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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필 무렵, 나는 이미 떠났다

꽃이 필 무렵, 나는 이미 떠났다

By:  천외선인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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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진성과 딸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가정주부가 되었다. 그런데 박진성의 첫사랑이 이혼한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편은 나를 혐오했고, 딸은 나를 가사도우미처럼 부려 먹었다. 마음이 완전히 식어 버린 나는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 먼 곳으로 떠났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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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유진 씨, 이혼 합의서는 꼼꼼히 확인해 보세요. 서명하고 한 달이 지나면 두 분의 혼인 관계는 완전히 종료됩니다.]

심유진은 욕실에 서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변호사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전화를 끊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뺨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심유진은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곤 했다.

그때 휴대폰에서 딸이 보낸 가족사진 알림음이 울렸다.

심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 박진성의 잘생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결혼한 뒤 심유진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심유진이 정성껏 키워온 딸 박수정은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우스운 건, 이른바 가족사진이라는 사진 속 아내의 자리가 심유진이 아니라 박진성의 첫사랑인 강희연의 차지였다는 것이었다.

이 사진은 박수정이 일부러 심유진을 비웃고 조롱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석 달 전 강희연이 이혼하고 돌아온 이후, 심유진은 마치 이방인처럼 변해 버렸다.

이제 부녀의 눈에 심유진은 그저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었다.

오늘은 두 사람의 결혼 8주년 기념일이자 심유진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박진성은 반찬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게 화를 내더니, 심유진 혼자 집에 남겨둔 채 딸을 데리고 나가 버렸다.

강희연의 SNS를 보고서야 심유진은 부녀가 강희연을 만나러 갔고, 세 사람이 함께 해양 공원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이어 올라온 십여 개의 짧은 영상 중 마지막 영상이 심유진이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평소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극도로 싫어하던 박진성이 강희연을 업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검지로 닦아낸 뒤, 그대로 자신의 입에 넣는 모습까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심유진은 얼음굴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

심유진은 이 가족을 위해 매일같이 고생하며 애써 왔건만, 결국 남 좋은 일만 시켜 준 꼴이었다.

자신의 처지가 정말 가엾고 처참했다.

심유진은 힘없이 의자에 앉아서, 눈앞에 놓인 거의 다 녹아버린 딸기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심유진의 마음도 함께 서서히 가라앉았다.

시간은 흘러 새벽 3시가 되었다.

갑자기 집 안에 불이 켜지더니, 박진성이 딸을 데리고 돌아왔다.

심유진을 보자, 두 사람의 눈빛 깊은 곳에 혐오의 기색이 살짝 스쳤다.

박진성은 넥타이를 풀어서 심유진에게 내던졌다.

“내가 생강 못 먹는 거 뻔히 알면서 음식에 그렇게 많이 넣어? 다음부터는 좀 기억해.”

그러고는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작은 선물 봉투 하나를 심유진에게 던졌다.

“이건 생일 선물이야.”

심유진은 그 봉투를 보자마자 쓴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별로 값도 나가지 않는 사은품으로, 꿀벌 모양의 귀걸이 한 쌍이었다.

비싼 정품인 스완 크리스털 목걸이는 이미 강희연의 SNS에 올라와 있었다.

심유진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는데, 너는 집에서 편하게 놀고먹기만 하잖아.”

“내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나한테 얼굴까지 찌푸리는 거야?”

“네가 이렇게 꾸미지도 않고 여자로서의 매력도 없는 모습으로 변할 줄 알았으면, 절대 너랑 결혼 안 했어!”

“오늘 밤은 마당에서 자. 네 잘못을 깨닫기 전까지는 용서할 생각 없으니까!”

이 말을 남기고 박진성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박수정은 심유진을 쓰레기 보듯 바라보더니, 이미 다 녹아버린 딸기 케이크를 그녀의 머리에 내리꽂으며 자랑하듯 말했다.

“나 오늘 희연 이모랑 해양 공원에서 정말 재밌게 놀았어!”

“당신은 그냥 우리 집 가사도우미일 뿐이야. 얼른 아빠랑 이혼하고 나가.”

“난 희연 이모가 우리 엄마가 됐으면 좋겠어! 당신 같은 못난이는 필요 없어!”

