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
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
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
“윤 대리님.”
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
“네.”
“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
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
“……한국인이니까요.”
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과장님.”
“어?”
“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
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진짜?”
“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
“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
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
“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
“거봐요.”
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
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
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
“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
누군가 바로 받았다.
“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
“내가 언제.”
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
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대리님 가세요?”
“네. 저는 여기까지.”
“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
“가서 안 취하면 되죠.”
“그게…… 될까요?”
“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
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렵네요, 회사.”
이재가 웃었다.
“2차 가요. 대신 집에 들어가면 잘 들어갔다고 연락 하나만 남기고.”
“네.”
“월요일에 봐요.”
횟집 문을 밀고 나오자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등 뒤에서 한꺼번에 닫혔다.
***
밤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이재는 잠깐 서서 숨을 들이마셨다.
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빨리 마신 탓인지 머리는 멀쩡한데 기분만 평소보다 두 박자쯤 앞서 있었다. 괜히 걷고 싶고, 별것도 아닌 게 조금 웃겼다.
아. 나 살짝 취했네.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사실이었다.
이재는 택시 앱을 켜 배차를 요청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록 자신을 받아주는 택시는 없었다. 근방 회사들이 죄다 오늘 회식이라도 한 건지 도로 위에는 빈 차보다 예약 표시등을 켠 택시가 더 많았다.
다시 화면을 봤지만 여전히 배차 중이었다.
이재는 눈앞을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살짝 노려봤다.
저건 또 누구를 그렇게 성실하게 데리러 가는지.
“됐어.”
괜히 심통이 난 이재는 호출을 취소했다.
조금 걸어가면 편의점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고 다시 부를 생각으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검은 차 한 대가 속도를 늦추며 앞을 지나갔다.
몇 미터쯤 간 차의 브레이크등이 켜졌다.
곧 차가 천천히 후진해 이재 앞에 멈췄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윤이재 씨.”
이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운전석의 얼굴을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몸이 창문 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강태혁 씨……인가?”
태혁의 시선이 이재에게 멈췄다.
평소에는 자신을 보는 순간부터 어딘가 단단해지던 여자였다. 말투도, 표정도, 눈빛도 늘 한 겹씩 걸쳐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조금 느슨했다.
발그레해진 뺨이며 반 박자 느린 눈까지 낯설었다.
태혁은 잠깐 이재를 바라보다 물었다.
“술 마셨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평소보다 기분 좋아 보이는데.”
“저 원래도 기분 좋은 사람인데요.”
“그런가.”
“네.”
태혁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오늘 처음 알았네.”
이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저 놀린 거예요?”
“윤이재 씨가 취해서 그렇게 받아들인 거예요.”
“저 안 취했어요.”
태혁이 앞을 보며 짧게 대꾸했다.
“아. 안 취했구나.”
분명 웃지는 않았다.
그런데 더 기분 나빴다.
이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왜 자꾸 나를 놀리는 기분이 들지…….”
태혁은 대꾸 대신 조수석을 눈짓했다.
“타요.”
“싫은데요.”
“뭐가 싫으신데요.”
“택시 탈 건데요.”
“그래요?”
태혁이 기어를 넣었다.
“그럼 그러던가.”
차가 정말 움직이려 하자 이재가 다급하게 창문을 붙잡았다.
“아, 잠깐만요.”
태혁이 멈췄다.
“왜요.”
“……택시가 안 잡혀서.”
찰칵.
조수석 잠금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쏙 들어왔다. 태혁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택시 타신다던 분치고는 태세 전환이 빠른데.”
“형사님 차를 택시라고 생각하려고요.”
“비싼데.”
“얼마인데요?”
태혁이 이재를 한번 봤다.
“나중에 받을게요.”
이재가 잠깐 멈칫했다.
“……뭘로요?”
“그건 나중에 정하고.”
차가 출발했다.
이재는 괜히 창밖을 봤다.
기분 탓인가. 아까보다 술이 조금 더 오른 것 같았다.
***
차가 큰길로 들어서자 짧은 경고음이 울렸다.
태혁이 말했다.
“안전벨트.”
이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이거였구나.”
“뭐가요.”
“아까부터 뭐가 계속 들려서요. 환청인 줄 알았어요.”
