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녀는 여원의 표정을 살피더니 급히 말을 덧붙였다.“언니, 오해하지 마. 오빠는 거실에서 잤어. 내가 불안해서 혼자 못 있겠다고 하니까 방을 쓰라고 한 것뿐이야.”여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세린은 그녀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언니, 사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오빠가 자꾸 나한테 의지하니까…….”“시헌이가 너한테 의지한다고?”“언니가 오빠를 피하니까 오빠도 힘들어하잖아. 밤마다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제대로 안 먹어. 나까지 외면하면 오빠 혼자 어떻게 버티겠어.”여원은 세린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떼어 냈다.자신이 떠났기 때문에 세린이 시헌의 곁을 지켜야 했다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책임마저 자신에게 돌리는 방식이었지만, 여원은 더 이상 그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내가 시헌이랑 헤어진 건 너한테 그 사람을 돌봐 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야. 네가 여기서 어떻게 지내든 이제 나하고 상관없지만, 내 물건을 함부로 치운 건 사과해야 해.”세린은 눈가를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미안해, 언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여원은 세린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 화면이 켜지는 것을 보았다.화면에는 백시헌의 이름과 함께 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세린은 여원이 화면을 본 것을 알아차리자 황급히 휴대전화를 뒤집었다.“오빠가…… 내가 혼자 있을까 봐 걱정해서.”여원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세린이 자신과 나누는 대화를 시헌에게 들려주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십 분도 지나지 않아 시헌이 집으로 들어왔다.그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작은 방으로 향했고, 방문 앞에 서 있는 세린을 보자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세린아, 괜찮아?”세린은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언니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또 실수했나 봐.”시헌은 여원을 돌아보며 세린에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여원은 정리해 둔 상자 뚜껑을 닫으며 자신의 물건을 왜 옮겼는지 물었을 뿐이라고 설명
“여원아, 시헌이한테 들었다. 결혼식을 취소하겠다고 했다며?”평소보다 딱딱한 목소리였다. 여원은 창가로 걸어가 잠시 숨을 고른 뒤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라고 대답했다.시헌의 어머니는 결혼을 앞두고 다투는 일이야 어느 집이나 있다며, 그런 일로 식까지 취소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여원이 단순한 다툼이 아니었다고 설명하자 이번에는 세린의 이름이 나왔다.“시헌이가 그러더라. 네가 세린이를 오해해서 일이 커졌다고. 세린이는 어려서부터 우리 집을 드나든 애야. 그 애 때문에 결혼을 포기할 만큼 두 사람 사이가 가벼웠니?”여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시헌의 어머니에게 세린은 이미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만 예민하고 모난 사람이 되어 있었다.“세린이와 시헌이의 관계만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시헌이와 결혼해서 행복할 자신이 없습니다.”“결혼은 사랑만으로 하는 게 아니야.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지.”“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양보만 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시헌의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더니 집안의 체면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고, 여원은 떨리는 손을 천천히 움켜쥐며 대답했다.“체면 때문에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통화를 마친 뒤에도 손이 조금 떨렸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에서 오래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여원은 신혼집과 관련된 비용도 정리하기 시작했다.예식장과 달리 신혼집 임대차계약은 시헌 명의로 되어 있었다. 여원이 직접 계약한 것은 일부 가구와 가전제품이었고, 따로 주문한 생활용품도 있었다.그녀는 결제 내역을 출력해 배송 전인 물품부터 확인했다. 침대와 식탁은 아직 제작 단계였고, 자신이 고른 커튼은 세린이 다른 제품으로 변경하면서 주문이 보류된 상태였다.여원은 업체마다 연락해 취소 가능 여부와 위약금을 확인했다. 비용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물건들을 신
“언제까지 이럴 건데? 양가 부모님은 어떻게 할 거야? 청첩장도 이미 돌렸는데 네 마음이 바뀌었다고 다 취소할 수는 없잖아.”여원은 부모님께 직접 말씀드릴 생각이며, 시헌의 어머니에게도 예의를 갖춰 자신의 결정을 전하겠다고 대답했다.시헌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네가 우리 집안을 얼마나 곤란하게 만드는지 알아?”“내가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누가 결혼하기 싫다는 걸 이해 못 한대? 그런데 네가 왜 이러는지 납득이 안 되잖아.”시헌은 한동안 여원의 얼굴을 살피다가 세린과의 연락을 줄이고 여원이 싫어하는 행동도 하지 않겠다며 그만 화를 풀라고 말했다.일곱 해 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내는 시헌의 얼굴에는 미안함보다 거래를 제안하는 사람의 조급함이 먼저 드러나 있었다.“그렇게 하면 돌아올 거야?”여원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세린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잖아.”시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네가 나를 놓아줬으면 좋겠어.”시헌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한참 만에 자신은 여원을 놓아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에 여원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네가 못 놓겠다고 해도 나는 떠날 거야.”여원이 돌아서자 시헌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며 낮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시헌은 닫히는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그날 저녁, 여원은 부모님께 약혼을 끝냈다고 말씀드렸다.어머니는 처음에 결혼식 날짜를 또 미루겠다는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여원이 이번에는 정말 결혼하지 않겠다고 설명하자 수화기 너머가 한동안 조용해졌다.“여원아, 무슨 일이 있었니?”그 한마디에 여원은 목이 메었다.그동안 그녀는 시헌의 잘못을 부모님께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미뤄질 때마다 회사 사정 때문이라고 둘러댔고, 세린의 존재도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가까운 동생 정도로만 설명했
