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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에는 이미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후사를 두지 못한 죄. 왕실의 신망을 잃은 죄.
그리고 서리가 끝내 알지 못한 한 여인의 죽음과 얽힌 의혹이, 다른 죄목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었다.
마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서리는 그 줄 위에 눈길을 잠깐 두었다가, 옮겼다. 지금 와서 캐물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붓을 들었다.
서 리.
이름 두 글자를 적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붓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까지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이것으로 끝이오."
왕의 명을 받든 내관이 문서를 말아 거두었다. 그 손짓 하나로, 서리는 더는 왕후가 아니었다.
왕후의 인장도, 궁에 머물 자격도 함께 거두어졌다.
내관은 이미 다음 할 일을 생각하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서리에게 남은 것은 폐후라는 두 글자와, 오늘 안으로 궁을 나서라는 명뿐이었다.
정전 밖으로 나오자 늦가을 바람이 뺨을 스쳤다. 서리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십 년이었다. 이 계단을 처음 올랐을 때는 붉은 비단신이었는데, 지금은 무명옷 자락이 발끝에 닿고 있었다.
왕후의 자리도, 이헌의 마음도, 되찾고 싶었던 서가의 이름도, 결국 손에 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계단 아래에는 가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왕후가 타던 것이 아니라, 장식을 모두 걷어낸 소박한 것이었다.
폐출된 여인을 조용히 실어 보내기에 딱 맞는 격이었다. 가마 곁에 선 자들 중 누구도 서리 쪽을 보지 않았다.
서리는 가마에 오르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리 없었다.
—
행선지는 도성 밖, 서가의 옛 별저였다. 부친과 오라비들이 죽은 뒤 오래 주인을 잃었던 집이었다.
지붕이 내려앉지 않도록, 대문이 썩지 않도록, 하인 몇이 최소한으로만 손을 대며 지켜온 곳.
왕실은 체면치레로 시종과 호위 몇을 함께 붙여주었다. 서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서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리를 지켜보기 위해 붙은 사람들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성문을 나서고 얼마쯤 지났을 때, 서리는 창의 발을 살짝 들쳤다.
해가 기운 자리가 어긋나 있었다. 별저로 가는 길이라면 진작 갈라졌어야 할 갈림목을, 행렬은 그냥 지나쳐 있었다.
"이 길이 아니다."
앞쪽에서 짧은 대답이 돌아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물었을 때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가마를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가 잦아졌다. 인적이 끊긴 산길이었다.
이윽고 가마가 내려졌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서리는 자신을 둘러싼 얼굴들을 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먼저였다.
그다음에, 손 하나가 어깨를 향해 뻗어 왔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서리는 그 손을 쳐내고 비탈 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무명옷 자락이 마른 덤불에 걸려 찢겼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고, 밟는 자리마다 흙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 디딘 곳에, 땅이 없었다.
몸이 붕 뜨는 감각.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손끝이 잡을 것을 찾아 허공을 긁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고를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이헌을 고르지 않으리라.
그것이 서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이었다.
낯선 문양이었다. 용이 아니라 매화.
서리는 잠시 그 무늬를 올려다보았다. 서씨 가문 저택, 어릴 적 자신이 쓰던 침소의 서까래였다.
방 안에는 말린 국화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옅게 섞여 있었다.
몸을 덮은 이불의 결이 뺨에 닿았다. 손끝으로 가만히 이불자락을 쥐어보았다.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기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서리는 그대로 굳었다.
빗과 세숫물을 든 감씨가 문턱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옷차림도, 이마의 잔주름도 서리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오 년 전 장례를 치렀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아기씨?"
감씨가 걸음을 멈추고 서리를 살폈다.
서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손목을 붙잡았다.
따뜻했다.
장례 날 마지막으로 잡았던, 얼음장 같던 손이 아니었다.
"……따뜻해."
"예?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씨."
감씨가 당황한 얼굴로 다른 손을 서리의 이마에 얹었다.
서리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이 온기가 손을 놓는 순간 사라져버릴까 봐.
"안색이 왜 이러세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한참 만에야 서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악몽을 꿨어."
그 악몽이 십 년이나 이어졌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감씨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물이라도 새로 떠 오겠다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서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서리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감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아 빗을 들었다.
익숙한 손길이 머리카락 사이를 오갔다. 그 감촉조차 낯설도록 생생했다.
이것이 죽기 직전 꾸는 마지막 꿈인지, 혼이 떠돌며 지난 삶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인지, 서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살아 있는 감씨와, 어릴 적 이 방과, 지나치게 선명한 온기와 감촉만이 분명했다.
