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rtir

8화

Autor: 홍피코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03 12:17:13

다음 날 아침, 이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어젯밤 지하주차장에서 거의 주저앉았던 사람치고는 상당히 멀쩡한 출근이었다. 잠은 설쳤고 속은 비어 있었지만, 화장을 하고 머리를 정돈하고 사원증까지 목에 걸고 나니 어제의 난리는 제법 남의 일처럼 보였다.

사회생활이란 게 원래 그랬다.

죽을 것 같아도 다음 날 아침에는 멀쩡한 얼굴로 회의 자료를 넘겨야 했다.

“대리님, 어제 말씀하신 거 수정했어요.”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다은이 노트북을 들고 따라붙었다.

이재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화면을 받아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숫자만 반듯하게 늘어서 있던 객실 매출 비교표에 지역 행사 종료에 따른 단체 수요 감소, 프로모션 비중 변화, 예약 채널별 평균 단가까지 제법 꼼꼼한 분석이 붙어 있었다.

시키면 잘했다.

그리고 한 번 알려준 건 두 번 틀리지 않았다.

그 정도면 입사 3년 차에게 기대할 수 있는 꽤 괜찮은 장점이었다.

“잘했네요.”

다은이 눈을 들었다.

“진짜요?”

이재도 화면에서 눈을 뗐다.

“왜요. 못 믿겠어요?”

“아뇨. 그냥…….”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기분 좋아서요.”

그렇게까지 좋아하니 괜히 더 칭찬해주고 싶어졌다.

“여기 채널별 비중만 그래프로 하나 추가해요. 나머지는 이대로 보내도 될 것 같아요.”

“네.”

다은이 노트북을 받아 들더니 잠깐 머뭇거렸다.

“대리님.”

“네?”

“제가 커피 사드려도 돼요?”

“갑자기요?”

“기분 좋아서요.”

이재가 잠깐 웃었다.

“비싼 거 마셔도 돼요?”

다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너무 비싼 건 말고요.”

“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계산대 앞에서는 자기가 카드를 내밀 생각이었다.

시킨 일을 제대로 해온 데다 칭찬 한마디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기특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손에 든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Chloe.

[You alive?]

(살아 있어?)

이재의 입꼬리가 먼저 움직였다.

뉴욕의 시간은 아직 어제였다.

시계를 보니 퇴근을 마치고 팀원들끼리 맥주라도 한잔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클로이는 이재가 이제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여전히 성실하게 전 직장의 소식을 보내오곤 했다.

[Barely.]

(간신히.)

[Work already killing you?]

(벌써 회사가 널 죽여?)

[Not yet.]

(아직은.)

[Give it time.]

(좀 기다려봐.)

곧이어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예상대로 호텔 근처 펍이었다.

클로이와 낯익은 동료 둘이 테이블에 붙어 앉아 있었고, 잔은 이미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사진 한쪽에는 이재가 좋아하던 메뉴까지 보였다.

[We ordered your favorite.]

(네가 좋아하던 거 시켰어.)

[Without me?]

(나 없이?)

[That’s the point.]

(그러려고.)

[Die.]

(죽어.)

[Miss you too.]

(나도 보고 싶어.)

이재가 피식 웃었다.

“오.”

옆에 있던 다은이 사진을 슬쩍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누구예요?”

“뉴욕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들이요.”

다은이 사진과 이재를 번갈아 봤다.

“신기해요.”

“뭐가요?”

“외국인 친구들 있는 거요. 뭔가…… 부러워요.”

이재가 웃었다.

“같이 일하다 보면 안 친해질 수가 없어요.”

특히 야간 근무와 진상 고객까지 몇 번 함께 겪고 나면 더 그랬다.

사진 속 세 사람은 이재가 떠나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퇴근 직전 같이 욕하고, 쉬는 날이면 별 목적도 없이 차를 몰고 나가던 얼굴들.

십 년 동안 미국에 있었으니 그곳에도 당연히 자신의 생활이 있었다.

다시 메시지가 올라왔다.

[Come visit before we forget your face.]

(우리 네 얼굴 까먹기 전에 놀러 와.)

이재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

[Miss you guys.]

(다들 보고 싶어.)

하트가 하나.

우는 얼굴이 둘.

욕이 하나.

클로이의 애정 표현은 여전히 조금 거칠었다.

“친구분들 보고 싶으시겠어요.”