어릴 때부터 정성껏 보살펴 온 딸이 자신에게 이토록 악독한 말을 내뱉는 모습을 보자, 심유진의 가슴은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마치 자신이 쓰레기라도 된 것 같았다.

자신이 이런 배은망덕한 아이를 키웠다니!

예전의 박수정은 정말 사랑스럽고 순수한 아이였다.

엄마인 심유진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하지만 석 달 전 강희연이 이혼하고 돌아온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여자와 몇 번 만난 뒤부터 딸의 태도는 완전히 돌변했다.

심유진은 강희연이 분명 딸 앞에서 무슨 말을 해서 모녀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의 말 따위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심유진을 가장 아프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자신이 수년 동안 쏟아부은 사랑과 정성이 강희연과 고작 석 달 함께한 시간보다도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심유진의 마음은 더욱 비참해져만 갔다.

자신이 마치 불쌍한 벌레처럼 느껴졌다.

딸은 엄마를 혐오하고, 남편 박진성도 심유진에게 점점 냉담해지면서 싫증을 냈다.

심지어 딸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마저 묵인하고 있었다.

심유진은 무표정하게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머리에 묻은 생크림을 씻어냈다.

심유진의 마음은 완전히 죽어 버렸다.

이 부녀에게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세면대 아래에서 서류를 꺼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며칠 전 두 사람은 강희연 문제로 크게 다퉜고, 박진성은 이혼 합의서를 심유진에게 내던졌다.

심유진이 자신과 딸을 깊이 사랑하고 있기에 절대 이혼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박진성은, 심유진을 온갖 방법으로 모욕하고 즐기고 있었다.

심유진은 위태로운 결혼을 붙잡기 위해 모든 억울함을 삼켜야 했다. 무릎을 꿇은 채 박진성에게 용서를 구했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차갑고 쉽게 변할 수 있는지를.

