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린은 치마 밑단을 찢어 손에 칭칭 감았다. 호수 저편에서 늑대 모양의 마물이 수백 마리 넘게 몰려오고 있었다.
“헬바르크잖아!”
어디선가 탄성이 터졌다. 포기한 듯한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마물들의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세레나를 태운 마차를 메이드들이 둘러쌌다. 그 바깥을 호위 기사들이 에워쌌다.
전열에는 반깐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큰 키에 차가운 얼굴을 가진 북부공작과 금발에 녹안을 지닌 장난기 어린 황태자가 자리했다.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이탈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북부공작의 엄포와 함께 마물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저 두 괴물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헬바르크 여러 마리를 쓰러뜨렸다.
‘공작만 셀 줄 알았는데 황태자도 의외잖아?’
서린은 침을 삼키며 둘의 무위를 눈에 담았다.
몸을 저렇게도 쓰는구나.
파이터의 눈으로 두 사람을 쫓았다.
잘 막던 전열이 살짝 흐트러지는 순간, 그 틈으로 헬바르크 한 마리가 마차 앞까지 파고들었다.
서린은 눈을 번뜩이며 날아오는 헬바르크의 오른쪽 머리를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나자빠진 헬바르크는 금세 몸을 일으켜 서린을 노려봤다.
‘크르릉.’
이제는 서린을 경계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헬바르크.
서린도 바짝 긴장한 채 가드를 올렸다.
그때.
황태자가 검으로 헬바르크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괜찮습니까?”
황태자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주먹으로 마물을 내리치는 메이드라니.
“네. 세레나 님은 마차에 계세요.”
무덤덤하게 대답한 서린은 근처에 쓰러진 기사의 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칼을 든 서린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황태자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위험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헬바르크 한 마리가 황태자에게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서린을 놓친 황태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하.' 하고 기가 찬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서린은 검을 처음 잡아본다.
하지만 수많은 전투 경험으로 거리감과 타이밍은 이미 몸에 익어 있었다.
헬바르크 한 마리가 높게 뛰어올라 서린의 목을 물려는 순간.
서린은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검으로 마물의 배를 갈라버렸다.
‘촤악.’
마물의 피가 서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몸으로 전장을 향해 전진하는 서린.
그 모습을 본 황태자는 한 번 더 혀를 찼다.
커다란 헬바르크의 포효가 에르딘 근처에서 들려왔다.
서린은 마물을 하나씩 처리하며 에르딘에게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딘의 오른다리에는 누가 봐도 보스급으로 보이는 거대한 헬바르크가 매달려 있었다.
서린은 다급히 달려가 그것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하지만 이빨이 깊게 박혀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체를 처리할 시간도 없이 헬바르크 떼가 다시 덤벼들었다.
에르딘은 슬쩍 서린을 바라본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헬바르크를 베어 넘겼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물 떼.
결국 먼저 지친 것은 서린이었다.
“공작님, 이제 피하시죠?”
공작은 다리에 매달린 보스급 헬바르크를 내려다보며 짧게 대답했다.
“그러지. 어디로?”
“아무 데나 뛰세요!”
서린이 힘들어서 버럭 소리쳤다.
에르딘은 지체 없이 숲속을 향해 뛰어들어 갔다. 그 사이 다리에 매달려 있던 마물의 시체가 떨어져 나갔다.
서린은 빠르게 달리는 에르딘을 죽을힘을 다해 쫓느라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그들의 눈앞에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뒤에는 헬바르크 떼가 쫓아오고, 앞에는 폭포가 흐르는 계곡.
‘이건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 아니냐고!’
“하하. 공작님, 저 믿고 뛰어내리시죠?”
서린이 신뢰의 눈빛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내가 그대의 무엇을 믿어야 하지?”
공작은 불신 어린 눈빛으로 되물었다.
서린은 서슴없이 공작을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며 외쳤다.
“닥치고 뛰어요! 주인공은 이런 데서 안 죽어!”
‘나는 주인공이 아닌데 괜찮을까?’
잠깐 고민한 서린은 안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곧바로 공작에게 리어 네이키드 초크를 걸었다.
