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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온은 LA에서 도망쳐 왔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 진짜 별론데.”
거울 앞에 선 해온이 교복 치맛자락을 괜히 한 번 잡아당겼다.
이모가 넉넉하게 맞춰 온 교복은 분명 새것이었다. 구김 하나 없이 반듯했고, 셔츠 깃도 빳빳했다. 그런데 막상 입고 서 있으니 꼭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교복도 싫고.
처음 가는 학교도 싫고. 다시 처음부터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도 싫었다.해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나.”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이나 보다가, 배고프면 냉장고를 뒤지고, 졸리면 자고. 누구도 말을 걸지 않고 아무도 자기를 쳐다보지 않는 하루.
그게 훨씬 나았다.
그런데 그것도 웃겼다.
그렇게 한국에 오고 싶어서 난리를 쳤으면서.
미들 스쿨 3년.
하이 스쿨 2년.아버지의 해외 발령으로 가족 모두가 LA로 건너갔고, 해온은 거기서 생각보다 많은 걸 배웠다.
영어.
욕. 그리고 사람을 믿지 않는 법.처음부터 끔찍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 몇 달은 그냥 불편했다. 말이 빨라서 못 알아듣겠고, 알아들어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수업 시간에 이름이라도 불리면 심장이 먼저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불편한 것과 싫은 것이 구분되지 않기 시작했다.
대놓고 무시하는 시선도 익숙해졌고,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견딜 만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이유 없이 밀치고 건드리는 것도.그냥 참았다.
처음에는 화도 났다.
왜 나한테 이러는데.
내가 뭘 했는데.그런 생각을 수십 번씩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묻는 것도 그만뒀다.
몇 년이나 그랬으니 맞는 것조차 새삼스럽지 않았다.
오늘은 몇 대일까.
어디를 맞으면 덜 아플까. 집에 들어가기 전에 멍이 가라앉을까.그런 걸 먼저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부모님에게 말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바빴고, 엄마는 낯선 나라에서 가족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지쳐 보였다.
무엇보다 말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내일도 학교는 가야 했고, 그 애들도 거기 있을 테니까.
그렇게 버티다 어느 날 선을 넘었다.
그날의 기억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
술에 취했는지, 다른 무언가에 취했는지 모를 남학생 하나가 해온에게 달려들었고, 그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겁이 났다.
그동안 맞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이후 기억은 흐릿했다.
분명한 건 하나였다.
해온이 병원에서 눈을 떴고,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엄마의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엄마는 해온이 눈을 뜬 걸 확인하자마자 손을 붙잡았다.
뭐라고 계속 말했다.
괜찮냐고 했던가.
미안하다고 했던가.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옆에는 아빠가 서 있었다.
늘 반듯하던 사람이 그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딸이 어떤 일을 겪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던 부모님은 그제야 무너졌다.
엄마는 해온의 손을 붙잡고 계속 울었다.
미안하다고 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했다.해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입술은 움직이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본인도 몰랐다.
목이 말랐나 싶었다.
충격 때문에 잠깐 그러는 건가 싶었다.다시 해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줘도 목구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했다.
입이 있는데 말을 못 한다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인 줄 처음 알았다.
병원에서는 쇼크로 인한 언어 장애라고 했다.
치료도 받았다.
상담도 받았다. 약도 먹었다.의사는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람들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게 전부였다.
가끔은 메모장에 몇 글자를 적었다.
괜찮아.
몰라. 싫어.그 세 마디면 웬만한 대화는 끝났다.
결국 부모님이 먼저 꺼낸 말은 한국이었다.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곳이니까.
거기에서는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니까.가족 모두가 당장 돌아올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일이 남아 있었고, 엄마도 정리해야 할 게 많았다.
그래서 해온만 먼저 보냈다.
혼자.
그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똑똑.
“야, 윤해온.”
문을 두드리던 손이 금세 방문을 벌컥 열었다.
류세라였다.
해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노크는 왜 해?”
“했잖아.”
“대답 듣고 들어오는 게 노크거든.”
“가족끼리 뭘 그렇게 따져.”
세라는 문틀에 기대 해온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준비 다 했어?”
“보면 몰라?”
“그 얼굴로 학교 가려고?”
해온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 얼굴이 왜.”
“누가 보면 학교에서 너 잡아가는 줄 알겠다.”
“비슷해.”
“첫날부터 지각하면 진짜 잡혀가.”
“…….”