자신이 아무리 양보하고 타협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놓아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든 딸이든, 전부 다 포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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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유진 씨, 이혼 합의서는 꼼꼼히 확인해 보세요. 서명하고 한 달이 지나면 두 분의 혼인 관계는 완전히 종료됩니다.]심유진은 욕실에 서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변호사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전화를 끊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오른쪽 뺨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심유진은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곤 했다.그때 휴대폰에서 딸이 보낸 가족사진 알림음이 울렸다.심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확인했다.사진 속 박진성의 잘생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결혼한 뒤 심유진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그리고 심유진이 정성껏 키워온 딸 박수정은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우스운 건, 이른바 가족사진이라는 사진 속 아내의 자리가 심유진이 아니라 박진성의 첫사랑인 강희연의 차지였다는 것이었다.이 사진은 박수정이 일부러 심유진을 비웃고 조롱하려고 만든 것이었다.석 달 전 강희연이 이혼하고 돌아온 이후, 심유진은 마치 이방인처럼 변해 버렸다.이제 부녀의 눈에 심유진은 그저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오늘은 두 사람의 결혼 8주년 기념일이자 심유진의 생일이었다.그런데 박진성은 반찬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게 화를 내더니, 심유진 혼자 집에 남겨둔 채 딸을 데리고 나가 버렸다.강희연의 SNS를 보고서야 심유진은 부녀가 강희연을 만나러 갔고, 세 사람이 함께 해양 공원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연이어 올라온 십여 개의 짧은 영상 중 마지막 영상이 심유진이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평소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극도로 싫어하던 박진성이 강희연을 업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검지로 닦아낸 뒤, 그대로 자신의 입에 넣는 모습까지 담겨 있었다.그 순간, 심유진은 얼음굴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심유진은 이 가족을 위해 매일같이 고생하며 애써 왔건만, 결국 남 좋은 일만 시켜 준 꼴이었다.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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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심유진은 겉옷을 걸친 뒤 마당에 있는 긴 의자에 누웠다.이미 늦가을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고, 밤공기는 더욱 차가웠다.찬바람이 불자 심유진은 몸을 움츠리며 옷깃을 여몄다.싸울 때마다 박진성은 늘 이런 식으로 심유진을 벌했다.겉으로는 정신 차리라고 하는 말이지만, 실상은 심유진을 모욕하는 행위였다.하지만 지금의 심유진은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오랜 세월 자신이 집착했던 것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졸음이 밀려와 막 잠들려던 순간, 따뜻한 손이 심유진의 옷 속으로 들어왔다.심유진이 곧바로 눈을 뜨자, 욕망으로 가득 찬 박진성의 눈동자와 마주쳤다.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았지만, 심유진의 마음은 오히려 차분했다.예전 같았으면 열정적으로 응하며 박진성이 좋아하는 대로 맞춰 줬겠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역겨웠고 그의 손길이 거부감으로 다가왔다.심유진의 달라진 태도를 눈치챈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심유진은 박진성의 손을 밀어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몸이 좀 안 좋아서.”마치 아직도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자 박진성은 곧바로 짜증을 냈다.“아직도 희연이 일로 나한테 삐져 있는 거야?”“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지금 희연이랑은 그냥 친구 사이라고. 그렇게 속 좁게 굴지 좀 마.”박진성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서 심유진은 눈을 감고 반응하지 않았다.심유진이 감히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박진성은 몹시 불쾌했다.“정말 봐주니까 기고만장하네. 희연이 말이 맞았어. 내가 너한테 너무 잘 해줬어.”“감히 나한테 이런 태도를 보여? 앞으로 내가 너한테 손 하나라도 대나 봐.”쾅!거세게 문 닫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심유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예전 같았으면 박진성이 조금이라도 불쾌해하는 기색을 보이는 순간, 심유진은 곧바로 자세를 낮추고 비굴하게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다 놓기로 마음먹었기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심유진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부녀를 위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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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온 뒤, 박진성은 그 붉은 장미꽃 다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어젯밤에 내가 기분이 안 좋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그렇게 속 좁게 굴어서 희연이를 곤란하게 만들면 안 되지.”“이건 내가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너 주려고 사 온 거야. 조금 있다가 희연이한테 가서 사과해. 그러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자.”“희연이는 뒤끝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분명 널 용서해 줄 거야.”박진성은 심유진에게 장미꽃을 선물한 것이 오랜만이었기에, 그녀가 분명 감동해서 어쩔 줄 몰라 할 거라고 확신했다.심유진은 꽃잎 가장자리가 벌써 시들기 시작한 장미 다발을 바라보며 속으로 비웃었다.‘내가 그렇게까지 비참한 존재인가? 어떻게 나를 이렇게까지 모욕할 수 있지?’이 꽃다발은 사실 박진성이 강희연에게 사준 것이었다.오늘 강희연이 올린 영상에서 이미 본 꽃이었다.