공작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짧은 찰나였지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낀 서린이 다급히 소리쳤다.
“미안한데, 저도 살아야 돼서요!”
물속으로 떨어진 서린은 생각했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분명 운동이 끝나고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골목에서 학교폭력으로 보이는 학생을 구해준 것이 문제였을까?
껄렁거리는 학생 몇 명을 잽과 어퍼, 미들킥으로 참교육해 주고 어린 학생을 구해줬다.
그리고 그 학생이 떨어뜨린 『검은 장미의 가시』라는 책을 집어 든 순간.
그 책을 당장 버리고 왔어야 했다.
책을 책상 위에 툭 올려놓고 씻은 뒤 머리를 말렸다.
그때.
책이 자신을 읽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책만 펼치면 몇 초 안에 잠들 자신이 있었기에 별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
그곳에는 에르딘과 노엘, 세레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와, 완전 집착 피폐 흑막 쓰레기 남자주인공이네.”
온갖 가스라이팅과 플러팅으로 세레나를 흔들어 놓고, 이용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에르딘.
그것이 서린의 첫 감상이었다.
오랜 친우인 노엘이 놀러 오고, 세레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두 사람은 일주일 뒤 호수로 산책을 가기로 약속했다.
노엘은 세레나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세레나는 그런 노엘을 보며 무언가를 결심한다.
“공작님이 없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황태자님.”
“레이디의 뜻대로.”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끝까지 다 읽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더 이상 이서린이 아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창밖으로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눈부셔.’
서린은 꿈틀꿈틀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 근데 방 배치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귀찮은 서린은 '있다 생각할까?' 싶어 다시 자려는데, 누군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델리아! 빨리 일어나! 늦었어! 너 이번에도 늦으면 정말 큰일 난다구!”
‘델리아……?’
“델리아! 세레나 님이 먼저 일어나셨다니까? 빨리 일어나!”
부스스 일어나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서린.
앞에 주근깨 가득한 단발머리의 메이드복 친구가 괴물 같은 힘으로 서린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너! 옷은 어디다 둔 거야? 오늘 세레나 님이 노엘 황태자님과 호수에 산책 가신다고 하셨단 말이야.”
그래서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 서린은 눈만 끔뻑이며 상황 파악에 나섰다.
세레나? 노엘? 어제 읽은 『검은 장미의 가시』 주인공들 이름 아닌가.
‘나 그럼 뭐 빙의한 거야? 메이드 같은 걸로?? 그러면 나 2권 안 읽어도 내용 알게 되는 거야??’
서린은 단순했다. 고민도 오래 하지 않는 편이다.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대책 없는 성격.
그녀의 기질은 이 복잡한 상황을 단박에 받아들였다. 이상함을 느끼기보다는 빠르게 현실을 인정하고 다음을 생각했다.
2권이 궁금했는데 잘됐다며 메이드복을 입었다.
