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행히 여분의 교복이 한 벌 더 있었다.
덕분에 어젯밤 빨아놓은 교복이 아직 덜 말랐어도 별문제는 없었다.
해온은 옷걸이에 걸린 셔츠와 조끼를 바라보다가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이모 몰래 핏물을 빼느라 얼마나 문질렀던지 손바닥이 아직도 따끔거렸다.
‘진짜 다음부터는 절대 안 도와줘.’
세라가 그렇게 잔소리해댄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길바닥에 누가 쓰러져 있든, 피를 흘리고 있든.
다음에는 그냥 신고만 하고 지나가야지.
절대로 직접 나서지 말아야지.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하며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그 순간 묵직한 무게가 어깨를 눌렀다.
“아…….”
해온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책을 전부 들고 다녀야 하는 건가.
미국에서는 이렇게까지 가방이 무겁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해온아! 다 했니?”
거실에서 이모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해온은 금세 표정을 풀고 방문을 열었다.
거실에서는 류세라가 현관 거울 앞에 붙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빗이 들려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앞머리를 이리저리 만지는 중이었다.
이모가 그런 세라를 보며 혀를 찼다.
“아이고 아이돌 보다 네가 준비 더 오래 걸리겠다.”
세라가 거울을 보며 눈을 흘겼다.
“엄마. 앞머리 한 번 망하면 하루 종일 기분 잡치는 거 몰라?”
“학교 공부하러 가지 머리 보여주러 가니?”
“둘 다 하는 거지.”
“류세라.”
“왜.”
이모가 세라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얼른 나가. 지각하겠다.”
“진짜 엄마는 딸을 너무 막 다뤄.”
“말이나 못 하면.”
세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이모가 들고 있던 도시락 가방 두 개는 재빨리 받아 들었다.
“내 거 뭐 들었어?”
“아침부터 반찬 타령하지 말고 가.”
“왜 불안하게 대답을 피해.”
“류세라.”
“알았어, 알았다고.”
세라가 운동화를 신으며 해온 쪽을 돌아봤다.
“야, 가자.”
해온은 이모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해온아, 학교 잘 다녀와.”
이모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해온도 작게 웃었다.
“네.”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해온이 한국에 처음 돌아왔을 때만 해도 바람이 살을 에는 것처럼 차가웠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추위에 몸을 움츠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데 어느새 나무 끝에 연둣빛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길가에는 개나리도 하나둘씩 피기 시작했다.
세라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바이크를 세웠다.
학교 바로 앞에 세웠다가는 선생에게 걸린다는 이유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교문 쪽으로 걸었다.
해온은 한쪽 어깨를 빙글 돌렸다.
“어깨 아파.”
옆에서 걷던 세라가 피식 웃었다.
“사물함은 폼으로 있냐?”
“사물함?”
해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라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락커.”
“아.”
“근데 넌 외국에서 대체 몇 년 쳐 살았다고 한국말을 못알아 들어?"
“나도 모르는걸 어떻게 하라고.”
“한국말 잘하잖아.”
“알아.”
“그럼 한국말 써.”
“싫은데.”
세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일부러 그러지?”
해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Maybe?”
“아, 진짜.”
세라가 해온의 팔을 툭 쳤다.
“영어 금지.”
“Why?”
“야!”
해온이 웃으며 조금 앞으로 뛰었다.
세라도 바로 뒤를 따라왔다.
“윤해온!!!!!! 거기 서라!!!!”
“싫어.”
“진짜 잡히면 뒤진다!”
해온이 일부러 뒤를 돌아보며 영어로 말했다.
“Knock it off , for real”
세라가 그 자리에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안 들려. 하나도 안 들려.”
“진짜 유치하다.”
세라는 웃으며 교문 안으로 먼저 뛰어 들어갔다.
해온도 그 뒤를 따라 뛰었다.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로 스쳤다.
문득 웃음이 났다.
이렇게 별것 아닌 일로 뛰어다니고, 장난치고, 학교에 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제야 조금.
정말 조금은.
평범한 일상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조금 있다 점심시간에 봐.”
“알았어.”
세라가 손을 세차게 흔들며 자기 교실 쪽으로 사라졌다.
해온도 교실 뒷문을 열었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발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아침부터 떠드는 목소리가 복도까지 들릴 텐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해온은 교실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자리는 거의 다 차 있었다.
그리고 전학 온 날 비어 있던 두 자리에도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아.
세라가 말했던 애들인가.
차이헌.
권태겸.
해온은 별다른 관심 없이 자기 자리로 향했다.
무거운 가방을 책상 옆에 걸고 시간표를 확인한 뒤 첫 수업 책을 꺼냈다.
그때 교실 앞문이 열렸다.
드르륵.
담임이 출석부를 들고 들어왔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인사가 끝나고 다시 조용해졌다.
담임이 교실 안을 둘러보다가 어딘가에 시선을 멈췄다.
“차이헌, 권태겸.”
해온의 손이 책장을 넘기다 멈췄다.
“어쩐일로 둘 다 제시간에 교실에 앉아 있냐? 선생님이 감동해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야”
그때 뒤쪽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저 보고 싶으셨죠?”
해온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훤칠한 남학생 하나가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다.
권태겸이었다.
“어쩔시구리.”
담임이 질색했다.
“너 안 본다고 내가 죽냐?”
태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데 선생님.”
“왜.”
“방학 동안 주름이 더 늘어난거 같은데요?”
교실에서 웃음이 터졌다.
담임의 표정이 굳었다.
“권태겸.”
“네.”
“조례 끝나고 교무실.”
“왜요!”
“차이헌 너도.”
담임의 시선이 옆자리로 움직였다.
“그리고 넌 얼굴이 또 왜 그 모양이야?”
