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장시범의 파트너인 윤해정은 강지연이 자기 짐까지 들겠다고 나서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러자 장시범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선배는 학교 무용단 때도 늘 이랬어. 우리를 챙겨주는 게 습관이라 그래. 사양하지 말고 얼른 가. 막히면 뒤에서 더 힘들어져.”그는 윤해정에게 슬쩍 눈짓까지 했다. 윤해정은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일단 말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수화물을 찾으러 가는 길에야 윤해정은 아까 했던 눈짓이 뭘 의미하는지 물었다.“선배가 우릴 돕고 싶어 할 때는 그냥 받아들여. 지금 선배는 무용단에서 본인이 아무 쓸모도 없을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일 거야. 무언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하게 두는 게 좋아.”장시범이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그제야 윤해정은 모든 걸 이해 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한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왜 웃어?”장시범은 눈을 흘기고는 성큼성큼 앞서가 강지연을 따라잡았다.그 사이, 강지연은 휴대전화를 현지 유심으로 전환했다.신호가 잡히자마자 순식간에 카톡 알림이 쏟아졌고 그중에는 홍순자가 보낸 짧은 문자 두 개도 섞여 있었다.도착했는지, 무사한지 묻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홍순자에게 답장을 보냈다.[할머니, 안전하게 도착했어요.]그리고 천천히 다른 문자들을 살펴보았다. 진경숙에게서도 한 통이 와 있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찾으세요. 저한테 전화가 왔더라고요.]강지연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그냥 모르겠다고 하세요.]그리고 남은 문자들은 모두 온하준에게서 온 것들이었다.[어디야?][왜 전화가 안 돼?][집에 있어?][강지연, 설마 어제부터 오늘까지 한 번도 집에 안 들어간 거야?][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모니터에 네가 안 잡혀.][마지막으로 모니터에 찍힌 게 새벽 네 시야. 그렇게 일찍 어디를 간 건데?]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되어 있었다. 거기에 그녀가 받지 않아 결국 자동 취소된 통화들까지 여러 통이었다.문자를 다 읽기도 전에 손에 쥔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 온하준의
하지만 그런 일들은 점점 홍순자 몫이 되었고 다시 조금씩 진경숙의 몫으로 넘어갔다.가끔 한두 번 도와준 적은 있어도 이제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온하준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끝은 익숙하게 움직여 이하나의 머리를 끝까지 말려 주었다.그리고 드라이기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말했다.“됐어. 쉬어.”말을 마치고 그는 거실로 나가 캐리어를 집어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샤워하려는 듯했다.뜨끈해진 머리카락을 어깨에 늘어뜨린 채 시원하게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을 맞자 이하나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이게, 강지연이 한때 누렸던 행복이라는 거지?’가슴 깊은 곳에서 진한 시기가 훅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 던지고 끈 나시 잠옷만 입은 채 2층으로 올라갔다.한쪽 어깨끈은 이미 흘러내려 팔꿈치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욕실 문 앞에 서자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호텔 욕실 문은 전부 유리문이라 무늬가 있긴 해도 속이 흐릿하게 비쳤다.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윤곽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고 얼핏 보이는 그의 등은 이쪽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이하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를 악물고 문을 밀어젖혔다.“하준아...”나른하고도 애교 섞인 부름과 함께 안으로 몸을 던지려던 이하나는 순간 멍해졌다.언제 갈아입었는지 샤워부스 안의 온하준은 이미 가운을 걸친 상태였다.“아, 그게...”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던 열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하준아, 샤워 다 했어? 내가 도와줄게.”“다 했어.”온하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이하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달려가 뒤에서 끌어안았다.“하준아...”온하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준아, 난 신분 같은 건 상관없어. 그냥 계속 네 옆에 있고 싶을 뿐이야.”그녀의 손이 그의 가운 안으로 파고들려는 순간 온하준이 이하나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이하나, 넌 내게 정말 소중해. 그래서 이런
