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검은 어디서 배운 거야?”
곤란한 질문부터 해 대는 세레나였다.
“이게 죽을 때가 되니까 전생에 검을 잡던 기억이 팟! 하고 떠올랐어요!”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우와, 그러면 전생에 검사였던 거네?”
이걸 속네.
“공작님이랑은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절벽에서 둘이 같이 떨어졌는데 살아서 몸을 숨겼다가 마을까지 걸어갔어요.”
진실을 말했다.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살았다고? 거짓말!”
이건 안 믿네.
“정말이에요. 공작님 상처가 심해서 죽을 뻔하셨어요. 치유술 받은 지 하루 만에 황성에 날아온 거예요.”
세레나의 눈빛이 급격히 어둡게 가라앉았다.
“에르딘 카이덴…… 그래도 나 결심했어. 그에게서 벗어날 거야.”
“정말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그가 준 건 사랑이 아닌 것 같아. 델리아는 사랑을 해 봤어?”
“아뇨.”
사랑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두근거려 본 적은 있지.
하지만 세레나는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조용히 서린의 눈만 쳐다보았다.
아마도 이곳에서 그녀 나름대로 커다란 일을 겪었겠지.
서린도 조용히 세레나의 눈을 바라보다 시익 웃어넘겼다.
“이제 그만 자도록 할까요? 저, 하루 종일 말 탔더니 엉덩이가 깨질 것 같아요.”
“그래, 그래. 델리아 너는 내가 꼭 데리고 올 거야.”
제발 그렇게 해 주길 바랄게.
나도 에르딘은 진절머리 나거든.
오랜만에 푹신한 베개에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오전.
별채에 모인 에르딘, 세레나, 델리아, 노엘 네 사람 사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에르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작저로 돌아가지, 세레나.”
“아뇨. 저는 더 이상 공작저로 가지 않아요.”
세레나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왜지? 네가 좋아하는 델리아를 내가 데리고 있어도?”
세레나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노엘이 세레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지 말라는 무언의 응원 같았다.
공작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압박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눈이 세레나의 어깨에 얹힌 노엘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델리아도 저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파셨으면 좋겠어요.”
“세레나, 이러는 거 설마 노엘 저 새끼 때문이야?…….”
듣다못한 노엘이 한마디 거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원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한마디로 델리아도 내놓고 너도 꺼져라, 이런 말이 되겠다.
세레나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책으로 읽어서 아는 서린이었다.
충격받은 듯한 에르딘의 모습을 봐도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세레나,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황궁에 머물 거야?”
그는 경고하듯 최대한 낮은 음성으로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델리아, 너도 따라갈 생각인 거지?”
‘내 생각? 내 생각은 왜 물어보는데. 당연한 거 아냐? 정상인이랑 살아야지!’
서린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네…….”
“알았어.”
에르딘은 순순히 알겠다며 서린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지만, 공작이 조금 사람다워진 것일까?
이 불안한 위화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공작이 순순히 세레나를 포기할 것 같지 않은데.
서린은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 정말 고마워, 에르딘. 나는 끝까지 반대할 줄 알았어. 정말 너무 고마워.”
세레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공작저를 나오기를 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노엘을 한 번 바라본 세레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 냈다.
에르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의 시선이 노엘에서 세레나로, 그리고 델리아에게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붉은 눈동자에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섬뜩한 이질감에 내가 미처 침을 삼키기도 전에, 서늘한 쇠붙이가 허공을 갈랐다.
에르딘이 재빨리 칼을 뽑아 서린의 가슴을 찔렀다.
푹.
검이 새빨간 피를 머금으며 천천히 서린의 가슴에서 빠져나왔다.
서린의 눈에는 그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리게 보였다. 허물어지는 몸으로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을 허무하게 바라봤다.
“자, 여기 시체라도 가져가.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시체로 가져다줄 테니. 여기서 기다려 줘.”
마음대로 안 되면 남이 좋아하는 것부터 부숴 버리는 저 미친, 사이코, 악마, 변태, 나쁜 새끼.
가슴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세레나와 노엘이 무너지는 서린의 상반신을 황급히 받쳐 들었다.
