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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녀의 하룻밤을 가져갔을까?
누가 그녀의 하룻밤을 가져갔을까?
Autor: 슈가로

1화. 내 연인의 청첩장

Autor: 슈가로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22 16:55:45

떠나는 겨울이 아쉬움을 남기듯, 하늘에선 함박눈이 쏟아졌다. 춘분(春分)에 내리는 때아닌 눈은 세상을 새하얀 침묵으로 덮어버렸다.

딸랑-.

카페 문이 열고 들어선 여자는 작고 왜소했다. 얼굴을 반쯤 가린 체크무늬 목도리에 투박한 떡볶이 코트.

봄옷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 홍차율만은 여전히 한겨울의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

습기가 하얗게 찬 안경을 벗어 닦자, 구석 자리에서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선명해졌다.

4년을 만난 익숙함은 저 뒷모습만으로도 그의 기류를 읽어내게 했다.

“녹현 씨!”

차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최녹현은 그녀를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내렸다.

촌스러운 안경, 맹한 눈동자, 몸매를 다 가리는 긴 치마까지.

변함없는 차율의 모습을 확인한 최녹현의 얼굴엔 노골적인 비웃음이 서려있었다.

‘주인 기다리는 똥개도 아니고, 여전하네.’

녹현은 진저리를 치며 커피를 들이켰다. 몸매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도통 드러낼 줄을 모른다.

4년을 만나도 설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매력 없이 착한 여자’ 그게 그가 정의하는 홍차율이었다.

“그동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걱정했잖아.”

“…그냥, 뭐. 바빴어.”

석 달만의 연락치고는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보통의 여자라면 화를 내거나 눈물을 보이겠지만, 차율은 그저 그가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행이라는 듯 쩔쩔맸다. 그 비굴한 태도가 녹현의 기고만장함을 부추겼다.

탁-.

녹현은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거 주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금박으로 새겨진 문구가 차율의 시야에 박혔다.

‘하나 되는 날’

최녹현 ♥ 김보라

“청…첩장?”

차율의 안경 너머로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4년을 사귄 연인에게 이별 통보조차 없었던 잠수 끝에 돌아온 것이 고작 다른 여자와의 결혼 소식이라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이해 해줄 거지?”

뻔뻔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녹현의 말에 멍하니 청첩장을 바라보는 차율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석 달만에 결혼? 아니, 그것보다 헤어지자는 말도 없었는데?

하지만 입술은 달싹일 뿐, 어떤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그저 식어버린 커피잔을 쥐고 있는 녹현의 손가락이 대답을 대신 해주는 것 같아서.

그의 네 번째 손가락.

걸리적거린다며 자신이 사준 커플링을 팔아치웠던 그 자리에, 보란 듯이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차율의 시선을 느낀 녹현이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긴 했는지 슬쩍 손을 내렸다. 마치 숨기기라도 하듯.

‘숨길 마음이 있긴 했구나.’

자신에게 배려 같지도 않은 배려를 해준 것에 안도하려던 것도 잠시, 이내 녹현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비수보다 날카로웠다.

“솔직히, 너도 알잖아. 너 여자로서 매력 없는 거.”

“…….”

“나도 남자야. 4년이나 만났으면 좀 받아줄 법도 한데, 꼴에 여자라고 끝까지 튕겨?”

“…….”

“어쩌다 자면 뭐 좋은 줄 알아? 너 목석이잖아. 어휴. 질린다. 질려.”

잔뜩 가시를 세운 말들이 사정없이 차율에게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상처를 내고, 그 틈으로 가시 끝에 발린 독이 퍼지는 고통이 차율의 심장에 박혔다.

녹현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짜증났다. 차라리 울고불고 매달리면 질리는 여자 탓으로 전가해서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너랑 하는 거? 상상만 해도 최악이야. 어떤 남자가 너 같은 애랑 자고 싶겠냐? 여자 같지도 않은데.”

“…….”

“굳이 올 필요는 없어. 옛정을 생각해서, 축의금만 보내던지.”

녹현은 남은 커피를 원샷하듯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고개를 숙이는 차율을 뒤로한 채, 그는 승리자라도 된 양 카페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차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경알이 뿌옇게 흐려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저 세상이 조금 흐릿해 보였을 뿐.

