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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강서우야.”
낮게 깔린 도윤의 목소리가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분노를 억누르느라 불거진 그의 턱 근육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은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서우가 뭐 어때서. 겉으로 보기에만 철없는 거지, 속도 깊고 여린 애야.”
“네가 걔에 대해서 뭘 알아!”
쾅. 도윤이 화장대를 내리쳤다. 정적을 깨는 굉음에도 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옛날 그의 으름장 한마디에 겁을 먹던 꼬맹이는 이제 없었다.
“그래 몰라. 그런데 사람 속을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나한테 잘해주면 되는 거잖아.”
“윤해인.”
“적어도 서우는 내가 아니면 안 된대. 걔 시선은 한결같이 나야.”
도윤은 성큼 다가와 해인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너, 자신 있어? 내 눈앞에서 다른 놈이랑 살 자신 있냐고.”
"못할 건 뭐 있어. 어차피 오빠 선택지에 나는 없잖아.”
순간, 도윤의 숨이 멎었다.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린 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해인은 그 비극적인 표정을 감상하듯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사실 나는 누구랑 결혼하든 똑같아. 그게 강서우든, 길거리의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 함부로 하지 마.”
도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니트 위로 해인의 가녀린 뼈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해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보다 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도윤의 심장에 박혔다.
“대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남부럽지 않은 결혼 시켜주겠다며. 자기 하기는 싫지만, 남 주려니 아까운 마음인가?”
도윤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해인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이며 제 몸으로 그녀를 가둬버렸다.
“계획 바꿨어."
도윤의 뜨거운 숨결이 해인의 입술 바로 위에서 흩어졌다.
"못 가. 강서우한테도, 그 어떤 새끼한테도.”
“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냥 죽어버릴까.”
해인은 있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당겨 봤지만, 기어이 눈앞이 흐려졌다. 그 처절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도윤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뜩였다. 갈 곳 잃은 분노와 참아온 갈증이 뒤섞인, 흡사 짐승의 눈빛이었다.
“……나랑 하면 되잖아.”
“뭐……?”
해인이 멍하니 되물었다. 눈물 고인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도윤은 도망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턱을 거칠게 쥐어 올려 제게 고정시켰다.
“결혼이든, 그보다 더한 거든. 강서우랑 하겠다는 거 다 나랑 하면 되잖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해인의 귓가를 짓눌렀다. 도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선택권 따위 줄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해인의 붉은 입술을 거칠게 삼켜버렸다.
그것은 다정함이라곤 전무한, 날 것 그대로의 침략이었다. 도윤은 해인의 숨을 송두리째 앗아갈 듯 몰아붙였다. 뜨겁고 단단한 감각이 부딪힐 때마다 해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해인을 벽에 박아넣듯 밀착하며,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방 안의 온도를 순식간에 치솟게 했다.
“하아, 오빠…… 잠시만…….”
해인이 도윤의 어깨를 밀어내려 버둥거렸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인의 허리를 부서질 듯 감아올려 제게 바짝 밀착시켰다. 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노골적인 소유욕에 해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윤은 입술을 떼며 해인의 귓가를 짓씹듯 속삭였다.
“오빠라고 부르지 마.”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지금 네 위에서 발정 난 새끼가, 아직도 오빠로 보여?”
도윤은 해인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 위로 눕혔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출렁이며 해인의 몸이 튀어 올랐다. 도윤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고, 그녀를 가두듯 위로 올라탔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해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서우한테는 어디까지 허락할 생각이었어?”
도윤의 시선이 해인의 흩어진 머리카락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끈적하게 훑었다. 그는 해인의 손목을 침대 헤드 위로 단단히 눌러 고정하며 숨이 막힐 듯 거리를 좁혔다.
“아니, 대답하지 마.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으니까.”
그는 해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거친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아올랐다. 도윤은 그녀를 완전히 옭아맨 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몰아붙였다.
해인이 애처롭게 그의 팔을 붙잡으며 버둥거렸지만, 도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해인을 내려다보며, 거친 숨결을 뱉어냈다.
“ 나랑 이런 짓거리 하는 건 싫어? 왜, 나랑은 뽀뽀나 할 줄 알았냐고.”
해인을 옭아매고 있던 압박감이 극에 달한 찰나.