가슴에는 불에 덴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보다 더한 것은, 그래도 며칠간 쌓였던 유대감이 한순간에 박살 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우리 같이 살려고 좀 열심히 하지 않았었어?’
서린은 원망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에르딘을 바라봤다.
살려 준 보람도 없이 사람 죽이는 놈을 살렸네.
마지막으로 원망과 분노를 담아 한마디라도 해 주고 죽겠다.
“넌 절대 세레나…… 못 가져, 병신아. 비참한 최후나 먹어라. 뻐큐.”
가운데 손가락 두 개를 날리자 서린의 시야가 천천히 닫혔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에르딘의 얼굴이 두 눈에 담겼다.
이서린 인생, 짧고 굵었다.
……어라?
왜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거지?
이서린은 눈을 번쩍 떴다.
“뻐큐!!!!!!!”
이서린의 방이었다.
현실로 돌아왔다.
서린은 가장 먼저 가슴부터 내려다보았다. 울컥울컥 흘러나오던 붉은 피는 보이지 않았다.
멀쩡한 가슴에서 여전히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핸드폰…….
핸드폰이 어디 있지?
서린은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에 뜬 날짜를 확인하고 그대로 굳었다.
책을 읽었던 날보다 일주일 전이었다.
이런 미친.
책 이름이 뭐였지.
검은…… 검은 장미의 가시?
서린은 재빨리 핸드폰으로 『검은 장미의 가시』라는 책을 찾아보았다.
없다.
온갖 검색 사이트에 검은 장미, 검은 장미의 가시, 장미의 가시까지 다 쳐 봐도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뒤에 나오는 책이라든가 그런 건가?
일주일 뒤에 다시 알아봐야겠다.
일단 피비린내 나는 세계에서 빠져나와서 그런지 갑자기 기운이 달렸다. 서린은 침대에 풀썩 누워 오늘 무엇을 했던가 생각했다.
오늘이 월요일이면 10시 수업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경호학 실무였나?
누구 경호하는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가지 말까.
아니다. 현생을 살아야지.
일단 빨리 머리부터 감고 준비하자.
잘은 못하지만 열심히는 하는 이서린이니까.
“안녕, 서린아?”
“안녕하세요, 재현 선배.”
아니, 이 수업을 원래 같이 들었었나?
그랬으면 이불킥 하면서 잠도 못 잤을 텐데, 엄청난 일들을 겪어서 그런지 과거의 일이 엄청난 사고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서글서글한 순둥이처럼 생겨서는 키가 188이나 되는 피지컬 깡패, 김재현 선배.
경호학과 최고의 인기남이자 단연 수석. 훌륭한 인품에 모자람 없는 재력까지.
사뭇 한국대의 모든 여성이 마음에 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남자다.
나 역시 개강 파티 때 술을 잔뜩 먹고 고백 공격을 하다가 선배 신발에 토하지만 않았어도…… 아직 좋아했을걸?
지금은 그저 피해야 하는 대상 1호일 뿐.
그런데 선배, 왜 제 옆자리에 앉으시나요.
정말 불편하네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출석 부르고 경호학 실무 평가를 진행하도록 할게요.”
