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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의 초대

Author: 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7 03:00:51

“겨우 이런 식으로 토요일 밤을 죽이고 있냐?”

쾅.

방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류세라의 목소리가 방 안을 뒤흔들었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윤해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헤드폰 너머로도 충분히 들릴 정도였다.

“나갈 생각 없어.”

“웃기지 마.”

“진짜 없어.”

“오늘 토요일이야.”

“알아.”

“내일 학교도 안 가.”

“그것도 알아.”

“근데 왜 처박혀 있는데?”

해온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 꼴을 내려다보던 세라의 표정이 서서히 구겨졌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

앞머리는 정성스럽게 손질되어 있었고, 눈매도 평소보다 조금 또렷했다. 귀에는 작은 링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검은색 니트 위에는 짧은 데님 재킷을 걸쳤고, 아래에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체크 스커트를 입었다. 평소 교복 차림만 보다가 사복을 입은 세라를 보니 분위기가 확 달라 보였다.

누가 봐도 집에서 뒹굴 생각으로 꾸민 차림은 아니었다.

“야.”

“…….”

“윤해온.”

“안 들려.”

“헤드폰 끼고 대답하는 애가 안 들리긴 뭐가 안 들려!”

세라가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해온은 불길함을 느끼고 헤드폰을 더 꾹 눌러썼다.

“나 오늘 안 나가.”

“나간다.”

“싫어.”

“나가.”

“너 혼자 가.”

“혼자 가기 싫으니까 너 데려가는 거잖아.”

“그게 내 알 바야?”

세라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 진짜 한국 오고 싸가지 더 없어졌다?”

“원래 이랬어.”

“그 대사 좀 그만 우려먹어.”

해온은 슬쩍 돌아누웠다.

“잘 거야.”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잠깐 조용해졌다.

포기했나.

해온이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휙.

이불이 통째로 벗겨졌다.

“야!”

“일어나!”

“류세라!”

“토요일 밤 열한 시도 아니고 이제 겨우 저녁인데 무슨 잠이야!”

세라가 해온의 팔목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해온은 침대에 반쯤 끌려 앉은 채 인상을 팍 썼다.

“나가기 싫다고.”

“한 번만 가봐. 재미없으면 바로 데리고 올게.”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사촌을 못 믿어?”

“응.”

“와. 상처받았어.”

“안 받아 보이는데.”

“됐고.”

세라가 그대로 옷장 앞으로 향했다.

벌컥.

옷장 문이 열렸다.

세라는 안쪽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옷걸이를 한 번 넘기고.

두 번 넘기고.

세 번 넘겼다.

“……윤해온.”

“왜.”

“너 옷이 왜 다 이래?”

해온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내 옷이 뭐.”

“죄다 검정이잖아. 후드, 맨투맨, 청바지. 또 후드, 또 청바지.”

“편하잖아.”

“치마는?”

“교복.”

“블라우스는?”

“교복.”

“가디건은?”

“교복.”

세라가 이마를 짚었다.

“너 미국에서 쇼핑 안 했어?”

“했는데.”

“뭘 샀는데?”

“후드.”

“미치겠다.”

세라가 옷장 안을 다시 한번 뒤적였다.

“여자애 옷장에 어떻게 치마가 교복밖에 없어?”

“바지가 편한데 어떡해.”

“오늘만큼은 안 돼.”

“왜.”

“기분이 안 나.”

“무슨 기분.”

“토요일 밤 기분.”

“뭔 개소리야.”

해온이 다시 침대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 세라가 팔을 붙잡았다.

“기다려.”

“뭘.”

“내 방 갔다 올 테니까 도망가지 마.”

“내 방에서 어디로 도망가.”

“창문.”

“미쳤냐?”

세라는 이미 방문을 열고 있었다.

“진짜 금방 온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잠시 후.

우당탕탕.

옷장 문을 여닫고 서랍을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뭘 저렇게까지…….”

해온이 어이없어 중얼거렸다.

30초도 지나지 않아 세라가 다시 나타났다.

두 팔 가득 옷을 들고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검은색 숄더백까지 올라가 있었다.

“갈아입어.”

해온의 얼굴이 굳었다.

“싫어.”

“입어.”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세라는 못 들은 척 침대 위에 옷을 하나씩 펼쳤다.

“일단 이거.”

얇은 아이보리색 니트였다.

해온이 손가락으로 옷을 집어 들었다.

“이걸?”

“응.”

“너무 밝은데.”

“그래서 입으라는 거야. 넌 맨날 검정만 입잖아.”

“검정이 뭐 어때서.”

“장례식 가냐?”

“검정 예쁘거든.”

“그리고 이거.”

이번에는 진청색 데님 스커트가 침대 위에 올라왔다.

해온이 그대로 굳었다.

“싫어.”

“왜.”

“치마 싫어.”

“교복도 치마잖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오늘도 어쩔 수 없어.”