해온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얼굴 곳곳에 상처가 남아 있는 남학생.
무표정한 얼굴.
붕대가 감긴 손.
어딘가 익숙했다.
담임이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둘 다 조금 있다 보자.”
조례가 끝난 뒤 담임이 교실을 나갔다.
태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헌의 어깨를 툭툭쳤다.
“야 가자 담임 개 열받았겠다.”
드르륵.
그 옆에 있던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이헌.
그가 먼저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태겸도 뒤를 따라갔다.
해온은 자기 사물함 위치를 물어보려고 일어서다가 문득 차이헌의 손을 봤다.
붕대.
순간 머릿속에 어젯밤 장면이 스쳤다.
어두운 골목.
피 냄새.
제 발목을 붙잡았던 손.
‘…… 안 돼.’
해온의 눈이 커졌다.
“……미친.”
왜 낯이 익나 했더니.
어제 골목에 쓰러져 있던 그 남자였다.
“뭐어어???????!!!!!!!!!!!!"
해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밥알이 얼굴로 날아왔다.
“류세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세라는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잠깐만.”
“더럽게 진짜.”
해온이 얼굴에 붙은 밥알을 떼어냈다.
세라는 눈까지 동그랗게 뜬 채 해온을 바라봤다.
“뭐라고?”
“그 사람이 차이헌이었다고.”
“차이헌?”
“응.”
“어제 네가 집까지 데려다준 애가?”
“그렇다니까.”
세라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도시락 위에 떨어뜨렸다.
“미친.”
“왜.”
“와.”
“뭔데.”
세라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너 진짜 한국 오자마자 제대로 꼬였다.”
해온의 눈썹이 꿈틀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니 하필이면 차이헌을 주워다가 놔?”
“내가 골라서 주웠냐?”
“걔는 너 알아보든?”
해온이 휴지로 얼굴을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몰라.”
“못 알아본 거야?”
“Beats me”
“한국말.”
“낸들 알겠어!!???”
해온이 결국 왁 하고 짜증을 냈다.
“오늘 아침에 얼굴 한 번 본 게 끝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
세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네가 걔 집까지 들어갔잖아.”
“그래서?”
“차이헌 집.”
“어.”
“와…….”
“왜 자꾸 감탄만 해.”
“아니, 그냥.”
세라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신기해서.”
“뭐가.”
“됐어. 넌 그냥 모르는 척해.”
“원래 그럴려고 했는데.”
“잘 생각했어.”
해온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밥을 먹었다.
“야 여기 너만 아는 곳이야?”
해온이 도시락을 절반쯤 비운 뒤 물었다.
배가 차오르기 시작해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세라가 기다렸다는 듯 해온의 도시락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야.”
“너 안 먹잖아.”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먹어도 돼?”
“이미 먹고 있잖아.”
세라는 씩 웃으며 해온이 남긴 반찬을 먹었다.
“여기 열쇠 있는 애들은 들어와.”
“많아?”
“조금.”
“선생님한테 걸리면?”
“모르지 나야?"
해온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이런 곳을 왜 와.”
“조용하잖아.”
세라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끼이익. 녹이슬어 기분이 나쁜소리의 철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해온의 표정이 굳었다.
아까 교실에서 봤던 두 사람이었다.
차이헌과 권태겸.
세라 역시 금세 표정이 구겨졌다.
“아 오늘 진짜 왜 이래.”
앞서 걸어오던 태겸이 세라를 발견하고 웃었다.
“류세라.”
세라가 대답하지 않았다.
태겸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오랜만?”
“아는 척하지 마.”
“여전히 까칠하네.”
“너한테만.”
“영광인데?”
“꺼져.”
세라가 도시락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해온보다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마치 일부러 가려주는 것처럼.
태겸의 시선이 그 뒤에 있는 해온에게 향했다.
“얜 누구?”
세라가 바로 대꾸했다.
“니가 알아서 뭐하게?"
“아.”
태겸이 해온을 바라봤다.
그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차이헌의 시선도 천천히 움직였다.
해온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 표정도 없었다.
알아보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해온은 괜히 어젯밤 일이 떠올라 시선을 먼저 피했다.
“얼른 가자 해온아.”
세라가 해온의 팔을 잡았다.
“응.”
두 사람 앞을 지나 계단 쪽으로 향했다.
세라는 태겸과 어깨가 스칠 때도 전혀 비켜주지 않았다.
태겸이 뒤에서 웃었다.
“진짜 성질 여전하네.”
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려다가 해온이 팔을 잡아 내렸다.
“하지 마.”
“왜.”
“유치해.”
“쟤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네가 더 유치해.”
“야.”
옥상 계단을 내려가며 해온이 물었다.
“근데 너 쟤들이랑 어떻게 아는 거야?”
세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알 필요 없어.”
“왜.”
“그냥 예전부터 좀 알아.”
“뭔 일 있었어?”
“별일 없어.”
세라는 해온의 팔짱을 끼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튼 쟤들이 너한테 뭐라 하거나, 말 걸거나 하면 그냥 무시해.”
“왜?”
“그냥.”
“또 그냥이네.”
“그리고 바로 나한테 문자해.”
“알았어.”
세라가 해온의 팔을 더 꽉 끼었다.
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무거워.”
“뭐가 무거워!”
“붙지 마.”
“내가 얼마나 가벼운데?”
“더워.”
“아직 겨울 이거든?”
해온이 세라의 팔을 떼어냈다.
세라가 발끈했다.
“진짜 정 없어.”
“응.”
“윤해온.”
“왜.”
“너 나 없으면 친구도 없잖아.”
해온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래도 무거워.”
“야!”
계단 아래로 해온의 웃음소리가 작게 퍼졌다.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