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보세요, 제가 계산한 거 맞나요?”미진은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 맞는 것 같아.”진욱은 경험이 많아 한눈에 이상한 점을 보아냈다.“이 두 곳은 여전히 틀리잖아.”“7번째 줄의 두 데이터가 모두 계산이 잘못되었어요. 50과 71이 아니라 50.2와... 70.88일 거예요.”정은은 지나갈 때, 그 장편의 수치를 보았고, 한눈에 7번째 노드에서 두 수치가 모두 틀렸다는 것을 보아냈다.평소에 네 사람은 실험실에서 줄곧 정은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해왔다.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비록 미진처럼 우호적이고 진욱처럼 마음이 너그럽다 하더라도, 그들은 정은과 그런 천연적인 거리감을 두었다, 이것은 밥 몇 끼 같이 먹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그것은 학력, 지위, 나이, 그리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가져오는 장벽이었다.그들은 태민과 수아를 대할 때, 분명히 정은을 대할 때와 많이 다를 것이다.이때 정은의 말을 듣고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심을 드러냈다.수아는 아예 입을 삐죽거렸다.진욱은 그들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속산 능력이 가장 강했다. 그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문제인데, 정은이 한눈에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니?‘장난해?’미진은 정은이 관심을 얻기 위해 고의로 이렇게 말한 것일까 봐 먼저 입을 열었다.“정은아, 이 몇 조의 데이터는 줄곧 태민이 계산하고 있었는데, 1판도 이미 나왔고, 우리도 모두 대조한 적이 있어. 넌 지금 노드의 원시 데이터에 문제가 있다고 하다니, 그... 그럴 리가 없을 거야.”진욱도 고개를 끄덕였다.“나와 재석도 모두 검산한 적이 있어서 문제가 없어.”“허-” 수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떤 사람들은 좀 조용히 있으면 안 돼? 모르면 말하지 말고, 왜 자꾸 남의 일에 끼어들려 하는 건데? 정말 웃겨!”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믿지 못하겠으면 한 번 검사해 보세요.”“검사는 무슨?” 수아는 직접 그녀의 말을 끊었다.“우리
진욱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정은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사람은 주제를 잘 알아야 해, 알아? 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뜻밖에도 물리팀의 실험 데이터에 이래라저래라 간섭을 하다니, 사람들 웃겨 죽을지도 모르겠네...”바로 이때, 줄곧 컴퓨터 앞을 지키면서 열심히 타자를 하던 태민이 갑자기 흥분해하며 말했다.“방금 다시 한번 계산했는데, 정은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요.”수아는 갑자기 말문이 막히더니 소리가 뚝 그쳤다.미진과 진욱도 깜짝 놀랐다.“50과 71이 아니라, 50.2와 70.88까지 정확해야 했어요! 바로 이 정도의 편차로 7번째 노드 뒤의 모든 수치에 이상이 생겼던 거예요.”과학 연구는 바로 이렇다. 한 치의 실수라도 그 결과에 엄청난 차이가 생길 수 있었다.진욱은 즉시 스크린 앞에 다가갔다. 이번에 그는 어디도 놓치지 않고 수정한 후의 50.2와 70.88에 따라 속산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의 모든 수치가 자동적으로 수정되었다.그는 두 눈에서 빛이 났다.“이번에 맞았네, 보아하니 확실히 7번째 노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미진도 계산해보니 확실히 맞았다. 이 순간, 그녀는 정은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놀라움, 경악, 그리고 미안함.‘아까 난 정은을 위해 나서지 않았는데...’태민은 이미 호칭을 바꾸었다.“우리 정은아, 이번에 다 네 덕분이야! 이 데이터 때문에 내가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어. 네가 제때에 잘못된 점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우리 팀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정은은 아주 평온했다. 방금 수아가 자신을 욕할 때부터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운이 좋아서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에요. 제가 아니더라도 전 교수님의 속산 능력이라면, 곧 잘못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그녀도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진과 태민이 보기에는 털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섬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수아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니, 정
이건 마치 목사가 사냥꾼에게 사냥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치는 것만 같았다...‘누가 믿겠어!’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수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수아 선배님의 가르침, 정말 고마워요. 저야 당연히 연구사업이 엄밀하고 진실성을 추구하며 실무적이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죠. 이는 과학연구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의견을 청취하고 합리한 건의를 채납할 수 있는 도량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수아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죠?”“오늘 같은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수정의견을 제기하든, 의견이 무엇이든 검증을 거친 후에 다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지, 개인의 느낌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건 아니죠.”정은의 말투는 마치 객관적인 사실을 진술하는 것처럼 평온했다.그러나 수아에게 있어, 그것은 바늘처럼 날카롭게 그녀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교훈이 아니었지만 교훈처럼 들려왔다.수라의 얼굴은 순식간에 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또 바쁜 하루였다. 정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운 다음, 베개를 안고 잠들었다.같은 밤, 어떤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느라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소란스러운 음악 소리, 현란하고 눈부신 불빛, 섹시하고 젊은 여자들이 무도장에서 마음껏 춤을 추고 있었다. 고동건도 이 열정 때문에 저절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그리고 손에 와인잔을 쥐며, 붉은 와인은 그의 동작에 따라 흔들렸다.동건은 가끔 무도장 속의 그 젊은 여인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사냥감을 고르고 있는 표범과 같았다.“뭘 봐요? 카드놀이 한다고 했잖아요? 왜요, 많이 져서 놀기 싫어요?”선우는 술을 들고 왔는데, 동건이 혼자 숨어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나른하게 비웃었다.동건은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소리야, 난 지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어. 오늘 밤은 운이 좋네. 그 여자들 모두 내 타입이야, 이건 카드놀이보다 훨씬 재미있지 않니?”무도장에서 검은색 탱크
