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갑자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사모님의 말은 무슨 뜻일까?’‘혹시 사모님이 뭔가 알게 된 걸까?’“사모님, 스승님과 벌써 20년을 서로 함께하셨잖아요. 스승님이 사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있다는 걸 믿으셔야 해요!” 방원호가 급히 말했다. 여인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 사랑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사랑일지 누가 알겠어.”이제 그 일을 꺼낼 때 그녀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 남자가 배신했는지 아닌지 이제는 그저 그것조차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아니요. 사모님은 자신의 눈을 믿으셔야 해요. 그리고 스승님의 인품도 믿으셔야죠.”방원호는 스승님의 인품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스승님이 아내와 가정을 배신할 사람이 될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자, 이 얘기는 잠시 미뤄두고 너희 얘기나 하자.”여인은 심미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 몇 년 동안 이룬 성과는 내가 다 알고 있어. 네 스승님이 너를 좋아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가네.” 심미연은 언제나 남들보다 뛰어난 존재였다. 그래서 그때 그녀의 남편이 심미연을 특별히 가르치고 배영했었다. “사모님...” 심미연은 다시 눈물이 나려 했고 말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제 그만 울어. 스승님은 이미 떠나셨고 더 이상 이런 얘기 하는 것도 다 의미 없어. 너희는 지금 열심히 일하는 게 스승님한테 가장 큰 보답이야.” 여인은 웃으며 말을 마쳤다.“그럼 그만 얘기하고 먼저 식사해요.”방원호가 말을 마치자 마침 그때 음식이 담긴 카트가 들어왔고 음식을 차례차례 올리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정적에 휩싸였고 창밖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마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생선 한 점을 집어 들었다. 부드러운 살결 위로 황금빛 소스가 고루 얹혀 있고 그 향은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생선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유 모를 구역질
심미연은 온지유를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온지유 너라면 벌써 겁먹고 숨어 있었을 거야. 이렇게 나올 용기도 없었어. 그러다 썩은 달걀에 너덜너덜한 채소라도 맞으면 어쩌려고?”‘강지한은 온지유한테 정말 지극정성이네. 경찰까지 물러서게 하고.’하지만 그게 오히려 그녀에게 도움이 된 셈이었다.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지며 심미연을 노려보았다. “이 일 네가 꾸민 거지? 두고 봐. 너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 심미연은 가볍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해봐. 나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가 이렇게 비참한 꼴로 사는데 심미연은 왜 그렇게 잘사는 거야?’‘대체 뭐가 잘나서!’‘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바로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온지유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받으며 한껏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한 씨.”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겨우 얼마 떨어져 있었다고 벌써 전화해?’‘잃어버릴까 봐 걱정되는 거야?’‘강지한이 언제부터 그렇게 세심한 사람이었지?’ 온지유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넣으며 심미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걸 보았다. “지한 씨가 기다리고 있거든. 난 먼저 갈게.” 명백히 심미연을 자극하려는 태도였다. 하지만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 배웅은 사양할게.”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일부러 발걸음을 더디게 옮겼다. 화장실 문턱을 막 넘어설 때 그녀의 시선이 무심한 듯 심미연의 살짝 불룩한 배를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에는 뚜렷한 조롱이 담겨 있었지만 그 속엔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도 어렴풋이 드러났다. 잠시 후 온지유는 단호한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엔 심미연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슴 속에 치솟은 불안감을 억누르며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운명은 늘 그렇듯 사람을 농락하기 일쑤였다. 문 앞에 다가갔을 때 예상치 못한 누군가
심미연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왜 가야 하지? 내가 왜 너한테 그걸 증명해야 해? 온지유, 너 진짜 웃기네.” 예전엔 강지한과 부부였으니까 임신 사실이 들통나면 강지한이 그녀를 낙태시키려 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이혼한 사이고 더 이상 강지한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온지유 같은 사람과 얽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너 검사 받으러 못 가는 거지? 이렇게 빨리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소문나면 별로 좋게 들리지도 않잖아.”온지유는 일부러 ‘다른 남자 아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강지한을 자극하려 했다. 그녀는 강지한이 화가 나면 심미연을 끌고 병원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 부채질하면 강지한이 심미연 뱃속에 있는 망할 아이를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심미연 뱃속에 그 아이만 없어지면 더 이상 그녀에게 위협이 될 게 없었다. 심미연은 온지유를 냉정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다 말했어? 다 말했으면 이제 녹음 끌게.” 온지유가 이런 식으로 뒤끝을 보이면 심미연은 바로 고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이제 그녀는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었다. 온지유는 이를 악물며 손에 쥔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의 심미연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이 년이 또 녹음했네.’‘그럼 아까 내가 한 말도 다 녹음한 거 아니야?’이어 강지한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한 씨, 저걸 봐! 얘기하는데 녹음까지 했어. 진짜 너무 교활하지 않아?” “다 말했어?” 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온지유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강지한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눈물 글썽인 채 간절하게 말했다. “지한 씨, 내가 말한 거 다 진짜야! 심미연 씨 정말 임신했어. 왜 날 믿지 않는 거야?” 그 모습은 마치 세상 모든 불행이 그녀에게 집중된 것처럼 온몸으로 억울함을 표현하려는