태혁이 이재를 한번 봤다.
“그 정도면 많이 취한 거 아닌가.”
“아닌데.”
이재는 뒤늦게 안전벨트를 맸다.
경고음이 사라졌다.
그러고는 차 안을 한번 둘러봤다.
“차가 꼭 강태혁 씨 차 같아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건 아닌데…… 그냥 그래요.”
“좋은 뜻은 아닌 것 같네.”
“조금 재미없다는 뜻이기는 해요.”
태혁이 슬쩍 이재를 봤다.
이재가 뒤늦게 눈치를 챘다.
“앗, 취소.”
“왜요.”
“차도 태워주시는데.”
태혁의 입가가 살짝 풀렸다.
“늦었는데.”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이재는 작게 입술을 삐죽였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늦은 서울이 유리창 너머로 흘러갔다.
한동안 그걸 바라보던 이재가 불쑥 말했다.
“서울은 좀 이상해요.”
“뭐가.”
“그냥.”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되게 많이 바뀌었는데, 안 바뀐 것 같기도 하고.”
태혁은 끼어들지 않았다.
“미국에 있을 때는 별로 생각 안 했거든요.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안 했고.”
“그런데요.”
“막상 오니까…….”
이재가 창밖을 보며 조금 웃었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기억하고 있었더라고요.”
태혁은 잠깐 이재를 봤다가 다시 앞을 봤다.
그 말이 무엇까지 포함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
“근데 아까 나 있는데는 왜 왔어요?”
“퇴근길.”
이재가 시간을 확인했다.
“금요일인데 야근한 거예요?”
“형사한테는 그런 거 없어요.”
이재가 작게 웃었다.
“진짜 재미없게 사네요.”
태혁이 고개를 돌렸다.
“나?”
갑작스러운 반말에 이재가 잠깐 눈을 깜빡였다.
“……네.”
태혁은 다시 앞을 봤다.
“차는 달리기만 하면 되고, 인생은 꼭 재미로 사는 건 아니고.”
“그럼 뭘로 사는데요?”
잠시 뒤 대답이 돌아왔다.
“필요한 거 하면서.”
이재는 옆얼굴을 잠깐 바라봤다.
참 강태혁 같은 대답이었다.
태혁이 물었다.
“그래서 집은 어디예요.”
“그것도 모르고 태운 거예요?”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이재가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그리고 주소를 알려줬다.
“미디어 시티역 앞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걸어갈 수 있어요.”
“집 앞까지 갈 겁니다.”
“왜요.”
“택시라면서요.”
태혁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비싼 택시는 문 앞까지 가요.”
이재가 피식 웃었다.
“서비스 좋네요.”
“그러니까 비싸죠.”
***
잠시 뒤 이재가 컵홀더의 빈 커피 컵을 발견했다.
“근데 야근했으면 저녁 안 먹었겠네요?”
“아직.”
“배 안고파요?”
“네.”
이재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까 태워준 비용 달랬죠.”
“그랬죠.”
“밥 살게요.”
태혁이 옆을 봤다.
“뭐 사줄 건데요.”
“우리 집 앞에 맛있는 데 있어요.”
***
차가 멈춘 곳은 이재의 오피스텔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설렁탕집이었다.
간판을 올려다보던 태혁이 말했다.
“조금 아저씨 취향이네요.”
이재가 바로 돌아봤다.
“형사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왜요.”
“아까 차 봤잖아요.”
태혁이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이재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저 미국에 있을 때도 설렁탕 자주 먹었어요.”
“의외네요.”
“왜요. 저 한식파예요.”
자리에 앉은 이재가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물론 거기서는 여기 세 배 가격이었지만.”
주문한 설렁탕이 나오고 나서야 태혁이 물었다.
“많이 그리웠겠네요.”
이재가 숟가락을 들다 멈췄다.
“설렁탕이요?”
“한국.”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재는 잠깐 국물을 바라봤다.
“……그립기도 했고.”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오기 싫기도 했고요.”
태혁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게 이재에게는 조금 고마웠다.
“지금은요?”
이재가 생각하다 국물을 한 숟갈 먹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리고 조금 웃었다.
“그래도 설렁탕은 여기가 낫네요.”
