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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해 볼까 해 - 겨울이 오고 있다.

Author: 운몽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2 23:48:43

"도윤아, 할미 왔다!"

여느 때처럼 도윤이 뽀르르 달려나와 자신을 반겨주리라 믿던 미연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당황했다.

"할미!"

늘 버선발로 달려나와 제 품에 쏙 안기는 도윤은 그대로였지만 바뀐 것이 있다.

수명을 잃어 깜빡이던 형광등, 사용한지 오래되어 이 나간 식기류, 계절을 신경쓰지 않고 늘 같았던  얇팍했던 이불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낡았던 것들이 치워지고, 모든 게 새롭고 예쁜 것들로 채워졌다.

"도윤아...이 할미가 꿈을 꾸고 있는거냐?"

"이거, 오늘 어떤 예쁜 누나가 와서 도윤이랑 같이 했어 할미!"

민지임이 틀림 없었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또 울려...진짜..."

민지에게 계속 신세만 지는 것 같아 미연은 마음 한 켠이 자꾸 아려왔다.

아무래도 미연의 인생에는 귀인이 두 명이나 생긴 것 같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미연은 살아갈 수 있다.

이 얼마나 감개무량한지 미연은 그렇게 또 도윤을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었다.

"자, 밥 먹자 내새끼"

어느순간부터 미연과 도윤의 밥상은 제법 그럴 듯 했다.

어느 날은 계란말이, 어느 날은 돈까스.

벌이가 넉넉하진 않아도 최선을 다해 도윤을 먹이고 싶었다.

사실  미연은 민지의 건물 청소 뿐만이 아니라 밤에는 산책겸 폐지까지 모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둘이 생활하기에 모자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도윤을 위하고 싶어 돈을 벌다보니, 도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지만, 때로는 이 사실이 무척 미안했다.

그래서인지, 시장에 다녀오게 되면 도윤에게 줄 간식은 하나씩 품에 안고 돌아왔다.

"할미 이건 뭐야? 처음 먹어 봐!"

"으응, 그건 핫도그라는 거야, 먹어 봐 내새끼. 할미가 사왔어."

"할미, 이거 봐라?"

핫도그를 미연에게 먼저 건네는 다정함을 배운 도윤은 갑자기 미연이 사준 스케치북을 당당히 펴 보였다.

'임미연'

너무나도 삐뚤빼뚤하게 적혀있어 어딘가 눈물 까지 나는 세 글자

"할미 이름 맞지? 도윤이가 썼어!"

제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도윤이 가장 먼저 쓰고 싶어했던 글자였다.

미연의 이름을 알기 전까지 도윤은 미연의 이름이 '할미' 인 줄 알았다.

이제서야 도윤은 온전히 미연을 받아들였다.

"할미, 사랑해!"

"오구 할미도 우리 도윤이 엄~청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할미가 그렇게 좋아?"

"응! 세상에서 제일 좋아!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는 말을, 이제서야 겨우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행복에서 포근한 빨간 털실같은 향이 난다면, 불행에선 어떤 향이 날까

가히, 그리고 감히 상상도 하지 못 할 향기가 나겠지.

그리고 그 잔인하게도 향은 갑자기 찾아온다.

"내가 오늘 장을 뭘 보려고 했더라....?"

요즘 미연의 고민은 도윤의 저녁밥이다.

뭘 차려주든 아기새마냥 잘 받아먹는 도윤이기에 더 많은 맛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맘 뿐이었다.

"분명 장 보려고 적은 메모를 여기다 뒀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도 미연의 메모는 온데간데 없었다.

"도윤이 할미 메모장 못 봤냐?"

도윤으로부터 답이 없다.

아무래도 곤히 잠든 모양이다.

"어머 시간 좀 봐, 민지씨네에 가야 해."

민지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 이거 너무 죄송해서 어쩌죠...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진짜 너무 죄송해요.미연씨"

민지를 본 미연은 불길을 예감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오랜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빌린 돈까지 흥청망청 다 쓴 뒤에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철민은 열리지 않는 도어락에 집주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집주인이 전화를 받자마자 철민은 대뜸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월세를 좀 밀릴 수도 있지, 갓난쟁이까지 있는 집을 이렇게 비밀번호까지 바꿔버리는 게 사람이 할 짓이에요?"

이럴 때에만 도윤은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쪽 어머니한테 못들었어요? 방 뺀지가 언젠데.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맘 고생 했는 줄 알어? 어디서 큰 소리야!"

집주인의 대답을 듣자마자 철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하루 아침에 집이 사라졌지 않은가.

그렇게 부동산으로 향하게 됐고 우연히 퇴근하는 미연의 뒷모습을 봤다.

미연이 천천히 멀어지자 부동산으로 어느때와 같이 우악스럽게 들어간 그는 소리쳤다.

"저 여편네한테 우리집 주소 알려준 게 당신네 들이야?"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발생했고 철민의 난동이 민지의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행히 철민은 거액의 돈을 받는 대가로 아무런 법적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에 동의 후 고분고분 사라졌다는 게 그 내용이다.

"내가 죄인이에요, 민지씨. 곤란하게 만들어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화가 난 민지의 아버지는 당장 미연을 잘라버리라 명했고, 민지의 그 어떠한 말도 더 이상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민지야, 너가 인생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겠다.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거라."

아버지의 말에 민지는 더 이상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고 죽상인 얼굴로 미연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가 아버지께 오늘 다시 한 번 말씀 드려 볼게요. 분명 방법이"

처음이었다.

미연이 누군가의 말을 멈춘건.

"고마웠어요, 민지씨. 진짜 나는 평생 민지씨한테 이 은혜를 갚을 순 없겠지만..."

미연이 민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도 절대 잊지 않고 갚아나갈 거에요. 어떤 식으로든."

미연의 손은 떨렸지만 눈 만큼은 굳은 결의가 보였다.

마지막 근무를 끝내고 가겠다는 미연을 민지는 차마 말리지 못했다.

그저 미연에게 줄 두유를 손에 쥐고 그녀의 일하는 뒷모습만을 지켜볼 뿐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대단히 감사했고, 대단히 행복했습니다."

결국 미연의 목소리에 또 물기가 맺히고 말았다.

"왜 마지막인 거처럼 인사해요, 나한테 은혜 갚는댔으면서...나 평생 안 볼거에요?

결국 참고 있던 민지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당신을 만나 정말 다행이었어요. 민지씨, 나 지금 얼마나 행복한 지 몰라."

미연은 작은 쇼핑백 하나를 민지에게 내밀었다.

"우리 도윤이 주려고 뜨다가 너무 크게 떠버려서, 근데 문득 다 뜨고 나니 민지씨가 그렇게 생각나더라"

쇼핑백 안에는 포근해보이는 예쁜 빨간색 목도리가 하나 들어있었다.

"이게 뭐에요?"

"그게 제 행복이었어요. 민지씨 감기 조심하세요, 곧 날씨가 추워질 것 같아서요.진짜 고마웠어요."

민지는 더 이상 미연을 따라가지 않았고, 미연 또한 다시 뒤돌지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도착한 미연은 도윤에게 밥을 간신히 먹인 뒤 그대로 깊은 잠을 잤다.

도윤이 옆에서 쫑알 거리며 동화책을 자신에게 읽어주었지만,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검은 잉크에 빠진 것만 같았다.

매번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세상이 미친듯이 미웠지만, 미연은 얼마 못 가 그 사실마저도 잊고 말았다.

그들을 감싸고 있던 빨간 털실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어느새 그들의 주변에는 검은 넝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도윤만이 너무나 예쁘게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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