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콰아아앙-!타티아나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시안의 몸에서 폭발한 심연의 흑기가 중앙 막사를 형체도 없이 찢어발겼다.천막 기둥이 부러져 내리고 바닥의 흙먼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타티아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자진해서 그놈의 손을 잡았다고?”검붉게 일렁이는 카시안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핏발이 곤두섰다.기억을 잃은 척 제 품에서 순종적으로 굴던 것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손아귀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벌이는 가련하고도 귀여운 놀음이라 여겼다. 언제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승자의 여유로 기꺼이 속아주었던 것이다.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살기 위한 발버둥이 아니라, 옛 남편이 제 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판을 짠 치밀한 기만이었단 말인가.‘나를 이용해 서연합과 전쟁을 벌이고, 정작 자신은 레온과 손을 잡은 채 타르티스로 빠져나갔다고?’제 침소 위에서 달콤하게 흐느끼던 그 순간조차, 속으로는 옛 남편을 기다리며 자신을 비웃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머리 꼭대기까지 농락당했다는 모멸감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레온의 품에 안겨 있을지 모른다는 시커먼 질투가 카시안의 이성을 송두리째 불태웠다.“감히 날 이용해 먹고 그놈에게 돌아가……?!”피를 토하는 듯한 포효가 적막한 진영을 뒤흔들었다. 카시안은 발밑에 엎드린 타티아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대기하고 있던 군마의 등에 거칠게 뛰어올랐다.“전군, 지금 당장 검은 안개 숲으로 진격한다! 숲을 통째로 불태워서라도 두 사람을 내 앞으로 끌고 와!”이성을 잃은 폭군의 명령과 함께, 칠흑 같은 드라켄의 기마대가 타르티스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인 검은 안개 숲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검은 안개 숲의 가장 깊은 곳.밤새 동굴 안을 달구었던 농밀한 열기가 가시고, 새벽의 서늘한 어스름이 내려앉은 숲속으로 로제와 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레온의
구릉지 아래 도열한 드라켄의 최전선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으로 얼어붙어 있었다.그 침묵의 중심에는 선두에서 말 고삐를 쥐고 있는 카시안이 있었다. 칠흑 같은 갑주를 두른 그의 몸에서 시커먼 심연의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살벌한 기세인지, 잘 훈련된 군마들조차 거친 콧김을 뿜으며 뒷걸음질을 쳤고 주변의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는 것조차 버거워했다.‘……너무 길어.’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구릉지 너머 서연합의 진영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블랑을 빼앗긴 지 고작 며칠. 철옹성처럼 틀어박힌 벨모어를 끌어내기 위해 타티아나를 밀정으로 보내고 신호를 기다리는 이 짧은 시간이, 카시안에게는 숨통을 조이는 지옥과도 같았다. 당장이라도 적진을 쓸어버리고 그 더러운 막사에서 블랑을 꺼내 와야만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바로 그때였다.부우우웅-! 와아아아아-!구릉지 너머에서 밤하늘을 찢는 듯한 진격의 나팔 소리와 함께, 서연합 병사들의 광기 어린 함성이 터져 나왔다.‘타티아나가 엘런의 숨통을 끊었군.’카시안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 곧 벨모어가 전군을 몰고 이곳으로 쏟아져 내려올 터였다. 카시안이 마침내 검을 뽑아 들고 요격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였다.콰아아앙-!서연합의 진영 한복판에서 기괴할 만큼 거대한 진홍빛 불기둥이 밤하늘을 집어삼킬 듯 치솟았다. 단순한 횃불이나 마법 따위가 아닌, 어둠을 대낮처럼 밝히는 기이하고도 폭력적인 화염이었다.그리고 그 불기둥이 사그라든 순간을 기점으로,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적진의 나팔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멎어버렸다.“……어?”“뭐야, 나팔 소리가 왜 갑자기 멈추지?”창을 고쳐 쥐고 있던 드라켄의 병사들 사이에서 당황스러운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언덕을 넘어 쏟아져 내려올 것 같던 적진이 소름 끼칠 정도의 깊은 정적에 휩싸였기 때문이다.“폐하, 이상합니다! 적들이 내려오지 않습니다!”“잠깐, 저 소리는…… 퇴각하는 말발굽 소리
동굴 안의 공기는 시리도록 차가웠으나, 얽혀 드는 입술과 뒤엉킨 숨결은 살갗을 데울 듯 뜨겁게 끓어올랐다.“읍, 츄릅…… 하아…….”로제의 입안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파고들던 입맞춤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에야 간신히 떨어져 나갔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로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레온의 황금빛 눈동자가 시커먼 열기로 일렁였다.챙그랑-! 레온은 숨이 막힌다는 듯 제 몸을 옥죄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흉갑과 검대를 거칠게 뜯어내 바닥으로 내던졌다. 바위에 쇳덩이가 부딪치는 둔탁한 파열음이 동굴 안을 울렸다. 스산한 밤바람 속에서 드러난 그의 거대한 상체가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로제.”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신음과 함께, 사내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얇은 가운을 단숨에 벗겨냈다.“하, 으흣……!”