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강태혁은 이재가 내려준 자리에서 몇 걸음 걸어 자기 차 앞에 섰다.
건물 입구 한쪽에 비스듬히 붙어 있는 검은 세단.
주차선은 없었다.
불법 주차였다.
형사가 불법 주차라니.
급하게 올라오느라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처박아둔 결과였다.
태혁은 운전석 문을 열면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이재의 차는 이미 진입로 끝을 돌아 사라진 뒤였다.
―안 타요?
차 있는 데까지 태워주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위라고 말했으면서 결국 얻어탔다.
태혁은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리려다 잠시 멈췄다.
통화 기록 맨 위에 이름이 남아 있었다.
윤이재.
먼저 전화한 건 처음이었다.
―숨이…….
그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손 하나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 순간 이재는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태혁은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거치대에 꽂았다.
로비에서 이재를 만났을 때는 상태만 봤다.
다친 곳이 있는지.
호흡은 돌아왔는지.
혼자 운전해도 되는지.
그게 전부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런데 지금 와서 이상하게 다른 게 남았다.
조금 전 운전석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얼굴.
겁을 먹은 뒤라 평소보다 더 창백했을 것이다.
그래도 유난히 희었다.
검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작은 얼굴은 아무 말 없이 있으면 꽤 여린 인상이었다.
눈 밑에 작게 찍힌 점 하나까지 눈에 들어올 만큼.
그러다 눈을 들면 인상이 달라졌다.
―진짜 재수 없어.
그 말을 할 때도 얼굴은 여전히 희었는데 눈에는 제법 힘이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운전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것까지는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사람 얼굴을 왜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지.
태혁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시동을 걸었다.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호였다.
“왜.”
―팀장님, 어디세요?
“가는 중.”
―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으셔서요.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습니다.
“용건.”
준호는 익숙하다는 듯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첫 번째 피해자 쪽 CCTV 추가 확보했습니다. 통화기록도 왔고요.
“자료 정리해둬.”
―지금 들어오십니까?
“어.”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었다.
태혁은 차를 출발시켰다.
***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야간 근무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퇴근한 뒤였다.
준호가 태혁의 자리 옆에서 종이컵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셨습니까.”
태혁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영상.”
“여기 있습니다.”
모니터에는 첫 번째 사건 당일 CCTV가 떠 있었다.
오후 두 시 십칠 분.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화질이 좋지 않았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태혁이 재생 속도를 낮췄다.
남자는 피해자의 집으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서 한 번 멈췄다.
주변을 훑고.
건너편 건물을 올려다봤다.
다시 걷는다.
“앞쪽 카메라는.”
“상가 CCTV 받아왔습니다.”
“같이 띄워.”
준호가 두 번째 영상을 열었다.
십이 분 전.
같은 체격의 남자가 화면 끝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골목으로 들어왔다.
태혁이 영상을 멈췄다.
“여기부터 다시.”
영상이 처음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골목을 지나며 집들을 살폈다.
창문.
공동현관.
주차된 차량.
어느 한 곳에 눈에 띄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십여 분 뒤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검침원 차림이었다.
준호가 말했다.
“사전에 동선 확인한 걸까요.”
“가능성은 있지.”
“두 번째 사건도 같은 식으로 보겠습니다.”
“어.”
준호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태혁은 첫 번째 영상을 다시 돌렸다.
한 번.
두 번.
남자의 동선을 머릿속에 넣었다.
첫 번째 사건.
두 번째 사건.
거짓 신분.
집 안을 살핀 행동.
가족사진.
같이 사는 사람.
귀가 시간.
겹치는 부분은 늘었다.
하지만 아직 그뿐이었다.
왜 지금인지.
왜 그 집들인지.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
잡힌 건 없었다.
태혁은 영상을 멈췄다.
“앞뒤 한 시간씩 더 확인해.”
“네.”
“차량도 봐. 같은 번호 반복해서 잡히는지.”
“알겠습니다.”
준호가 메모하다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
“아까 나가신 건 윤이재 씨 때문이었습니까?”
태혁의 시선이 화면에서 떨어졌다.
“왜.”
“혹시 이쪽 사건이랑 관련된 일인가 해서요.”
준호가 태혁의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본 모양이었다.
하긴.
남들이 놓친 몇 초짜리 장면을 들여다보는 게 직업인 인간이었다.
태혁은 짧게 대답했다.
“아니야.”
“네.”
“사건이랑 상관없어.”
준호는 그걸로 끝냈다.
질문이 더 이어지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다시 키보드 소리만 이어졌다.
태혁도 화면으로 돌아갔다.
십 분.
이십 분.
영상을 몇 번이고 되감았다.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가능성만 하나 더 높아졌다.
그 이상은 없었다.
