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윤해온은 비명을 삼켰다.
“Ah, fuck!”
무언가가 발목을 붙잡았다.
순간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발이 그대로 굳었다. 심장은 가슴을 뚫고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것 처럼 뛰었다.
해온은 숨을 죽인 채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사람 손이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해온의 발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
“뭐, 뭐야…….!!”
본능적으로 발을 빼려던 순간 코끝으로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피 냄새였다.
조금 전까지 무서워 죽을 것 같던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해온은 발목을 조심스럽게 빼낸 뒤 쭈그리고 앉았다.
“저기요.”
대답이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 불빛을 비췄다.
골목 벽 아래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해온과 같은 학교 교복이었다.
머리카락과 얼굴 주변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숨도 일정하지 않았다.
해온이 급하게 몸을 숙였다.
“Hey, you with me?”
놀라면 영어부터 튀어나오는 건 아직 고쳐지지 않은 버릇이었다.
“저기요. 정신 들어요?”
대답이 없었다.
해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가방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손끝이 떨렸다.
바닥.
숨소리. 피 냄새.기분 나쁘게도 LA에서의 기억이 겹쳐졌다.
해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야.’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를 누르려다가 멈췄다.
“아, 여긴 한국이지.”
119를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턱. 손목이 잡혔다.
해온이 흠칫했다.
피에 엉겨붙은 남자가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 안 돼.”
목소리는 거의 숨에 가까웠다.
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 안 된다고....”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눈이 다시 감겼다.
해온은 황당해서 한동안 그 얼굴만 내려다봤다.
“지금 병원을 안 가게 생겼어요?”
대답 없음.
“사람이 이 상태인데 병원을 왜 안 가.”
역시 대답이 없었다.
정상적인 선택은 119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손목을 붙잡고 병원은 안 된다고 하던 목소리가 이상하게 걸렸다.
“진짜 귀찮게 하네.”
해온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가방을 앞으로 돌려맸다.
“집은 어디예요.”
남자의 눈꺼풀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저기요.”
해온이 어깨를 흔들자 겨우 눈을 뜬 남자가 손가락을 들었다.
골목 밖,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남자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온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미쳤나 봐.”
남자는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다.
“아, 잠깐…….”
해온은 이를 악물고 그의 팔을 제 어깨 위로 넘겼다. 키 차이가 꽤 났다. 남자의 체중이 그대로 실리자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씨..진짜 힘 좀 줘봐요.”
대답 대신 낮은 숨소리만 들렸다.
몇 걸음 걷고 멈추고, 다시 몇 걸음 걷고 멈췄다.
평소라면 몇 분도 안 걸릴 거리가 끝도 없이 멀게 느껴졌다.
겨우 남자가 가리킨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해온은 진이 다 빠져 있었다.
“하...몇 층이에요.”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이다 카드 하나를 꺼내 해온 손에 쥐여줬다.
“이게 뭐…….”
카드키였다.
카드에 적힌 호수를 확인한 해온이 입구를 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에도 남자가 쓰러지지 않게 팔을 붙잡아야 했다.
띵.
목적 층에 도착하자 다시 부축해 현관문 앞으로 갔다.
카드키를 대자 문이 열렸다.
“여기 맞죠?”
역시 대답은 없었다.
해온은 남자를 거실 소파까지 데려다 놓고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허리를 두드리던 해온이 남자를 돌아봤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대로 두고 가면 안 되겠지.”
집 안을 둘러보던 해온은 수납장에서 구급함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상비약이 많았다.
해온은 깨끗한 거즈와 붕대만 챙겨 돌아왔다.
상처를 건드릴 때마다 남자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아프면 말을 하든가.”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해온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피가 묻은 얼굴 주변을 닦아냈다.
조금씩 얼굴이 드러났다.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교복을 입고 있으니 당연히 학생일 텐데 어둠 속에서 처음 봤을 때는 나이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묘하게 날카로운 인상.
눈을 감고 있는데도 성격 좋아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싸우다 이렇게 된 건가.”
손등에도 멍이 보였다.
그제야 세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동네 은근 양아치들 많아.
골목으로 가지 말고.“설마 양아치인가.”
해온이 남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시 길에 내다 버릴 수도 없었다.
“됐어. 내 알 바 아니지.”
필요한 만큼 정리한 뒤 구급함을 닫았다.
이런 상황이 완전히 낯선 건 아니었다.
LA에 있을 때는 본인이 다쳐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겁을 먹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웬만한 멍에는 무덤덤해졌다.
그런 걸 익숙해졌다고 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온은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예전에는 늘 자기 피를 닦았는데.
오늘은 처음 보는 남자의 피를 닦고 있었다.
“진짜 웃기네.”