태혁의 입가가 살짝 풀렸다.
“그럼 잘 왔네요.”
“그러네요.”
별것 아닌 대화였다.
그런데 이재는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
두 사람은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이재가 먼저 물었다.
“주말에는 뭐 해요?”
“갑자기?”
“그냥요.”
“일하거나, 운동하거나.”
“그게 끝?”
“대충.”
“취미는요?”
“운동.”
“그건 방금 말했잖아요."
태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재를 봤다.
“뭘 그렇게 캐묻습니까.”
“대화하잖아요.”
“나한테 관심 있어요?”
이재가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뭐래.”
“아니면 말고.”
“사람이 밥 먹으면서 말 좀 할 수도 있죠.”
“그렇죠.”
태혁은 다시 밥을 먹었다.
“윤이재 씨는요.”
“저요?”
“주말에 뭐 하는데.”
이재가 눈을 들었다.
“왜요.”
이번에는 태혁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대화하잖아요.”
이재가 잠깐 그를 보다가 웃었다.
“영화 봐요. 혼자.”
“혼자?”
“네. 혼자 보는 게 편해요.”
“드라이브도 하고?”
이재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건 어떻게 알아요?”
“차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걸 언제 봤지.
이재가 잠깐 태혁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자신을 많이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맞아요. 밤에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그건 나랑 반대네.”
“왜요?”
“나는 목적지 없으면 운전 안 해서.”
이재가 웃었다.
“역시 재미없어.”
이번에는 태혁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로 향하자 이재가 가방을 열었다.
그보다 먼저 결제음이 울렸다.
“제가 사려고 했는데.”
태혁이 카드를 지갑에 넣었다.
“다음에 사요.”
“아까 제가 택시비 낸다고 했잖아요.”
“그럼 다음에 비싼 걸로 얻어먹죠.”
이재가 잠깐 그를 봤다.
“비싼 거요?”
“네.”
“얼마짜리 먹으려고요.”
태혁이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모범 택시보다 더 받을 생각인데요.”
이재가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양심 없네.”
“그러니까 잘 골라요.”
자연스럽게 다음이 생긴 기분이었다.
***
오피스텔까지는 차로 금방이었다.
술도 어느 정도 깬 이재는 창밖을 보다가 문득 운전 중인 태혁을 바라봤다.
늘 사건 속에서만 마주하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평범하게 운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달랐다.
신호등 불빛이 스칠 때마다 콧대와 턱선에 짧은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잘생겼네.
이재는 곧장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차가 오피스텔 앞에 멈췄다.
“여기 맞죠?”
“네.”
이재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그래요.”
“밥도... 제가 사려고 했는데.”
“다음에 사면 되고.”
이재는 차문을 열며 말했다.
“알겠어요. 다음에 엄청 비싼 거 사드릴게요.”
“기대할게요.”
태혁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갈게요.”
“들어가요.”
이재가 차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집에 들어와 씻고 침대에 앉았을 때였다.
이재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들고 메신저를 열었다.
강태혁.
잠시 이름을 보고 있다가 대화창을 눌렀다.
[오늘 고마웠어요.]
여기까지 쓰고 멈췄다.
보내기 버튼 바로 위에 엄지가 떠 있었다.
굳이?
아까 이미 고맙다고 했다.
밥도 다음에 사기로 했다.
더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한동안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재는 결국 문장을 전부 지웠다.
휴대폰을 침대 위에 엎어놓았다.
“아, 나 왜 이래.”
양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술이 문제였다.
분명히.
“미쳤나 봐.”
***
다음 날 아침.
태혁은 울리는 휴대폰에 눈을 떴다.
잠든 지 세 시간이 조금 넘었다.
박준호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말해.”
―팀장님. 성림동입니다.
남아 있던 잠이 빠르게 걷혔다.
태혁이 상체를 일으켰다.
“어디.”
준호가 주소를 불렀다.
―주택에서 신고 들어왔습니다.
“침입?”
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그 짧은 침묵이면 충분했다.
―이번에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태혁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현장 건드리지 마.”
옷장을 열어 재킷을 꺼냈다.
“지금 갈게.”
통화를 끊었다.
십 년 전에도 세 번째 집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번에도.
세 번째였다.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