한참 뒤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사 오겠습니다. 드실 겁니까?”
“아메리카노.”
“아이스요?”
“어.”
준호가 사무실을 나갔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태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목덜미를 한번 문질렀다.
모니터 한쪽에는 십 년 전 사건 기록이 함께 떠 있었다.
현장 기록.
피해자 목록.
당시 작성된 서류.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잠깐 멈췄다.
윤이재.
열여덟.
태혁은 몇 초간 이름을 보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십 년 전의 이재와 지금의 이재는 좀처럼 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 속에는 얼굴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의 상황이 먼저였다.
문.
피.
구급대원.
그리고 들것 위에서 눈을 감은 어린 여자애.
그런데 지금의 윤이재는 달랐다.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조수석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가까이 있던 얼굴.
하얗고 작은 얼굴에 눈만 또렷했다.
가만히 있으면 얌전해 보였고.
조금만 눈을 가늘게 뜨면 금세 성질이 있어 보였다.
자신을 볼 때는 대체로 후자였다.
태혁은 문득 생각했다.
그래서 그 신입이 기다렸나.
그 생각이 들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고 퇴근 시간도 한참 지난 지하주차장에서 사람 차 앞에 죽치고 앉아 기다린다는 발상까지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이었다.
더군다나 윤이재가 차를 지나치는데 따라붙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까지 손으로 잡아 열었다.
태혁은 무심코 혀끝으로 안쪽 볼을 눌렀다.
김현우.
기획조정실 신입.
이름까지 다시 떠올랐다.
그 순간 손이 멈췄다.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름이었다.
태혁은 화면에 떠 있는 수사 기록을 보다가 짧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유난히 집중력이 형편없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준호가 돌아왔다.
책상 위로 커피 한 잔이 놓였다.
“팀장님.”
“왜.”
“커피요.”
“알아.”
준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태혁은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제야 머릿속이 다시 사건 쪽으로 돌아왔다.
이쪽이 훨씬 익숙했다.
***
새벽 한 시를 넘기고서야 사무실 불을 껐다.
두 사건 모두 범인이 현장에 들어가기 전 주변을 살핀 정황은 있었다.
적어도 즉흥적인 접근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 이상은 아직이었다.
태혁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올라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자 화면이 켜졌다.
업무 알림 몇 개.
뉴스.
메시지.
특별한 건 없었다.
태혁은 시동을 걸었다.
그러다 화면 상단의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오전 1시 14분.
이재와 헤어진 지도 세 시간 가까이 지났다.
진작 집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직접 운전하는 걸 봤고.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도 확인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까지 했다.
애매하면 무조건.
혼자 판단하지 말고.
그러면 끝이었다.
태혁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몇 초 뒤.
다시 들었다.
연락처를 열었다.
윤이재.
메시지 창으로 넘어갔다.
[집에는 들어갔어요?]
전송.
보내고 나서야 손가락이 멈췄다.
굳이?
사건과 관련된 질문도 아니었다.
신변보호 중인 것도 아니고.
이재가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는 건 별일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태혁은 화면을 껐다.
오늘 상태가 안 좋았으니까.
확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리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네. 들어왔어요.]
짧았다.
태혁은 화면을 내려놓으려 했다.
곧 메시지가 하나 더 올라왔다.
[설마 아직도 일해요?]
손이 멈췄다.
[이제 나가요.]
십여 초쯤 뒤 답이 왔다.
[늦었네요.]
조금 있다가 한 줄이 더 붙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태혁은 그 문장을 잠깐 봤다.
별것 아닌 인사였다.
오늘 자신이 이재에게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네.]
답은 그것뿐이었다.
보내고 보니 지나치게 딱딱한가 싶었다.
그 생각이 든 것부터가 조금 이상했다.
태혁은 더 쓰려던 손을 거뒀다.
원래 이 정도면 됐다.
휴대폰을 거치대에 끼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자 한산한 도로가 이어졌다.
첫 번째 신호에 걸렸을 때였다.
태혁은 별생각 없이 휴대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새 연락이 올 이유도 없었다.
대화는 이미 끝났다.
그걸 알면서 확인했다.
신호가 바뀌었다.
태혁은 다시 앞을 보고 차를 움직였다.
오늘 머릿속을 가장 오래 차지한 건 당연히 사건이어야 했다.
두 개의 집.
같은 방식의 접근.
십 년 전의 기록.
그런데 그 사이로 자꾸 다른 장면이 끼어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던 이재.
희고 작은 얼굴.
눈 밑의 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가늘어지던 눈.
그런 것들은 굳이 기억해둘 필요가 없는 정보였다.
그런데도 남아 있었다.
태혁은 무심코 미간을 문질렀다.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건지.
볼 생각이 없었던 건지.
그 차이가 조금 걸렸다.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