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도윤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세상에는 낯선 얼굴과 흐린 빛만이 가득했다.
도윤은 놀란 것도 잠시, 이윽고 자신의 뺨에 처음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에 잠자코 있었다.
이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
"오구 내새끼, 이제 일어난겨? 누굴 닮아 이리 예쁠꼬? '
미연은 행여 깨질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도윤의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차가웠던 도윤의 뺨은 어느새 사람의 온도를 만끽하고 있었다.
"할미~ 해 봐 응? 할미~ 내새끼 이름 좀 들어보자 할미가"
도윤의 뺨에 사람의 손길보다 더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아이구, 내새끼 왜 울어. 그 동안 많이 힘들었지? 응?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어."
이제서야 겨우 3살의 아이로 살 수 있게 된 도윤은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할...할미, 도윤...나는 권도윤..."
도윤은 광원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와 똑같은 감정, 몽글몽글한 햇살 같았다.
"아이구, 내새끼는 이름도 예쁘네! 내가 너 할머니야! 예쁜 내새끼!"
겨우 정신을 차린 도윤에 미연은 크게 한시름 놨다.
처음 만난 도윤의 몸상태는 너무 심각했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지나치게 가벼웠고, 지나치게 망가졌다.
"미안해 내새끼, 도윤이, 할미가 미안해. 할미가 나빴어, 응? 용서해주라..."
미연의 말은 어린 도윤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웠다.
그렇게 둘은 서로 부둥켜 한참을 눈물을 흘렸다.
도윤은 안도의 눈물을, 미연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속죄의 눈물을.
"내새끼, 배고프지? 얼른 밥 부터 먹자."
정신을 잃은 도윤을 처음 봤을 때, 미연은 한참동안이나 그 어린 몸을 껴안고 넋이 나가 있었다.
모두 다 본인의 잘못 같이 느껴졌다.
어느덧, 아침에 나온 미연이 해가 져 뉘엿뉘엿 해 질때까지, 가만히 있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머, 또 내 정신 좀 봐. 이럴 시간이 어딨어 내가"
언제 흘렀는지 모를 눈물이 미연의 웃옷을 푹 적신 채였다.
마른 세수를 연거푸 하던 미연은 소중히 도윤을 다시 바르게 눕혀두곤 옷장으로 향했다.
낡은 남성의 옷만 가득했다.
자신의 아들, 철민의 것이리라.
옷들에선 퀘퀘한 냄새들만이 가득했고 옷 주머니를 하나씩 뒤져보던 미연은 형원의 지갑을 찾아냈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현실이 된다는 건 꽤나 씁쓸했다.
도윤 다음으로 소중히 챙겨두곤 이어 화려한 여자의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도윤의 옷으로 추정되는 옷을 겨우 두 벌 발견 했다.
상의 하나, 하의 하나.
미연은 그동안 도윤이 겪었을 현실이 너무나 안쓰러워 또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아내고는 그 두 벌의 옷을 챙겼다.
도윤을 허리 아픈지도 모르고 업고 집으로 돌아온 미연은 자신의 자리를 먼저 내어주고 형원의 집으로 향했다.
지갑을 돌려주면서 미연은 다시 한 번 더 자존심을 잃어야했다.
"형원 엄마 미안했어. 철민이 옷에서 형원이 지갑은 찾았어요.내가...철민이는 못 찾았지만..."
잽싸게 미연의 손에서 형원의 지갑을 채간 형원의 엄마는 행여 생채기가 난 곳은 없는지 살폈다.
"...때는 좀 탔네. 내가 이걸 어떤 돈으로 사준건데, 빌려간 돈이나 갚아요 이제, 150 이나 빌려갔어. 철민이가. 갚을거지? 엄마잖아"
미연의 머리 속에 집 주인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니까.
미연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통장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죽고 싶었지만 자신에겐 다시 살아야 할 소중한 이유가 생겼다.
내새끼.
이름 모를 이 예쁜 것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통장을 내려두고 큰 결심을 한 미연은 도윤이 일어날 때까지 한참을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행여 본인 손길에 작은 아이가 깨질까, 그 손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보다도 떨렸으리.
이윽고 그 큰 눈이 자신을 담았을 때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운 도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따뜻한 밥 이라는 것을 먹었다.