"오늘이……"
"연택례 날이잖아요. 잊으셨어요?"
감씨가 웃으며 손을 놀렸다.
"궁에서 사람이 벌써 다녀갔어요. 오시까지 별궁으로 오라고요."
서리는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겪지 않은 스무 살의 얼굴 안에, 십 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들어차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꿈이든, 정말 돌아온 삶이든, 상관없었다.
이번만큼은, 이헌을 고르지 않으리라.
잘 부탁드립니다
"관에서는 모릅니까."서리가 낮게 물었다."모를 리가요."이겸도 낮게 답했다."나졸이 안 도는 건 아닐 겁니다. 다만 크게 터지지만 않으면 겉만 훑고 돌아가겠지요."—서리는 몇 군데 좌판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값을 묻고, 물건을 만져보고, 어디서 들어온 것이냐 물었다. 상인들은 대개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몇 마디를 주고받다 보면 흘러나오는 것이 있었다.그사이 이겸은 말수가 적었다. 대신 시선이 계속 움직였다. 사람이 몰리는 자리와 비는 자리, 좌판이 놓이지 않은 통로, 담장이 무너져 밖으로 이어지는 곳. 서리가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겸은 반 걸음 뒤에 서서 등 뒤쪽을 보고 있었다.말을 맞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어긋나지 않았다.—좌판 하나를 지나던 서리의 걸음이 잠깐 멎었다.붉은 옥으로 깎은 머리꽂이였다. 등불 아래에서 옥이 짙게 가라앉은 빛을 냈다. 서리는 그것을 집어 들고 잠시 손안에서 돌려보았다.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제자리에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이겸의 시선이 그 자리에 잠깐 머물렀다가, 서리를 따라갔다.—장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통로가 좁아졌다.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몰리는 지점에서, 서리는 어느새 이겸의 안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짐을 진 사내가 지나가자 이겸이 반 발 앞으로 나섰고, 좌판 모서리가 튀어나온 자리에서는 손이 먼저 뻗어 왔다. 서리는 그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사람을 지키는 데 익숙한 것인지, 여인을 이끄는 데 익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서리는 문득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왜 그런 것을 따지고 있는지가 더 이상했다.그리고 한 박자 늦게, 다른 것이 걸렸다.생각하기 전에 이미 몸이 그 움직임에 맞춰 따라가 있었다. 손이 뻗어 오기 전에 이쪽 어깨가 먼저 기울었고, 발이 옮겨질 자리를 발이 먼저 알고 있었다.처음 하는 일이 이렇게 익숙할 수는 없었다.서리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다만 그 감각이 손끝 어딘가에 남았다.—수레꾼 몇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목연이 돌아간 뒤, 이겸은 회신을 들고 다시 서리의 처소를 찾았다.다과 자리에서는 꺼내지 못했던 북방의 답신이었다. 서리는 앞에 놓인 문서를 밀어두고 자리를 내주었다."매듭 말입니다."이겸이 종이를 펼치며 말했다."실 끝을 안으로 감아 숨기는 그 마감.""어느 쪽 것이었습니까.""어느 쪽 것도 아니랍니다."서리가 눈을 들었다."북방에서 물건을 몰래 넘기는 자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라더군요. 어느 세력의 표식도, 서로 알아보는 암호도 아니고요. 그저 짐을 오래 지고 다니는 자들이 손에 익힌 방법이라 합니다."이겸이 종이를 서리 쪽으로 돌려놓았다."그 물건들이 남쪽으로 흘러오면서, 묶는 법도 함께 내려왔다고요."서리는 그 대목을 눈으로 훑었다. 북쪽 사람의 손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그 물건이 지나온 길의 흔적이었다."그렇다면 그 꾸러미는,"서리가 천천히 말했다."북방에서 온 자가 묶은 것이 아니라, 북방 물건이 오가는 자리를 거쳤다는 뜻이겠군요.""그렇게 읽는 편이 맞을 겁니다.""도성에도 그런 자리가 있습니까.""있다고 합니다."이겸이 종이 끝을 짚었다."북방 물건이 흘러드는, 관에 잡히지 않는 장이 선다고요. 다만 저쪽에서도 그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지까지는 모른답니다."서리는 잠시 그 문장을 들여다보았다."도성 안에서 그런 장이 서는데, 우리가 모른다는 게 이상하군요.""아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요."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별채 쪽으로 향했다.—포로는 요즘 살이 조금 붙어 있었다. 식구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눈치를 보는 기색도 줄었다."또 뭘 여쭤보시려고요.""묻는 게 좀 다르다."이겸이 앉으며 말했다."네가 쓰려던 것 중에 사람을 재우는 약이 없었지.""그건 저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애초에 준비하지 않았다고.""그건 됐고. 만약 썼다면, 그런 건 어디서 구하나."사내가 잠깐 눈을 깜빡였다."……그거야 뭐, 사는 데가 있죠.""어디.""저 같은 놈들이야 다 아는 데입니다."사