다은의 말에 이재가 사진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응. 보고 싶네요.”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그곳에서의 십 년이 싫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평온했고, 익숙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캐묻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편하기까지 했다.

다만 한국에 돌아와 며칠을 보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미국은 잘 만들어놓은 생활이었고, 한국은 좋든 싫든 자신의 삶이 시작된 곳이었다.

도망치듯 떠났으니, 한 번쯤은 제 발로 돌아와 살아보고 싶었다.

***

점심 무렵, 회의실에서 나온 이재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중 자신의 아버지 윤정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윤정호는 아주 잠깐 딸을 바라보더니 고개만 가볍게 까딱했다.

딱 회사에서 마주친 직원에게 할 법한 인사였다.

이재도 얌전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스쳐 지나갔다.

조금 웃긴 건 아버지의 입매가 평소보다 살짝 굳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며칠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먼저 부탁한 건 이재였다.

―아빠, 회사에서는 나 아는 척하지 마요.

윤정호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딸을 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빠가 나한테 말 걸면 주변 사람들이 다 도망치는 거 못 봤어요?

―내가 내 딸한테 말도 못 거나.

―알겠어. 그럼 인사만. 다른 직원들한테 하는 만큼.

한동안 마뜩잖은 표정으로 이재를 바라보던 윤정호는 결국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정말로 인사만 했다.

이재는 몇 걸음 더 가다 휴대폰을 꺼냈다.

[삐지셨어요?]

곧 메시지가 읽음 표시로 바뀌었다.

그런데 답은 없었다.

이재는 휴대폰을 그대로 손에 든 채 사무실 쪽으로 걸었다. 복도 하나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설 때까지도 화면에는 읽음 표시만 얌전히 남아 있었다.

답장이 도착한 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아니다.]

안 삐진 사람이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안 삐졌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재는 웃으며 답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두 층쯤 올라간 뒤 답이 왔다.

[너도 챙겨 먹어.]

그 정도면 됐다.

***

하루 종일 달궈졌던 도시는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조금 숨을 죽였다.

건물을 나선 이재는 서늘해진 공기를 한 번 깊게 들이마시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제 일이 생각났다.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불쑥 끼어들던 손.

김현우의 당황한 얼굴.

그리고.

―저 새끼 누구예요.

전화기 너머로 낮게 가라앉았던 목소리.

강태혁은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나타났다.

평소와 다른 옷차림에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주변보다 먼저 자신부터 찾았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상당히 급하게 온 모양이었다.

이재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

강태혁은 늘 필요한 만큼만 말했다. 그마저도 듣기 좋은 종류는 아니었지만.

그런데 이상하게 행동은 그 반대였다.

오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는 선을 긋고, 정작 필요할 때는 묻기도 전에 와 있었다.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재는 차 문을 열며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

태혁의 휴대폰이 네 번째 울렸다.

발신자는 강유진.

세 번째까지 넘긴 태혁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들어갔다. 급한 일이면 메시지부터 남겼을 누나였다.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목숨이 오가는 일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문을 닫고 전화를 받았다.

“왜.”

―너 살아 있어?

“어.”

―엄마가 실종신고 한대.

태혁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하라 그래.”

―어디다?

“경찰.”

―너 경찰이잖아, 미친자식아.

“빨리 찾아주겠네.”

―엄마 전화 좀 받아.

“바빴어.”

―오늘 집에 와. 밥 해놨대.

“나 오늘 늦어.”

―늦게라도 와.

잠깐 벽시계를 확인한 태혁이 컵을 들었다.

“알았어.”

―엥? 온다고?

“응.”

이번에는 유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별일 없지?

태혁은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없어.”

―알겠어. 이따 봐.

“어.”

통화가 끝났다.

자리로 돌아오자 준호가 추가로 확보된 CCTV를 띄워놓고 있었다.

“1차 사건 전후 영상 더 왔습니다.”

태혁은 곧장 의자를 당겨 앉았다.

화면 속 남자는 여전히 얼굴을 남기지 않았다.

첫 번째 집에서도.

두 번째 집에서도.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접근 방식.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주변을 살폈고, 안에서는 가족사진과 동거인, 귀가 시간을 확인했다.

닮은 점은 늘어나는데 두 피해자를 잇는 선은 아직 없었다.

통화 기록과 금융 거래.

병원.

