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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선을 넘은 밤

Author: 슈가로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2 16:55:36

“으…….”

깨질 듯한 두통이 전신을 짓눌렀다.

억지로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은은한 주홍빛 조명이 쏟아졌다. 그리고 가정집에서는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천장 몰딩.

그 생경한 풍경만으로도 이곳이 자신의 자취방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둥둥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협탁 위를 더듬었지만, 있어야 할 안경 대신 손 끝에 걸린 건 낯선 감촉이었다.

그것은 분명 어제 착용했던 붉은색 레이스 속옷…….

차갑게 식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두툼한 구스 이불을 살짝 들추자 따뜻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살색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실크처럼 매끄러운 시트 위로 남겨진 흔적들이 어젯밤의 격렬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억은 끊겼다. 회식 자리 이후의 풍경은 마치 지워진 필름처럼 하얬다.

하지만 눈앞이 핑 도는 찰나, 눅진한 알코올 향과 함께 벼락처럼 스치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나랑 잡시다.’

차 과장님, 선 넘지 마시죠.’

당신이, 몸으로 확인해봐요. 내가 정말 그 정도로 최악인지.’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음성, 그리고 그를 향해 쏘아붙이는 오만한 목소리. 취해서 맥이 풀리긴 했어도 그건 분명 제 목소리였다.

꼬불거리는 억양만큼이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제 앞에 서 있던 남자에게 저돌적으로 다가서던 자신의 실루엣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미쳤다. 미쳤어. 홍차율.’

제 입으로 그런 망측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최녹현과 몇 년을 만나면서도 단 한 번도 먼저 손을 내민 적 없던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니.

하지만 자책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지독한 공포였다.

사락-

“…….”

뒤늦게 등 뒤에서 묵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차율은 그제야 숨을 멈췄다.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린 차율의 시야에 시트 밖으로 드러난 사내의 등판이 들어왔다. 넓은 어깨와 균형 잡힌 근육들이 촘촘하게 박힌 뒷모습.

골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이불 커버 아래로 드러난 남자의 선은 그 자체로 어젯밤의 열기가 떠오르는 듯했다.

시야가 아찔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등골부터 뺨까지 소름이 돋으며 귀 끝이 화끈거렸다.

차율은 남자를 깨울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몸을 일으키자, 허리와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감각이 비로소 현실을 일깨웠다.

부정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이건 꿈도 환상도 아닌 현실이었다.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침대 주변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흐린 눈으로도 보였다.

차율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는 남자의 동태를 살피고는 흩어진 잔해들을 주워 모았다.

그때, 협탁 및 쓰레기통에 닿은 차율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그 안에는 지난밤의 뜨거웠던 흔적들이 노골적으로 남아있었다.

‘…세, 세 개?’

휴지통을 뒤집어엎고 센 게 아닌데도 한눈에 들어오는 숫자였다. 저도 모르게 제 체력에 감탄하던 차율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안전한 날이지만, 이 와중에 피임을 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차율은 주운 옷가지들을 가슴에 꽉 안은 채 욕실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홍차율,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진짜로.”

잠긴 문에 기댄 체 이마를 짚었다. 목소리는 밖을 의식하듯 지독하게 낮았지만, 속에서는 천불이 났다.

아랫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든 차율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또 한번 경악했다.

새하얀 피부 위로 군데군데 새겨진 선명하고 붉은 얼룩들.

태연한 척 했지만,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원나잇은커녕 그런 관계를 혐오하다시피 살아온 인생이었다.

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국 위를 거칠게 문질렀다. 주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붉은 자국은 야속하게도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민소매 이너웨어로도 간신히 가려질 위치라는 것뿐.

똑똑 떨어지는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어젯밤의 파편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다.

솔직히 너도 알잖아. 너 여자로서 매력 없는 거

그거 알아? 네가 목석이라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랑 하는 거, 최악이라는 얘기야.’

하긴, 어떤 남자가 너랑 자고 싶겠어- 여자 같지도 않은 널.’

최녹현, 그 쓰레기가 던진 말들이 화근이었다.

평소엔 잘만 거절하던 회식 자리가 어제는 왜 그렇게 가고 싶던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은 또 얼마나 달던지.

차라리 독하게 느껴졌다면 마시지라도 않았을 텐데.

차율은 정신을 차리려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는 욕실 문을 빼꼼히 열었다. 남자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어젯밤의 진실이 아니라 도망이었다.

