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투자심사팀장은 회의록 작성자에게 승인 경위에 대한 추가 확인 요청을 남기라고 지시했다. 정정 집행계획서는 별도 검토하되, 발송 절차와 최종 승인 책임도 백림유통 측에서 문서로 설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현우는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그를 보며 웃지 않았다.다만 며칠 전 대표실에서 그가 내게 던졌던 경위서를 떠올렸다.그 종이에는 내 잘못이 아닌 일을 내 잘못이라고 쓰라고 되어 있었다.이제 도원 회의록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남게 됐다.백림유통 대표실의 최종 승인 경위를 확인할 것.현우가 남에게 떠넘기려던 책임을 자신의 이름으로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었다.***회의가 끝나자 현우는 복도에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너 오늘 아주 신났지? 투자자 앞에서 남편 망신 주니까 속이 다 시원해?”그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지나가던 직원이 걸음을 늦추자 현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내게 몸을 숙였다.“회사 돌아오면 각오해. 내가 너 하나 어떻게 못 할 것 같아?”나는 그를 피해 복도 한쪽으로 이동했다.“대표님, 회사 업무와 관련된 지시는 공식적으로 전달해 주세요. 오늘 회의에서 요청받은 보완 자료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네가 지금 누구한테 명령이야?”“명령이 아니라 업무 처리 방식을 말씀드리는 겁니다.”현우는 내 얼굴을 노려보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는 더 대꾸하지 않고 회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 진이건이 복도 끝에서 다가왔다.현우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을 바꿨다.“진 대표님, 저희 내부 문제 때문에 괜히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이건은 현우의 말에 길게 답하지 않았다.“추가 확인 자료는 담당 부서를 통해 제출해 주십시오.”그는 곧바로 도원 직원에게 다음 일정을 확인했다. 현우가 더 말을 붙이려 했지만, 이건은 회의 내용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았다.나는 현우가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진 뒤에야 서류철을 정리했다.“한 과장님.”이건이 내게 다가왔다.“오늘 설명은 명확했습니다.”“
나는 서류철 위에 놓인 경위서 사본을 바라보았다. 현우가 내게 서명하라고 했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아니요, 대표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직접 하시겠습니까?”“네. 이번에는 제 입으로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요.”이건은 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좋습니다. 내일 회의에 참석하십시오. 관련 기록은 정식으로 보존하도록 하겠습니다. 발표 도중 누구도 설명을 막지 못하게 하죠.”나는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매만졌다.“감사합니다.”“한 가지는 분명히 하겠습니다. 제가 백 대표와 다투는 자리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투자자로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과장님에게 설명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그걸로 충분합니다.”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누군가 나 대신 현우를 혼내 주는 일은 잠깐 통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현우는 또다시 내가 다른 남자의 힘을 빌렸다고 비웃을 것이다.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내가 확인한 자료를 내가 설명하고, 현우가 한 일을 현우 자신의 책임으로 남기고 싶었다.나는 노트북을 열어 발표 자료의 첫 장을 고쳤다.‘투자금 집행계획서 오류 정정 및 발송 경위.’그리고 그 아래에 내 이름을 적었다.작성자, 한지아.***다음 날 도원 회의실에서 현우는 내 옆자리에 앉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오늘 입 잘못 놀리면 회사 돌아올 생각 하지 마.”나는 준비한 자료를 꺼내며 대답했다.“확인된 사실만 말씀드릴 겁니다.”“한지아, 너 정말 끝장을 보고 싶은 거야?”그가 내 팔꿈치를 거칠게 건드렸다.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회의가 곧 시작됩니다. 손 치워 주세요.”현우는 이를 악물고 손을 거뒀다.잠시 후 진이건이 들어왔다. 그는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고, 곧바로 투자금 집행계획서의 오류부터 확인하자고 했다.현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담당자가 최종 검토를 소홀히 해서 일부 수치가 잘못 전달됐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이미 조치하고
이미 책임을 인정하는 문장까지 작성되어 있었다.“여기 서명해. 도원에서 문제 삼으면 담당자 실수로 정리하고 끝낼 거야.”“이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사실이고 나발이고, 내가 시키면 하는 거야!”현우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찻잔이 흔들리면서 물이 받침에 흘러넘쳤다.“네가 여기서 월급 받아먹는 게 누구 덕분인데? 회사에서 내 말 안 듣고, 집에서도 남편 우습게 보더니 이제 아주 대놓고 나를 물 먹여?”서라가 재빨리 현우의 팔을 붙잡았다.“대표님, 그러다 손 다치세요. 사모님도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하시면 되는데 왜 자꾸 일을 크게 만드세요?”나는 서라를 바라보았다.“제가 하지 않은 일을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서라의 눈이 커졌다. 현우는 그녀를 자기 뒤로 물리더니 다시 내게 다가왔다.“너 요즘 진이건 믿고 까부는 거지?”그가 내 앞에 바짝 섰다.“그 자식이 몇 번 잘해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넌 아직 내 아내고, 백림유통 직원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 자리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라고.”나는 현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업무상 잘못이 있다면 정식 절차에 따라 처리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경위서에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끝까지 버텨 보겠다?”“확인할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요.”나는 경위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오늘 중으로 자료를 정리하겠습니다.”돌아서려는 순간 현우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뼈가 눌리는 통증이 올라왔다.“내 말 아직 안 끝났어.”나는 붙잡힌 팔을 내려다본 뒤 그를 바라보았다.“놓으세요. 업무 이야기는 계속 듣겠습니다.”현우는 몇 초 더 버티다가 거칠게 손을 놓았다. 나는 흐트러진 소매를 정리하고 대표실을 나왔다.복도 끝까지 걸어간 뒤에야 손목을 살폈다.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휴대전화를 꺼내 시계를 확인했다.오전 열 시 사십이 분.나는 방금 대표실에서 들은 지시와 발언을 시간순으로 메모했다