눈앞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를 안으로 데려갔다.수많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그중 한곳에 눈이 멈췄다.메이드...델리아...그곳에 그녀가 있었다.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찾았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나는 지금 여기가 어딘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맸다.이 세상은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나는 그저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을 뿐이었다.어둑어둑해질 즈음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섰다.'이건 뭐, 떠돌이 용병만도 못하군.'그때 검은 옷을 차려입은 남자 대여섯 명이 나를 에워쌌다.“너희는 누구지?”“도련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보낸 사람들이죠.”말이 끝나자마자 주먹이 날아왔다.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대인전은 늘 몸풀기처럼 해왔던 운동에 가까웠으니까.숫자에 밀리지 않고 싸우던 중, 골목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저기요!!!!!”'델리아.......'아차.잠시 한눈을 판 사이 복부로 날카로운 열감이 밀려왔다.주르륵 밀려 벽에 쿵 부딪힌 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볼일을 마친 사내들은 재빨리 사라졌고, 델리아가 앞으로 달려왔다.“윤시후 씨!!!!!!!”다급히 이름을 외치던 그녀는 별안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에르딘.......?”나는 진심으로 놀라 델리아를 마주했다.너도 나를 알아봤어?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쿨럭.델리아가 발로 칼을 눌러 비틀었다.그래, 맞다.내가 네 가슴을 찔렀지.세레나 앞에서 잔인하게 시체처럼 너를 내던졌지.네가 이럴 만도 해.이해는 하는데....... 용서는 못하지.내 눈이 초점을 잃어갔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공작저였다.‘어떻게 된 일이지.’침대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발을 옮겼다.그러다 마주친 델리아.고개를 푹 숙인 모습을 보니 죄인 같구나.혹시 그녀도 자신을 죽인 것을 기억하려나?죽은 저 메이드가 살아 있다면, 세레나도 살아 있는 거겠지.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나?나는 한 가지 실험을 해보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가지고 싶은 여자.세레나에 대한 에르딘의 감상이다.저 해맑음을, 저 순진함을, 저 깨끗한 영혼을 모조리 내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걸까.분명 호수에 그만한 마물이 나올 수는 없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마물을 유인한 것이 분명했다.세레나를 지키기 위해 전열에 나서 싸웠지만 결국 한 마리, 두 마리 이탈하는 놈이 생겼다.노엘을 마차 앞으로 보냈다. 그럼 다 죽어도 세레나만큼은 지키겠지.그런 계산 아래 에르딘은 홀로 전방을 지키고 있었다.헬바르크의 우두머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직 버틸 만했다.우두머리는 확실히 다른 개체보다 빨랐고,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순식간에 다가왔다.'콰직.'다리에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일었다.'우두머리급은 다르다 이건가.'그때 웬 메이드 하나가 헬바르크의 머리를 칼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는 바로 에르딘의 뒤에 섰다.소름이 쭈뼛 돋았다.'피를 뒤집어쓴 메이드라…….'메이드는 투박했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잘 처리해 나갔다.어디서 난 메이드지.손에는 찢은 옷을 말아 만든 듯한 천이 둘둘 감겨 있었다.메이드가 지쳐가는지 퇴각하자고 했다.“어디로?”“저기…… 그냥 일단 아무 방향으로 뛰실까요?”“그러지.”마차는 보이지 않고 우두머리도 여기서 죽었으니 최대한 마차에서 먼 곳으로 뛰었다.아마 놈들이 쫓아와도 우리를 쫓겠지.여기까지는 에르딘의 계산이 맞았다.그런데 이 미친 메이드가 감히 절벽에서 밀지를 않나, 이상한 소리를 하며 내 목을 조르고 함께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와중에도 살기가 피어올랐다.내가 깨어나면 저 메이드부터 죽여버리겠다.그렇게 나는 물에 빠지자마자 정신을 잃었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바지 위로 누군가의 손이 올라와 있었다.“지금 뭐 하는 짓이지.”많은 여자를 봐왔지만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하지만 치료를 해야 한다며 덤덤하게 옷을 벗기는 메이드를 말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몸을 벗겨놓고는 불 피울 준
