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지하실의 공기는 오래된 슬픔처럼 가라앉아 있었다.수진은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 채,가슴 안쪽 어딘가에 묵직하게 박힌 돌을 꺼내 보는 사람처럼 흑거미의 말 한 줄 한 줄을 되새기고 있었다.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가방 끈을 잡고 있었지만, 그 힘은 조금씩 풀려 있었다.마치 오랫동안 꽉 쥐어온 진실을 더는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흑거미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조심스러웠지만, 감정을 숨길 수 없는 깊이가 묻어 있었다.“수민은 배신구가 너희 둘을 모두 지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이 표적이 되는 쪽을 선택했지.”수진의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그녀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수민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자신보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선택하는 사람.그 따뜻함 때문에 연변의 혹독한 겨울에서도 언니는 늘 눈처럼 맑았었다.“그럼 언니는…”수진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아주 작은 떨림을 보였다.“…언니는 처음부터 죽음을 택한 거예요?”흑거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숨을 들이쉬고, 오래 담아둔 금 같은 슬픔을 꺼냈다.“살아남는 쪽이 너여야 한다고 믿었다. 너는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흑거미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수민은 너를 참 많이 사랑했다.”그 순간, 수진의 시야가 비틀렸다.그녀는 눈을 감아야 했다.감정이 넘쳐서가 아니라, 너무 조용하게 무너졌기 때문에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강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수진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지금 마주하는 진실은 어떤 위로나 손길도 대신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그는 그녀가 스스로 견디도록 곁에서 지켜주는 쪽을 선택했다.흑거미는 시선을 내렸다가 어떤 결심이 담긴 표정으로 다시 올렸다.“수민은 네가 끌려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어둠이라는 건… 한 번 물들면 벗어나기 어렵지.”흑거미의 손이
문이 닫히고 난 뒤, 지하실은 다시 깊은 숨을 들이킨 것처럼 조용해졌다.누구도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여진의 마지막 마음이 지하의 공기 속을 천천히 떠돌며 각자의 피부 위에 얇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흑거미가 먼저 움직였다.그녀는 벽을 등지고 서 있다가 천천히 앞으로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그녀의 그림자가 지하실 바닥을 길게 긁었다.수진은 여전히 가방을 품에 안고 있었고,강혁은 그녀의 바로 옆에 서서 그 어떤 충격에도 그녀가 휘청이지 않도록 말없이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흑거미가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하지만 시선은 둘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이제 말할 때가 왔구나.”수진이 고개를 들었다.“무슨… 말이요.”흑거미는 눈을 감았다 뜨며 조금 오래된 그림자를 털어내듯 호흡을 내쉬었다.“수민의 죽음. 배신구의 움직임. 그리고… 너희 둘이 아직 모르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그녀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단단했지만어디엔가 오래 묵은 후회가 섞여 있었다.“수민은… 내 딸이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지하실의 온도가 떨어졌다.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수진은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기울였다.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말의 무게를 정확히 이해해야 해서.강혁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는 흑거미가 자매를 ‘데려왔다’고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표현 뒤에 이런 진실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그 어떤 기록에도, 그 어떤 감각에도 없었다.흑거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수진과 눈을 마주했다.“피가 이어진 딸은 아니야. 그러나… 내가 선택하고, 내가 지키고, 내가 세상에 내놓은 아이였다.”“그게… 무슨 의미죠.”수진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조금 더 깊게 가방을 쥐고 있었다.흑거미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조용히 풀었다.“나는 오래전에… 아주 중요한 것을 잃었다. 국정원 안쪽에서 벌어진 내분이었고, 그 속에서… 나는 내 아이를 잃었지.”그 말의 끝에서
사내가 남긴 마지막 문장을 지하실의 어둠은 오래도록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여진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연락처입니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수진은 작은 숨을 들이켰다.언니의 마지막 흔적도 아직 다 파헤치지 못했는데,이제는 여진이 남긴 또 다른 그림자가 바람처럼 문틈으로 밀려 들어온 것이다.강혁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사내가 들고 있는 작은 가방 검은 가죽으로 된, 지나치게 얇아 보이지만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한 번도 들여다본 적 없는 듯한 낡은 가방이었다.가방의 손잡이 부분은 닳아 있었다.누군가 그것을 오랫동안 쥐고 다녔다.마치 들지 않으면 안 되는 물건처럼,버리려 해도 다시 손에 붙는 물건처럼.강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가방 안에, 여진의 노트가 있어요?”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마지막으로 제게 맡겼습니다.”“언제.”“죽기… 이틀 전.”지하를 누르고 있던 공기가 그 말에 아주 조금 흔들렸다.죽기 이틀 전.여진은 이미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혹은 누구에게 죽을지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흑거미가 조용히 사내를 훑어봤다.그녀의 시선 속에는 의심, 경계, 그리고 아주 얇은 호기심이 있었다.“여진이… 너한테 왜 맡겼지?”사내는 그 질문에 잠시 숨을 고르고 답했다.“…저는 여진 씨의… 강사였습니다.”“강사?”강혁이 되물었다.“네. 보이스피싱 대응 교육, 심리전, 화상 상담 기법…그런 것들을 가르쳤습니다.국정원 협력 기관이었고, 여진 씨는 제 강의에 자주 왔어요.”강혁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여진을 떠올렸다.날카롭고, 야망 있고, 자기감정을 감추는 데 서툴렀던 여자.그러나 그녀가 어떤 시간들을 겪어왔는지 그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여진은… 마지막 수업이 끝난 날, 조용히 제게 왔습니다.”사내는 말을 골라 이어갔다.“제가 죽으면, 이걸 당신이 전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이 가방을 맡겼습니다.”수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내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그녀의 눈빛은 여진을
