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녁을 먹고 나온 건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정호는 헤어지기 전까지 두 번이나 운전 조심하라고 말했다. 이재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사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도착하면 연락해라.]
“알았다고.”
혼잣말로 대답하고 차에 올랐다. 이재는 밤 운전을 좋아했다. 도로를 따라 이어진 가로등 불빛이 차창 위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풍경도 좋았고, 낮보다 한산해진 길을 오래 달리는 기분도 좋아했다.
음악 하나를 틀어놓고 앞차의 미등을 따라가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도 어느 순간 비슷한 속도로 정리됐다.
어디로 갈지만 알고 있으면 됐다. 나머지는 길이 알아서 이어졌다.
집에 도착한 뒤 정호에게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했어.]
답장은 금방 왔다.
[그래. 쉬어라.]
이재는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구두부터 벗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미뤄뒀던 우편물을 정리했다. 관리비 고지서는 챙기고 광고지는 그대로 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열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다가 사내 메신저를 확인했다. 다은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김다은 : 윤 대리님 저 자료 다시 받았습니다!]
파일 하나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이재가 열어보니 이번에는 기준 월이 제대로 맞아 있었다.
[윤이재 : 확인했어요. 고생했어요]
답장이 곧바로 왔다.
[김다은 : 이제 진짜 퇴근합니다]
이재가 시간을 확인했다.
[윤이재 : 아직 회사였어요?]
[김다은 : 수정본 기다렸어요 ㅠㅠ]
[윤이재 : 내일 봐도 됐는데]
잠시 답이 없었다.
[김다은 : 그걸 조금만 일찍 알려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재가 웃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말을 고르고 골라 건네던 사람이었다. 반나절 사이에 제법 편해진 모양이었다.
[윤이재 : 미안해요ㅋㅋ 내일 커피 살게요]
[김다은 :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이재도 짧게 인사를 보내고 메신저를 닫았다. 다음 날 오전에는 회의가 하나 있었고, 주말에는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도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조금씩 늘어갔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빠르게 모양을 갖추는 중이었다.
회사에 가면 이제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생겼고, 저녁이면 밥을 먹자고 연락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퇴근한 뒤에는 누가 정해주지 않은 시간을 온전히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그 사이에서 며칠 전의 일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첫날에는 모르는 번호가 뜰 때마다 강태혁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둘째 날에는 휴대폰을 신경 쓰는 것조차 잊었고, 사흘째에는 강태혁이 했던 이야기도 업무 중 문득 떠오르는 정도가 전부였다.
확인해보겠다고 했었다. 그 뒤 아무 말이 없다는 건, 굳이 자신에게 알릴 만한 일이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재에게는 그 해석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약을 찾지 않았다.
눈을 감은 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 뒤로도 며칠은 별다를 것 없이 흘렀다.
회사에서는 새로운 업무가 하나 더 생겼고, 점심을 같이 먹는 사람들과는 어느새 메뉴를 두고 의견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워졌다. 다은에게 약속한 커피도 사줬다. 주말에는 예정대로 혼자 영화를 한 편 봤고, 돌아오는 길에는 미뤄뒀던 생활용품까지 샀다.
집에 와서는 남은 이삿짐을 풀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옷 몇 벌을 버리고, 빈 박스를 접어 현관 옆에 쌓아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왔다.
그동안 모르는 사람이 집을 찾아오는 일도, 이상한 전화를 받는 일도 없었다.
무서운 일은 대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았다. 반대로 평범한 날들은 애써 붙잡지 않으면 금방 지나갔다. 이재는 그런 날들을 오래 바라왔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며칠 전 강태혁이 가져왔던 이야기는 그렇게 조금씩 현실감을 잃어갔다. 그리고 이재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은.
***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건 퇴근 직전이었다. 이재는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윤이재 씨.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번호가 뜰 때마다 떠올렸던 목소리였다. 막상 잊고 있으니 왔다.
“강태혁 씨?”
―네.
“제 번호도 알아냈네요.”
―네.
당연하다는 투였다. 입국 날짜까지 알아낸 사람이었다. 연락할 필요가 생겼다면 휴대폰 번호쯤은 진작 알아뒀을 것이다.
“무슨 일이세요?”
―지난번에 확인해보겠다고 했던 거.
이재의 손이 멈췄다.
―확인했습니다.
며칠 동안 제법 멀어진 줄 알았던 일이 그 한마디로 다시 가까워졌다.
“그래서요?”
―잠깐 봅시다.
“오늘요?”
―네.
이재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난번 그 카페에서 봐요. 몇 시쯤 오실 수 있는데요?”
―바로요.
“……벌써요?”
―근처라서.
통화가 끊겼다. 이재는 까맣게 변한 화면을 잠시 내려다봤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근처에 있다고 하지. 여전히 설명은 필요한 만큼만 하는 사람이었다.
