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블랑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일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안아 올렸다.불바다가 된 서연합의 진영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쏘아져 나간 그의 속도는 인간의 것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스치는 밤바람이 살갗을 벨 듯 사나웠으나, 그는 자신의 넓은 품으로 블랑을 빈틈없이 감싸 안아 찬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얼마나 달렸을까. 쫓아오던 병사들의 함성이 아득히 멀어지고, 타르티스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인 ‘검은 안개 숲’의 거대한 나무들이 시야를 뒤덮었다. 삼국의 영토가 맞닿은 이 완충 지대는 흉포한 마수들이 득실거려 누구도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는 마경이었다.크아아아앙-!아니나 다를까, 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고목들이 부러지며 집채만 한 크기의 마수가 아가리를 벌린 채 덮쳐 왔다. 시커먼 독기를 뚝뚝 흘리는 고위급 마수였다.하지만 카일의 걸음은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수축하는 순간, 허공을 가른 검신에서 다시 한번 맹렬한 진홍빛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콰아아앙!단 일격에 마수의 거대한 머리가 재로 변하며 폭발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직후였다. 불길에 휩싸인 마수의 심장부에서 마정석이 뒤틀리며 터져 나오더니, 검붉은 연기가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갔다.“윽……!”카일이 반사적으로 망토를 펼쳐 블랑의 얼굴을 가렸으나, 죽어가는 마수가 마지막으로 토해낸 고농도의 ‘음기(陰氣)’ 일부가 얄궂게도 블랑의 호흡 속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그녀의 몸이 힘없이 휘청거렸다.“로제!”다급하게 터져 나온 외침은 블랑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그녀를 또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 앞에서, 그간 억지로 부르고 있던 가짜 이름 따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로제를 고쳐 안고는, 숲 한가운데 자리한 바위 동굴 안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바닥에 마른 망토를 깔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하아, 흐으
광기 어린 함성이 밤하늘을 뒤흔들고 난 뒤, 엘런의 시신은 벨모어의 명을 받은 병사들에 의해 거적에 싸여 실려 나갔다.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막사 안에는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다. 블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걸치며 차분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했다.그때였다.툭,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타티아나가 블랑의 발치에 두 무릎을 꿇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살인의 흥분과 공포로 어깨는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고개를 들어 블랑을 올려다보는 눈빛만은 소름 끼치도록 또렷했다.“……나와 내 아들을 거두어 주십시오.”타티아나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블랑은 옷끈을 묶던 손을 멈추고, 제 발밑에 납작 엎드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이상하네요. 이 일을 성공하면 카시안이 복권을 약속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내게 굳이 그런 부탁을 하죠?”블랑의 의아한 물음에 타티아나가 피 묻은 입술을 달싹이며 자조 섞인 숨을 토해냈다.“얀은…, 아니 카시안 폐하에게 저는 이제 그 무엇도 아니니까요. 황제의 비호도, 가문도 힘도 없는 귀족 자리는 그저 허울 뿐이라는 걸 저는 알거든요. 공을 인정 받아서 드라켄에서 귀족으로 산다고 해도 제 아들이 엘런의 핏줄이라는게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그 꼬리표는 그 다음 대에도 따라다니겠죠.”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어 블랑의 맨발 끝에 입을 맞추듯 바짝 다가앉았다.“게다가 오늘 밤 똑똑히 보았습니다. 내 손에 직접 복수의 칼을 쥐여준 구원자가 누구인지. 저의 진짜 은인은 당신이죠.”블랑의 붉은 입술에 만족스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그녀는 가볍게 무릎을 굽혀 타티아나의 피 묻은 뺨을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영리하네. 마음에 들어.”“옆에서 당신을 모시게 해주세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그렇다면 너는 이곳에 남아.”타티아나의 눈동자가 버림받았다는 불안감으로 크게 흔들렸다. 블랑은 당황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네 아들은 아직 드라켄에
타티아나의 젖은 목소리가 엘런의 귓가에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어젯밤, 그가 그녀의 몸을 짓누르며 내뱉었던 바로 그 끔찍한 비웃음이었다.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번졌다. 욕정에 마비되었던 엘런의 뇌리가 단숨에 차갑게 식었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었다.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한 그가 입을 쩍 벌려 호위병을 부르려던 찰나였다.“읍, 으읍-!”블랑이 억센 손아귀로 뭉쳐둔 두꺼운 천을 엘런의 입안에 우겨 넣고 턱을 거칠게 틀어막아 버렸다. 찢어질 듯한 비명은 입안에서 맴돌다 끔찍한 파열음으로 부서졌다.덜컹! 덜컹!쇠로 된 간이침대가 엘런의 처절한 발버둥에 요란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막사 밖의 경비병들에게 그 소리는 그저 격렬하고 변태적인 정사의 흔적으로 들릴 뿐이었다.