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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구급차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유리는 택시 창밖을 보며 흐려지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는 단 한 문장이었다.
"조유진 씨의 가족분이시죠? 지금 바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유진.
유리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여러 번 굴려보았다.
살아 있는 동안, 언니의 이름을 그렇게 또박또박 마음속에 되새긴 적이 있었던가.
지금은, 이름의 모양이 너무 선명해서 아팠다.
병원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응급실 안쪽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유리가 안내받은 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유리는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문 앞에 도착한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저 문을 열면, 자신이 끝까지 부정하고 있던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았다.
"조유진 씨 가족분 맞으시죠?"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문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유진. 차가운 이마, 닫힌 눈, 말라버린 입술. 그토록 자주 웃던 입꼬리는 완전히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얼굴이,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유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목 안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느라 이가 맞부딪혔다.
"그…… 전달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의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요."
의사는 잠시 말을 골랐다.
"고인께서는 임신 중이셨습니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네?"
"임신 8주차였습니다."
임신.
그 한마디가 가슴 깊숙이 박혔다.
언니가 아이를 갖고 있었다.
언제부터?
누구의 아이였을까?
왜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해한 사람처럼. 하지만 눈은 흐리지 않았다.
그 감정은 눈물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고, 아직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
장례 전날 밤.
유리는 언니의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향이 빠진 립밤, 접힌 잠옷, 침대맡에 던져진 머리끈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그 모든 일상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정작 주인은 사라져 있었다.
유리는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이불 자락을 잡았다.
미세하게 남은 체온의 흔적을 붙잡는 듯, 느릿한 동작이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전원이 꺼져 있었고, 케이블도 빠져 있었다. 평소에 유진이 쓰던 핸드폰과 다른 것이었다.
유리는 가만히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은 몇 초 후에 켜졌고, 밝아진 배경엔 낯익은 바탕화면이 드러났다.
잠금은 설정돼 있지 않았다.
유진이 마지막 순간까지 믿은 단 한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유리는 문득 목이 조여 왔다.
손끝이 화면을 밀었고, 메모 앱이 보였다.
[유리에게]
음성 파일은 하나뿐이었다.
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짧은 정적 뒤.
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지쳐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혹시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서이현 때문이야."
유리의 손끝이 굳었다.
"절대 그 사람한테 가까이 가지 마. 미안해. 언니가 너까지 위험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 말들이 뼛속을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정신은 또렷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으나, 손등에 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서이현. 그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장례는 빠르게 치러졌다.
유진의 삶은 화환 몇 줄과 헌화하는 몇 명의 손길로 정리되었다.
사진 속 웃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유리는 어쩐지 언니가 자기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모든 절차가 끝난 뒤, 유리는 다시 언니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모 앱을 닫고, 통화 기록을 열었다.
언니의 마지막 통화 기록. 마지막으로 걸려온 번호, 마지막으로 건 번호.
그런데 이상했다.
마지막으로 건 번호가, 자신이 아니었다.
발신자 표시도 없는, 그냥 숫자만 있는 번호 하나.
유리는 그 숫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숫자를 캡처해서 저장했다.
그날 밤, 유리는 처음으로 ‘서이현’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가 뜨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진, 기사, 프로필.
첫 번째로 뜬 사진은 그가 어떤 자선 행사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장, 단정한 머리, 부드러운 미소.
유리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손끝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너야?”
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유리는 처음으로 복수를 생각했다.
그 생각은 감정이 아니었다.
선고였다.
창밖으로 느리게 아침이 흘러왔다.그리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도시는 조용히 일상을 준비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아침은 유리에게 어떤 평범함으로도 다가오지 않았다.긴 계절을 견뎌온 마음처럼, 그녀의 가슴속엔 여전히 한 사람이조용히 살고 있었고, 그 이름은 결코 잊히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의 심장을 천천히 눌러오고 있었다.유진. 그 이름은 언제부터였을까,하루를 여는 입술보다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 되었고,눈을 감는 밤마다 바닥에 스며든 물처럼 유리의 꿈을 적시곤 했다.이우는 유리의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내렸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은, 말이 필요 없는 날이라는 것을.말보다 먼저
아침이라고 부르기엔 빛이 너무 흐렸고, 밤이라고 말하기엔 공기 속에 묘한 기척이 스며 있었다.창밖에서는 희뿌연 운무가 도시의 윤곽을 덮고 있었고, 그 위로는 말갛게 식은 하늘이 부서지듯 펼쳐져 있었다.그 시간,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영상 속 그 장면을 반복해서 되감고 있었다.프레임이 전환될 때마다 유진의 뒷모습이 다시 태어났고,그 안에서 유리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숨을 멈추곤 했다.그녀는 더 이상 영상 속 언니를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녀는 이제, 유진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그날의 공기, 그날의 마음, 그리고 그날의 고요한 침묵.그녀는 알 수 있었다. 유진이 결심했던 마지막 말들.끝내 남기지 못한 문장들.그 말들 안에 담긴 두려움과 애착과 절망.
짙은 어둠의 끝에서 새벽이 고개를 들 무렵,방 안의 공기는 유리하게 식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고,도시는 잠시,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 정적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그 조용한 새벽의 맥박을 따라, 유리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책상 위 조명을 낮게 틀어놓은 채,그녀는 이우가 건넨 복구된 파일을 응시하고 있었다.파일 이름은 숫자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127_final’.유진이 사라지기 하루 전날.그 마지막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지 모를,결정적인 진실의 조각이었다.손끝이 마우스를 눌렀다. 영상이 재생되었다.흑백의 흐릿한 영상. 심리상담소의 내부.
조용한 저녁이었다.하늘은 흐렸고,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에는 축축한 기운이 감돌았다.햇살이 지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의 그 어정쩡한 회색빛.세상의 색채들이 점점 흐릿해지고, 경계가 무너지는 시간.그 사이에 유리는 앉아 있었다.고요한 방 안, 창문은 닫혀 있었고 커튼은 젖혀져 있었다.그녀의 눈은 오래된 녹음 파일의 자막을 따라가고 있었지만,마음은 이미 그날, 그 순간의 숨결 속으로 깊이 잠겨 있었다.“조유진 씨, 그만두세요. 이 이상은”그 목소리는 분명 도훈이었다.하지만 말의 끝은 흐려졌고,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급하게 숨을 눌러 삼킨 것처럼 어딘가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문장이었다.유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늦겨울의 아침은 여느 계절보다 조용하고,그 고요함은 무언가를 숨기기엔 오히려 더 적막했다.해는 아직 창문을 넘지 않았고,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세상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밤새 덮어두었던 사건 파일을 다시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종이 위를 천천히 훑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멀리 닿아 있었다.그 눈빛은 잊힌 이름들을, 버려진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유진의 마지막 통화 기록. 그 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보며,유리는 숫자 하나, 초 하나까지 마치 생명의 리듬처럼 새겨 넣듯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무심히 넘겼던 다음 장. 한쪽 귀퉁이에 작게 메모된 통화 연결 지연 시간.
새벽이었다. 밤과 아침의 경계에서 잠시 머무는 그 짧은 틈.세상은 여전히 조용했고, 창문 너머의 어둠은 채 가시지 않은 채 조용히 유리의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불은 켜지지 않았다. 유리는 침대 머리맡에 앉은 채,두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로 긴 시간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어젯밤의 메일. 그리고 ‘강도훈’이라는 이름.그 이름 하나가 유리의 가슴 안에 다시 오래전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마지막 전화.”그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조유진이 사라지기 직전,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하지만, 그 통화를 ‘강도훈’이 끝냈다는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