‘남에게 줬던 걸 또 나한테 마치 선심 쓰듯 건네다니. 나를 쓰레기 취급하는 거야?’심유진은 그저 가만히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박진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너, 적당히 좀 해. 내가 이렇게까지 기회를 줬으면 알아서 받아들여야지. 계속 일을 키워 봐야 너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심유진은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거부하듯 말했다.“나 꽃가루 알레르기 있잖아.”그 말을 듣는 순간, 박진성은 잠시 멍해졌다. 그제야 심유진에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하지만 박진성은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어떻게 해명할까 고민하다가, 심유진의 차가운 얼굴을 보자 갑자기 폭발하고 말았다. 분노에 휩싸인 박진성은 탁자 위의 장미꽃 다발을 집어 들더니 심유진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한 번, 또 한 번, 조금도 봐주는 기색 없이 내리쳤다.심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너무 많은 꽃가루를 들이마신 탓에 피부에는 금세 붉은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얼굴은 새빨개진 채 숨쉬기조차 점점 힘들어졌다.박진성은 아랑곳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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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심유진은 일주일 동안 입원해 있었지만, 박진성은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고 전화 한 통조차 없었다.정아진은 사과를 깎으며 투덜거렸다.“박진성은 남편 자격도 없어. 이혼하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일이야.”“근데 너 또 후회하고 돌아가서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거 아니지?”심유진은 박진성과 수없이 다투었고, 이혼을 결심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하지만 매번 무릎 꿇고 잘못을 비는 것으로 끝이 났다.지난날의 그 모든 일을 떠올리자, 심유진은 자신이 우습고도 한심하게 느껴졌다.“이제 안 그래.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면 개를 키워도 정이 들었을 텐데, 박진성 마음속에 나는 개만도 못한 모양이야.”자신을 그렇게 표현하는 심유진이 안쓰러워 정아진은 마음이 아팠다.“그런 생각 하지 마.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 세상에 남자가 박진성 하나뿐이겠어?”입원한 지 8일째 되던 날, 심유진은 퇴원했다.숨이 막힐 것만 같았던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다.집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 상한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바닥에 버려진 장미꽃은 이미 바싹 말라 있었다.심유진은 박진성이 딸을 데리고 강희연에게 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박진성이 심유진을 괴롭힐 때마다 써먹던 수법이었다.이렇게 함으로써 심유진을 괴롭히는 것이다.박진성은 심유진이 자신과 딸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굴수록 심유진이 더 큰 고통을 받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머릿속에 그날의 난폭했던 박진성의 모습이 떠올랐다.너무나 낯선 모습이었다.심유진이 알던 박진성이 아니었다.그 모습은 너무나도 끔찍했다.그때 휴대폰 알림음이 울리며 심유진의 생각을 끊어버렸다.확인해 보니 강희연이 보낸 짧은 영상이었다.영상 속 박수정은 아이스크림을 입 가득 넣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희연 이모가 우리 엄마 하면 안 돼요? 그 못난이는 나한테 이런 맛있는 것도 못 먹게 하고 맨날 돼지 먹이 같은 것만 먹였어요.] [보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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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박진성과 박수정, 강희연의 곁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앉아 있었다.세 사람을 제외하면 심유진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오늘은 강희연의 생일이었다.강희연은 생일 모자를 쓰고 박진성 곁에 다정하게 붙어 앉아 있었다.같은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농담을 건넸다.“박 대표님이랑 희연 씨는 정말 잘 어울려요. 선남선녀에 천생연분인데, 언제쯤 두 분 결혼식에서 술 한잔할 수 있을까요?”강희연은 수줍은 표정으로 박진성을 슬쩍 바라보았다.박진성이 아무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자, 강희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테이블은 떠들썩하게 달아올랐다. 어느 누구도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심유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심유진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어떤 파문도 일지 않았다.세 사람은 정말 한 가족처럼 보였다.강희연이 몸을 돌리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심유진을 발견했다.강희연은 일부러 머리를 박진성의 어깨에 기대며 감사 인사를 했다.“오늘 정말 고마워.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이 됐어.”박진성이 강희연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는 필요 없어.”박진성이 말하는 동안, 강희연은 일부러 취한 척하며 박진성의 목을 끌어안았다.강희연의 눈빛은 몽롱하면서도 욕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박진성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숙이면서 강희연에게 입을 맞췄다.박진성은 강희연을 단단히 품에 끌어안은 채, 거침없이 뜨겁게 키스했다.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은 환호하고 휘파람을 불었다.심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다 그만 실수로 컵을 떨어뜨렸다. 컵이 바닥에 떨어지며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소리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심유진에게 쏠렸다.박진성은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가 순간 멍하니 굳어 버렸다.