목연은 새로 따른 차에 입술을 대었다.잠시 뒤, 서리가 문득 말했다."아까 옷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제가 아는 것이라면요."서리는 시비를 불러 함을 들이게 했다. 뚜껑을 열자 짙은 남빛 비단이 곱게 개어져 있었고, 흰 꽃송이가 그 위에 수놓여 있었다."꽃놀이 뒤에 왕후께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무얼 지어야 격에 맞을지 잘 모르겠어서요."목연은 잠시 예를 갖추어 손을 닦고 나서야 비단에 손을 댔다. 자수 위로 손끝을 지나가게 하고, 창 쪽으로 각도를 돌려 빛을 받게 했다. 그 동작이 익숙했다."저고리보다는 겉옷 쪽이 나을 듯합니다. 이런 바탕에 수가 이만큼 들어가면, 자잘하게 마르는 것보다 폭을 살려 쓰는 편이 아깝지 않지요."목연은 그렇게 말하고도 한동안 비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그런데 이 수실이……""실이 어떻습니까.""드문 것입니다."목연이 비단을 조금 기울이자, 흰 꽃잎을 따라 옅은 윤기가 흘렀다."여기서 나는 실은 이런 빛이 잘 안 납니다. 저도 이런 걸 본 게 몇 번 없어요."서리는 찻잔을 내려놓지 않은 채 물었다."어디서 보셨습니까.""태자 전하께서 쓰시던 손수건입니다."목연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수에 쓰인 실이 빛을 받으면 꼭 이렇게 은은하게 윤이 났습니다. 그때도 참 귀한 것이다 싶었지요.""그것이 언제쯤입니까.""연택례 전, 궁의 자리에서 몇 차례 보았습니다."목연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다가 어깨를 가볍게 폈다."언제부터 쓰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그 손수건을 본 기억이 없군요. 물건이야 바꾸기도 하시겠지요."서리는 비단을 다시 개켜 넣으며 고맙다는 뜻을 표했고, 화제는 곧 봄옷 짓는 시기로 옮겨갔다.—이겸이 들어선 것은 다과가 반쯤 지났을 무렵이었다.바깥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손님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뒤, 안으로 들어 예를 갖췄다."목가 아가씨께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보내주신 향은
목연이 영안궁에 든 것은 해가 제법 높이 오른 뒤였다.목연이 탄 말이 영안궁 앞뜰에 멎자, 기다리던 하인이 다가와 고삐를 받아 들었다. 목연은 말에서 내려 옷자락을 한 번 정돈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뒤따라온 시비와 호위들도 차례로 말에서 내렸고, 마당의 시비들이 익숙한 몸짓으로 손님을 맞았다.서리는 마루 앞에서 목연을 맞이했다. 예를 갖추는 데 부족한 데가 없었으나, 반가움을 지어 보이지도 않았다. 지나온 회랑에도, 이쪽을 향해 자리를 비켜서는 시비들의 몸짓에도 흐트러진 구석이 없어서, 목연은 걸음을 옮기는 동안 이 궁의 살림이 이미 서리의 손에 익어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먼 걸음 하셨습니다.""이렇게 자리를 내주셔서, 오히려 제가 송구합니다."두 사람은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고 안으로 들었다.—다과상 위로 김이 옅게 올랐다."보내주신 향은 잘 받았습니다."서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이런 것을 받고 서찰만 돌려보내기가 마음에 걸려, 이리 청했습니다.""영안공께서 큰 병을 이겨내셨으니, 그 정도야 마땅한 일이지요."목연은 찻잔을 들며 옅게 웃었다."다만 침향은 두는 자리를 조금 가립니다. 볕이 드는 데 오래 두면 향이 얕아지니, 서늘하고 그늘진 곳에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향합째로 옷장 안쪽에 넣어두는 분들도 계시고요.""그리하겠습니다.""요즘은 향낭에 넣어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라, 아예 조각을 잘게 내어 쓰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러기가 아까워서 통으로 두는 편입니다만.""향낭도 그만큼 작아지겠군요.""예. 옷에 걸었을 때 처지지 않을 만한 것을 찾지요. 수가 아무리 고와도 무거우면 손이 잘 가지 않으니까요."목연은 다과 하나를 집어 작은 접시에 옮겼다."작은 것을 찾는 건 거울도 비슷합니다. 요즘은 나갈 때 품을 만한 것을 찾는 분들이 많아요.""작은 거울은 본 적이 있습니다만.""있기는 하지요. 그런데 작은 것은 잘 비치지 않는 것이 많아서요. 제대로 된 것은 또 너무 크고요."목연이 웃었다."전에