“그러니까 빨리 나와.”
세라가 문을 다시 닫으려다 말고 해온을 힐끔 봤다.
“근데.”
“왜.”
“교복은 좀 잘 어울리네.”
해온이 바로 침대 위 쿠션을 집어 들었다.
“꺼져.”
“어우, 성질.”
세라가 웃으며 문을 닫았다.
해온은 손에 든 쿠션을 침대 위로 다시 던졌다.
그리고 거울 앞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멀쩡했다.
놀랄 정도로.
누가 봐도 평범하게 전학 첫날을 준비하는 여고생이었다.
눈 밑이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만 빼면 어디가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LA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왜 한동안 말을 못 했는지.겉만 봐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해온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불쌍하다는 표정도 싫었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 것도 싫었다.
괜찮냐고 묻는 말은 더 싫었다.
안 괜찮다고 하면 뭘 해줄 건데.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앞으로 만날 사람들하고 친해질 생각도 없었다.
적당히 학교 다니고,
적당히 졸업하고, 적당히 살면 된다.이번에는 누구하고도 엮이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날 아침까지는.
한국에 도착했던 날도 지금처럼 흐렸다.
긴 비행을 끝내고 입국장을 빠져나온 해온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모를 발견했다.
이모는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반가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가슴부터 꽉 막혔다.
그 순간이었다.
몇 달 동안 죽어라 치료해도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갑자기 터졌다.
“이모…….”
자기가 말해놓고 해온 스스로도 굳어버렸다.
이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을 흔들던 자세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 해온을 바라봤다.
“해온아?”
그 다음에는 엉망이었다.
해온은 캐리어 손잡이를 놓아버린 채 이모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어린애처럼 울었다.
“이모…… 이모…….”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래 쓰지 않은 악기처럼 거칠고 낯선 소리였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몇 달 만에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이모는 해온을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래. 왔어. 이제 왔어.”
그 말에 더 서럽게 울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몸이 먼저 알아버린 것 같았다.
이제 괜찮다고.
적어도 여기는 거기가 아니라고.
그날 이모는 공항 주차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해온이 말했어.”
수화기 너머가 한동안 조용했다.
“진짜야. 나 보자마자 이모라고 했어.”
해온은 옆자리에서 창밖만 보고 있었다.
괜히 민망했다.
조금 전까지 목이 쉬도록 울어놓고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고 싶었다.
이모에게서 연락을 받은 부모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허락했다.
네가 원할 때까지 한국에 있어도 된다고.
아빠는 공부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하라고 했다.
해온은 둘 다 대충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모네 집에 눌러앉았다.
처음 며칠은 거의 잠만 잤다.
낮에 눈을 뜨면 이모가 과일을 깎아놓고 갔고, 밤에 깨면 세라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살아 있냐고 물었다.
귀찮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세라는 과하게 위로하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묻지도 않았고, LA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굴었다.
“야, 치킨 시킬 건데 뭐 먹을래.”
“안 먹어.”
“그럼 네 거까지 내가 먹는다.”
“양념.”
“먹을 거면서 꼭 한 번 튕겨.”
그 정도였다.
해온에게는 오히려 그게 편했다.
하지만 계속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모가 알아본 학교에 전학 절차가 끝났고, 결국 등교 날짜가 정해졌다.
그리고 하필이면 오늘이 그 첫날이었다.
“윤해온! 진짜 두고 간다!”
거실에서 세라가 소리쳤다.
“간다고!”
해온이 가방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잠시 멈췄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별것도 아닌데.
그냥 학교일 뿐인데.
현관 쪽에서는 이모와 세라가 주고받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쟤 긴장한 거 아니야?”
“윤해온이? 설마.”
“너보다 훨씬 낯가림 심해.”
“알아. 그래서 내가 데리고 간다잖아.”
문 너머로 들리는 말에 해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긴장한 건 맞았다.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지.
새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수십 개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는 장면을 떠올리자 벌써부터 속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안 갈 수는 없었다.
해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학교만 다니면 된다.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친구도.
연애도.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도.전부 귀찮았다.
“윤해온!”
“아, 간다니까!”
해온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아무하고도 엮이지 않고,
조용히 졸업하는 것.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해온은 아직 몰랐다.
그날 밤, 자기가 어두운 골목에서 피투성이로 쓰러진 남자 하나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그 남자가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가장 시끄럽게 만들어놓을 사람이라는 것도.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