이재는 잠시 태혁을 바라봤다. “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태혁이 이재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만큼 세게. 이재도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익숙한 체온과 향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반년이나 지났는데 몸은 너무 쉽게 기억해냈다. 이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태혁 씨.” “네.” “좀 세요.” 팔에 들어간 힘이 조금 풀렸다. “미안합니다.” 이재가 태혁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놓으라는 건 아닌데.” 잠시 멈췄던 팔이 다시 등을 감쌌다. 이번에는 조금 덜 세게. 이재가 웃었다. “말 잘 듣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이제 와서요?” “늦었습니까?” 이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태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재가 먼저 발끝을 들어 입을 맞췄다.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태혁은 한동안 이재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요.” “…….” “뭐 할 말 있어요?” 태혁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방금 닿았던 입술에 머물렀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이재가 웃었다. “아까부터 자꾸 아니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혁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이번에는 짧지 않았다. 반년 동안 참았던 시간을 한꺼번에 되찾으려는 것처럼 몇 번이고 입술이 겹쳤다. 이재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싸자 허리를 끌어당기는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숨이 흐트러졌다. 입술이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다. 그 사이 이재는 몇 번이나 웃었다. 태혁도 그때마다 따라 웃었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을 때 이재가 그의 턱을 만졌다. 까슬했다. “따가워.” “아까 깎고 온다고 했잖아요.” “그러게요.” “지금이라도 깎고 올까요?” 이재가 피식 웃었다. “지금은 됐어요.” “마음대로네.” “원래 그랬잖아요.” 태혁도 작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 이재는 괜히 한 번 더 입을 맞췄
태혁은 잠시 이재를 바라보다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네.” 이재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익숙한 현관에 둘만 남았다. 구두를 벗던 이재가 발밑을 봤다. 없었다. 예전에 자신의 슬리퍼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태혁의 것만 남아 있었다. 반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했다. 이재가 맨발로 올라서려는데 태혁이 신발장을 열었다. “잠깐.” 안쪽에서 슬리퍼 한 켤레를 꺼냈다. 분홍색. 이재의 슬리퍼였다. 태혁은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신어요.” 이재가 슬리퍼를 내려다봤다. “안 버렸네요.” “네.” “왜요?” 태혁이 신발장 문을 닫았다. “버릴 이유가 없어서.” 이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반년 만이었다. *** 집은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파도, 식탁도 그대로였다. “뭐 마실래요?” “물.” 태혁이 주방으로 향하다 돌아봤다. “얼마나 마셨어요?” “쪼금.” “……쪼금?” “네.” 태혁이 이재를 가만히 봤다. “그 쪼금 때문에 반년 만에 남의 집까지 온 겁니까?” 이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의 집?” 태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재가 발끝을 내려다봤다. “슬리퍼까지 꺼내주고?” “…….” “남의 집이었구나.” 태혁은 더 대꾸하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물이나 마셔요.” 이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여전했다. 태혁이 물을 가져왔다. 이재는 잔을 받아 들고 소파에 앉았다. 태혁도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반년 만인데 막상 얼굴을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네.” “태혁 씨는요?” “저도요.” 이재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살 빠졌어요?” “조금.” “바빴나 보네.” “네.” 시선이 턱에 멈췄다. “수염도 기르고.” 태혁이 턱을 한번 쓸었다. “기른 거 아니에요. 오늘 안 깎은 겁니다.” “다행이다
첫눈이 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잠깐 내려앉았던 겨울은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기온은 다시 올랐고, 길가에 남았던 눈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전부 녹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이었다. “대리님.” 다은이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표정부터 수상했다. “왜요.” “제가 저번에 추천한 영화 있잖아요.” “왜요. 환불해주게요?” “그거 평점 난리 났대요. 그래서 영화관에서도 거의 다 내렸잖아요.” “잘됐네요.” “그래서 약간 사죄의 의미로.” 다은이 두 손을 모았다. “오늘 저녁 제가 살게요.” 이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밥을요?” “네.” “영화표보다 비싼데?” “대신 술은 대리님이 사주셔야 돼요.” “그럼 사죄가 아니잖아요.” 다은이 웃었다. “싫으세요?” 이재는 잠시 생각했다. “좋아요.” “진짜요?” 다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바로 예약해요.” “업무 보고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아.” 다은이 다시 얌전히 앉았다. “네.” 이재가 웃으며 다시 모니터를 보려는데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비서실이었다. [회장님께서 잠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재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은 씨.” “네?” “먼저 내려가 있어요. 금방 갈게요.” “넵.” *** 회장실 문을 열자 윤정호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왔니.” “네.” 이재가 맞은편에 앉자 윤정호가 서류 하나를 앞으로 밀었다. “다음 달 싱가포르 건이다.” 이재는 서류를 펼쳤다. 신규 호텔 운영사와의 협의 일정이었다. 자신이 몇 달 전부터 맡아온 프로젝트였다. “일정이 길어질 것 같더구나.” “네. 현지에서 최종 협의까지 하면 일주일 정도 예상하고 있어요.” 윤정호가 이재를 바라봤다. “네가 직접 갈 생각이니?” 이재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결정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네가 갈 필요 없다.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 그렇게 통보하고 끝났을 것이다. 요즘은 달랐다.