세린의 웃음이 잠깐 굳었지만, 곧 고개를 숙이며 자신은 여원이 나중에 후회할까 봐 걱정될 뿐이라고 말했다.여원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계약서 사본을 요청했다. 담당자가 서류철을 펼치는 동안 세린은 테이블 아래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고, 여원은 누구에게 연락하는지 묻지 않은 채 계약 조건을 확인했다.***계약서에는 백시헌과 한여원의 이름이 공동 예약자로 적혀 있었다. 여원은 서명란과 연락처 변경 이력을 살펴보다가 신부 측 연락처가 세린의 번호로 바뀐 기록을 발견했다.“이 연락처는 언제 변경됐나요?”담당자가 기록을 확인하는 동안 세린은 의자에 앉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지난번 예식 일정 조정 때 신랑 측 요청으로 변경된 것으로 확인됩니다.”“제 동의를 확인하셨나요?”담당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당시 시헌이 여원과 상의했다고 설명했으며, 정확한 처리 경위는 다시 확인해 보겠다고 답했다.여원은 해당 기록의 사본을 요청했다. 그러자 세린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급하게 끼어들었다.“언니, 그건 내가 연락을 대신 받으려고 한 거야. 오빠가 언니 회사 일 방해하면 안 된다고 해서.”“그럼 나한테 먼저 물었어야지.”“그렇게 큰일인 줄 몰랐어. 내가 도와주려고 한 건데 언니가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네.”세린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담당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금세 눈가를 붉혔다. 마치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선의가 오해받아 상처 입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표정이었다.여원은 그 모습을 더 지켜보지 않고 계약서로 시선을 돌렸다.“오늘 제 취소 의사를 정식으로 기록해 주세요. 앞으로 추가 발주나 변경이 필요하다면 제 동의를 받았다고 처리하지 말아 주시고요.”담당자는 계약의 최종 해지와 위약금은 약관에 따라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설명했고, 여원은 그 절차를 이해했다며 오늘 이후 발생하는 추가 비용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남겨 달라고 요청했다.여원이 차분하게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 세린은 더 이상 끼어들지 못했다
백시헌은 결혼식을 취소하지 않았다.한여원이 약혼반지를 돌려준 지 사흘째 되던 아침, 그녀의 휴대전화로 예식장 예약 확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결혼을 준비하던 시절이라면 몇 번이고 들여다봤을 문장이었지만, 이제는 화면에 나란히 적힌 두 사람의 이름조차 낯설게 느껴졌다.[백시헌·한여원 고객님, 예정된 예식의 최종 진행 여부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여원은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메시지를 확인한 뒤 곧바로 웨딩플래너에게 연락했다. 담당자는 신랑 측에서 예식 진행을 재확인했으며, 남은 비용도 예정대로 정산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설명했다.“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수화기 너머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담당자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신랑님께서는 두 분 사이에 잠깐 다툼이 있었을 뿐이라고 하셨어요. 예식 준비를 중단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셨고요.”“다툼이 아니라 약혼이 끝났습니다. 제 동의 없이 준비를 계속하지 말아 주세요.”담당자는 공동 예약으로 등록된 계약이라 최종 해지와 비용 정산에 관한 절차를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원은 취소 규정과 계약서 사본, 현재까지 발주된 항목의 내역을 요청한 뒤 직접 방문하겠다고 알렸다.통화를 마치고 나자 지하철 창에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다섯 번이나 결혼식 날짜가 바뀌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먼저 취소를 말하지 않았다. 시헌이 기다려 달라고 하면 기다렸고, 세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속상한 마음을 삼켰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원은 시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예식장에 결혼식 진행하겠다고 했어?][당연하지. 결혼식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우리 약혼은 끝났어.][네가 화났다고 결혼까지 취소할 수는 없어. 양가 부모님도 생각해야지.]여원은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결혼을 결정할 때는 자신의 동의가 필요했으면서, 끝내는 일에는 왜 시헌의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예식장 상담실에 들어선 여원은 자신보다 먼저
“일곱 해 만난 사이를 이런 걸로 끝내겠다는 거야?”“이런 일들이 일곱 해 동안 쌓였어.”시헌은 한동안 여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너 지금 나 겁주려고 이러는 거지?”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내가 세린이랑 연락 끊고 네 비위 맞춰 주길 바라는 거잖아.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될 것 같아?”그는 반지 상자를 손끝으로 밀어 여원 쪽으로 돌려놓았다.“반지 다시 껴. 유치하게 굴지 말고.”여원은 상자를 집지 않았다.시헌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한여원.”그가 낮게 이름을 불렀다.“내가 지금 좋게 말할 때 그만해.”여원은 그의 눈을 바라봤다.“나도 좋게 말하고 있어.”“너 지금 나한테 이별 통보하는 거야?”“응.”시헌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허락할 것 같아?”여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별하는 데 네 허락이 필요해?”그 말에 시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그는 식탁 위 반지 상자를 집어 들더니 여원의 손을 붙잡았다.“손 줘.”여원은 손을 빼려 했지만 시헌이 놓아주지 않았다.“반지 끼라고.”“놓아.”“네가 지금 감정적으로 이러는 거잖아. 며칠 지나면 후회할 일 만들지 마.”시헌은 반지를 꺼내 여원의 손가락에 끼우려 했다. 여원이 손을 움켜쥐자 그는 더 세게 붙잡았고, 그 순간 그녀의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아프니까 놓으라고.”그제야 시헌의 손이 멈췄다.여원은 손을 빼내 반지를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끝내자, 시헌아.”그녀는 떨리는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나는 이제 네 약혼녀로 살고 싶지 않아.”시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원을 바라봤다.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는 오세린의 이름이 떠 있었다.시헌은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원은 그 손을 바라봤다.이별을 통보받은 순간에도 그는 세린의 전화를 먼저 확인하고 있었다.“받아.”여원이 말했다.시헌이 고개를 들었다.“뭐?”“세린이 전화잖아. 받아야지.”시헌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