그가 묻는 방식은 거침없었고 심미연은 그 질문에 별다른 불쾌감은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직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사모님이었다. 그 생각에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그때 갑자기 손목이 잡혔고 뒤를 돌아보니 차가운 살기가 가득한 강지한의 눈과 마주쳤다. 심미연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불안함이 엄습했다. ‘강지한은 도대체 왜 찾아온 거야!’ 강지한이 갑자기 그녀를 잡아당기자 심미연은 비틀거리며 몇 발짝 뒤로 밀려갔다. 그 순간 남자는 그녀를 아무도 없는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방원호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이 쾅 하고 닫히며 모든 소리와 외부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방원호는 손을 뻗어 문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강지한 씨! 그 사람 내보내세요.” 심미연은 문 바로 뒤에서 몸을 문에 붙인 채 두 손은 강지한에게 위로 들어 올려져 문에 눌려 있었다. 남자의 힘은 너무 강해 마치 옷을 뚫고 그녀의 떨리는 심장까지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방원호의 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강지한 씨, 뭐 하자는 거야? 빨리 놔줘.” 그녀는 방원호에게 자신과 강지한의 관계가 밝혀지는 걸 원치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고 이제는 다시 과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강지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심미연, 대답해. 임신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떨렸으며 하나하나의 단어가 마치 이를 악물고 내뱉는 듯했다. 그 속에 묻어 있는 절박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이 일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심미연의 동공이 잠시 커졌고 그녀는 몰래 깊은숨을 들이쉬며 이 압박감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아니. 강지한, 너 온지유한테 속은 거야!” 그녀가 인정하지 않으면 강지한은 그녀를 더 이상 어쩔 수
[차 돌려! 내가 직접 가서 찾을 거야!] 강지한의 목소리는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하게 들렸다. 각 단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한 결단이 묻어났다. 심미연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곧장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경멸과 비웃음이 어우러져 있었다. ‘온지유가 일이 생기니까 직접 가서 찾겠다고?’ ‘내가 일이 생기면 온지유와 함께 있어 줬을 텐데.’ ‘사람이 다르니까 이렇게 되는 거구나.’ 강지한이 전화를 끊고 심미연의 조롱 섞인 웃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내가 또 이 여자에게 뭘 잘못했을까?’ 심미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만 풀어줘. 네 여자나 찾으러 가.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내 탓으로 돌리려고 할 거잖아.” 예전에 그녀는 그런 걸 아주 잘 떠안았다. 온지유는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 일쑤였다. 강지한은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이미 말했잖아. 온지유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심미연은 한층 더 비웃으며 말했다. “맞아. 너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지! 이제 우리는 이혼했으니까 더 이상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강지한 씨, 이제 그만하고 나 좀 보내줘.” 그녀가 여기 있으면 방원호가 분명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급박하고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며 방원호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들려왔다. “미연아, 괜찮아? 미연아, 내가 곧 문을 부술 거야. 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강지한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 속에 쌓인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강지한은 깊은숨을 들이쉰 뒤 터져 나올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심미연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턱을 거세게 움켜잡아 강제로 자신의 시선과 맞대게 했다. 그의 눈에는 반항할 수 없는 강한 빛이 어려 있었다. “강 부인께서 날 떠나고 아주 잘 지내나 봐. 주변 남자들 하나둘씩 바꿔 가면