대충 눈가를 훔쳐낸 차율이 무심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5분 남았음을 확인한 차율은 검지로 안경을 밀어올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청첩장을 야무지게 챙겨 가방에 넣었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내민 청첩장도, 쏟아낸 모욕도.

4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담담했다.

차율은 문득 녹현과 연락이 끊겼을 때,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하던 말들이 떠올렸다.

그게 잠수 이별이잖아.’

그때마다 차율은 아니라고 했고, 녹현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뿐이라고.

그 시간이 지나면 꼭 자신과 결혼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확신을 준 건 뜻밖의 한 장면이었다.

늘 약속에 늦던 남자가 처음으로 먼저 카페에 와 있었던 것.

그게 이별의 예고였다는 걸.

차율은 짧은 호흡을 내뱉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오후 2시. 점심시간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사무실에는 기계적인 키보드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20대 타켓 마케팅 전략 최종본 : SNS 인플루언서 및 숏폼 챌린지 큐레이션.]

푸드하임 마케팅팀의 에이스, 홍차율 과장의 모니터 속 기획안은 완벽했다.

비록 연애는 엉망이었을지 몰라도, 일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에이스답게 모니터 속 차율의 기획안은 빈틈이 없었다.

“홍 과장님, 오늘도 회식 안 옵니까?”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차율의 시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백호빈 부장.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을 거머쥔 능력치에 서글서글한 눈웃음까지 장착해 사내 여직원들에게 인기 1순위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

차율의 손끝이 멈칫했다. 평소라면 남은 업무를 핑계 삼아 매끄럽게 쳐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입술 사이로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뇨. 오늘은 갑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호빈의 짙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는 이내 반색하며 차율의 책상 근처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잘 생각했어요. 이번에 민지 씨가 좋은 곳 예약했다고 했거든요.”

“…네.”

“근데 의외네요. 오늘도 안 올 줄 알았거든요.”

호빈이 짓궂게 웃으며 덧붙이자, 차율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길어지는 침묵에 호빈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좋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네.”

간결하다 못해 서늘한 축객령.

호빈은 잠시 차율의 얼굴을 살피다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남기고 멀어졌다. 차율은 그가 사라진 뒤에야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혀끝은 타고 넘어가는 씁쓸함이 요동치던 속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사실 차율은 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늘 어수선한 분위기, 업무와 별개로 이어지는 대화들 속에서 자신이 낄 자리를 찾느라 더 피곤해지는 공기.

상사의 말에 웃어야 할 타이밍을 고민하는 자체가 이미 일 같아서.

오늘은 예외였다. 이상하게도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가 최녹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때문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차율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밖에는 여전히 천천히 눈이 내렸고, 흰 눈으로 덮인 도시가 잔잔한 평화로움에 감싸인 듯했다.

그래, 눈이 오니까.

날씨 탓이다. 그냥, 아주 우연히 날씨가 이래서 가는 것뿐이다.

차율은 스스로를 속이는 문장들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 * *

“홍 과장님 오늘 기세가 무서운데요? 천천히 좀 드시죠.”

호빈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차율의 잔을 붙잡았지만, 차율은 가볍게 그 손을 제지하며 다시 잔을 채웠다.

“괜찮아요. 다 좋자고 마시는 건데.”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차율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카페에서 무심하게 청첩장을 챙겨 나올 때까지도.

하지만 독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꽁꽁 얼려두었던 속구석이 비참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매력 없는 여자. 목석. 여자 같지도 않은….’

녹현의 비수 같은 말들이 술기운을 빌려 머릿속을 헤집었다.

4년의 세월을 고작 ‘청첩장’으로 갈음해버린 그 잔인함이 뒤늦게 차율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술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홍 과장님 완전 딴사람 되셨네.”

“자, 2차 갈까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

차율이 비틀거리면서도 당당하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호기로운 외침도 잠시, 핑그르르 도는 어지럼증에 세상이 기우뚱하게 기울었다.

쏟아지는 함박눈 사이로 중심을 잃고 고꾸라지려던 찰나─

“어, 어?”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차율의 허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두꺼운 코트 너머로 전해지는 묵직한 체온, 코끝을 간지럽히는 낯설고 서늘한 향기.

차율은 제 허리를 지탱하고 있는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에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누군가의 턱선이 보였지만, 그게 누구인지 확인하기엔 의식이 너무도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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