처음 만난 도윤을 위해 미연은 도윤이 잠들어있는 동안 오랜만에 부랴부랴 장을 봤다.
본인이 아닌 남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햄 몇조각과 신김치로 끓인 맑은 김칫국.
다행히 도윤은 아기새처럼 잘 받아먹었다.
"할미! 맛...맛...맛..."
"맛있어 내새끼?"
"맛있어!"
부모로부터 모진 학대와 폭행만을 받아온 도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이 진행이 되었을리가 없다.
그 날 장을 보고 돌아오던 미연의 눈에 왠지 모르게 작은 서점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 서점에 들어가, 자신의 양말 한 켤레 사는 데도 한참을 망설이던 미연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책 여러권과 연필을 사서 나왔다.
도윤에게 가르칠 한글책과 읽어 줄 동화책.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의 아쉬움이 아닌 돈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나던 그들의 집에서는 처음으로 웃음소리와 어린 아이가 한글을 배우는 소리만 가득했다.
이후 미연의 삶은 제법 바빠졌다.
"도윤이, 집 문 꼬옥 잘 잠그고 있거라잉? 할미 다녀올게?"
그 동안 간신히 모아둔 돈으로 철민의 월세도, 형원의 돈도 갚고나니 돈이 필요했다.
두가지의 문제를 해결한 미연은 마음만 급했다.
도윤에게 온 관심을 붓고 싶었고 뭐든 부족함 없이 키워내야만 했다.
"어어, 미연씨 왔어요?"
익숙한 환경, 미연은 자신을 도와줬던 부동산이 있는 건물 청소 담당을 하게 되었다.
미연의 소식을 전해들은 민지가 같이 고민하던 중, 미연을 위해 일자리를 기꺼이 만들어주었다.
"민지씨한테는 도움만 받네요 내가...고마워서 이 은혜를 어쩌면 좋을지..."
민지는 미연에게 찡긋 윙크를 하더니 미연의 손에 따뜻한 두유 한 잔을 쥐여주었다.
"저는 미연씨가 이렇게 열심히 일 하시는게 참 멋져요, 최근 좋은 일이 많이 생기고 계시네요?"
"좋은 일은 많이 생기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나 몰라."
민지의 따스한 마음에 미연은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리저리 일자리를 수소문하고 있는 할머니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게 미연일 줄은 민지는 꿈에도 몰랐다.
뭔가 사정이 생긴 그녀를 도와야만 할 것 같았다.
놀랍게도 민지는 건물주의 딸이었고,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 미연의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였다.
민지는 미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그리고 이번에도 하면 안 되는 일을 했다
미연의 계약서를 통해 미연의 집주소를 확인 한 그녀에겐 왜 인지 모를 즐거움이 엿보였다.
다행히 미연에게 일의 강도가 높진 않았지만 미연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자신의 하루가 보람으로 채워지고 있는 감정이 너무나 즐거웠다.
청소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미연은 건물의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어휴, 조금 쌀쌀해진 것 같은데, 내새끼 감기 걸리는 건 아닌가 몰라."
도윤에게 예쁜 목도리를 하나 짜 줄 생각이었다.