다행히 미련을 버렸기에 이제는 이런 말을 들어도 더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방원호는 그녀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빨리 가요. 돌아가서 밥부터 먹어요.” 심미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원호를 바라봤다. 방원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다시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막 도착했을 때 사모님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네 표정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우리한테 숨기려는 거 아니야?” 사모님의 농담 섞인 한마디에 심미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고 그 움직임은 미세했지만 결연했다.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말이다. ‘지금은 절대 말하면 안 돼.’“아니에요, 사모님. 오해하셨어요.” 심미연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 휘몰아칠지도 모른다는 걸.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신중함은 곧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모님은 그런 그녀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앉으라고 옆에 있는 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일단 앉아서 밥부터 먹자.”테이블 분위기는 방금의 상황 탓에 어딘가 미묘하게 변했지만 심미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써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한입씩 넘겼지만 입안에선 음식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힘겹게 삼켜낼 뿐이었다. 식사 도중에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창밖으로 흘러갔다. 머릿속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온갖 위험한 상황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침묵만이 맴도는 어색한 식사가 계속되었다. 식사가 끝난 뒤 사모님은 옆에 두었던 정교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표면은 복잡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오랜 세월이 빚어낸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이건 네 스승님이 생전에
대답이 없자 온지유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심미연을 희생해야 한다. “왜 대답하지 않아요? 혹시 심미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제 핸드폰에 사진이 있어요. 핸드폰을 저에게 주시면 그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온지유의 말투에는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이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칠 수 없다면 심미연을 끌어들여 함께 끌고 가야 한다. 도망칠 수 있다면 심미연을 여기서 죽게 해야 한다. 한 몸에 두 목숨이라니. 그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이 심미연을 데려오기만 하면 그녀는 심미연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심미연이 죽으면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좋아! 한 번 믿어볼게! 가서 손 풀어줘.” 드디어 누군가 입을 열었고 온지유는 기쁨에 벅차 벌떡 일어나고 싶을 정도였다. 너무 좋았다.곧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풀어주었고 손목을 가볍게 풀자마자 바로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어 던졌다.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제히 같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런 생사를 거는 자들이 아닌 것처럼 매우 전문적으로 보였다. 온지유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고 잠금을 풀었다. 그 사람이 뒤를 돌려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틈을 타 급히 강지한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곧바로 삭제하고 그제야 갤러리를 열기 시작했다. 갤러리에는 심미연의 사진이 적지 않았고 대부분 몰래 찍은 것이었다. 심미연과 박유진이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사진도 있었다. 이 사진들은 그녀가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찍게 한 것들이었고 아직 강지한에게 보여줄 적절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탈출 해야만 말할 수 있었다. “이거 보세요.” 온지유는 핸드폰을 건넸다. 남자는 핸드폰을 받아 들고
‘정말 전문적이네.’ ‘그럼 사람을 처리할 때도 이렇게 전문적으로 할까?’ 온지유는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손이 묶였고 누군가가 그녀의 눈을 천으로 가렸다. 순간 그녀의 세상은 암흑으로 변했다. 가슴 속에서 이유 모를 불안이 일었다. ‘이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이때 귀에 남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한 남자가 주의를 주듯 말했다. “먼저 간다. 너희들은 저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잘 지켜.” 온지유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미연이 오기 전까지 내가 도망을 갈 리 없지.’‘난 반드시 심미연이 죽는 걸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그래야 마음이 놓이지.’온지유의 전화를 받은 후 심미연은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고 그 안에 강준형이 전해준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조심스레 금고 속에 넣었다. 두 상자가 나란히 놓였을 때 왠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며 손끝으로 상자 위를 매만졌다.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화면에 낯선 번호가 뜨자 심미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 온지유일까?’‘아니야!’ ‘온지유는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계속 전화를 걸어오는 거지?’ ‘혹시 방금 그 전화로 내 위치를 추적하려던 걸까?’ 심미연은 그 생각이 들자 등골에 오싹한 기운이 스쳤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집에 있는 게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 벨 소리가 멈추고 곧바로 다시 울렸다. 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냉정하고 감정 없이 흘러나왔다.[무슨 일이야?] 지금 심미연의 머리속엔 온통 온지유가 자신을 해치려는 생각뿐이었다. 강지한과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자기를 지켜야 했다. [기사 보낼게. 본가에 가서 지내.]강지한의 태도는 단호했다. [별일 없으면 끊을게.] 심미연은 그 말만 남기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