아직도 병원에 입원 중이던 진경숙에게서는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진경숙은 강지연이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이제 사모님은 진짜로 대표님을 떠났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마치 자신이 과거의 그 사람에게 다시는 발각당하고 싶지 않듯, 강지연 역시 그에게 다시 붙잡히고 싶지 않을 터였다.그렇기에 진경숙이 온하준에게 말해줄 수 있는 대답은 오직 본 적이 없다는 말뿐이었다.온하준은 결국 아쉬움 섞인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지연의 번호를 눌렀다.그러나 돌아온 것은 여전히 연결 불가 안내음뿐이었다.이번에는 휴대전화로 집 안 CCTV 앱을 열었다. 화면에는 새까만 어둠만 가득했다.‘거실에 불도 안 켰나? 혹시 침실에서 자는 중인가?’온하준은 다시 미간을 좁혔다.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서서히 뜨거워졌다.“하준아?”이하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지만 애써 염려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아니면 김도윤한테 가보라고 하는 건 어때?”“괜찮아.”두 사람은 호텔 로비를 지나 객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아마 내가 귀찮게 해서 또 꺼버린 거겠지.”‘설마 또 차단한 건 아니겠지? 이번에 또 차단하면 돌아가서 먼저 엉덩이부터 두들겨 줄 거야.’온하준은 이마를 찌푸린 채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이하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준아, 강지연이 너를 귀찮아한다고?”온하준은 피식 웃었다.“귀찮아하는걸 수도 없이 봐 왔어.”이하나는 더 이상 웃음을 이어 가지 못했다. 방으로 향하는 길 내내 온하준도, 이하나도 말을 아꼈다.둘이 머무는 곳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풀빌라였다.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온하준은 곧장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하준아.”뒤에서 이하나가 달콤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온하준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너 먼저 쉬어.”“아직도 강지연한테 문자 보내는 거야?”이하나는 일부러 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아니. 메일이 몇 통 와
“그러면 다행이야. 너는 항상 강지연보다 나를 먼저 챙기잖아. 혹시 강지연이 속상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이하나는 떠보는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온하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지연은 우리가 함께 힘든 시간을 버티고 노력했기에 본인이 지금처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 이해할 거고 앞으로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거야.”한편, 온하준에게 방해받은 뒤로 강지연은 더 이상 이부자리에 늘어져 있을 마음이 사라졌다.그녀가 일어났을 때, 홍순자는 이미 아침을 드신 뒤였다.어제 장 보러 나갔다가 사 온 빵과 집에 쌓아 둔 우유 몇 상자 중 하나를 뜯어 드시고 계란도 하나 부쳐 드셨다.강지연이 일어난 것을 본 홍순자는 다시 웃는 얼굴로 부엌으로 향했다.“할머니, 제가 할게요.”홍순자가 손을 내저었다.“내 나이에는 많이 움직이는 게 약이야. 이런 게 다 운동이거든.”강지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챙기기 위해서라면 할머니는 언제든 이런저런 이유를 꾸며냈다.그래도 오늘 점심은 두 사람이 함께 차렸다. 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 뒤, 그녀는 공항으로 떠나야 했다.그리고 이제부터 홍순자는 진경시에서 혼자 지내야 했기에 해드려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집 안에서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외출할 때는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사소한 것까지 강지연은 두 번 세 번 반복해 당부했다.그런 손녀의 모습에 결국 홍순자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우리 지연이는 어쩌면 이렇게 말투까지 영락없는 할머니 같을까? 할머니가 그렇게 안 미더워? 나 아직 정신 멀쩡해.”강지연도 웃으며 힘껏 홍순자를 안아주었다. 할머니가 모든 걸 다 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막상 떠나려니 마음이 자꾸 걸렸다.“할머니, 제일 중요한 건 안전이에요.”이미 수십 번은 되풀이한 ‘쓸데없는 소리’였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반복했다.“걱정하지 말라니까.”홍순자는 손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 틈에 조용히 은행 카드를 그녀의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강지연은