다음 날 아침.서린은 깨질 듯한 두통에 차디찬 방바닥에서 일어났다.‘어떻게 된 거지.’집에는 무사히 들어오긴 한 것 같은데.서린의 침대 위에는 그림 같은 자세로 에르딘이 자고 있었다.“아, 머리야.”화가 나야 되는데 머리가 아파서 아무 생각이 안 났다.몸도 너무 아팠다.밤새 누가 서린을 때린 것 같았다. 서린이 의심의 눈초리로 에르딘을 흘겨보았다.서린은 침대위로 올라가 몸을 쑤욱 밀어 넣어 에르딘을 떨어뜨리려고했다.“내 침대라고…….”그리고 에르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서린이 침대를 포기하고 차디찬 바닥에서 몸을 공벌레처럼 말고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너무 많이 마셔서 필름이 통째로 날아갔다. “나 어제 어떻게 왔지?”그때 불현듯 누군가에게 업힌 서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설마.죽은 듯 자고 있던 에르딘이 어느 순간 옆으로 누워 서린을 바라보고 있었다.‘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아.이불이 에르딘한테 있어서 이불킥도 못 하는 서린이였다.“내가 어제…. 혹시….”“취해서 내가 업고 왔다.”“아악…. 고, 고마워?”“됐다. 술 작작 처먹어라.”이렇게 내 업보를 돌려받는다고?인정하겠다.어제의 서린은 개서린이었겠지…….“라면 먹을 거지?”민망해진 서린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오늘은 어제 산 밥그릇이 있어서 둘 다 그릇에 식사할 수 있었다.문제는 이제 먹을 게 없었다.더 문제는 이제 돈도 없었다.오늘 어떻게 해서든 윤시후가 누군지 찾고 아르바이트도 구해야 하는 빡센 하루가 보였다.어제보다 오늘 좀 더 빠르게 라면을 먹은 에르딘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야. 오늘은 네가 치우고 설거지해. 어제 내가 했잖아. 나 머리가 너무 아파.”“어제 내가 너 업고 왔는데?”“야… 그건 그거고 설거지는….”“어제 너 물도 내가 먹여줬는데?”“그래, 그럼 내가 할게.”저 얄미운 공작 자식!지은 죄가 많아서 서린은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상을 치웠다.머
머리를 양손으로 헝클이며 내적으로 비명을 지르는 서린을 보며 에르딘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제 씻지도 못하고 잠든 상태라 꿉꿉해서 어디 나갈 수도 없었다.씻자니 에르딘이 방에 있는 게 신경 쓰였다.‘에르딘은 왜 뽀송뽀송한 거지. 나는 절어 있는데?’세상이 급 불공평하게 느껴졌다.잘생긴 놈한테만 더욱더 잘생김을 주는 세상.“에르…… 아니, 시후야. 나 씻고 올 테니까 기다려.”침대에 앉아 있던 에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서린은 최대한 재빠르게 촤아아, 촤아아 씻었다.들고 들어간 옷이 습기에 들러붙어 잘 들어가지 않았다.긴 머리는 말리지도 못하고 수건으로 돌돌 말아 나왔다.‘옷을 입고 나와야 해서 불편하네.’“시후, 너도 대충 씻어. 어제 못 씻었잖아.”“거절하지.”에르딘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서린은 당황스러웠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안 꿉꿉한가?’표정이 심상치 않았다.뭔가 이유가 있겠지.이제 생필품도 사야 하고 학교도 가야 했다.“잠깐.”서린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내 돈으로 다 하는 거야??”지금 두 명의 생활비를 혼자서?망했다.알바도 알아봐야 할 것 같다.에르딘도 내가 나타났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부자니까 별로 상관없었으려나?서린은 벌써부터 등골이 휘는 것 같았다.“일단 생필품 좀 사러 나가자. 너 물건이 하나도 없으니까! 일단 내가 돈을 꿔줄게.”에르딘의 눈이 가늘어졌다.“내 저택에서는 공짜로 뭘 안 썼나 보군?”은근한 살기에 서린이 움찔했다.“알았어. 사 줄게.”좀팽이 자식.어떻게 알았지?너한테 죽느라 얼마 못 쓰긴 했지만 네 거 쓰긴 했다.밥도 먹고, 잠도 자고.‘내가 상도덕이 있어서 갚는 줄 알아라.’서린은 입을 삐죽이며 신발을 신고 나가려 했다.침대에서 쑥 일어난 에르딘도 교양 있는 몸짓으로 운동화를 신었다.“이걸 교양 없애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나……. 원룸에서 저러니까 인지부조화 오네.”서린은 에르딘을 데리고 모든 걸 다 판다는 그곳으로 향해 쇼핑을 시작했다.장바구