얇은 가운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기 무섭게, 거친 호흡을 토해내던 레온이 로제의 하얗게 드러난 발목을 거칠게 낚아챘다.우악스럽고 단단한 손아귀가 가느다란 발목을 그러쥐고 단숨에 그녀의 두 다리를 제 허리 양옆으로 벌려 놓았다. 바닥에 깔린 망토 위로 로제의 등이 닿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며 덮쳐왔다.“흐…… 레온, 잠깐……!”당황한 로제의 숨이 멎기도 전, 다시금 거칠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타들어 갈 듯 뜨거운 혀가 사정없이 얽혀 들었다.단순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타액이 턱 끝을 타고 질척하게 흘러내릴 만큼, 마치 숨을 모조리 빨아들여 삼켜버릴 듯 폭력적인 포식이었다. 그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드래곤의 순수한 열기가 폐부 깊숙이 쏟아져 들어와, 혈관을 어지럽히던 탁한 음기를 매섭게 밀어냈다.“하아, 하…… 로제, 제발…….”입술이 겨우 떨어지자마자, 레온은 핏발 선 황금빛 눈동자로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나신을 훑어내렸다.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노예 검투장의 흙먼지와 피비린내를 견뎌내며 단단하게 벼려진 그의 육체는, 과거 황
블랑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일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안아 올렸다.불바다가 된 서연합의 진영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쏘아져 나간 그의 속도는 인간의 것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스치는 밤바람이 살갗을 벨 듯 사나웠으나, 그는 자신의 넓은 품으로 블랑을 빈틈없이 감싸 안아 찬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얼마나 달렸을까. 쫓아오던 병사들의 함성이 아득히 멀어지고, 타르티스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인 ‘검은 안개 숲’의 거대한 나무들이 시야를 뒤덮었다. 삼국의 영토가 맞닿은 이 완충 지대는 흉포한 마수들이 득실거려 누구도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는 마경이었다.크아아아앙-!아니나 다를까, 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고목들이 부러지며 집채만 한 크기의 마수가 아가리를 벌린 채 덮쳐 왔다. 시커먼 독기를 뚝뚝 흘리는 고위급 마수였다.하지만 카일의 걸음은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수축하는 순간, 허공을 가른 검신에서 다시 한번 맹렬한 진홍빛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콰아아앙!단 일격에 마수의 거대한 머리가 재로 변하며 폭발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직후였다. 불길에 휩싸인 마수의 심장부에서 마정석이 뒤틀리며 터져 나오더니, 검붉은 연기가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갔다.“윽……!”카일이 반사적으로 망토를 펼쳐 블랑의 얼굴을 가렸으나, 죽어가는 마수가 마지막으로 토해낸 고농도의 ‘음기(陰氣)’ 일부가 얄궂게도 블랑의 호흡 속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그녀의 몸이 힘없이 휘청거렸다.“로제!”다급하게 터져 나온 외침은 블랑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그녀를 또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 앞에서, 그간 억지로 부르고 있던 가짜 이름 따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로제를 고쳐 안고는, 숲 한가운데 자리한 바위 동굴 안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바닥에 마른 망토를 깔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하아, 흐으
광기 어린 함성이 밤하늘을 뒤흔들고 난 뒤, 엘런의 시신은 벨모어의 명을 받은 병사들에 의해 거적에 싸여 실려 나갔다.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막사 안에는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다. 블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걸치며 차분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했다.그때였다.툭,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타티아나가 블랑의 발치에 두 무릎을 꿇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살인의 흥분과 공포로 어깨는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고개를 들어 블랑을 올려다보는 눈빛만은 소름 끼치도록 또렷했다.“……나와 내 아들을 거두어 주십시오.”타티아나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블랑은 옷끈을 묶던 손을 멈추고, 제 발밑에 납작 엎드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이상하네요. 이 일을 성공하면 카시안이 복권을 약속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내게 굳이 그런 부탁을 하죠?”블랑의 의아한 물음에 타티아나가 피 묻은 입술을 달싹이며 자조 섞인 숨을 토해냈다.“얀은…, 아니 카시안 폐하에게 저는 이제 그 무엇도 아니니까요. 황제의 비호도, 가문도 힘도 없는 귀족 자리는 그저 허울 뿐이라는 걸 저는 알거든요. 공을 인정 받아서 드라켄에서 귀족으로 산다고 해도 제 아들이 엘런의 핏줄이라는게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그 꼬리표는 그 다음 대에도 따라다니겠죠.”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어 블랑의 맨발 끝에 입을 맞추듯 바짝 다가앉았다.“게다가 오늘 밤 똑똑히 보았습니다. 내 손에 직접 복수의 칼을 쥐여준 구원자가 누구인지. 저의 진짜 은인은 당신이죠.”블랑의 붉은 입술에 만족스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그녀는 가볍게 무릎을 굽혀 타티아나의 피 묻은 뺨을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영리하네. 마음에 들어.”“옆에서 당신을 모시게 해주세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그렇다면 너는 이곳에 남아.”타티아나의 눈동자가 버림받았다는 불안감으로 크게 흔들렸다. 블랑은 당황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네 아들은 아직 드라켄에