결박된 두 팔의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하고, 눈가리개 아래로 공포에 질린 핏대가 솟구쳤다. 엘런의 명치를 짓누르고 올라탄 타티아나는 한계까지 치켜든 단검을 꽉 쥐고 있었다. 어젯밤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에는 엘런이 남긴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했다.수천 번 되뇌었던 살의가 칼끝에 응집되었다. 타티아나의 눈동자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시퍼런 광기가 번뜩였다.“죽어.”푹-!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타티아나의 단검이 엘런의 목구멍 깊숙이 파고들었다.“커윽, 으으읍……!”뜨거운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 타티아나의 창백한 뺨과 드레스를 붉게 적셨다. 엘런의 거대한 몸뚱이가 고통으로 펄떡이며 침상을 부술 듯 요동쳤지만, 블랑이 틀어막은 입술 새로 새어 나가는 것은 기괴한 쇳소리뿐이었다.타티아나는 칼자루를 쥔 손에 체중을 싣고 더 깊게, 더 잔인하게 칼날을 비틀었다. 어젯밤 자신이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유린과 질식의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주듯, 그녀의 두 손에는 지독한 원념이 서려 있었다.점차 엘런의 펄떡이던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침상 기둥을 부여잡고 핏줄이 터지도록 당겨지던 두 팔이 마침내 무력하게 툭 떨어졌다. 막사를 가득 채웠던 끔찍한 진동이 멎고, 오직 기도가 끊어
“하! 이 계집이 단단히 미쳤군. 감히 내가 네년 밑에 묶이라고?”“끝까지 들어봐요.”살기 등등한 엘런의 반응에도 블랑은 여유롭게 웃으며 그의 단단한 어깨를 쓸어내렸다.“어차피 나 같은 연약한 계집이 묶어봤자, 전하의 힘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내가 어설픈 주인 흉내를 내다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때는 당신이 이 가는 밧줄을 끊어버리고, 겁 없이 주인 행세를 한 이 건방진 노예를 마음껏 벌주면 되잖아요.”엘런의 눈매가 움찔했다. 블랑의 붉은 입술이 조롱하듯, 그러나 몹시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주인 흉내를 제대로 못 내서, 분노한 진짜 주인에게 잔혹하게 짓밟히고 길들여지는 노예. ……전하의 취향에 딱 맞지 않나요?”그 순간, 엘런의 눈동자가 기괴한 욕정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단순히 반항하는 여자를 짓누르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그래, 기꺼이 네년의 그 시시한 장단에 놀아나 주지.’“하, 건방진 계집. 좋아. 네년이 감당하지도 못할 짓을 벌인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지 똑똑히 가르쳐주마.”엘런은 실소를 터뜨리며 거칠게 제복의 벨트와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지고는, 기꺼이 두 팔을 뒤로 뻗었다.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던 타티아나의 눈동자에 짙은 경외와 서늘한 자각이 스쳤다. 평생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유린했던 저 끔찍한 인간을, 블랑은 혓바닥 하나로 너무도 유려하게 옭아매고 있었다.‘저게 카시안이 선택한 여자…….’만약 드라켄에 남아 저 여자와 총애 다툼을 벌였다면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 속에서 냉혹한 현실을 직시했다.‘오늘 밤 이 사냥이 끝나면, 기꺼이 저 여자의 발밑에 엎드리자. 무슨 짓을 해서든 저 여자의 사람이 되어야만 나와 내 아들이 살아남아.’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어미이자, 막 살의에 눈을 뜬 그녀가 본능적으로 직감한 완벽한 복종 선언이었다.그때, 허공을 가르며 블랑의 나른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타티아나. 평소 전하께선 어떻게 손목
잠시 후, 거친 발소리와 함께 막사의 휘장이 걷히고 엘런이 들어섰다. 회의 내내 벨모어에게 또다시 무시를 당하고 온 것인지, 그의 미간에는 신경질적인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타티아나는 본능적으로 돋아나는 소름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서늘한 와인 잔을 들어, 완벽하게 길들여진 순종적인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전하…….”완전히 굴복한 듯, 미세하게 떨리는 타티아나의 목소리에 엘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턱을 치켜들며 타티아나가 내민 잔을 받아 들었다.“그래. 이제야 누구 밑에서 기어야 하는지 주제 파악이 좀 되나 보지?”타티아나는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눈웃음 아래로 완벽하게 감춘 채, 엘런의 가슴팍에 조심스레 뺨을 기대었다.“……당신의 기분을 좀 풀어드리고 싶어서, 낮에 블랑 백작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왔어요.”“뭐? 그 계집과 네년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엘런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타티아나는 짐짓 매혹적인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그녀가…… 어제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매우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그럴 만도 하죠. 이곳에 붙잡혀 와서는 내내 홀로 밤을 보내야 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은밀한 제안을 했습니다. 오늘 밤 이곳에서 함께 전하를 모시는 건 어떠냐고요. ”잔을 쥔 엘런의 커다란 손이 우뚝 멈췄다.“오늘 밤, 셋이 어때요?”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천박한 허영심과 욕정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그 여자가, 그걸 받아들였다고?”타티아나가 엘런의 목을 부드럽게 감아안으며 쐐기를 박았다.“그럼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걸요. 듣자 하니 당신에게 아주 오만방자하게 굴었다면서요. 이번 기회에 당신 밑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우는지, 당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타티아나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음란하고도 치명적인 제안에, 엘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낮고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하하하! 네년이 드디어 쓸만한 짓거