눈빛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심유진이 여기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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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식사가 끝난 뒤, 박진성은 집에 가서 차 한잔하자는 강희연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사실 마음 한구석에는 약간의 미안함과 죄책감도 있었다.집으로 돌아가서 심유진에게 몇 마디 부드럽게 말해 주면서 달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심유진이 자신을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하자, 박진성은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었다.“오늘 희연이 생일이라서 나랑 수정이가 같이 축하해 준 거야. 그런데 거기까지 따라와?” “이제 아주 대단한 짓까지 하는구나. 그렇게까지 뻔뻔해질 줄은 몰랐어.”심유진은 여전히 박진성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그저 이 남자가 너무나 우습게 느껴질 뿐이었다.‘겉부터 속까지 이미 다 썩어 버렸어.’다른 여자와 어울리고 있는 건 자신이면서, 모든 책임은 오히려 심유진에게 떠넘겼다.정말 책임 전가 하나만큼은 타고난 사람이었다.박진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심유진을 노려보았다.예전 같았으면 박진성이 조금이라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면, 심유진은 곧바로 잘못을 빌고 사과했다.심지어 자신의 잘못이 아니어도 박진성은 마음대로 화를 내며 심유진을 쥐고 흔들었다.하지만 이제는 그 수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이런 심상치 않은 변화에 박진성은 은근히 불안해지면서 이유 모를 초조함이 밀려왔다.“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나하고 희연이는 그냥 친구라고. 절대 남녀 관계 같은 건 아니야. 너도 좀 나만 쳐다보지 말고 너 자신한테나 신경 써!”심유진은 여전히 박진성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네 말이 맞아. 나도 이제 내 자신한테 집중해야겠어.”그 말에 박진성은 완전히 폭발했다.박진성은 심유진이 일부러 자신에게 냉담하게 굴면서 빈정대는 투로 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분노한 박진성은 탁자 위의 과일 접시와 컵을 모조리 바닥으로 쓸어버렸다.심유진은 미동도 없이 조용히 TV만 바라보았다.박진성은 눈이 벌게진 채 주먹을 꽉 쥐었다.“내가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밖에서 일하는데, 너는 집에서 귀부인처럼 호강하고 있잖아. 뭐가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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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두 사람을 보고도 심유진의 마음에는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예전처럼 역겹지도 않았다.어차피 이틀밖에 남지 않았고, 앞으로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 마지막만큼은 좋게 끝내자는 생각뿐이었다.그런 심유진의 모습에 박진성은 마음속으로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예전 같았으면 자신과 딸이 이틀만 집에 안 들어와도, 심유진은 수십 통의 전화와 수백 개의 문자를 보내서 잘못을 빌며 돌아오길 애원했다.이번에는 열흘이 넘도록 집을 비웠는데도, 심유진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억지로 해석하려고 애를 썼다.‘심유진이 혼자 집에 있는 게 너무 불쌍해서 그저 측은한 마음에 돌아온 것뿐이야.’박진성은 심유진이 자신을 미칠 듯이 사랑해서 본래의 모습조차 잃어버린 여자라고 확신했기에, 계속해서 그런 방식으로 심유진을 괴롭힐 수 있었다.이번에 먼저 돌아온 것조차, 심유진에게 베푸는 은혜이자 다시 기회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심유진의 얼굴에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박진성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물었다.“뭐야? 우리가 돌아온 게 싫어?”심유진은 박진성과 길게 말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다.어차피 이틀 남았는데, 박진성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싸움을 이어 갈 필요가 없었다.심유진은 그대로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그런 심유진의 무심한 태도에 박진성의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았다.박진성의 심경은 복잡해졌다.특히 지난날의 일들이 떠오르면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가장 힘들었던 시절, 심유진은 자신의 곁을 지키며 함께 걸었다.심유진이 물을 마시러 들어왔을 때, 거실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바닥에는 꽃잎이 흩뿌려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을 위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그 광경을 보자 심유진은 비웃음만 나왔다.‘이제 와서 이런 걸 준비하면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데.’심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그런 심유진의 행동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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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심유진은 강희연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 변화가 없었다.“난 이미 모든 걸 포기했어. 너랑 뭘 두고 다투지 않을 거야.”강희연은 비웃으며 말했다.“됐거든. 정말 떠날 생각이었으면 진작 떠났겠지. 지금까지 뻔뻔하게 붙어 있는 건 결국 돈 때문이잖아.”“아, 맞다. 지난번에 진성 오빠가 너한테 보낸 장미꽃 어땠어? 향이 아주 좋았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심유진의 얼굴빛이 변하면서 표정이 복잡해졌다.강희연조차 자신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박진성은 전혀 몰랐다.남에게 팔려 가면서도 그 사람 대신 돈까지 세어 주는 꼴이었다.결국 박진성의 마음속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진성이 딸을 데리고 나왔다.박진성은 심유진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수정이가 어려서 철이 없어. 내가 이미 잘 타일렀어. 조금 있다가 우리 가족끼리 크루즈 타러 가자.”그 말을 들은 강희연은 재빨리 콘서트 티켓 두 장을 꺼내 보였다.“이 밴드 우리 대학 때부터 정말 좋아했잖아. 오늘이 그 밴드의 마지막 콘서트야.”박진성은 잠시 멈칫하며 마음속으로 갈등했다.