“류세라.”

“윤해온.”

둘이 한동안 서로를 노려봤다.

세라가 먼저 가디건 하나를 추가로 침대에 던졌다.

“밤에 추우니까 이거까지.”

“나 그냥 청바지 입을래.”

“안 돼.”

“왜 안 되는데.”

“위에는 내가 골라준 거 입고 아래에는 네 헐렁한 청바지 입으면 이상하잖아.”

“아무도 나 안 봐.”

“내가 봐.”

“네가 안 보면 되잖아.”

“아, 진짜 말 드럽게 안 듣네.”

세라가 결국 다른 옷을 하나 꺼냈다.

“그럼 이거.”

검은색으로 떨어지는 깔끔한 와이드 팬츠였다.

해온이 잠시 쳐다봤다.

“……그건 괜찮네.”

“진작 타협할 것이지.”

“치마를 왜 억지로 입히려고 해.”

“한 번쯤 입혀보고 싶었지.”

“인형 놀이 하지 마.”

“재미없게.”

세라는 아이보리 니트와 검은 와이드 팬츠, 얇은 가디건을 해온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숄더백을 툭 올려놨다.

“가방도 이거.”

“내 백팩 있는데.”

“책 들고 놀러 가냐?”

“지갑이랑 핸드폰 넣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이거 들라고.”

해온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귀찮아.”

“그래도 입으면 예쁠걸.”

“안 궁금해.”

“나는 궁금해.”

세라가 해온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갈아입어.”

“나 그냥 안 갈래.”

“윤해온.”

“…….”

“5분.”

“10분.”

“7분.”

“나 안 갈래.”

“알았어, 10분!”

세라가 재빨리 방을 나갔다.

해온은 닫힌 문을 한참 노려보다가 침대 위에 펼쳐진 옷을 내려다봤다.

아이보리 니트.

검은 와이드 팬츠.

연한 회색 가디건.

그리고 작은 검은 숄더백.

해온은 니트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진짜 제멋대로야.”

10분 뒤.

방문이 열리자 거실에 있던 세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깐 말이 없었다.

해온은 괜히 가디건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

“뭐.”

세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뭔데.”

“예쁘잖아.”

해온이 바로 인상을 썼다.

“옷 다시 갈아입는다.”

“야! 왜!”

“부담스러워.”

“칭찬도 못 해?”

세라가 급하게 해온의 팔을 붙잡았다.

“됐어. 가자.”

“놔.”

“안 놔. 너 다시 방 들어갈 거잖아.”

“맞아.”

“그러니까 안 놔.”

결국 세라에게 끌려 엘리베이터까지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두 사람이 나란히 비쳤다.

평소 편한 옷만 입던 해온에게는 어색한 차림이었지만, 지나치게 꾸민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세라는 만족스러운 듯 해온을 한번 훑었다.

“가방도 훨씬 낫지?”

“내 백팩이 더 편해.”

“오늘 하루만 참아.”

“내가 분명히 안 간다고 했는데.”

“알아.”

“근데 지금 내가 왜 여기 있어?”

“나랑 놀러 가려고.”

“대화가 안 되네.”

세라는 거울을 보며 립밤을 한 번 덧발랐다.

“나가면 재밌을 거야.”

“재미없으면?”

“오천 원.”

“만원.”

“도둑이냐?”

“그럼 집 갈래.”

“알았어. 만원.”

해온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세라가 바로 손가락질했다.

“방금 웃었지?”

“아닌데.”

“돈 준다니까 바로 웃었어.”

“착각이야.”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해온은 곧장 세라의 손을 뿌리쳤다.

“간다고! 이제 좀 잡지 마.”

“야, 목소리.”

세라가 귀를 막았다.

“이 아파트 사람들 다 깨우겠다.”

“너 때문이잖아.”

“목청은 진짜 어디 가서 안 지겠다.”

“누가 먼저 사람을 끌고 나오는데.”

둘은 투닥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해온은 세라의 바이크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여자애가 무슨 바이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세라는 바이크를 탈 때만큼은 진짜 자기 자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시동 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굳었지만 이제는 먼저 헬멧을 꺼내 머리에 눌러쓸 정도였다.

세라가 그런 해온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년 많이 컸네.”

“뭐가.”

“처음에는 안 탄다고 난리 치더니.”

“그때 네가 갑자기 출발했잖아.”

“잘 잡으면 되지.”

“떨어지면 네 책임이야.”

“그러니까 꽉 잡으라고.”

세라가 시동을 걸었다.

해온이 자연스럽게 세라의 허리를 붙잡았다.

부우웅―.

바이크가 밤거리로 빠져나갔다.

"악! 냄새.”

바이크에서 내리자마자 해온이 코를 막았다.

골목 안쪽에는 쓰레기봉투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오래된 음식 냄새와 습기 찬 골목 특유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세라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유난은.”

“냄새 안 나?”