백현우가 회의실 탁자 위로 서류철을 집어 던졌다.두꺼운 서류가 탁자 모서리에 부딪혀 벌어지면서 종이 몇 장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전략기획팀 직원들은 누구 하나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지 못했다. 현우는 내 얼굴을 노려보며 손에 들고 있던 볼펜까지 내려쳤다.“한지아, 너 지금 회사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벽면 화면에는 도원에 제출한 투자금 집행계획서가 떠 있었다. 온라인 판촉비가 과다하게 반영됐고, 물류비 증가분은 빠져 있었다. 어제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자료와는 분명히 다른 숫자였다.“도원에서 아침부터 전화가 왔어. 집행계획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데, 담당자가 대체 뭘 했길래 이 모양이냐고!”현우는 참석자들이 모두 듣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내게 설명할 기회를 주기보다는 처음부터 책임자를 정해 놓고 몰아세우는 태도였다.나는 노트북을 열어 문서관리 시스템에 접속했다.“대표님, 제가 어제 오후에 올린 수정 요청부터 확인하겠습니다. 현재 화면에 나온 자료는 제가 검토한 최종안과 다릅니다.”“아주 입만 열면 변명이야. 네가 담당자잖아! 담당자가 끝까지 확인했어야 할 거 아니야?”“수정 요청은 오후 다섯 시 십이 분에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제 계정에서 투자자료 폴더가 보이지 않았습니다.”현우가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그래서? 내가 자료를 못 보게 해서 네가 일을 못 했다는 소리야?”그가 탁자 끝을 돌아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직원들이 눈을 내리깔았지만, 나는 노트북 화면을 닫지 않았다.“누가 접근권한을 변경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최종 승인 과정도 함께 확인해야 책임 소재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책임 소재?”현우가 내 말을 비웃듯 되풀이했다.“야, 한지아. 내가 널 사람 취급해 주니까 아주 회사가 네 것인 줄 알아? 과장 자리 하나 달아 줬더니 이제 대표 결재까지 따지겠다고?”그가 내 노트북 덮개를 거칠게 눌렀다. 화면이 닫히는 순간, 나는 손을 뒤로 뺐다.“대표님, 업무용 장비입니다. 말씀은 듣고 있으니 손대지 말아 주
그런 마음은 그가 익숙하게 다루던 사업상의 관심과는 전혀 달랐다.퇴근 시간이 지난 도원 본사 복도는 조용했다.이건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지아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자료 봉투를 들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울음을 참던 얼굴은 어느새 사라졌고, 다시 단정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대표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이제 내려가는 길입니다. 한 과장님도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그녀가 웃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이건은 지아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는 것을 보았다.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웃음을 지운 채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수화기 너머에서 백현우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아직도 도원이야? 내가 자료 설명 끝나면 바로 돌아오라고 했지. 너 지금 누구랑 있는 건데?”지아는 이건을 힐끗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업무를 마치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곧 돌아가겠습니다.”“진이건이랑 또 단둘이 있는 거 아니야? 너 정말 남자 문제로 회사 망신시키고 싶어?”이건은 그 말을 분명히 들었다.지아가 손에 든 서류 봉투를 움켜쥐자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은 회사 복도입니다. 돌아가서 보고드리겠습니다.”현우가 무언가 더 소리쳤지만 지아는 대꾸하지 않았다.통화가 끝난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통화 내용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아는 또다시 상황을 설명하거나 변명해야 할지도 몰랐다.잠시 후 지아가 고개를 들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급한 연락이 와서요.”그녀는 웃었다.조금 전 회의실에서 울음을 참던 여자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이건은 그 미소를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지금 바로 돌아가셔야 합니까?”“네.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어서요.”“알겠습니다. 오늘 업무는 모두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일을 해냈다.그러나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지아가 급히 몸을 숙였다.“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이건도 허리를 굽혀 서류를 주웠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손을 뻗는 바람에 손끝이 스치자 지아가 놀라 손을 거두었다.그는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해 그녀에게 건넸다.“한 과장님, 서류가 떨어진 것뿐입니다. 그런 일까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지아는 서류를 받아 들었지만 곧바로 가방에 넣지 못했다.평소 같았으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웃었을 텐데, 이번에는 한참 동안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이건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잠시 후 지아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는 정말 괜찮아지고 싶습니다.”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냥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하고, 일하고, 집에 돌아가면 언젠가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전화가 울리기만 해도 겁이 납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또 들어야 할까 봐요.”지아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오늘도 아침부터 계속 웃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수군거려도 못 들은 척했고, 제가 만든 자료를 다른 사람이 가져가도 괜찮은 척했어요. 그런데 대표님이 잘못한 게 없다고 말씀하시니까…….”말끝이 흐려지자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이건은 창가 쪽으로 몸을 조금 비켜섰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회의실 밖에서 직원들의 발소리가 지나갔지만, 닫힌 문 안쪽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한동안 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건 역시 침묵을 지켰다.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죄송합니다. 업무 시간에 이런 모습까지 보여 드려서.”이건은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보여 주신 모습 때문에 업무 평가가 달라지는 일도 없습니다.”지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