남자는 짜증이 났고, 무척 초조해했다. 도겸은 시간을 보았는데, 이제 겨우 9시였다. 그러나 집에서 이미 전화를 4~5통 걸었고, 그중 3개는 도겸의 어머니, 나머지 하나는 서연희였다.연희는 도겸이 받지 않을 줄 알고 한 통 건 다음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눈치가 있었다.그런데도 도겸은 귀찮았다. 특히 최근 별장에 남이 하나 더 생겼다는 생각에 더욱 귀찮아졌다.선우는 시간을 보았다.“아직 이른데, 벌써 가려고요?”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우는 그가 비록 술에 취하지 않았지만, 온몸의 포악한 기운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선우도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우리 기사가 아래층에 있으니까 내가 형 데려다 주라고 할게요.”“고마워.”“나한테 고맙긴요?” 선우는 술잔을 내려놓았다.“도겸이 형, 내가 데려다 줄게요.”도겸는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너희들끼리 놀아.”동건은 멀리 떠나는 도겸을 보며 가볍게 웃더니 감탄했다. 그러나 그는 고소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도겸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서연희는 정말 대단한데? 이렇게 능력이 있는 여자였어?”“말 좀 작작 해요. 도겸이 형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은데...”“나 같아도 괴롭겠다. 수박을 잃어버리고 참깨를 줍다가, 참깨에 이빨까지 낀 셈이잖아. 소정은이 서비대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아마도 사랑을 단념하고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걸.”“그때 우리가 내기를 했잖아. 소정은이 언제까지 삐질지. 그런데 소정은은 삐진 게 아니라 정말 마음을 굳게 먹고 도겸과 헤어지려 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쯧쯧...”동건은 그동안 도겸과 정은이 티격태격하고 다투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그들 둘이 정말 헤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결국, 정은은 너무나도 잘 참았던 것이다. 6년을 버텼으니, 틀림없이 도겸과 결혼하기 위해 계속 참을 것이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솔직히 동건은 정은과 같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도겸은 그제야 연희가 전혀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난 이 여자가 청순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바보처럼 속고 당할 줄이야. 심지어 그런 여자 때문에 정은이를 잃어버렸어... 만약 서연희만 아니었다면, 나와 정은이는 이렇게 남남처럼 지낼 리가 없잖아?’여기까지 생각하면, 도겸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고, 연희가 있는 곳이라면 아예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그는 이미 연속 며칠간 회사에서 잤다. 연희는 감히 전화를 걸지 못했기에 서영숙을 통해 끊임없이 도겸을 재촉했다.도겸은 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별장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서연희, 넌 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별장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되었다.문을 열자, 연희는 문 앞에 서서 도겸의 외투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도겸은 몸을 옆으로 피하며 뚜벅뚜벅 거실로 걸어갔다.연희는 텅 빈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고, 섭섭함에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오늘 옅은 색의 느슨한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가슴 앞에 드리우니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다.그러나 도겸은 오히려 그런 연희를 직접 무시하며 서영숙을 향해 걸어갔다.“어머니께서 돌아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돌아온 거예요.”말을 마치자 바로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거기 서지 못해.”도겸은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엄청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요.”서영숙은 눈썹을 찌푸리며 도겸의 아무렇지 않은 말투에 불만을 느꼈다.“따라와, 할 말 있으니까.”그녀의 태도가 강경했기에 도겸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따라갔다.두 사람은 서재에 들어갔다. 도겸은 앉아서 자신을 위해 물 한 잔을 따르며 천천히 마셨고, 서영숙의 어두운 표정을 외면했다.“연희 뱃속의 아이가 네 것인데, 넌 신경을 좀 쓸 수 없니?”서영숙은 눈을 부라렸다. 사실 그녀도 아들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완벽한 외모는 모든 사람들을 현혹시켰지만, 도겸은 지극히 무정하고 냉담
