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 류세라?”
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아…….”
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
해온도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했더니.”
권태겸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
해온의 손이 멈췄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
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
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
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
“여기서 또 보네?”
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뭐.”
“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
“못 해.”
“여전히 까칠하네.”
“꺼져.”
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해온과 눈이 마주쳤다.
“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
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태겸이 씩 웃었다.
“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
“……안녕.”
짧은 대답.
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
“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
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
“내가 뭐 전염병이냐?”
“비슷하지.”
“너 아직도 화났냐?”
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내가 왜 너한테 화나?”
“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
“네가 싫으니까.”
“와. 상처받네.”
“안 받아 보이거든.”
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알아본 건가?
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
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도 니친구 데리고 그냥 가.”
“왜. 우리도 좀 앉으면 안 돼?”
“자리 많잖아.”
“여기가 좋아 보이는데.”
“난 싫거든?”
태겸은 아예 세라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난 좋은데.”
“아, 진짜 짜증 나.”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해온이 테이블 아래로 세라의 손목을 잡았다.
세라가 고개를 돌렸다.
해온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냥 있어.’
괜히 한 성질머리하는 세라가 또 싸울 것 같았다.
세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해온을 보다가 결국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진짜 너 때문에 참는다.”
“내가 뭘.”
해온이 태연하게 팝콘을 집어 먹었다.
태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웃었다.
“둘이 진짜 엄~청 친한가 보네?”
“사촌이거든.”
“아~”
태겸의 눈이 해온에게 향했다.
“뭘 그렇게 신기하게 쳐다봐?”
세라가 끼어들었다.
태겸은 대꾸 대신 손을 들었다.
“여기 술 좀 더 주세요.”
세라의 눈이 커졌다.
“야 이새끼야 누가 같이 먹는대?”
“이미 앉았는데?”
“네가 멋대로 앉았잖아.”
“이왕 앉은 거 같이 놀자.”
“싫어.”
“난 좋은데.”
“하…….”
세라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해온은 둘의 대화를 듣다가 슬쩍 옆을 바라봤다.
여전히 서 있는 이헌.
해온이 결국 빈 의자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안 앉아요?”
그제야 이헌의 시선이 해온에게 내려왔다.
잠시 침묵.
세라와 태겸까지 동시에 조용해졌다.
“왜 다 쳐다봐.”
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헌은 말없이 의자를 당겨 해온 옆에 앉았다.
세라의 시선이 순간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태겸의 입꼬리도 묘하게 올라갔다.
“오.”
“뭐.”
해온이 쏘아보자 태겸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잠시 후 음료와 간단한 안주가 테이블 위에 더 놓였다.
태겸은 마치 처음부터 같이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했고, 세라는 그런 태겸을 볼 때마다 얼굴을 구겼다.
“근데.”
해온이 문득 옆을 돌아봤다.
이헌은 술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너는 쟤처럼 술 안마셔?”
이헌은 대답 대신 붕대가 감긴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아.”
해온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나왔다.
그 손을 보자 또 그날 밤이 떠올랐다.
자기가 서툴게 감았던 붕대.
지금까지 그대로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한걸 모를테니
아는 척 하는것도 이상할것같아 더이상 말을 아꼈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 쓰였다.
그때 이헌이 말했다.
“저번에는.”
처음으로 제대로 들은 이헌의 목소리였다.
낮고 짧은 목소리.
해온의 손이 멈췄다.
“응?”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
“고마웠어.”
해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기억해?”
“어.”
“다?”
이헌이 잠시 생각하듯 눈을 내렸다.
“뭐 대충?”
그제야 해온의 머릿속에 며칠 동안 남아 있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알아보고 있었구나.
학교에서도.
옥상에서도.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지?
“기억하면서 왜 학교에서는 모르는 척했어?”
이헌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네가 아는 척 안 하길래.”
“…….”
그 말에 해온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기도 눈 마주치자마자 피했으니까.
“그건 그렇네”
해온은 순순히 인정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태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세라가 바로 말했다.
“넌 몰라도 돼”
“뭘 몰라도 돼?”
“아무것도.”
“둘이 뭔데?”
태겸의 눈이 반짝였다.
해온이 대답하려는 순간 세라가 먼저 끼어들었다.
“야 권태겸 아무 일도 아니니까 닥치고 네 거나 먹어.”
“난 해온이한테 물었는데?”
“언제 이름까지 외웠냐?”
“방금.”
태겸이 해온을 보며 싱긋 웃었다.
