 남아 있었다. 창밖이 어두워질 무렵에야 붓을 씻고 침실로 돌아왔다.***밤이 깊어지자 하윤은 다시 향수병을 꺼냈다.이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남편이 처음 선물했을 때의 기억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다.하윤은 병목의 리본을 풀었다. 흰색 리본 아래에는 작은 종이 라벨이 붙어 있었다.향수의 이름과 제조 정보가 적힌 라벨이었다.그녀는 이름을 휴대전화에 입력했다. 검색 결과에는 오래된 향수 소개 기사와 해외 판매 기록이 나타났다.하윤은 화면을 넘기다가 한 문장에서 손을 멈췄다.해당 향수는 몇 년 전 생산이 중단된 한정 제품이라는 설명이었다.하윤은 다시 검색했다. 판매가 중단된 정확한 시점을 확인하려고 여러 자료를 비교했다.그러다 백유리가 해외 유학 중 참석한 행사 사진을 발견했다.사진 속 백유리의 화장대에는 익숙한 모양의 향수병이 놓여 있었다.하윤은 화면을 확대했다. 병목의 장식과 뚜껑 모양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았다.그녀는 향수병을 손에 쥔 채 사진을 바라보았다.시혁은 결혼 첫해 겨울에 이 향수를 선물했다. 그런데 백유리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같은 향수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였다.하윤은 판매 종료 시점을 다시 확인했다.향수는 시혁이 하윤에게 선물하기 전에 이미 공식 생산이 중단된 제품이었다.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단정할 수 없었다. 시혁이 우연히 남아 있던 제품을 구입했을 수도 있었고, 오래전부터 그 향수를 좋아했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하윤은 남편이 선물을 건네며 했던 말을 기억했다.*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그때 그는 향수를 처음
거친 선과 강한 색채, 자유롭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구의 취향에도 맞추려 하지 않았다.하윤은 스케치북을 넘기다가 자신의 자화상 앞에서 멈췄다. 짧은 머리의 여자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때는 누군가를 닮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 부끄럽지 않았다.그녀는 자화상 아래 적힌 날짜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새로운 캔버스를 꺼냈다.이번에는 백유리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남편이 좋아하던 얼굴도, 그가 골라 준 옷도 생각하지 않았다.그저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처음 그은 선은 흔들렸지만, 두 번째 선부터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녀는 그림 속 자신의 머리카락을 짧게 그렸다. 결혼 전처럼 어깨에 닿는 길이였다.그림을 그리는 동안 하윤은 오랜만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다시 찾고 싶었다.그러나 그 마음이 생겨났다고 해서 남편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하윤은 붓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시혁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자신이 있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오후 늦게 시혁이 화실 문을 열었다.하윤은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붓을 내려놓았다. 오전에 출근했던 시혁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었다.시혁은 작업대 위에 펼쳐진 오래된 사진과 영수증을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하윤은 캔버스를 가리지 않았다."예전 사진 정리하고 있어요."시혁은 사진 몇 장을 집어 들었다. 그중에는 결혼 전 하윤의 모습도 있었다.그는 짧은 머리의 하윤을 바라보다가 별다른 감정 없이 사진을 내려놓았다."옛날 사진을 왜 꺼냈어?"하윤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당신은 내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면 싫어요?"시혁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하윤은 거울 옆에 놓인 자화상을 가리켰다."머리도 짧게 자르
시혁이 선물한 옷은 대부분 비슷한 색이었다. 흰색 블라우스, 아이보리색 원피스, 연한 베이지색 카디건, 부드러운 소재의 긴 치마까지 옷걸이에 걸린 모습이 마치 누군가가 정해 놓은 규칙처럼 보였다.그녀는 옷을 침대 위에 펼쳐 놓고 구매 내역을 확인했다.시혁이 직접 주문한 물건은 자신의 계정에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함께 매장에 갔던 날의 영수증과 배송 문자 일부는 남아 있었다.하윤은 오래된 문자메시지를 검색했다.*이 색으로 골라.**머리 자르지 마.**향수는 내가 준 걸로 써.*짧은 문장들이 화면에 나타났다.당시에는 남편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증거라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으니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시혁은 하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먼저 이야기했다.하윤은 문자메시지를 하나씩 캡처했다. 그리고 백유리의 과거 사진과 날짜를 대조하기 시작했다.백유리가 해외에서 참석한 행사 사진에는 비슷한 색의 원피스와 긴 머리카락이 반복해서 등장했다. 어떤 사진에서는 하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의 머리핀까지 보였다.그녀는 화면을 확대했다.머리핀은 시혁이 결혼 첫해 생일에 선물한 것과 닮아 있었다.하윤은 서랍에서 머리핀을 꺼냈다. 작은 진주 장식이 달린 머리핀이었다.시혁은 그날 하윤의 머리카락을 직접 묶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이렇게 하면 훨씬 예뻐."하윤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 기억이 떠오르자 손끝에 힘이 풀렸다. 머리핀이 바닥에 떨어져 작은 소리를 냈다.하윤은 한동안 그것을 줍지 못했다.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시혁이 침실로 들어왔다. 그는 아직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고, 셔츠 소매를 정리하며 침대 위에 펼쳐진 옷과 사진들을 바라보았다."이게 다 뭐야?"하윤은 고개를 들었다.남편은 자신이 사 준 옷들이 바닥과 침대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옷장 정리하고 있어요."시혁은 하윤의 손에 들린 오래된 영수증을 바