쾅!
정적을 찢는 굉음과 함께 방문이 박살 날 듯 열려젖혀졌다.
“이 미친 새끼가, 어디다 손을 대!”
해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일그러진 강서우의 얼굴이었다. 도윤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서우의 발길질이 도윤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윤의 몸이 침대 아래로 나뒹굴었다.
“오빠! 강서우!”
해인이 헝클어진 옷가지를 추스르며 비명을 질렀고, 침대 아래로 떨어진 도윤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넌, 아직도 이 새끼한테 오빠소리가 나와?"
서우가 도윤의 멱살을 거칠게 쥐어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던 참이었어."
도윤 또한 지지 않고 서우의 손목을 부서뜨릴 듯 움켜쥐며, 다른 한 손으로 서우의 멱살을 잡았다.
"이제부터 오빠 말고 얘 남편하려고."
“이 새끼가!”
서우의 주먹이 다시 도윤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려는 순간 해인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얇은 니트 하나만 걸친 채, 도윤과 서우의 단단한 가슴팍 사이에 선 해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타이트하게 조여오던 넥타이를 풀어 내리고, 자켓을 침대 위로 던지듯 벗어던졌다.도윤은 마스터 룸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비좁은 빛의 영토를 만들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하나도 안 변했네.’가만히 떠올려 보면 아직도 중학생 꼬맹이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자신을 보고 엄마 뒤로 숨던 6살 아이의 눈빛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렸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고단함을 읽어버린 순간, 도윤은 제 심장이 뜯겨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그때 가볼 걸.’중학교 졸업식 때 갈게.고등학교 입학하면 보러 갈게.고등학교 졸업하면 보러 갈게...자꾸 늘어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반복될 때쯤, 해인에게 오던 이메일도 끊어졌다.용기를 내볼까 했을 땐 남자친구가 생겼단다.복잡한 가정사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연락처를 바꾸어었다. 그게 해인을 위한 길이라 믿었던 자신의 오만함이, 결국 해인을 그 시궁창 속에 홀로 버려두게 만들었다.“지금부터 다시 해주면 돼. 대학도 보내고…….”텅 빈 서재에 그의 다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남부럽지 않게 결혼도…… 시켜줘야지.”그래, 그거면 됐다. 해인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고, 가장 좋은 것만 입히고 먹여서 가장 좋은 놈에게 보내주는 것. 그것이 오빠로서,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린 공범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스스로 내린 결론은 명쾌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답답함이 응어리져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노트북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해인이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완벽한 울타리를 더 견고하게 다지는 것뿐이었다.노트북 화면 너머로 내일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도윤의 귀에 둔탁한 소리가 꽂혔다.텅!플라스틱 통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다. 서둘러 서재를 나가보니 주방 불이 환하게 켜져
“그냥…, 바빴어. 군대 다녀오고 학교 졸업하고, 일하고 살다 보니. 넌 왜 안 했는데?”“나도 바빴지 뭐. 순식간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 시작하니까 시간이 더 빠르게 가더라.”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백화점 일?”“아니. 처음엔 미용실에서 일하다가, 백화점으로 들어왔어. 내가 손재주가 없나봐 하핫, 지금도 포장 잘 못한다고 혼나거든.”가벼운 웃음소리가 차 안을 울렸지만, 도윤의 표정은 굳어졌다.“자격증 같은 건? 고등학교에서 전문 자격증 따서 졸업하는 친구들도 있잖아.”“자격증은 뭐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나. 그것도 돈이랑 시간이 있어야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하지. 학교 끝나고 고깃집 아르바이트 다녔는데.”도윤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너희가 진짜 남매도 아니고 네 아버지랑 이혼한 마당에, 가깝게 지내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해인이 남자친구 생겼어. 돈 좀 보내봐, 아비도 없는데 비싸게라도 보여야지 대접을 받지.]어째서 그 여자가 보내온 말과 사진을 믿었을까.거짓말이 가득한 메시지를 볼 때마다, 해인이 적어도 자신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화려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 믿으며 비겁하게 안도했었다.“……아버지가 살던 집도 줬었고 해서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안 어려웠어. 내 주변 친구들 다 비슷하게 살아. 그래도 아저씨 덕분에 남들 보기에 좋은 집에서 살았어. 감사하게 생각해.”감사하다니. 그 말은 도윤에게 독설보다 더 아프게 박혔다.“남자친구는……, 있어? 20대 초반인데 한창 연애할 나이잖아.”도윤이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약 올려? 누구 인생 망치려고. 아마 내가 누구만난다고 하면 우리 엄마, 그 남자 찾아가서 돈 뜯어낼 생각부터 할걸?”“…….”“오빠 여자친구, 아니 그 약혼녀 이야기나 해줘. 강채영…이라고 했지? 예쁘더라. 성격은 좀 까칠한 것 같지만.”“미안해.”갑작스러