“윤해온 맞지?”
“응.”
“난 권태겸.”
“알아.”
“내 이름도 알아?”
“같은 반이잖아.”
“오~”
태겸이 괜히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까지 기억해주고~”
세라가 팝콘 하나를 집어 태겸 쪽으로 던졌다.
“지랄하지 마.”
“야!”
팝콘이 태겸의 재킷 위로 떨어졌다.
해온이 그걸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야.”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웃고 있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누구들인가 했더니.”
해온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남학생 몇 명이 서 있었다.
맨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이쪽을 향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태겸의 웃음이 아주 조금 옅어졌다.
세라도 표정이 굳었다.
“한빛고 애들끼리 아주 재밌어 보이네?”
해온은 그들을 모르는 눈치로 바라봤다.
하지만 세라와 태겸은 확실히 아는 것 같았다.
세라가 팔짱을 끼었다.
“뭐야.”
남자가 웃었다.
“여전하네, 류세라?"
“아는 척하지 마.”
“기지배가 엿같은 성질도 그대로고?”
세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시비 걸 거면 다른 데 가서 걸어.”
“시비라니.”
남자가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다.
“반가워서 왔지.”
“우린 안 반가운데.”
해온이 세라의 손등을 살짝 눌렀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학교 옥상에서 태겸을 만났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세라가 단순히 짜증을 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았다.
“세라야.”
해온이 작게 불렀다.
세라가 돌아봤다.
해온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세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헌이 짧게 말했다.
“가라”
남자의 시선이 이헌에게 향했다.
“뭐?”
“가라고.”
아까 해온과 이야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차갑고 낮았다.
남자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네가 가라면 가야 되냐 개새끼야?”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사람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오려 했다.
그때 태겸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웃고는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장난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냥 가라.”
“싫다면?”
“귀찮게 하지 말고.”
짧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해온은 가만히 상황을 바라봤다.
세라가 왜 차이헌과 권태겸에게 엮이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둘 주변에는 이상할 정도로 이런 분위기가 따라다녔다.
결국 상대 쪽에서도 언성이 높아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향했다.
“아! 진짜.”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해온이 다시 팔을 잡았다.
“가만있어.”
“쟤들이 먼저”
“그래도.”
그 순간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이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온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서로 밀쳐내는 소리가 나고, 주변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해온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세라가 그런 해온을 다시 앉혔다.
“넌 가만있어.”
“아까는 네가 나가려고 했잖아.”
“나는 나고 넌 너야.”
“무슨 논리야.”
"아무튼."
태겸이 두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거기 공주님들 낄 자리 아니거든?"
해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게 신경 안 쓰이게 생겼어요?”
“금방 끝나.”
“어떻게 알아요?”
태겸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소란이 잦아들었다.
상대 일행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해온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다가 이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
이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왔다.
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질린다.”
태겸은 다시 평소의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자, 분위기 잡쳤으니까 다시 먹자.”
“너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냐?”
세라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응.”
“미친놈.”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니거든.”
태겸이 병을 들어 해온 쪽으로 내밀었다.
“자, 윤해온도.”
“왜.”
“분위기 전환.”
해온은 잠깐 망설이다가 병을 가볍게 부딪쳤다.
탁.
세라도 마지못해 따라 했다.
다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전 소란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해온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이헌의 손.
붕대 끝이 풀려 있었다.
“잠깐.”
해온이 병을 내려놓았다.
이헌이 바라봤다.
“줘봐.”
“왜.”
“붕대 풀렸잖아.”
해온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헌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이헌의 눈이 잠시 내려갔다.
해온은 풀어진 붕대를 조심스럽게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손 다 나을 때까지 좀 얌전히 있지.”
“…….”
“이렇게 계속 풀리면 뭐 하러 감아놔.”
“…….”
“듣고 있어?”
“어.”
대답은 짧았다.
해온은 신경 쓰지 않고 끝까지 붕대를 정리했다.
“됐어.”
손을 놓아주려던 순간.
맞은편에서 태겸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오.”
해온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태겸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세라도 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뭔데.”
세라가 먼저 피식 웃었다.
“아니.”
“뭐.”
“차이헌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해온이 옆을 돌아봤다.
이헌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무슨 표정?”
“됐어.”
세라가 괜히 웃으며 팝콘을 집었다.
태겸도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해온만 이해하지 못한 채 눈살을 찌푸렸다.
“둘 다 왜 저래.”
그러면서 해온은 이헌의 손을 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이헌은 한동안 다시 감긴 붕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