시혁은 잠시 침묵하더니 유리와 식사했다고 대답했다.하윤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남편을 위해 끓인 국은 식탁에서 식어 가고 있었고, 남편은 백유리와 저녁을 먹고 돌아와 아내의 옷차림부터 지적했다.그녀는 더 묻지 못하고 돌아섰다.부엌으로 돌아온 하윤은 수저 두 벌을 하나씩 치웠다. 그릇에 담긴 국을 냄비에 다시 붓는 동안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시혁이 집에 들어왔을 때 조금이라도 기뻤던 자신이 초라했다.하윤은 국을 버리지 못했다.내일 아침 남편이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하윤은 향수병을 화장대에 내려놓았다.시혁이 서재에 들어간 뒤에도 거실에는 한동안 그의 발소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붉은색 블라우스의 소매를 만지며 거울 앞에 앉았다.남편이 싫어하는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불안해질 줄은 몰랐다. 시혁이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던 모습이 떠올랐다.그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돌아가면 다시 다정해질까.하윤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남편이 다른 여자와 약혼한 뒤에도, 자신을 직원이라고 소개한 뒤에도, 그의 사랑을 되찾을 방법부터 찾고 있었다.그녀는 손끝으로 눈가를 눌렀다. 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 전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려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하윤은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는 오래된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결혼 전 화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짧은 머리에 검은색 셔츠를 입고, 양손에 물감을 묻힌 채 웃고 있었다.그 사진 속 하윤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리고 자유로워 보였다.시혁을 만나기 전에도 자신은 그림을 그렸고, 웃었고, 좋아하는 옷을 입었다.그런데 언제부터 남편의 칭찬을 듣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일이 당연해졌을까.하윤은 사진을 꺼내 거울 옆에 세웠다. 그리고 다시 백유리의 오래된 사진을 열었다.두 사진을 나란히 놓자 차이가 더욱 선명해졌다.결혼 전 하윤은 백유리와 지금처럼 닮지 않았다. 머리 길이도, 옷차
그녀는 수저를 치우지 못했다.저녁 일곱 시가 조금 지나 현관문이 열렸다.하윤은 거실에서 그림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시혁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고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하윤을 발견하자 손을 멈췄다.그의 시선이 붉은색 블라우스에 머물렀다."그 옷 뭐야?"하윤은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예전에 샀던 옷이에요."시혁은 가까이 다가오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갈아입어."하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왜요?""안 어울리니까."그 말은 너무 익숙했다.하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삼 년 동안 남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머리는 조금 더 기르라고, 밝은색 옷을 입으라고, 자신이 고른 향수를 사용하라고 했던 말들이었다.그때마다 하윤은 남편이 자신을 더 예쁘게 봐 주길 바랐다.하지만 오늘은 그 말을 그대로 따르고 싶지 않았다."나는 이 옷이 좋아요."시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하윤아.""내가 좋아서 산 옷이에요. 한 번도 입지 못했지만."그녀는 남편의 눈을 바라보았다."당신이 싫어한다고 해서 삼 년 동안 넣어 뒀어요."시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갑자기 옷 가지고 왜 이래?"하윤은 대답하지 않고 화장대 위의 향수병을 가져왔다.투명한 병을 보는 순간 시혁의 시선이 달라졌다."그건 왜 들고 있어?"하윤은 향수병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당신이 사 준 거잖아요.""그래서?""나한테 어울린다고 했죠."시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윤은 병목에 묶인 흰색 리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이 향수였어요?"시혁은 피곤하다는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그냥 좋아서 골랐어.""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하윤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하윤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백유리의 이름을 꺼내고 싶었다. 당신이 그 여자를 닮게 하려고 나를 바꿨느냐고 묻고 싶었다.그러나 그 질문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남편이
그녀는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서 검은색 원피스를 입었다. 결혼 전부터 아끼던 옷이었고, 화실에서 전시 준비를 마친 날이면 종종 입곤 했다.시혁은 현관에서 그녀를 보더니 잠시 걸음을 멈췄다."다른 옷 없어?"하윤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왜요? 이상해요?""너무 어두워."그는 옷장 안에서 밝은색 원피스를 꺼내 건넸다."이런 게 더 잘 어울려."하윤은 처음에는 웃으며 거절했다. 검은색이 편하고, 친구를 만나는 자리라 특별히 꾸밀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그러자 시혁은 원피스를 든 채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내가 골라 준 건 마음에 안 들어?"그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자 하윤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옷을 갈아입었고, 시혁은 그제야 만족한 듯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예쁘네."그 한마디에 하윤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친구가 새 원피스를 칭찬했을 때도 남편이 골라 준 옷이라며 자랑했다. 그날 밤 시혁이 자신을 끌어안고 예쁘다고 한 번 더 말해 주었을 때는, 앞으로 그가 좋아하는 옷만 입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다.자신은 옷을 갈아입은 대가로 남편의 다정함을 얻었다.하윤은 침대 위의 원피스를 내려다보았다. 그 옷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백유리의 사진이 실린 기사 날짜를 확인했다. 시혁이 원피스를 사 주기 몇 년 전이었다.우연일 수도 있었다. 아이보리색 원피스가 세상에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긴 머리를 좋아하는 남자가 드문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비슷한 옷이 한 벌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하윤은 옷장 안쪽에서 오래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결혼 전 입던 짧은 재킷과 진한 남색 셔츠, 물감 자국이 남은 작업복, 검은색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하나씩 꺼낼 때마다 자신이 어떤 색을 좋아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났는지 떠올랐다.그중에는 아직 한 번도 입지 못한 붉은색 블라우스도 있었다.결혼 후 처음 맞은 생일에 스스로 구입한 옷이었다. 그날 하윤은 붉은색 블라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