정은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깨어났다.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들어보니, 누군가 자신의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누구세요?” 정은은 경계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밤 재석은 실험실에 남아 야근을 했기에, 만약 정말 강도라도 만났다면 정은은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노크 소리가 잠시 멈췄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정은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도겸은 계속 두드렸다.“대답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정은아, 나야...”도겸은 쓴웃음을 지었다.‘어쩜 고집이 이렇게 센 건지.’“무슨 일이야?”정은은 도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들어가서 너랑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그래. 나 절대로 너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을 거야. 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문을 열고 있어도 되는데...”“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정은은 도겸의 말을 끊으며 문을 전혀 열고 싶지 않았다.후에 도겸이 어떻게 애원하든 정은은 그저 못 들은 척했다.그러나 오늘 유난히 인내심이 있었던 도겸은 정은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계속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밖에서 아직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핸드폰을 들었다.“여보세요, 경찰서죠? 지금 누가 계속 제 집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그렇게 도겸은 경찰에게 끌려갔다.‘드디어 조용해졌군.’정은은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한 다음, 옷을 챙기고 실험실로 출발했다.앞으로 며칠 동안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실험실에서 밤을 보낼 작정이었다.한 편으로는 도겸이 계속 문을 두드릴까 봐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실히 진도를 따라가야 했다.정은은 9월 개학하기 전에 이 논문을 완성해야 했다.‘일석이조인 셈이지.’그런데 뜻밖에도 정은이 피하고 싶은 사람은 그녀가 아파트에서 나온 순간 골목에서 뛰쳐
먼저 손을 놓은 사람은 분명히 도겸이었다. 그러나 정은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곧 그 그늘에서 벗어날 때, 도겸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끌고 가려 하다니?‘이건 너무 웃기지 않아?’“강도겸, 앞으로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 난 널 증오하고 싶지 않거든.”정은의 단호한 말투와 무정한 눈빛은 마치 칼처럼 도겸의 자신감을 쿡쿡 찔렀다.“정은아... 이러지 마... 응?”그러나 정은은 그저 담담하게 도겸을 바라보기만 했다.“난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했어. 우리 어머니도 이미 동의했단 말이야. 이제 네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혼인신고를 할 수 있어!”“난 싫어.”그리고 도겸도 단지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다.“정은아...”“난 바빠서 먼저 갈게.”말을 마치고 정은은 도겸을 넘어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도겸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으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나갔지만, 도겸은 혼을 잃은 것 같았다. 마치 전 세상이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멍하니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얼마가 지났는지, 도겸은 뻣뻣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정은이 떠난 방향을 보고 중얼거렸다.“나에게 정말 기회가 없는 거야?”...연희는 그날 밤 도겸과 서영숙이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랐다. 처음에 그녀는 편하게 이 집에서 지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자의 냉담한 태도를 마주칠 때마다 연희는 자신이 수시로 쫓겨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불안한 감정은 금새 사라졌다.서영숙은 연희가 강씨 가문의 공신이라고 위로하면서, 두 이모님에게 그녀를 잘 챙겨주며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심지어 거액을 들여 연희에게 임산부 보양식까지 많이 사주었다.게다가 도겸도 연희가 이 별장에서 지내는 것을 묵인한 것 같았는데, 전처럼 배척하고 싫어하지 않았다.그 후 별장의 가정부들도 이를 눈치채며 연희에 대한 태도가 뒤바뀌었다.어떤 가정부는 이미
실험실에서.조미진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전 교수는 속산이 빠르니까 빨리 이 데이터 좀 계산해줄래? 정말 급해서 그래!”전진욱도 한창 바쁠 때였다.“컴퓨터로 계산해. 나 지금 시간이 없거든...”“에이, 이 데이터 엄청 중요하니까 좀 봐봐. 몇 분밖에 안 걸려!”진욱은 맞은편 실험대에 있는 정은을 가리켰다.“그럼 정은이에게 부탁해. 정은이의 속산 실력도 엄청 강하거든.”지난번에 데이터를 수정할 때, 모두들 정은의 실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이수아만이 정은이 황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무슨 일인데요 미진 언니? 제가 도와드릴까요?” 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미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것 좀 봐줘...”2분 후, 정은이 입을 열었다.“다 됐어요. 이미 메일로 보내드렸어요.”미진은 깜짝 놀랐다.‘이렇게 빨리 완성했다고?!’진욱도 놀라서 하던 일을 그만두며 미진에게 그 데이터를 달라고 말했다.“나도 좀 보자...”미진은 어이가 없었다.“방금 계산해달라고 했는데, 바쁘다며 거절했잖아? 지금 계산을 다 마쳤는데 또다시 계산을 하려 하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이니!”진욱은 미진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계산에 전념했다.손태민도 이 상황을 보고 즉시 시간을 재었다.“다 됐어. 얼마나 걸렸는데?”“2분 5초요.”그러고 정은도 겨우 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진욱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너 속산을 배운 적 있지?!”“주산법도 속산에 속하나요?”“언제 배웠는데?”“다섯 살? 아니다, 여섯 살인가? 죄송해요,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잊어버렸어요.” 정은은 궁색함 때문에 머리를 긁적였다.진욱은 침을 삼켰다.“그 이후로 배운 적이 없는 거야?”“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더니, 이게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태민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