엘런의 막사를 뒤흔들던 잔혹한 파열음과 억눌린 비명이 멎고, 진영 위로 내려앉은 것은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었다.막사 주변을 지키던 병사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굳어 있었고, 타오르는 횃불 아래로 짙은 환멸이 번져 나갔다.“……이게 제국의 사절단을 맞이한 총사령관의 진영인지, 인간 도살장인지.”“사절 하나 제대로 감당 못 해 총질을 하려 들더니, 기껏 분풀이한다는 게 저런 짓거리라니.”“벨모어 전하도 저 꼴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말 한마디 얹지 않으시다니. 이러면 벨모어 전하께서 황위를 이어도 문제 아니야? 더 미쳐서 날 뛸 거 아니야.”수군거림이 바람을 타고 은밀하게 퍼져 나갈수록, 어둠 속에 서 있던 벨모어의 턱 끝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정치적 명분과 위엄을 중시하는 그에게, 엘런의 이 천박한 광기는 서연합의 결속을 바닥부터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독이었다.“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그림자 속에서 블랑이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달빛을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가 벨모어의 일그러진 옆얼굴을 흥미롭게 훑었다.“저 비효율적인 동생분께서, 전하의 고결한 명분마저 진흙탕에 처박고 있다고.”“……입술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블랑 백작. 너와 드라켄의 협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전하께 먼저 가벼운 성의를 보여드릴까 합니다.”블랑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본격적인 체스를 두기 전에, 전하의 눈길을 거슬리게 하는 가장 큰 골칫거리부터 제 손으로 치워드리지요.”“……무슨 수로?”“전하께서는 그저 방관만 하시면 됩니다.”벨모어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블랑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욕망과 의심 사이에서 치열하게 주판알을 튕기던 벨모어는, 이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 아침, 진영을 가르는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막사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벨모어가 주재하는 긴급 군사 회의 소집령이었다.엘런은 짜증을 내며 군복을 꿰입고는 막사를 거칠게 나섰다.엘런의 발소리가 완전히
엘런이 사라진 뒤, 응접실에는 지독한 혐오의 침묵만이 남았다.“폐하…… 괜찮으십니까? 저자가 감히…….”참모가 사색이 되어 다가왔지만, 차마 끝까지 말을 다 하지는 못했다.카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머릿속엔 아까 자신을 도발하던 로제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역겹군.”“그렇긴 하지만…. 얼핏 보면 난봉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알아. 그러니까 엮이지 말아야지.”카시안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붉은 와인이 마치 피처럼 일렁였다
별궁의 안뜰에 발을 들여놓자, 짙은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몸을 낮추었다.“드라켄의 위대한 포식자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유들유들하고 관능적인 인상.엘런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끈적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서쪽 연합의 제2왕자, 엘런입니다. 어제 연회는 정말 대단했죠. 아르센의 황후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더군요. 폐하께서도 그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카시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서연합의 놈들은 왜 하
대접견실의 문이 닫히자, 레온은 그대로 굳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로제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저의 폐하를 너무나 연모하거든요.]그 말은 독처럼 달콤했고, 동시에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연모……?’레온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로제는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던 수줍은 여인이었다.그리고 자신은 어떠했나.첫날밤조차 그녀가 겁을 먹을까 봐 제대로 안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 본 로제는 달랐다.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밤일’을 운운하고, 적
“황후 폐하를 들라 하라.”레온은 목소리 아래 깔린 비릿한 긴장을 억눌렀다.대접견실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은빛 스며든 틈 사이로 한 겹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러운 광채를 머금으며 모습을 드러냈다.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과 금빛이 기묘하게 얽혀 흐르는 듯한 머리칼이었다. 햇빛 아래 흔들리는 그 물결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고도 서늘했다.은회색과 청색이 겹겹이 섞인 로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얇은 실크 드레스가 허벅지 곡선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