눈앞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를 안으로 데려갔다.수많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그중 한곳에 눈이 멈췄다.메이드...델리아...그곳에 그녀가 있었다.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찾았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나는 지금 여기가 어딘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맸다.이 세상은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나는 그저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을 뿐이었다.어둑어둑해질 즈음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섰다.'이건 뭐, 떠돌이 용병만도 못하군.'그때 검은 옷을 차려입은 남자 대여섯 명이 나를 에워쌌다.“너희는 누구지?”“도련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보낸 사람들이죠.”말이 끝나자마자 주먹이 날아왔다.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대인전은 늘 몸풀기처럼 해왔던 운동에 가까웠으니까.숫자에 밀리지 않고 싸우던 중, 골목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저기요!!!!!”'델리아.......'아차.잠시 한눈을 판 사이 복부로 날카로운 열감이 밀려왔다.주르륵 밀려 벽에 쿵 부딪힌 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볼일을 마친 사내들은 재빨리 사라졌고, 델리아가 앞으로 달려왔다.“윤시후 씨!!!!!!!”다급히 이름을 외치던 그녀는 별안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에르딘.......?”나는 진심으로 놀라 델리아를 마주했다.너도 나를 알아봤어?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쿨럭.델리아가 발로 칼을 눌러 비틀었다.그래, 맞다.내가 네 가슴을 찔렀지.세레나 앞에서 잔인하게 시체처럼 너를 내던졌지.네가 이럴 만도 해.이해는 하는데....... 용서는 못하지.내 눈이 초점을 잃어갔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공작저였다.‘어떻게 된 일이지.’침대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발을 옮겼다.그러다 마주친 델리아.고개를 푹 숙인 모습을 보니 죄인 같구나.혹시 그녀도 자신을 죽인 것을 기억하려나?죽은 저 메이드가 살아 있다면, 세레나도 살아 있는 거겠지.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나?나는 한 가지 실험을 해보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가지고 싶은 여자.세레나에 대한 에르딘의 감상이다.저 해맑음을, 저 순진함을, 저 깨끗한 영혼을 모조리 내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걸까.분명 호수에 그만한 마물이 나올 수는 없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마물을 유인한 것이 분명했다.세레나를 지키기 위해 전열에 나서 싸웠지만 결국 한 마리, 두 마리 이탈하는 놈이 생겼다.노엘을 마차 앞으로 보냈다. 그럼 다 죽어도 세레나만큼은 지키겠지.그런 계산 아래 에르딘은 홀로 전방을 지키고 있었다.헬바르크의 우두머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직 버틸 만했다.우두머리는 확실히 다른 개체보다 빨랐고,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순식간에 다가왔다.'콰직.'다리에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일었다.'우두머리급은 다르다 이건가.'그때 웬 메이드 하나가 헬바르크의 머리를 칼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는 바로 에르딘의 뒤에 섰다.소름이 쭈뼛 돋았다.'피를 뒤집어쓴 메이드라…….'메이드는 투박했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잘 처리해 나갔다.어디서 난 메이드지.손에는 찢은 옷을 말아 만든 듯한 천이 둘둘 감겨 있었다.메이드가 지쳐가는지 퇴각하자고 했다.“어디로?”“저기…… 그냥 일단 아무 방향으로 뛰실까요?”“그러지.”마차는 보이지 않고 우두머리도 여기서 죽었으니 최대한 마차에서 먼 곳으로 뛰었다.아마 놈들이 쫓아와도 우리를 쫓겠지.여기까지는 에르딘의 계산이 맞았다.그런데 이 미친 메이드가 감히 절벽에서 밀지를 않나, 이상한 소리를 하며 내 목을 조르고 함께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와중에도 살기가 피어올랐다.내가 깨어나면 저 메이드부터 죽여버리겠다.그렇게 나는 물에 빠지자마자 정신을 잃었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바지 위로 누군가의 손이 올라와 있었다.“지금 뭐 하는 짓이지.”많은 여자를 봐왔지만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하지만 치료를 해야 한다며 덤덤하게 옷을 벗기는 메이드를 말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몸을 벗겨놓고는 불 피울 준