"내새끼 피부가 을매나 하얀지 몰라! 빨간색이 잘 어울릴 것 같어. 이 털실 좀 챙겨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행복에 눈에 보인다면 빨간 털실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시간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다.막노동 일터에서 간신히 일자리를 빌어 고된 노동도 해봤고, 노숙자의 쉼터에서 하루하루 버텨냈다.물론, 제 또래 친구들의 금품을 갈취하는 나쁜 행동도 서슴치 않고 해봤다.미연이 봤다면 속상해했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그렇게 도윤은 어느샌가 훌쩍 자라 있었다."눈을 어떻게 뜨고 다니는 거야!"목소리의 주인공은 남자, 그리고"죽고 싶어?"목에는 허름한 빨간 목도리가 둘러져 있는 도윤이었다."죽고 싶냐고?"길을 지나가다 어느 남자와 부딪힌 도윤이 남자의 대답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너, 사람은 죽여보고 하는 말이야 지금?"남자가 재차 질문해왔다.당황한 도윤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낯선 남자는 도윤의 목도리를 움켜잡았다."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도윤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도윤의 몸은 어릴 적 당했던 폭행의 기억을 떠올렸고 그대로 갇히고 말았다.그 순간, 도윤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남자를 밀치기 위해 들어올렸지만 한 발 늦었다.이미 도윤의 얼굴은 남자의 손에 의해 반쯤 돌아가 쓰러지고 말았다."뭣도 없는 게 허세만 가득해선, 좋게 보낼 때 가라."도윤은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어느샌가, 세상의 잔혹함 또한 배운 도윤은 주머니 속의 반짝이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칼이었다.그대로 도윤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지금 죽이면 되잖아!!!!!!"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남자는 그대로 뒤를 돌아 도윤을 그대로 엎어쳐 날려버렸다."으윽..."칼을 그대로 놓쳐버린 도윤이 쓰러져 신음할 때, 남자는 칼을 쥐어들고 도윤의 위로 올라왔다."넌 사람 못 죽여."남자는 손쉽게 도윤을 제압한 후 도윤의 목에 칼 끝을 가져다댔다."그러니까 아까 보내줄 때 갔으면 좋았잖아."남자는 그대로 칼 끝으로 도윤의 목을 살살 눌렀다."무섭지"남자의 표정은 즐거워보였다."세 번 기회는 없어. 보내줄 때 가."여전히 도윤은 대답이
민지의 아버지는 기가 찰 노릇이다."이제 하다하다 애까지 데리고 들어왔니? 왜, 이젠 육아라도 할 생각이니?"요즘들어 사고를 많이 치고있는 민지였다."아빠, 그게...""애 이름이 뭐라고?""권도윤"민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나중에 이야기 하자."민지의 아버지는 이윽고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민지야, 엄마도 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사정이 딱한 건 알지만...요즘 왜 이렇게 사고를 치니. 속상하게."민지의 엄마 또한 민지에게 한 소리 했다.그리고 민지만 들리도록 작게 읊조렸다."대충 상황봐서 고아원에 데려다 주던지 해, 우리 집은 그 애 돌볼 형편까진 아니잖니."곧 민지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오로지 도윤의 손을 쥔 민지의 손에만 힘이 들어갔고, 그런 민지를 걱정스럽게 올려다 본 도윤이었다.미연과의 행복했던 2년의 시간을 보낸 도윤은 어느덧 5살이 되었다.겨우 5살이 되었건만, 도윤은 다시금 눈치를 보는 삶으로 되돌아왔다.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누나..."일단 민지의 방에서 생활하게 된 도윤은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다.도윤의 품엔 민지가 사 준 작은 곰돌이 인형과 민지가 미연으로부터 받은 목도리가 도윤에게 메여져 있었다.미연의 집에서 나올 때 민지가 둘러준 것이다."아우 진짜 재를 어쩜 좋아!"거실에서 들리는 소리가 도윤의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어쩔 거에요 진짜, 이대로 민지 그냥 둘 거에요? 네? 말 좀 해봐요!""조용히 좀 해 봐.""어떻게 조용히를 해요, 쟤가 어디서 온 앤 지도 모르는데.부모도 없는 애를 우리가 그냥 키워요?네? 이대로요?""조용히 좀 해달라고 하잖아!"큰 소리에 작은 아이의 몸은 한없이 움츠려 들었다.이윽고 거실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지금이었다.도윤은 미연이 사 준 하늘색 가방에 자신의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그리고 미연이 자신에게 남긴 통장까지.그리고 민지가 돌아와서 볼 편지까지 남겼다.2년전과 비교하면,