보험.

직장.

하나씩 겹쳐보았지만 같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태혁이 영상의 재생 속도를 낮췄다.

“여기.”

준호가 화면을 멈췄다.

“흰색 세단이요?”

“앞에도 있었어.”

십여 분 전까지 되돌리자 같은 차가 한 번 더 걸렸다.

번호판은 보이지 않았다.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확인해야 했다.

“동선 더 따라가.”

“네.”

준호가 곧장 다른 영상을 열었다.

그 뒤로 한참 더 화면을 돌렸지만 새로 잡히는 건 없었다.

준호가 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팀장님.”

“왜.”

“오늘 집에 가신다면서요.”

태혁의 시선이 옆으로 갔다.

“너 나 스토킹하냐?”

준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걸로 하죠.”

태혁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취향 특이하네.”

“들어가세요. 남은 건 제가 더 볼게요.”

태혁은 시간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량 동선부터 보고. 번호 잡히면 바로 조회 돌려.”

“네.”

“뭐 나오면 바로 보내고.”

“네네.”

태혁은 재킷을 걸쳤다.

준호가 잠깐 그를 보다가 말했다.

“이렇게 빨리 가시는 거 몇 달만 아닙니까?”

태혁은 대답 대신 책상 위 서류 하나를 준호 쪽으로 밀었다.

“여유 있나 보네.”

준호의 표정이 굳었다.

“아닙니다.”

“일이나 해.”

태혁은 그대로 나갔다.

***

본가 문을 열자 부엌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왔니?”

“네.”

“손 씻고 와.”

“네.”

소파에 앉아 있던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실종신고 취소해야겠다. 제 발로 걸어들어왔네.”

태혁은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허위신고는 중대범죄야.”

“아직 접수 안 했어.”

“다행이네.”

그걸로 끝이었다.

손을 씻고 나오니 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태혁이 자리에 앉자 어머니가 된장찌개를 앞으로 밀어줬다.

“아버지는요?”

“모임. 늦는대.”

태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곧 생선살 한 조각이 밥 위에 올라왔다.

어머니가 발라준 것이었다.

태혁은 그대로 먹었다.

조금 뒤에는 계란말이가 올라왔다.

이번에도 말없이 먹었다.

유진이 맞은편에서 그걸 보고 웃었다.

“엄마한테는 잘하네.”

태혁이 누나를 한번 봤다.

“누나 말도 가끔 들어.”

“언제?”

“오늘.”

유진의 눈이 잠깐 멈췄다. 

“그건 그러네."

유진은 더 묻지 않고 태혁 쪽으로 멸치볶음 접시를 밀어줬다.

“이것도 먹어. 너 좋아하잖아.”

태혁이 젓가락을 뻗었다.

“응.”

유진은 TV를 보면서도 그가 생선가시를 한쪽에 몰아놓는 걸 보더니 빈 접시 하나를 가까이 밀어줬다.

이 집에서는 대개 그런 식이었다.

챙긴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고도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대충 알고 있었다.

태혁의 어머니 한주은은 맞은편에 앉은 아들을 잠깐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손이 안 가는 아이였다.

공부하라는 말을 하기 전에 책상에 앉았고, 밤이 늦으면 오히려 그만하고 자라고 말려야 했다. 학교를 가도, 대학을 가도 돌아오는 평가는 늘 비슷했다.

성실하다.

잘한다.

걱정할 게 없다.

그러니 졸업하고도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적당히 좋은 직장을 구하고, 남들처럼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는 삶.

태혁이 처음 그 예상을 벗어난 건 대학 졸업을 앞두고서였다.

―경찰 시험 볼 거예요.

주은은 농담인 줄 알았다.

―네가?

―네.

―갑자기 왜?

태혁은 그때도 지금처럼 별일 아닌 얼굴이었다.

―갑자기는 아니에요.

이미 혼자 알아보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허락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알려주러 온 것이었다.

평생 말썽 한번 피운 적 없는 아들이 처음 자기 뜻대로 고른 길이었다.

부모는 결국 말리지 못했다.

경찰이 된 뒤에는 현장과 수사 업무를 거쳐 형사가 됐다.

잘한다는 소리는 거기에서도 들렸다.

잘할수록 집에서 볼 일은 줄었지만.

“엄마.”

주은이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응?”

태혁의 밥그릇이 거의 비어 있었다.