타티아나의 젖은 목소리가 엘런의 귓가에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어젯밤, 그가 그녀의 몸을 짓누르며 내뱉었던 바로 그 끔찍한 비웃음이었다.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번졌다. 욕정에 마비되었던 엘런의 뇌리가 단숨에 차갑게 식었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었다.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한 그가 입을 쩍 벌려 호위병을 부르려던 찰나였다.“읍, 으읍-!”블랑이 억센 손아귀로 뭉쳐둔 두꺼운 천을 엘런의 입안에 우겨 넣고 턱을 거칠게 틀어막아 버렸다. 찢어질 듯한 비명은 입안에서 맴돌다 끔찍한 파열음으로 부서졌다.덜컹! 덜컹!쇠로 된 간이침대가 엘런의 처절한 발버둥에 요란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막사 밖의 경비병들에게 그 소리는 그저 격렬하고 변태적인 정사의 흔적으로 들릴 뿐이었다.결박된 두 팔의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하고, 눈가리개 아래로 공포에 질린 핏대가 솟구쳤다. 엘런의 명치를 짓누르고 올라탄 타티아나는 한계까지 치켜든 단검을 꽉 쥐고 있었다. 어젯밤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에는 엘런이 남긴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했다.수천 번 되뇌었던 살의가 칼끝에 응집되었다. 타티아나의 눈동자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시퍼런 광기가 번뜩였다.“죽어.”푹-!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타티아나의 단검이 엘런의 목구멍 깊숙이 파고들었다.“커윽, 으으읍……!”뜨거운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 타티아나의 창백한 뺨과 드레스를 붉게 적셨다. 엘런의 거대한 몸뚱이가 고통으로 펄떡이며 침상을 부술 듯 요동쳤지만, 블랑이 틀어막은 입술 새로 새어 나가는 것은 기괴한 쇳소리뿐이었다.타티아나는 칼자루를 쥔 손에 체중을 싣고 더 깊게, 더 잔인하게 칼날을 비틀었다. 어젯밤 자신이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유린과 질식의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주듯, 그녀의 두 손에는 지독한 원념이 서려 있었다.점차 엘런의 펄떡이던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침상 기둥을 부여잡고 핏줄이 터지도록 당겨지던 두 팔이 마침내 무력하게 툭 떨어졌다. 막사를 가득 채웠던 끔찍한 진동이 멎고, 오직 기도가 끊어
탑의 꼭대기 방.육중한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감옥의 철창 소리보다 더 무겁게 울렸다. “하아….” 엘런은 로제를 침대 기둥으로 몰아붙이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는 급하지 않았다. 이미 제 손아귀에 들어온 완벽한 전리품이었으니까. 그는 로제의 얇은 쉬폰 드레스 자락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훑어 올렸다. “떨고 있군요, 황후.” 그의 손이 로제의 허리를 지나, 맨살이 드러난 어깨를 타고 뱀처럼 미끄러졌다.“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 무능한 황제 놈은 당신의 이 뜨거운 몸을 제대로 다루는 법조차 몰랐던 모양인
“황후 폐하를 들라 하라.”레온은 목소리 아래 깔린 비릿한 긴장을 억눌렀다.대접견실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은빛 스며든 틈 사이로 한 겹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러운 광채를 머금으며 모습을 드러냈다.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과 금빛이 기묘하게 얽혀 흐르는 듯한 머리칼이었다. 햇빛 아래 흔들리는 그 물결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고도 서늘했다.은회색과 청색이 겹겹이 섞인 로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얇은 실크 드레스가 허벅지 곡선을 따
아르센의 수도 칼텐부르크.나른한 봄볕 아래 평화롭던 도시의 공기는, 일순간 비릿한 피 냄새와 뜨거운 무쇠의 열기에 짓눌려 굳어버렸다.먼저 들린 것은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규칙적인 철제의 파동, 대지를 가르는 짐승의 박동이었다.“……왔다.”군중 속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문 너머로 검붉은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들이닥쳤다.북방의 포식자, 드라켄 제국의 황실 근위대.태양 빛을 집어삼킬 듯 번쩍이는 흑철색 갑옷들은 흙먼지 하나 없이 오만했다.300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는 도시를 순식간에 질식시킬 듯 무거웠다.
패전국의 황후가 맞이한 결말은 비참했다.적국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정말 이 여자를 두고 갈 텐가, 아르센의 황제여?”로제는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보았다.피 묻은 검을 쥔 북방의 포식자.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러나 지독히도 오만한 시선으로 로제의 남편을 조롱하고 있었다.“……제국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이오.”레온은 차마 로제 쪽을 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로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밤마다 자신의 생명력과 마력을 쥐어짜 내어 그 핏줄에 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