다음 날 아침.서린은 깨질 듯한 두통에 차디찬 방바닥에서 일어났다.‘어떻게 된 거지.’집에는 무사히 들어오긴 한 것 같은데.서린의 침대 위에는 그림 같은 자세로 에르딘이 자고 있었다.“아, 머리야.”화가 나야 되는데 머리가 아파서 아무 생각이 안 났다.몸도 너무 아팠다.밤새 누가 서린을 때린 것 같았다. 서린이 의심의 눈초리로 에르딘을 흘겨보았다.서린은 침대위로 올라가 몸을 쑤욱 밀어 넣어 에르딘을 떨어뜨리려고했다.“내 침대라고…….”그리고 에르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서린이 침대를 포기하고 차디찬 바닥에서 몸을 공벌레처럼 말고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너무 많이 마셔서 필름이 통째로 날아갔다. “나 어제 어떻게 왔지?”그때 불현듯 누군가에게 업힌 서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설마.죽은 듯 자고 있던 에르딘이 어느 순간 옆으로 누워 서린을 바라보고 있었다.‘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아.이불이 에르딘한테 있어서 이불킥도 못 하는 서린이였다.“내가 어제…. 혹시….”“취해서 내가 업고 왔다.”“아악…. 고, 고마워?”“됐다. 술 작작 처먹어라.”이렇게 내 업보를 돌려받는다고?인정하겠다.어제의 서린은 개서린이었겠지…….“라면 먹을 거지?”민망해진 서린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오늘은 어제 산 밥그릇이 있어서 둘 다 그릇에 식사할 수 있었다.문제는 이제 먹을 게 없었다.더 문제는 이제 돈도 없었다.오늘 어떻게 해서든 윤시후가 누군지 찾고 아르바이트도 구해야 하는 빡센 하루가 보였다.어제보다 오늘 좀 더 빠르게 라면을 먹은 에르딘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야. 오늘은 네가 치우고 설거지해. 어제 내가 했잖아. 나 머리가 너무 아파.”“어제 내가 너 업고 왔는데?”“야… 그건 그거고 설거지는….”“어제 너 물도 내가 먹여줬는데?”“그래, 그럼 내가 할게.”저 얄미운 공작 자식!지은 죄가 많아서 서린은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상을 치웠다.머
머리를 양손으로 헝클이며 내적으로 비명을 지르는 서린을 보며 에르딘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제 씻지도 못하고 잠든 상태라 꿉꿉해서 어디 나갈 수도 없었다.씻자니 에르딘이 방에 있는 게 신경 쓰였다.‘에르딘은 왜 뽀송뽀송한 거지. 나는 절어 있는데?’세상이 급 불공평하게 느껴졌다.잘생긴 놈한테만 더욱더 잘생김을 주는 세상.“에르…… 아니, 시후야. 나 씻고 올 테니까 기다려.”침대에 앉아 있던 에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서린은 최대한 재빠르게 촤아아, 촤아아 씻었다.들고 들어간 옷이 습기에 들러붙어 잘 들어가지 않았다.긴 머리는 말리지도 못하고 수건으로 돌돌 말아 나왔다.‘옷을 입고 나와야 해서 불편하네.’“시후, 너도 대충 씻어. 어제 못 씻었잖아.”“거절하지.”에르딘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서린은 당황스러웠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안 꿉꿉한가?’표정이 심상치 않았다.뭔가 이유가 있겠지.이제 생필품도 사야 하고 학교도 가야 했다.“잠깐.”서린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내 돈으로 다 하는 거야??”지금 두 명의 생활비를 혼자서?망했다.알바도 알아봐야 할 것 같다.에르딘도 내가 나타났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부자니까 별로 상관없었으려나?서린은 벌써부터 등골이 휘는 것 같았다.“일단 생필품 좀 사러 나가자. 너 물건이 하나도 없으니까! 일단 내가 돈을 꿔줄게.”에르딘의 눈이 가늘어졌다.“내 저택에서는 공짜로 뭘 안 썼나 보군?”은근한 살기에 서린이 움찔했다.“알았어. 사 줄게.”좀팽이 자식.어떻게 알았지?너한테 죽느라 얼마 못 쓰긴 했지만 네 거 쓰긴 했다.밥도 먹고, 잠도 자고.‘내가 상도덕이 있어서 갚는 줄 알아라.’서린은 입을 삐죽이며 신발을 신고 나가려 했다.침대에서 쑥 일어난 에르딘도 교양 있는 몸짓으로 운동화를 신었다.“이걸 교양 없애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나……. 원룸에서 저러니까 인지부조화 오네.”서린은 에르딘을 데리고 모든 걸 다 판다는 그곳으로 향해 쇼핑을 시작했다.장바구