담장이 몇 채 더 지나갔다.아무도 그가 다시 일어날 거라 말하지 않았었다. 의관도, 궁의 누구도. 아버지가 다른 혼처를 꺼냈을 때 잠자코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그때는 영안공의 이름을 혼처와 함께 입에 올리는 이가 없었다. 안부를 물으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답부터 돌아왔다. 목연도 그 뒤를 묻지 않았다.꽃놀이에서 본 이겸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왕의 인사를 받았다. 자리에서는 부인에게 돌아가는 질문을 가볍게 받아냈다.목연은 고삐를 잡은 하인의 등으로 눈을 돌렸다. 말이 좁은 길목을 지나느라 걸음을 늦췄다.자신은 그 곁에 앉을지 말지를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혼처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남겨둔 것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이렇게 빨리 다시 일어날 사람이었다면.영안공부인이 다들 예상한 대로 태자 전하를 골랐더라면.그 자리는—목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지나간 일이었다.그런데도 무릎 위에 놓인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을 천천히 펴고 흐트러진 옷자락을 바로잡은 뒤에는, 다시 빈틈없이 단정한 목연으로 돌아가 있었다.말이 목가의 대문 앞에 멎었다.—그날 저녁, 아버지는 목연에게 다과 자리가 어떠했는지 물었다."꽃놀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네 혼사도 물었겠구나."목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읽던 서찰을 접어 곁에 놓았다."그 자리에서 네 이름이 나왔다는 말은 들었다. 집에서는 무슨 말이 있느냐고 하더냐.""예.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잘했다."목연은 잠시 무릎 위의 소매를 고쳐놓았다."왕후께서 서두를 일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저희가 먼저 여쭈면 재촉하는 모양이 되지 않겠습니까."아버지는 접어놓은 서찰 끝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밖에서 묻는다고 우리가 답을 정할 일은 아니지. 당분간은 더 말하지 말거라.""예."시종이 식은 차를 물리고 새 잔을 놓았다. 아버지가 잔을 들며 물었다."영안공은 어떠하시더냐. 연회 끝까지 계셨다던데.""안색도 좋으셨습니다. 연회 끝까지 자리를 지
"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냐."이헌의 목소리가 낮았다. 앞에 엎드린 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송구합니다. 친척 되는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물었으나, 그 뒤로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합니다. 연고가 있다는 고을 두 곳도 사람을 보내 살폈습니다만—""없더냐.""예."이헌은 서안 위에 놓인 종이를 손끝으로 밀었다. 몇 달째 같은 자리에 같은 내용이 적혀 오는 종이였다."관청 기록은.""이주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신고도, 호적을 옮긴 흔적도 없습니다.""집은.""그대로 비어 있습니다. 다만—"사내가 잠시 말을 골랐다."이웃들 말이, 어느 날 보니 사람이 없더랍니다. 짐을 싣는 것도, 나가는 것도 본 사람이 없다고요."이헌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온 집안이 나가는데, 아무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되느냐.""저희도 그것이 이상하여 몇 번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답만 돌아옵니다."사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그 집에 셈이 남아 있던 상인이 둘 있었는데, 받으러 갔더니 이미 비어 있었다 합니다. 빚을 떼먹고 야반도주를 했다기엔, 집이 너무 깨끗했다더군요.""깨끗했다.""예. 쓰던 세간까지 정갈하게 치워져 있었다고요."이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죽었다는 소문도, 도망쳤다는 소문도 없었다. 몰락했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런 일이면 도성 안에 반드시 말이 돌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돌지 않았다.담장 너머로 웃던 얼굴이 잠깐 스쳤다가 흩어졌다."내가 태자다."이헌이 말했다."태자의 사람들이 반년을 뒤졌는데, 집 한 채가 통째로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면목이 없습니다.""다시 가라."이헌이 종이를 밀어냈다."그 집 담장 하나까지 다시 봐라. 누군가 치웠다면, 치운 자가 있을 것이다."사내가 물러난 뒤에도 이헌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찾고 싶은 마음보다, 찾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걸렸다. 누군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사람 여럿을 흔적까지 지워냈다.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