도윤을 만난것이 미연에게 있어서 큰 행운임은 틀림없었지만, 미연은 이 행운만을 즐길 순 없었다.철민에 의해 민지의 건물로부터 나온 미연은 새로운 일자리를 계속해서 찾아야 했고 이젠 아픈 몸을 꼭두새벽부터 이끌고 나가야만 했다.도윤을 입히고 먹여야 했다.어느새 미연의 옷장에는 미연의 옷보다 도윤의 옷이 더 많이 걸려 있었다.하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콜록, 콜록. 내가 감기를 조심하라 해놓곤 내가 감기에 걸린 모양이군."도윤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 한 미연은 새벽 아침식사 밥집으로 출근하기 위해 대문을 나섰다.대문은 아침부터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겼다.도윤을 위해 도어락을 설치한 미연이었다."할미 다녀올게."도윤에겐 닿지 않을 인사를 남긴 채 미연은 홀연히 떠났다.사실 미연은 도윤의 육아와 일의 병행, 그리고 금전적인 문제로부터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그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진 탓일까, 최근 들어 그녀는 잔병치례가 잦아졌다.원래도 좋지 않았던 허리는 악화되었고, 감기같은 질병은 달고 살았다.어느 날은 일어날 수 조차 없어 가만히 누워 자고 일어나니 옆에서 도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놨다.옆에 잠든 도윤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한참 운 사람의 것이었다."이러면 안되는데 자꾸 나쁜 생각이 든다 할미가..."그 날밤은 미연은 한참동안이나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한다.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아침부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도윤은 일찍 눈을 떴다."도윤아, 안에 있어? 민지 누나야!"문 밖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도윤은 의심할 겨를도 없이 문부터 열었다."우리 도윤이! 잘 지내고 있었어?"제 품으로 와락 안기는 도윤에 민지 또한 함박 웃음을 지으며, 도윤의 눈곱을 다정스레 떼어주었다."할머니는?"열린 문틈으로 집 안을 빼꼼 살펴보던 민지는 미연을 찾았다."우리 할미 요즘 아파 누나"아까의 모습은 어디가고 풀이 잔뜩 죽은 도윤이 답했다."집에 약은 있어?"절레절레고개를
"도윤아, 할미 왔다!"여느 때처럼 도윤이 뽀르르 달려나와 자신을 반겨주리라 믿던 미연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당황했다."할미!"늘 버선발로 달려나와 제 품에 쏙 안기는 도윤은 그대로였지만 바뀐 것이 있다.수명을 잃어 깜빡이던 형광등, 사용한지 오래되어 이 나간 식기류, 계절을 신경쓰지 않고 늘 같았던 얇팍했던 이불까지.전부 다 사라졌다.낡았던 것들이 치워지고, 모든 게 새롭고 예쁜 것들로 채워졌다."도윤아...이 할미가 꿈을 꾸고 있는거냐?""이거, 오늘 어떤 예쁜 누나가 와서 도윤이랑 같이 했어 할미!"민지임이 틀림 없었다."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또 울려...진짜..."민지에게 계속 신세만 지는 것 같아 미연은 마음 한 켠이 자꾸 아려왔다.아무래도 미연의 인생에는 귀인이 두 명이나 생긴 것 같다.하늘이 두 쪽이 나도 미연은 살아갈 수 있다.이 얼마나 감개무량한지 미연은 그렇게 또 도윤을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었다."자, 밥 먹자 내새끼"어느순간부터 미연과 도윤의 밥상은 제법 그럴 듯 했다.어느 날은 계란말이, 어느 날은 돈까스.벌이가 넉넉하진 않아도 최선을 다해 도윤을 먹이고 싶었다.사실 미연은 민지의 건물 청소 뿐만이 아니라 밤에는 산책겸 폐지까지 모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둘이 생활하기에 모자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았다.사랑하는 도윤을 위하고 싶어 돈을 벌다보니, 도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지만, 때로는 이 사실이 무척 미안했다.그래서인지, 시장에 다녀오게 되면 도윤에게 줄 간식은 하나씩 품에 안고 돌아왔다."할미 이건 뭐야? 처음 먹어 봐!""으응, 그건 핫도그라는 거야, 먹어 봐 내새끼. 할미가 사왔어.""할미, 이거 봐라?"핫도그를 미연에게 먼저 건네는 다정함을 배운 도윤은 갑자기 미연이 사준 스케치북을 당당히 펴 보였다.'임미연'너무나도 삐뚤빼뚤하게 적혀있어 어딘가 눈물 까지 나는 세 글자"할미 이름 맞지? 도윤이가 썼어!"제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도윤