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강희연을 우선으로 삼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심유진의 이상한 변화를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기에, 먼저 크루즈에 타서 야경을 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여기서 또 강희연을 선택하면, 심유진이 그 결과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심유진이 자신을 미칠 듯이 사랑해서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결국 박진성은 처음의 결정을 지켰다.“미안, 그 밴드 이제 안 좋아해. 그리고 아내한테 먼저 약속했어.”말을 마치고 박진성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이런 상황은 강희연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평소 박진성은 강희연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는데, 오늘은 저 못난이 때문에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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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강희연은 종합 검진을 받았지만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심지어 처방받은 약조차 없었다.박수정은 침대 옆에 서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강희연을 바라보았다.“다 그 못난이 때문이에요. 진짜 나빠요.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그 말을 들은 박진성은 깜짝 놀라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6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가, 그것도 자신의 친어머니에게 그런 악독하고 더러운 말을 내뱉다니.박진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딸을 노려보았다.“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어? 네가 입에 담을 말이야?”아이가 생긴 뒤로 박진성은 줄곧 일에만 매달렸고, 박수정은 항상 심유진이 돌봐 왔다.그때의 박수정은 명랑해서 마치 천사 같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이였다.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상해지더니, 자주 심유진을 원망하고 모욕하면서 그런 엄마를 둔 것을 부끄러워했다.심유진의 얼굴에 있는 흉터도 딸이 제멋대로 굴다가 생긴 상처였다.예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박진성은 그제야 원인을 깨달았다.모든 것은 딸이 강희연과 만난 이후부터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기회를 봐서 딸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마음먹었다.박진성의 표정이 달라진 것을 본 강희연은 남자가 뭔가 의심할까 봐 불안해졌다.강희연은 다시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기 시작했다.박진성은 황급히 의사를 불렀고, 강희연은 조금씩 진정됐다.병실에서 나온 박진성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담배를 피우며 긴장을 풀려고 했다.원래 계획은 심유진을 불러 사과하게 하고, 적당히 이혼 이야기로 겁을 주려는 것이었다.박진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유진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자존심도 버릴 수 있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여자였다.그런데 박진성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전화를 걸었는데, 심유진이 감히 자신의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다.‘이게 무슨 뜻이지? 감히 이렇게까지 나온다고?’그 순간, 박진성의 마음속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났다.박진성은 휴대폰을 꼭 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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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박진성은 굳은 얼굴로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그 위에는 자신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었다.문뜩 기억이 났다.얼마 전 크게 다툰 뒤, 심유진을 일부러 자극하고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합의서를 꺼내서 서명까지 했던 것이다.요즘 심유진이 달라진 모습을 떠올리자, 박진성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 몇 장의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처음부터 이혼할 생각이었던 거였어?”박진성의 눈에 심유진은 그저 가정주부에 불과했다.‘매일 출근도 하지 않고 사모님처럼 살아가는 주제에, 감히 이혼을 입에 올리다니?’박진성은 휴대폰을 꺼내 심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무릎 꿇고 용서를 빌기만 한다면, 마지못해 한 번 더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박진성은 몸이 굳어졌다.심유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데다가, 휴대폰도 꺼져 있는데 대체 어디서 그녀를 찾는단 말인가?박진성은 점점 더 난폭해지더니, 집 안의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졌다.겨우 마음이 가라앉은 뒤에야 박진성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아마도 심유진은 잠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일 것이다.가정주부에 아무런 수입도 없고, 그동안 자신도 심유진에게 많은 돈을 주지 않았으니 밖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다.그때가 되면, 이런 짓을 한 대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줄 것이다.이렇게 모든 생각을 정리한 박진성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병실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강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모가 네 엄마가 됐으면 좋겠지? 그럼 앞으로 이모 말 잘 들어야 해.”“그날 심유진이 먼저 이모한테 욕하고, 먼저 손을 댔다고 말하는 거야. 알겠지? 그렇게 하면 이모가 곧 네 엄마가 될 수 있어!”강희연은 박수정의 볼을 쓰다듬으며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계산하는 기색이 가득했다.박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나는 희연 이모가 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못난이는 희연 이모 발끝에도 못 미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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