마감 시간을 알리는 부드러운 음악이 매장에 깔리기 시작했다. 지친 다리를 두드리며 매대를 정리하던 해인의 귀에,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꽂혔다.“어, 그래! 나 지금 에비뉴 백화점에 옷 사러 왔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우리 딸이 여기서 일한다고.”불안한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저 멀리서 화려하다 못해 천박한 원색 원피스를 입은 명희가 전화를 귀에 댄 채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어머, 해인아! 아직 마감 아니지?”명희는 사색이 된 딸의 안색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마구잡이로 행거에 걸린 고가의 코트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 벌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신상들이 명희의 거친 손길에 힘없이 흔들렸다.“엄마…… 여기 왜 왔어. 지금 영업 끝나가. 일단 나가서 얘기해.”“왜 이래? 나 오늘은 여기 고객으로 온 거야. 어머, 이거 색깔 예쁘다. 이것도 꺼내봐.”명희는 보란 듯이 고가의 실크 블라우스를 집어 들었다. 해인은 떨리는 손으로 명희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왜 이래, 돈 없잖아. 이거 엄마가 살 수 있는 옷 아니야.”“왜 못 사? 여기 직원 할인되잖아. 딸 덕 좀 보자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야 내 배 찢고 너 낳은 게 안 억울하지 않겠니?”명희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명희는 보란 듯이 코트와 원피스 서너 벌을 계산대 위에 툭 던져 올렸다.“자, 이거 네 사원 카드로 긁어. 직원가로 하면 얼마 안 하겠네.”“절대 안 돼. 이거 내 몇 달치 월급으로도 못 갚아. 당장 내려놔.”해인이 강하게 거부하며 옷을 다시 가져가려 하자, 명희의 눈독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명희는 집어 들었던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를 제 화장기 가득한 얼굴에 대고 막무가내로 문질러버렸다.“어머, 어쩌니? 파운데이션이 다 묻어버렸네?”새하얀 실크 위에 진득하게 묻어난 살색 파운데이션과 붉은 립스틱 자국. 해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거칠게 차에 올랐다. 핸들을 잡은 그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해인이 학원비 좀, 대학은 붙었는데 학비가 없네. 해인이가 해외연수도 가고 싶대.괜찮은 남자 만나려면 해인이도 명품 좀 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어?그렇게 그 여자에게 보낸 돈이 억 대에 달했다.적어도 한 때는 제 여동생이었던 그녀가 번듯한 대학 졸업장을 따고, 고생 따위는 모르는 귀한 집 아가씨처럼 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씨발, 그런데 왜……!”참지 못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도윤은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왜 저 꼴로 살고 있냐고, 대체!”갈라진 손끝과 푸석한 얼굴과 머리카락.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앙상한 손목과 발목이 망막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거칠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는 그의 눈동자가 액정 불빛에 번들거렸다.뚜르르르. 뚜르르르.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익숙하고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차안을 채웠다.[이 시간에 웬일이냐.][해인이 어머니, 지금 뭐 하고 사는지 아버지는 아시죠.]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수화기 저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냉소적인 대답이 돌아왔다.[그건 알아서 뭐하게. 네가 그 여자 계좌로 돈 보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지? 그런데 이제 직접 찾아가기까지 하려고?][오늘 해인이 만났습니다. 그 애가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아세요?][이혼 한 지가 언제 인데 내가 그것까지 알아냐 하니.][저한테 분명히 그랬어요. 대학교도 가고, 어학연수도 가고 싶어한다고 해서…….][내가 뭐라고 했어! 그 여자한테 돈 보내봐야 해인이 밑으로 한 푼도 안 들어간다고 했지!]아버지의 무심한 포표에 도윤의 눈시울이 뜨겁게 타올랐다. 핸들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아버지도 해인이는 귀여워하셨잖아요. 무려 10년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어요.][그렇다고 그 애가 진짜 내 딸이 되는 건 아니지 않니.]