자는 남자를 깨워 무슨 말을 할 것이며, 혹여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했다간 코가 꿰여 평생의 수치로 남을 게 뻔했다.

안경이 없는 것도 차라리 신의 계시라고 믿기로 했다.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나가는 게 나았다. 평생 모를 사이로 끝내면 그만이니까.

차율은 까치발로 살금살금 문을 향해 걸었다. 카펫 바닥이 발가락 사이로 기분 나쁘게 폭신거렸다.

철컥-.

육중한 호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선 순간, 차율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찬 기운이 코끝을 스쳤지만, 가슴 속은 여전히 뜨거웠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어젯밤의 사고를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루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 * *

-뭐?! 얼굴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수화기 너머로 터져 나온 비명에 차율은 황급히 스피커쪽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주위를 살폈다.

이른 새벽의 버스 안은 주말답게 한산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차율은 핸드폰 볼륨을 최대한 낮춘 뒤에야 다시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럼 어떡해…. 안경은 없지, 머리는 깨질 것 같지.”

-네가 자자고 했다며! 그 남자는 무슨 죄야? 아침에 인어공주처럼 사라진 널 보고 꽃뱀한테 물린 줄 알면 어떡할 건데!

“꽃뱀! …이라니.”

절친 지온의 거침없는 몰아붙임에 발끈하던 차율이 다시금 주위 눈치를 보며 언성을 낮췄다.

속닥거리는 목소리 사이로 한숨이 섞여 들었다. 통화를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호텔문을 나설 때만 해도 별일 아니라고, 그저 하룻밤의 사고일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했건만.

어쩌면 별일이 아니어야만 한다는 간절한 부정이었을 지도 몰랐다.

-야, 일단 피임약부터 사 먹어. 확실히 해야지.

“…그건 밖에서 대답할 게 아니야.”

-밖에서 대답할 게 아닌 건 또 뭐야.

지온의 말에 되받아칠 말이 없는지, 차율의 입매가 가늘어졌다.

새벽녘에 안개 속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며 생기는 빛을 따라 창문 위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너무 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자, 잠수라도 하듯 침묵을 지키던 차율이 고개를 떨궜다.

바닥을 향한 그녀의 고개를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설핏 보이는 붉은 귀가 그녀의 심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왜 대답이 없어? 피임약, 사 먹으라니까.

“…해, 했어. 그거.”

-뭔 뚱딴지같은 소리…. 아. 피임했다고?

“어어. 봤어.”

무심코 내뱉은 대답과 동시에 휴지통 속의 적나라한 흔적들이 다시금 눈앞에 아른거렸다.

차율은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축이려 마른침을 삼켰다. 핸드폰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수상한 기척을 지온이 놓칠 리 없었다.

-뭐지, 이 흥미진진한 반응은? 홍차, 너 설마…….

“흐, 흥미진진은 무슨! 나 도, 도착했다. 끊는다!”

-야! 홍차!

지온의 외침을 가차 없이 끊어낸 차율의 얼굴이 달아오른 화로처럼 붉어졌다.

그 덕분에 여름도 아닌데 훅 끼치는 열기를 식히려 손부채질을 해대는 차율이었다.

[이번 정류장은 은하 주공 3단지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푸른 숲 초등학교입니다.]

안내 음성에 맞춰 몸을 일으킨 차율은 뒷문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집에 다다를수록 긴장이 풀리는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오늘이 주말이라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집에 도착하자마자 땀과 알코올 기운을 씻어내려 욕실로 들어간 차율은 목걸이를 풀기 위해 목 뒤를 더듬거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허전한 손끝에 의아함을 느낀 차율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거울 앞에 서서 입고 있던 옷을 아래로 끌어내리면서까지 눈으로 확인해봤지만, 제 손에 의해 붉게 물든 목만 훤히 보일 뿐이었다.

‘목걸이가…….’

없어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히 채워져 있었다. 그 자국을 지우겠다며 난리를 피우던 순간에도 분명.

그 목걸이가 어떤 물건인데.

차율에게 목걸이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자,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부적 같은 것이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차율은 벗어둔 옷을 다시 입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제 탓이었다. 하지만 목걸이가 있을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호텔.

어쩌면 아직 그 남자가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곳.

차율은 택시를 잡아타며 기도했다.

제발, 그 남자가 잠에서 깨기 전이기를. 아니, 깨어났더라도 이미 체크아웃을 하고 사라진 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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