도윤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세상에는 낯선 얼굴과 흐린 빛만이 가득했다.도윤은 놀란 것도 잠시, 이윽고 자신의 뺨에 처음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에 잠자코 있었다.이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오구 내새끼, 이제 일어난겨? 누굴 닮아 이리 예쁠꼬? '미연은 행여 깨질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도윤의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고 있었다.얼마나 쓰다듬었는지 차가웠던 도윤의 뺨은 어느새 사람의 온도를 만끽하고 있었다."할미~ 해 봐 응? 할미~ 내새끼 이름 좀 들어보자 할미가"도윤의 뺨에 사람의 손길보다 더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아이구, 내새끼 왜 울어. 그 동안 많이 힘들었지? 응?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어."이제서야 겨우 3살의 아이로 살 수 있게 된 도윤은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할...할미, 도윤...나는 권도윤..."도윤은 광원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그 때와 똑같은 감정, 몽글몽글한 햇살 같았다."아이구, 내새끼는 이름도 예쁘네! 내가 너 할머니야! 예쁜 내새끼!"겨우 정신을 차린 도윤에 미연은 크게 한시름 놨다.처음 만난 도윤의 몸상태는 너무 심각했다.아무리 아이라지만 지나치게 가벼웠고, 지나치게 망가졌다."미안해 내새끼, 도윤이, 할미가 미안해. 할미가 나빴어, 응? 용서해주라..."미연의 말은 어린 도윤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웠다.그렇게 둘은 서로 부둥켜 한참을 눈물을 흘렸다.도윤은 안도의 눈물을, 미연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속죄의 눈물을."내새끼, 배고프지? 얼른 밥 부터 먹자."정신을 잃은 도윤을 처음 봤을 때, 미연은 한참동안이나 그 어린 몸을 껴안고 넋이 나가 있었다.모두 다 본인의 잘못 같이 느껴졌다.어느덧, 아침에 나온 미연이 해가 져 뉘엿뉘엿 해 질때까지, 가만히 있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어머, 또 내 정신 좀 봐. 이럴 시간이 어딨어 내가"언제 흘렀는지 모를 눈물이 미연의 웃옷을 푹 적신 채였다.마른 세수를 연거푸 하던 미연은 소중히 도윤을 다시 바르게 눕혀두곤 옷장으로 향
누군가에겐 야속했던 밤이 지나갔고, 속절없이 아침은 찾아왔다.모두에게 아침은 반가운 존재는 아님은 확실했다."철민 엄마! 철민 엄마! 일어났어? 안에 있지? 있는 것 다 알아! 문 좀 열어봐! 어휴, 못 살아 진짜!"오늘의 아침은 요란했다.문을 두드리는 손짓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철민 엄마! 나야, 옆집 형원 엄마! 얘기 좀 해요!"곧이어 재촉하는 목소리에 이윽고 문이 열렸다."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미처 말이 다 뱉어지기도 전에 끝나고 말았다."철민이 어딨어요 지금!!"다급했던 목소리는 곧 분노로 변하고 말았다."...네?""...뭐야, 반응이 왜 그래, 진짜 몰랐어?"누군가의 세상이 또 무너져 내렸다."형원 엄마, 정말 나 어쩜 좋아...형원 엄마한테 미안해서 어떡해. 미안해서 어떡하지 내가 진짜..."물기가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그 누군가의 행복이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당장 돌려 달란 건 아니고...천천히 갚아요...돈 빌려준 내가 괜히 미안해지네, 진짜 사람 나쁘게 만드는데 뭐 있어 철민 엄마는"간밤에 많은 일들이 일어난 듯 하다."형원 엄마한테는 늘 폐만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해 어제 철민이가 형원이한테 빌려간 돈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아유! 그만 좀 울어! 철민이가 우리 형원이한테 빌려간 돈을 왜 당신이 미안해 해!""자식을 잘못 키운 내 잘못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형원 엄마""...아무튼, 철민이 찾게 되면 형원이 지갑도 좀 같이 돌려줘요. 우리 아들 첫 취업했을 때 내가 사 준 지갑이니까."대답도 미처 하지 못하고 눈물만 하염없이 닦아내는 몸뚱이 위로 떨어진 말은 꽤 가혹했다."철민이 그놈도 진짜 웃긴 놈이야, 친구도 없는 놈 착한 우리 형원이가 좀 놀아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은혜를 원수로 갚았네. 아까는 철민 엄마가 너무 울어서 내가 맘 좀 약해졌지만, 기간은 오래 못 줘. 알지?"아침부터 요란스러웠던 문은 이제서야 조용해졌다.칠이 다 벗겨진 대문부식된 외벽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