그날 밤, 막 청소를 마쳐 은은한 세제 향이 감도는 새집에 누우니 강지연은 세상이 이렇게까지 맑고 가벼울 수 있나 싶었다.그녀는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가장 소중한 사람이 바로 곁에 있고 드디어 마음을 붙잡아두던 모든 것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편안한 마음으로 강지연은 밤새 깊이 잠들었고 무려 열두 시간을 푹 잠에 빠져들었다.눈을 뜨니 머리는 개운했고 몸은 나른하면서도 편안했다.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아 전원을 켜보니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뭐 해?][왜 전화 안 받아?]물음표가 줄줄이 이어진 문자들이었다. 강지연은 답하지 않았다.에어컨 온도는 알맞았고 암막 커튼은 아직 걷지 않아 방 안은 포근하게 어스름했다.어제 이미 홍순자와 아침 식사 준비를 다 의논해 둔 터라 서둘러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조금 더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때, 다시 온하준이 그녀의 평온을 깨트렸다.이번에는 영상통화를 보내왔는데 강지연은 받지 않고 바로 거절 버튼을 눌렀다.그러자 곧바로 문자가 도착했다.[뭐야? 왜 안 받아?]강지연은 어쩔 수 없이 답장을 보냈다.[방금 깨어서 세수도 못 했어.]그러자 곧바로 다시 영상 초대가 떴다.주위를 둘러본 강지연은 새삼 인간의 취향이라는 게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깨달았다.지금 누워 있는 침대 시트의 색상, 무늬 그리고 패턴까지 모두 집에 있던 침구와 놀랍도록 비슷했다.그 사실을 확인한 강지연은 결국 통화를 수락했다.휴대전화를 얼굴 가까이 들고 각도를 조금 조정해 화면 가득 자기 얼굴만 꽉 차게 비쳤다.오랜만의 숙면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돌아 있었다.그 모습을 보자마자 온하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랑 한 침대에서 잔 지 5년인데 자고 일어난 얼굴을 모를까 봐 안 보여주는 거야?”강지연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기는 왜 꺼놨던 거야?”강지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너 때문에 깰까 봐.”온하준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돼지야
탑승구 대기실이 유달리 조용해 강지연은 목소리를 낮추어 전화받았다.“왜 이렇게 목소리가 작아? 지금 뭐 하는 중이야?”온하준이 물었다.“밖에서 아침을 먹고 있어. 식당이 조용해서 큰 소리내기 좀 그렇거든.”강지연은 휴대전화를 손바닥으로 반쯤 가리고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 너 요즘 왜 이렇게 자주 전화를 거는 거야?”정말 질릴 지경이었다. 전화 너머에서 온하준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 내 전화가 싫어졌어?”‘싫어진 정도를 넘었지.’강지연은 속으로 생각하며 눈을 흘겼다.“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말하면 좀 귀찮기는 해.”“강지연!”온하준은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돈 받을 때는 안 귀찮았어?”강지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될 수 있으면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그래서 무슨 일인데?”“일이 없으면 전화도 못 걸어?”강지연은 할 말을 잃었다. 요즘따라 온하준은 정말 알고도 모를 사람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답했다.“할 수도 있지. 그래서 온 대표, 또 무슨 지시가 있어서 전화 한 거야?”“까불기는.”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비행기 갈아타는 중이야. 아직 탑승 시간도 안 됐고 그냥 네가 일어났는지 궁금해서.”‘정말 한가하기도 하지.’“나한테 해줄 말은 없어?”강지연은 포도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있던 참이라 대충 없다고 얼버무렸다.“강지연! 지금 음식이 남편 안부보다 더 중요해?”‘갑자기 왜 또 화를 내는 거야?’강지연은 포도를 꿀꺽 삼키며 말했다.“온하준, 너 설마 강도라도 만난 거야?”전화기 너머에서 온하준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아니, 먹어.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다. 나 곧 탑승해야 해.”전화는 곧바로 끊어졌다. 강지연은 멍하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옆에서 홍순자가 조심스레 물었다.“하준이니?”“네, 할머니.”강지연은 홍순자에게 솔직히 말했다.“할머니, 앞으로는 저랑 할머니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요. 괜찮으시죠?”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