지하실의 공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수민의 마지막 숨결이 스피커 안쪽에서 떨며 흘러나온 것처럼,마치 방 전체가 그녀의 존재를 품고 있는 듯했다.누군가가 한 발 움직이기만 해도 그 여운이 깨질 것 같은 고요였다.수진은 강혁의 품에 잠시 몸을 맡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손가락만이 천천히 강혁의 셔츠를 쥔 채 미세하게 떨릴 뿐이었다.그 떨림 속에 담긴 건 분노도, 의심도 아니었다.그보다는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언니가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벅찬 혼란이었다.강혁은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며 수진을 더 꽉 안지도, 놓지도 못한 채 멈춰 서 있었다. 그는 지금 어떤 말도 그녀에게 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말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함께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이었다.수진이 천천히 팔을 풀었다.완전히 떨어진 건 아니었다.팔을 내렸지만, 그의 옷자락 한 귀퉁이는 아직도 놓지 못한 채 손끝에 붙어 있었다.그녀는 화면이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흰색 잔광조차 남지 않은 검은 화면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수민의 마지막 표정이 남아 있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언니 목소리… 마지막이 아니었네.”너무 작아서 강혁조차 한 번 숨을 참아야 들릴 만큼 미세한 목소리였다.“난… 그렇게 생각했어. 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을 거라고.”흑거미가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수민은 오래전부터 흑거미에게도 말하지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수진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조직의 기둥이었던 그녀를언제든 배신자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수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수민은 동생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수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마치 꺼진 화면 속으로 들어갈 듯이 모니터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언니가 왜 끝까지 나한테 이런 말을 남겼을까.”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분노가
밤이 깊어질수록 바깥의 공기는 차가워졌지만, 지하실 내부는 오히려 숨이 막힐 만큼 뜨거웠다. 긴장 때문이 아니라, 마침내 모든 실이 하나의 매듭으로 모이는 것을 서로의 몸이 먼저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혁, 수진, 백사, 그리고 흑거미. 서로 다른 복수와 책임과 죄책감을 안은 네 사람이, 같은 좌표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좌표가 표시된 패널은 오래된 장치처럼 묵직하게 깜빡거렸다.“LZM KEY ACCESS - PENDING”그 기계적인 문장 하나가 지금 이 자리의 감정들을 모두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치 인간의 고통이나 상처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어떤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숫자나 이름을 요구하는 차가운 시스템처럼. 그러나 그 속에 걸린 ‘LZM’이란 세 글자는 너무도 인간적인 의미로, 너무도 개인적인 무게로 수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수진은 그런 화면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아무도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그녀가 움직이기 전까진, 이 방 안에서 다음으로 흘러갈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강혁은 그녀가 서 있는 위치까지 걸어와 머뭇거리는 대신,조심스레 그녀 옆에 섰다. 그의 손등이 아주 가볍게 그녀의 손등을 스쳤다. 잡으려는 의도도 붙잡아두려는 의도도 없이. 단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주는 가장 인간적이고 담백한 접촉이었다.“네 탓이 아니야.”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수진은 그 말에 고개를 흔들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다.“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그녀의 목소리는 낮되 단단했다.“언니가 왜 죽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지금 알았으니까.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아.”흑거미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수진에게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오래 침묵하게 만들었다.“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게 있을 거야.”흑거미가 낮게 말했다.수진은 그 말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더 많아도 좋아. 지금은 이 문을 열어야 하니까.”백사는 패널 쪽
화면 속, 수민의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다.마치 어두운 방의 한쪽 구석, 라디오 불빛 하나에 의지해 녹음을 남기는 사람처럼그녀의 윤곽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흔들렸고,목소리만이 이 공간의 모든 진실을 대신해 말해주고 있었다.“…혹시 이 기록을 듣는 사람이…”수민의 호흡이 살짝 흔들렸다.“…혁 씨라면… 미안하다고, 꼭 전해줘요.”강혁의 손등이 미세하게 떨렸다.흐르는 시간은 현재였지만, 그의 표정은 완전히 과거에 갇힌 사람처럼그때와 지금 사이에서 억누르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 경직되어 있었다.수진은 숨을 참은 채 화면만 바라봤다.언니의 목소리는 너무 익숙하면서도, 너무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그녀는 손을 허벅지 위로 올려놓았다.겨우 흔들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수민의 목소리가 조금 더 또렷해졌다.“그리고… 멍멍이.”수진의 눈동자가 번쩍 흔들렸다.그건 한 번도 외부에서 부르지 않던,오직 둘만이 있을 때만 쓰던 은어였다.‘멍멍이.’연변 골목에서 놀던 어린 자매가 멍멍이 경찰놀이를 할 때 만들었던 암호.“우리 둘만 아는, 위험할 때 쓰는 표시.”수민은 그 단어를 꺼내는 순간,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 미소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절벽이 서 있었다.“멍멍이… 듣고 있지? 네가 나 대신 살아야 해.”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피 맛이 살짝 올라왔다.그녀는 승복을 강요당하던 어린 시절처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지금 내면을 토해내지 않기 위해 모든 얼굴근육을 고정했다.수민이 말을 이었다.“내가 지금… 누구한테 들켰어. 근데… 너까지 가져가게 할 수는 없어.”그 말이 끝날 때 화면이 잠시 흔들렸다.누군가 수민의 팔을 잡아끌거나, 전화기를 들고 있던 손이 부딪힌 듯한 움직임.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낮고 무거운 남자의 숨소리.백사가 들이쉰 숨을 삼켰다.수진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다음 순간, 수민이 마지막으로 입술을 떼는 모습이 화면에 가까스로 잡혔다.“멍멍이…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