“지퍼 좀 올려줄래요?”피팅룸의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네, 손님.”해인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가 걸친 원피스는 해인의 석 달 치 월급을 합쳐도 살 수 없는 고가의 신상이었다. 여자가 해인을 등지고 거울 앞에 섰다.순간, 해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거울 속 여자의 실루엣이, 그리고 살짝 돌아본 옆얼굴이 어쩐지 자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화려한 조명 아래서 빛나는 보석 같았고, 해인은 그 보석을 닦는 초라한 수건 같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예쁘다…….’그 찰나의 멍함이 독이 되었다.“아얏!”돌연 여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해인의 팔을 거칠게 밀쳤다.“미쳤어요? 지금 뭐 하는 거야!”“죄, 죄송합니다!”당황한 해인은 급히 지퍼를 살폈다. 가늘고 긴 머리카락 몇 올이 지퍼 이빨 사이에 단단히 씹혀 있었다.“머리카락이 지퍼에 걸려서…….”“아, 진짜 짜증 나. 이거 오늘 관리받고 온 머리인데! 당신 눈 어디다 두고 일해?”“정말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제가 금방 해결해 드릴게요.”다급히 카운터에서 쪽가위를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엉킨 머리카락을 끊어내려던 찰나, 여자의 눈이 가자미처럼 찢어졌다.“지금 내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이 상황에서 가위질이야? 당신 미쳤어?”“하지만 고객님, 지퍼가 완전히 끼어서 이 방법밖에는…….”“관리자 불러, 당장! 내가, 네 머리카락도 모조리 잘라줄게.”매장 안이 채영의 고함으로 소란스러워진 그때, 묵직한 구두 소리와 함께 매장 입구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무슨 일이야.”낮고 위압적인 음성. 여자는 반색하며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여기 점원이 내 머리카락을 뜯어놓고는 이제 자르겠대. 말도 안 되지?”남자의 시선이 채영을 지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인에게 멎었다. 얼음처럼 차갑던 남자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렸다.“……윤해인?”익숙하면서도 낯선 무게감에 해인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닿는 순간, 해인의 손에 든 가
“왜 하필 강서우야.”낮게 깔린 도윤의 목소리가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분노를 억누르느라 불거진 그의 턱 근육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해인은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서우가 뭐 어때서. 겉으로 보기에만 철없는 거지, 속도 깊고 여린 애야.” “네가 걔에 대해서 뭘 알아!”쾅. 도윤이 화장대를 내리쳤다. 정적을 깨는 굉음에도 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옛날 그의 으름장 한마디에 겁을 먹던 꼬맹이는 이제 없었다.“그래 몰라. 그런데 사람 속을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나한테 잘해주면 되는 거잖아.” “윤해인.” “적어도 서우는 내가 아니면 안 된대. 걔 시선은 한결같이 나야.”도윤은 성큼 다가와 해인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너, 자신 있어? 내 눈앞에서 다른 놈이랑 살 자신 있냐고.”"못할 건 뭐 있어. 어차피 오빠 선택지에 나는 없잖아.”순간, 도윤의 숨이 멎었다.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린 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해인은 그 비극적인 표정을 감상하듯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사실 나는 누구랑 결혼하든 똑같아. 그게 강서우든, 길거리의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 함부로 하지 마.”도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니트 위로 해인의 가녀린 뼈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해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보다 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도윤의 심장에 박혔다.“대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남부럽지 않은 결혼 시켜주겠다며. 자기 하기는 싫지만, 남 주려니 아까운 마음인가?”도윤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해인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이며 제 몸으로 그녀를 가둬버렸다.“계획 바꿨어."도윤의 뜨거운 숨결이 해인의 입술 바로 위에서 흩어졌다. "못 가. 강서우한테도, 그 어떤 새끼한테도.”“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냥 죽어버릴까.”해인은 있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당겨 봤지만, 기어이 눈앞이 흐려졌다. 그 처절한 얼굴을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