서린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게슴츠레 눈을 뜨니 당황한 듯한 에르딘이 보였다.“에르딘! 너!”“이서린. 이곳은 어디지? 날 어디로 데리고 온 것이냐?”심각한 표정으로 서린의 어깨를 붙잡고 묻는 에르딘은 꽤나 혼란스러워 보였다.“잠깐! 멈춰 봐. 여긴 내 집이야. 어제 네가 너무 취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다구.”그제야 짤랑짤랑 서린을 흔들던 에르딘이 멈췄다.“집이라고? 이 작은 곳은 업무를 보는 곳이냐?”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니.설마 저택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저러는 거?“아니, 여기서 먹고 씻고 자고 다 하는데? 한국은 물가가 비싸.”“설마 너는 여기서도 신분이 하찮은 거냐?”저런, 같은 말을 해도 더 얄미운 놈 같으니.“보통 대학생은 다 이런 데서 산단다. 나도 좀 묻자. 너 왜 안 죽고 내 옆에 돌아다녀?”“……말을 해 줘야 하나?”“나는 묻는 거 다 말해 줬는데?”“…….”에르딘은 침묵했다.그래. 네 속을 다 말해 주면 네가 에르딘 카이덴이 아니지. 다른 사람이지.저 머릿속에 또 생각이 얼마나 팽팽 돌아가고 있을까.서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에르딘을 지나쳐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흠칫 놀란 에르딘이 경계하는 낯으로 서린을 쳐다봤다.“아니, 나 물 좀 마시려고…… 너…… 너도 줘?”“됐다. 뭘 탔을 줄 알고.”듣다 보니까 화나네?나는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지 술 먹은 거 개고생해서 여기까지 끌고 와 재워 주기까지 했는데.고맙다는 말은 기대도 안 했지만, 아주 태도가 뻔뻔하기 그지없네.서린은 생수 하나를 따서 벌컥벌컥 마신 뒤, 마시던 물병을 그대로 내밀었다.“자. 독 없지? 마셔. 어제 술 많이 먹어서 갈증 날 텐데?”“감히 네가 입에 댔던 것을 누구에게 주는 거지?”에르딘의 끊임없는 으르렁거림에 결국 서린의 뚜껑이 열렸다.‘남의 집에 와서 지금 공작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서린은 성큼성큼 다가가 순간적인 완력과 기술로 에르딘의 머리채를 잡아 내리고 입에 물병을
‘하핫. 재현 선배, 아직 전 말도 못 꺼냈어요.’에르딘의 시선이 서린의 어깨 위에 얹힌 재현의 손에 집요하게 꽂혀 있었다.매운 걸 먹어서 화가 난 눈치였다.“할 말 있다며, 남자 대 여자로.”‘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니? 이 수많은 여자들 앞에서?’일부러 그러는 거지?서린은 땀이 또르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아니, 야. 남자 대 여자도 친구로 잘 지내 보자는 말이지. 뭘 그렇게 정색하냐. 하하하하하.”에르딘은 말없이 서린을 쳐다보기만 했다.서로가 서로에게 경계의 대상이니 이상하게 볼 만도 했다.“그래. 시후도 왔으니까 다 같이 잘 지내 보자. 내가 계산했으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돼.”나이스 타이밍, 재현 선배.서린은 조용히 선배를 향해 ‘고마워요.’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에르딘과 둘이 있어야 뭐라도 대화를 할 텐데, 그의 주변으로 사람이 들끓었다.그래. 너 잘생겼다.그 얼굴로 욕을 한들 안 좋아할 여자들이 있겠니?타이밍을 보며 삐죽삐죽 음식을 먹고 있는데, 다들 2차를 가자고 했다.얼떨결에 2차 술집으로 끌려온 서린은 근손실 때문에 안주만 깨작였다.곧이어 재현 선배가 서린의 옆으로 쑥 들어왔다.“서린아, 술 안 마셔서 재미없지?”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거대 멍뭉이 같았다.‘좀 취하신 듯하군.’인기 스타라 여기저기서 술을 권한 듯했다.“아니에요. 재밌어요!”“있잖아. 잠깐 바람 좀 쐬러 나갈까?”“앗. 넵!”에르딘은 여전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서린은 잠시 나갔다 와도 될 듯해 재현 선배와 함께 일어났다.재현 선배는 가게 옆 골목에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하아. 오늘 좀 취하네. 서린아, 나 줄곧 너한테 할 말 있었는데…….”꿀꺽.무슨 소리를 하시려고.‘네가 토했던 신발 비싼 거야? 고백 공격은 너무했어? 나대지 마?’찔리는 게 너무 많았다.“술 먹고 실수한 걸로 나…… 피하지 마. 친하게 지내고 싶어, 서린아…….”“네?”“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하하.”쑥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