“밥 더 줄까?”

잠깐 망설이던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요.”

주은은 반 공기쯤 더 퍼줬다.

태혁은 자기가 생각한 ‘조금’과는 분명 달랐겠지만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맞은편에서 유진이 웃었다.

“많은데.”

“그래도 먹어. 엄마가 준건데.”

유진의 말이 어쩐지 놀리는 것 같아 태혁이 고개를 들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유진은 동생 앞의 빈 국그릇을 가져다 한 번 더 데워왔다.

***

한 시간쯤 뒤, 태혁은 다시 현관에 서 있었다.

올 때는 빈손이었는데 나갈 때는 반찬 봉투가 양손에 하나씩 들려 있었다.

안을 확인한 태혁이 말했다.

“이걸 언제 다 먹어요. 혼자 사는데.”

“아침에도 먹고 저녁에도 먹어.”

“네.”

반박은 거기까지였다.

주은이 과일까지 넣으려 하자 유진이 옆에서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사과는 나 줘. 얘 잘 안 먹잖아.”

“그래?”

“응. 대신 이거 가져가.”

유진은 냉장고에서 작은 반찬통을 꺼내 태혁의 봉투에 넣었다.

“장조림. 어제 했어.”

태혁이 반찬통을 한번 내려다봤다.

“누나가?”

“응.”

잠깐의 침묵 뒤.

“잘 먹을게.”

유진이 오히려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웬일로 멀쩡하게 말하나 해서.”

태혁은 대꾸하지 않고 봉투 손잡이를 정리했다.

유진이 옆에서 한쪽 매듭이 느슨한 걸 보고 대신 고쳐 묶었다.

“운전하다 쏟지 말고.”

“응.”

“통은 다음에 줘도 돼.”

“다음에 올 때 줄게.”

그 말에 유진이 손을 멈췄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주은이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운전 조심하고.”

“네.”

“전화도 좀 받고.”

“받을게요.”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문을 닫기 전 태혁은 누나를 한번 봤다.

“잘 가.”

유진이 먼저 말했다.

태혁은 고개를 까딱했다.

“응.”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호였다.

[흰색 세단 동선 추가 확인 중입니다. 아직 번호는 안 잡혔습니다.]

[내일 이어서 해.]

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껐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층수를 눌렀다.

―운전 조심하고.

조금 전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 닫힘 버튼에 손을 올리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그 뒤를 이어왔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윤이재.

태혁의 손이 잠깐 멎었다.

어제는 자기가 먼저 물었다.

집에 들어갔느냐고.

오늘은 별일이 없었다.

그러니 연락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이 조금 싱거웠다.

태혁은 엘리베이터 문에 희미하게 비친 자기 얼굴을 보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

성림동의 밤은 일찍 잠잠해졌다.

길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한 남자가 주택 한 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이 켜진 창은 두 개였다.

거실.

안방.

조금 전 현관문이 열렸고, 중년 남자 하나가 택배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들어갔다.

차 안의 남자가 휴대폰 화면을 켰다.

7:13.

어제와 귀가 시간이 거의 같았다.

같은 차.

같은 사람.

오늘도 혼자였다.

남자는 짧게 메모를 남겼다.

조수석에는 작업복 한 벌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그 위에 작은 장비 가방이 놓여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아니었다.

오늘은 확인만 하면 됐다.

누가 사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혼자인 시간이 언제인지.

남자는 다시 창문 너머의 집을 바라봤다.

잠시 뒤 안방의 불이 꺼졌다.

조금 더 지나 거실까지 어두워졌다.

충분했다.

남자는 휴대폰 화면을 잠그고 시동을 걸었다.

차가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주택은 다시 조용해졌다.

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도 자신이 관찰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모르는 편이 나았다.

내일까지는.

Continúa leyendo este libro gratis
Escanea el código para descargar la App

Último capítulo

  • 다정한 지옥   14화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 다정한 지옥   13화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 다정한 지옥   12화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 다정한 지옥   11화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 다정한 지옥   10화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 다정한 지옥   9화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Más capítulos
Explora y lee buenas novelas gratis
Acceso gratuito a una gran cantidad de buenas novelas en la app GoodNovel. Descarga los libros que te gusten y léelos donde y cuando quieras.
Lee libros gratis en la app
ESCANEA EL CÓDIGO PARA LEER EN L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