“대리님.” 다은의 목소리에 이재가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다은은 대답 대신 창밖을 가리켰다. “우와!”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탄성이 터졌다. 이재도 창밖을 봤다. 통유리 너머로 하얀 눈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리에 닿자마자 녹아 없어지던 것이 어느새 제법 눈에 보일 만큼 많아졌다. 다은은 벌써 휴대전화를 들고 창가로 달려갔다. “첫눈이에요.” “아.” “반응이 왜 그래요?” 이재는 창밖을 한 번 더 봤다. “오늘 운전 어떻게 하지.” “…….” “길 막히겠네.” 다은이 혀를 찼다. “진짜 낭만 없다.” “눈이잖아요.” “첫! 눈이잖아요.” 이재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메일 한 통을 마저 쓰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회의가 하나 있었고, 수정해야 할 보고서가 두 개 생겼다. 첫눈이라고 별일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오후가 저물수록 눈발은 조금씩 굵어졌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에는 맞은편 건물의 불빛 사이로 흰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재가 노트북을 덮고 코트를 입자 다은이 물었다. “대리님 오늘 바로 집 가세요?” “그래야죠.” “첫눈이 온 날인데요?” 이재가 가방을 들었다. “그러니까 더 빨리 가야죠.” “와.” 다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심하다.” 이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봐요.” “네. 운전 조심하세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탔다. 시동을 켜자 내비게이션에 집까지 40여 분이 찍혔다. 평소보다 10분 정도 더 걸리는 수준이었다. 이재는 잠시 화면을 보다가 기어를 넣었다. 집으로 향하던 차는 두 번째 교차로에서 방향을 바꿨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왠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 큰맘 먹고 본 영화치고 내용은 그저 그랬다. 단지 슬픈 영화라서는 아니었다. 러닝타임 내내 사람을 그렇게 고생시켜놓고 마지막까지 불행한 건 좀
이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하기에는 미안했고, 기다리지 말라고 하기에는 마음에 남은 게 너무 많았다. 좋아하지 않아서 떠나는 게 아니었다. 그 반대라서 어려웠다. “기다리지 마요.” 태혁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이재는 그걸 보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한참 뒤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날 밤은 이상하리만큼 평범하게 지나갔다. 태혁은 거실에서 잤고, 이재는 침대에 누웠다. 처음 이 집에서 잤던 밤처럼 문을 열어두지도 않았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이재가 캐리어를 끌고 나오자 태혁은 이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칫솔도, 화장품도, 옷도 전부 캐리어 안에 들어 있었다. 이재가 신발을 신는 동안 태혁이 손잡이를 가져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재는 말리지 못했다. 복도로 나오자 캐리어 바퀴가 낮게 굴렀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태혁이 버튼을 눌렀다. 둘 사이에 캐리어 하나가 놓였다. 이재는 내려오는 숫자를 바라보다 괜히 옷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태혁이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재가 뒤따라 들어서려는데 태혁은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정말 안 데려다줘도 돼요?” “네. 경호팀이 밑에서 기다린대요.” 태혁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놓았다. “알았어요.” 이재가 안으로 들어섰다. 태혁은 문밖으로 물러났다.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문은 알아서 움직였다. “도착하면…….” 태혁이 말을 멈췄다. 이재가 고개를 들었다. 몇 초쯤 그렇게 서로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삼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연락해요.” 이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태혁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읽기 어려웠다.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좁아지는 틈 사이로 태혁이 보였
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 “십 년 전부터 의심했습니다.” 이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십 년 전부터요?” “네.” “그때부터 아빠가 표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네.” 대답은 짧았다. 이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걸 확신하게 된 건 언제예요?”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며칠 전입니다.” 며칠 전. 이재는 가만히 태혁을 바라봤다. “그럼 내가 세림호텔 얘기 물어봤을 때는요?” 태혁의 시선이 멈췄다. “그때도 이미 확인한 뒤였어요?” 잠시 후 대답이 돌아왔다. “……네.” 차 안에서 자신이 물었다. 왜 하필 우리 호텔일까요. 그때 태혁은 확인할 게 있다고 했다. 확인되면 말해주겠다고. 그보다 전에는 서진우의 아버지가 세림호텔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먼저 알아냈다. 그때도 물었다. 지금도 아무 연결이 없느냐고. 태혁은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이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한 건…….” “김현석하고 현재 사건이 어디까지 연결돼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아빠가 서진우의 표적이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요.” “……네.” 이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은 차분했다. “왜 말 안 했어요?” 태혁의 입술이 굳었다. “김현석 쪽도 더 확인해야 했고, 지금 사건과 어디까지 연결되는지 확실하지 않았어요.” “그게 다예요?” 대답이 없었다. 이재가 그를 바라봤다. “내가 알면 힘들까 봐요?” 태혁은 끝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이재는 그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도 그렇게 말했어요.” “…….” “내가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태혁의 표정이 굳었다. “아빠는 오늘 나한테 거짓말했어요.” 서진우가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직접 연락했다는 걸 숨긴 채, 몰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