서린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게슴츠레 눈을 뜨니 당황한 듯한 에르딘이 보였다.“에르딘! 너!”“이서린. 이곳은 어디지? 날 어디로 데리고 온 것이냐?”심각한 표정으로 서린의 어깨를 붙잡고 묻는 에르딘은 꽤나 혼란스러워 보였다.“잠깐! 멈춰 봐. 여긴 내 집이야. 어제 네가 너무 취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다구.”그제야 짤랑짤랑 서린을 흔들던 에르딘이 멈췄다.“집이라고? 이 작은 곳은 업무를 보는 곳이냐?”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니.설마 저택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저러는 거?“아니, 여기서 먹고 씻고 자고 다 하는데? 한국은 물가가 비싸.”“설마 너는 여기서도 신분이 하찮은 거냐?”저런, 같은 말을 해도 더 얄미운 놈 같으니.“보통 대학생은 다 이런 데서 산단다. 나도 좀 묻자. 너 왜 안 죽고 내 옆에 돌아다녀?”“……말을 해 줘야 하나?”“나는 묻는 거 다 말해 줬는데?”“…….”에르딘은 침묵했다.그래. 네 속을 다 말해 주면 네가 에르딘 카이덴이 아니지. 다른 사람이지.저 머릿속에 또 생각이 얼마나 팽팽 돌아가고 있을까.서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에르딘을 지나쳐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흠칫 놀란 에르딘이 경계하는 낯으로 서린을 쳐다봤다.“아니, 나 물 좀 마시려고…… 너…… 너도 줘?”“됐다. 뭘 탔을 줄 알고.”듣다 보니까 화나네?나는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지 술 먹은 거 개고생해서 여기까지 끌고 와 재워 주기까지 했는데.고맙다는 말은 기대도 안 했지만, 아주 태도가 뻔뻔하기 그지없네.서린은 생수 하나를 따서 벌컥벌컥 마신 뒤, 마시던 물병을 그대로 내밀었다.“자. 독 없지? 마셔. 어제 술 많이 먹어서 갈증 날 텐데?”“감히 네가 입에 댔던 것을 누구에게 주는 거지?”에르딘의 끊임없는 으르렁거림에 결국 서린의 뚜껑이 열렸다.‘남의 집에 와서 지금 공작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서린은 성큼성큼 다가가 순간적인 완력과 기술로 에르딘의 머리채를 잡아 내리고 입에 물병을
‘하핫. 재현 선배, 아직 전 말도 못 꺼냈어요.’에르딘의 시선이 서린의 어깨 위에 얹힌 재현의 손에 집요하게 꽂혀 있었다.매운 걸 먹어서 화가 난 눈치였다.“할 말 있다며, 남자 대 여자로.”‘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니? 이 수많은 여자들 앞에서?’일부러 그러는 거지?서린은 땀이 또르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아니, 야. 남자 대 여자도 친구로 잘 지내 보자는 말이지. 뭘 그렇게 정색하냐. 하하하하하.”에르딘은 말없이 서린을 쳐다보기만 했다.서로가 서로에게 경계의 대상이니 이상하게 볼 만도 했다.“그래. 시후도 왔으니까 다 같이 잘 지내 보자. 내가 계산했으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돼.”나이스 타이밍, 재현 선배.서린은 조용히 선배를 향해 ‘고마워요.’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에르딘과 둘이 있어야 뭐라도 대화를 할 텐데, 그의 주변으로 사람이 들끓었다.그래. 너 잘생겼다.그 얼굴로 욕을 한들 안 좋아할 여자들이 있겠니?타이밍을 보며 삐죽삐죽 음식을 먹고 있는데, 다들 2차를 가자고 했다.얼떨결에 2차 술집으로 끌려온 서린은 근손실 때문에 안주만 깨작였다.곧이어 재현 선배가 서린의 옆으로 쑥 들어왔다.“서린아, 술 안 마셔서 재미없지?”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거대 멍뭉이 같았다.‘좀 취하신 듯하군.’인기 스타라 여기저기서 술을 권한 듯했다.“아니에요. 재밌어요!”“있잖아. 잠깐 바람 좀 쐬러 나갈까?”“앗. 넵!”에르딘은 여전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서린은 잠시 나갔다 와도 될 듯해 재현 선배와 함께 일어났다.재현 선배는 가게 옆 골목에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하아. 오늘 좀 취하네. 서린아, 나 줄곧 너한테 할 말 있었는데…….”꿀꺽.무슨 소리를 하시려고.‘네가 토했던 신발 비싼 거야? 고백 공격은 너무했어? 나대지 마?’찔리는 게 너무 많았다.“술 먹고 실수한 걸로 나…… 피하지 마. 친하게 지내고 싶어, 서린아…….”“네?”“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하하.”쑥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