“나지.”

“근데?”

“코 막는다고 없어지냐.”

“안 맡는 게 낫잖아.”

세라는 작은 숄더백을 뒤적이다 껌 통을 하나 꺼냈다.

“먹을래?”

“응.”

해온이 하나를 받아 입에 넣었다.

세라는 제 것도 하나 꺼내 씹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와.”

골목을 조금 더 들어가자 낡은 철문이 하나 나타났다.

간판도 제대로 없었다.

벽에는 공연 포스터 몇 장만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해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

“응.”

“문 닫은 데 같은데.”

“원래 이렇게 생겼어.”

세라가 철문을 두 번 두드렸다.

끼기긱―.

문이 열렸다.

얼굴까지 문신이 많은 젊은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세라를 발견하자마자 인상을 썼다.

“류세라. 문 좀 살살 다뤄.”

“오늘은 안 찼거든?”

“그게 자랑이냐.”

“비켜.”

“말 예쁘게 하는 꼴을 못 봐.”

남자는 투덜거리면서도 문을 활짝 열어줬다.

그러다 세라 뒤에 서 있는 해온을 발견했다.

“얘는 누구?”

“내 사촌.”

“아.”

남자가 해온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온도 어색하게 따라 고개를 숙였다.

세라는 해온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좁은 복도를 빠져나가자 갑자기 커다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해온의 눈이 커졌다.

복도 끝 문을 여는 순간 널찍한 공연장이 나타났다.

앞쪽에서는 DJ가 음악을 믹싱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음악을 듣거나 춤을 추고 있었다.

천장에는 색색의 조명이 돌아갔다.

“Club?”

해온이 주위를 둘러봤다.

세라가 음악에 맞춰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공연장에 더 가까워.”

“시끄러운데.”

“그래서 좋잖아.”

“내 귀 나갈 것 같은데.”

“또 유난.”

세라는 익숙한 듯 안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해온은 신기한지 계속 주위를 둘러봤다.

LA에서도 비슷한 곳은 본 적 있었지만 한국에서 이런 공간에 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라가 뒤를 돌아봤다.

“왜. 조금 재밌어 보이지?”

“아직 몰라.”

“표정은 아닌데?”

“시끄러워.”

“올라가자.”

공연장 한쪽에 있는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와 달리 위층은 훨씬 조용했다.

낡은 목재 테이블과 작은 조명들이 놓여 있었고 오래된 해외 펍을 흉내 낸 듯한 분위기였다.

한쪽에는 커피와 탄산음료, 무알코올 음료가 적힌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세라는 가장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

“오빠!”

바쁘게 지나가던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왜.”

“우리 하이볼두개좀 ”

“네가 웬일로 얌전한 걸 먹냐?”

“잔말 말고 줘.”

“성질머리.”

잠시 뒤 차가운 병 두 개와 갓 튀긴 팝콘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퍼졌다.

해온이 바로 팝콘을 집어 먹었다.

세라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까 그렇게 안 온다더니.”

“배고파서 먹는 거야.”

“응, 그러시겠죠.”

“왜.”

“아무것도.”

해온은 병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탄산이 목으로 넘어갔다.

세라가 턱을 괴고 바라봤다.

“어때.”

“뭐가.”

“밖에 나오니까 좀 낫지?”

해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래층에서는 둔탁한 음악 소리가 바닥을 타고 희미하게 올라왔다.

사람들 떠드는 소리.

잔 부딪치는 소리.

낯선 공간인데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해온은 팝콘을 하나 더 집었다.

“……그냥 그래.”

세라가 피식 웃었다.

“저 표정으로?”

“무슨 표정.”

“재밌는 표정.”

“아닌데.”

“맞는데.”

해온이 눈을 흘겼다.

“This is a piece of cake.”

세라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아, 또 영어.”

해온이 코웃음을 쳤다.

“영어만 나오면 왜 그렇게 싫어해?”

“내가 못 알아듣잖아.”

“배우면 되지.”

“싫어.”

“왜.”

“한국에서 사는데 왜 배워.”

해온이 웃었다.

“단순하다.”

“뭐?”

“아무것도.”

세라가 팝콘을 한 움큼 집었다.

“아무튼 너무 늦게까진 안 있을 거야.”

“왜.”

“엄마한테 걸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잖아.”

“나는 왜.”

“내가 널 끌고 나왔으니까.”

“그건 맞네.”

“그리고 너도 공범.”

“그 논리 되게 좋아한다.”

해온이 탄산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처음에는 정말 오기 싫었다.

그런데 막상 나오고 보니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집과 학교.

그 두 곳만 오가던 며칠과는 조금 달랐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놀러 나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세라가 괜히 끌고 나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류세라.”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가 팝콘을 집던 손을 멈췄다.

해온도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세라를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어.”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불렀다.

“류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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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내 옆자리 차이헌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눈 떠보니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기억하고 있었네?

    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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