욕실로 가 손을 씻은 뒤 휴대폰을 확인한 해온의 눈이 커졌다.
부재중 전화가 줄줄이 찍혀 있었다.
류세라.
류세라. 류세라.“미쳤다.”
시간도 꽤 늦어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걸면 어디냐, 뭐 하냐, 왜 안 받았냐부터 시작해서 난리가 날 게 뻔했다.
“집 가서 말하지 뭐.”
해온은 가방을 둘러맸다.
현관으로 향하다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소파에 누운 남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자는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살아는 있겠지?”
숨은 쉬고 있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그렇게 병원은 안 된다고 했다.
해온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오늘 한 번 본 게 전부였다.학교가 같아도 학생이 몇 명인데 다시 마주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삑, 삑, 삑.
집 현관 도어락을 누르던 해온은 마지막 번호를 입력하기도 전에 문이 확 열리는 바람에 뒤로 물러섰다.
“아, 깜짝이야!”
문 앞에는 류세라가 서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였다.
그리고 세라의 시선이 해온의 교복에 꽂혔다.
“야.”
“왜.”
“너…… 그 피 뭐야?”
해온이 자기 셔츠를 내려다봤다.
곳곳에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
“아?”
세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대체 무슨 일 있었어? 어디 다쳤어?”
“쉿. 이모 깨.”
“그게 중요해 지금?”
세라가 해온의 팔을 붙잡고 이리저리 확인했다.
“어디 다친 데 없어?”
“없어.”
“그럼 이 피는 뭔데!”
“내 피 아니야.”
세라의 얼굴이 굳었다.
“……뭐?”
“내 피 아니라고.”
“그럼 누구 피야?”
“일단 들어가.”
해온이 세라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세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윤해온, 제대로 말해.”
해온은 대답 대신 교복 셔츠를 벗어 던졌다. 안에 입고 있던 티셔츠에도 붉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세라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와, 미치겠네.”
“호들갑 좀 떨지 마.”
해온은 편한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세라는 그대로 뒤따라왔다.
“누구 피야?”
해온은 칫솔을 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윤해온.”
“…….”
“너 골목으로 갔지?”
해온의 손이 잠깐 멈췄다.
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갔네.”
해온이 입 안의 거품을 뱉었다.
“길 가다가 사람이 쓰러져 있었어.”
“뭐?”
“다쳐 있길래.”
“그래서?”
“집까지 데려다줬어.”
세라의 입이 벌어졌다.
“미쳤어?”
“왜 소리를 질러.”
“사람이 쓰러져 있으면 119를 부르면 되잖아!”
“병원 안 간대.”
“그걸 왜 네가 들어줘!”
“본인이 싫다는데.”
“야!!!!!!!!!!!!!”
“아, 시끄러워.”
세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너 그 사람이 누군 줄 알아?”
“몰라.”
“이름은?”
“몰라.”
“그런데 집까지 데려다줬다고?”
“응.”
“미치겠네, 진짜.”
세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 그런 일 있으면 절대 가까이 가지 마.”
“알았어.”
“대답 대충 하지 말고. 어떤 놈인지 어떻게 알고 네가 따라가.”
“알았다고.”
“내가 가기전까지 몇번이나 말했는데 그쪽은 혼자 다니지 말라고!!!”
해온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세수 좀 하자.”
“듣고 있어?”
“응.”
“윤해온.”
“아, 알았어!”
결국 해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방문 밖에서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둘 안 자고 뭐 하니?”
해온과 세라가 동시에 굳었다.
세라가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봐. 깨셨잖아.”
해온이 세라를 노려봤다.
“누구 때문인데.”
“네가 소리 질렀잖아.”
“네가 잔소리를 하니까.”
“내가 걱정돼서 그러지!”
“됐고. 이모한테 말하지 마.”
“뭘.”
해온이 피 묻은 교복을 가리켰다.
“이거.”
세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한테 비밀 지켜달라는 거야?”
“너도 나한테 비밀 많잖아.”
“…….”
“바이크.”
“야.”
“담배.”
“윤해온.”
“클럽.”
세라의 입이 딱 다물렸다.
해온이 피식 웃었다.
“공범이라며.”
“와. 너 진짜 못됐다.”
“고마워.”
세라는 한동안 해온을 노려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대신 다음부터는 진짜 그러지 마.”
“응.”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한테 전화하고.”
“하....알았다니까.”
세라는 못마땅한 얼굴로 욕실 문을 나섰다.
혼자 남은 해온은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어두운 골목.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던 손. 힘겹게 눈을 뜨던 남자.‘병원은 안 돼.’
왜였을까.
왜 그렇게까지 병원에 가기 싫어했던 걸까.
해온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신경 써.”
다시 만날 것도 아닌데.
그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 하나일 뿐이었다.
해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