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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밤의 시식

작가: 6jay
last update 게시일: 2026-08-15 09:32:12

칼릭스는 잠들지 못했다.

그는 원래 잠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작은 발소리, 문틈의 바람, 멀리서 부딪히는 금속음에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하지만 오늘의 불면은 전장 때문이 아니었다.

맛 때문이었다.

노란 맛.

따뜻한 단맛.

구운 고기의 뜨거움.

그리고 엘리제가 포크를 들고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던 순간.

칼릭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손목에 닿았던 감촉. 사형 직전이라 떨린다고 말하면서도 눈은 흔들리지 않던 얼굴. 먹여주던 손끝.

맛이란 원래 이런 식으로 남는 것인가. 혀가 아니라 손끝에, 입안이 아니라 눈앞에.

칼릭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쾌하지 않다.'

그는 그 감각을 그렇게 분류했다.

불쾌하지 않은 것.

조금 더 알고 싶은 것.

사라지면 곤란할 것 같은 것.

이름은 아직 없었다.

***

엘리제는 주방에서 남은 빵을 먹고 있었다.

정확히는 먹다 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일 황실 미식회 준비를 위해 공작가 식재료 목록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각종 곡물, 북부산 고기, 말린 허브, 꿀, 산미 열매, 포도주 식초. 이 세계의 식재료는 낯설었지만, 냄새와 구조를 알면 응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황실이었다.

황실 미식회는 요리 대회가 아니라 권력의 식탁일 가능성이 크다. 독살 누명을 쓴 엘리제가 그 자리에 선다? 분명 누군가는 그녀를 다시 떨어뜨리려 할 것이다.

엘리제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오늘 아침 조식용으로 남은 빵이었다. 바삭함은 사라졌지만, 곡물의 고소한 향은 남아 있었다.

그때 주방 문이 열렸다.

엘리제는 고개를 들었다.

칼릭스였다.

그는 밤의 주방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이상했다. 검은 옷, 창백한 얼굴, 조용한 발소리. 꺼진 화구들 사이를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밤 그 자체 같았다.

엘리제는 빵을 든 채 물었다.

"공작님, 이 시간에 또 손님이십니까?"

"혼자 먹나."

"이 빵요?"

"그래."

"드실래요?"

그녀는 무심코 빵 조각을 내밀었다.

그러고 나서야 멈칫했다.

계약서 때문인지, 어제 처형장 때문인지, 칼릭스의 시선이 빵이 아니라 그녀의 손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엘리제는 뒤늦게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칼릭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세게는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이번엔 안 떨리는군."

엘리제는 그를 보았다.

"사형 직전이 아니니까요."

"그럼 그때는 정말 무서웠나."

"당연하죠."

"그런데 왜 웃었지?"

엘리제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이상하게 정직했다.

사형장 앞에서 왜 웃었나.

비웃음인가, 허세인가, 미친 건가.

아마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엘리제는 빵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무서워도 접시는 내야 하니까요."

칼릭스의 손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 말이 그에게 이상하게 남았다.

무서워도 접시는 낸다.

전장에서 무서워도 검을 든다는 말과 비슷한 듯하면서 달랐다. 검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들고, 접시는 누군가에게 먹이기 위해 낸다. 그런데 그녀에게 그 둘은 같은 무게로 보였다.

"그런가."

칼릭스가 낮게 말했다.

"네."

엘리제는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이제 놓으시겠습니까?"

칼릭스는 손을 놓았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손에 남아 있었다.

엘리제는 일부러 빵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드실 거면 제대로 드세요. 남은 빵이라 상태가 좋진 않지만요."

"상관없다."

"상관있습니다. 셰프 앞에서 그런 말 금지입니다."

칼릭스는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엘리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빵을 조금 데웠다. 화구를 아주 약하게 켜고, 팬에 빵을 올렸다. 표면이 다시 살짝 바삭해질 때까지. 물을 아주 조금 뿌려 속을 되살렸다.

빵 냄새가 주방에 퍼졌다.

구운 곡물.

식은 빵이 다시 숨을 쉬는 냄새.

엘리제는 빵을 접시에 담아 칼릭스 앞에 놓았다.

"이건 정식 요리가 아니라 야식입니다."

"야식."

"밤에 먹는 작은 식사요."

"그건 좋은 단어군."

"공작님은 단어도 맛보시나요?"

"요즘은 그런 것 같다."

엘리제는 웃었다.

그는 빵을 집었다.

이번에는 스스로 먹었다.

천천히 씹었다.

"낮보다 다르다."

"당연하죠. 식은 빵을 다시 데운 거니까요."

"그런데 나쁘지 않다."

"그건 좋은 빵이라는 뜻입니다. 식어도 살릴 수 있으면요."

칼릭스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너도 그런가."

엘리제의 손이 멈췄다.

"뭐가요?"

"죽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살아났다."

"저를 식은 빵에 비유하시는 겁니까?"

"그런가."

엘리제는 어이없어 웃었다.

"공작님, 여자에게 그런 비유는 조심하세요."

"왜."

"보통은 칭찬으로 안 받아들입니다."

칼릭스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좋은 빵이라고 말했다."

엘리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주방에 작은 웃음이 퍼졌다.

칼릭스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웃음도 맛이 있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듣고 싶었다.

***

엘리제는 칼릭스의 반응을 기록했다.

밤에 데운 빵.

식은 빵 대비 향 회복.

칼릭스 반응, 낮과 다름 인지.

그녀가 기록하는 사이 칼릭스는 주방을 둘러보았다.

"너는 주방에 있으면 달라진다."

"그런가요?"

"그렇다."

"어떻게요?"

"살아 있는 것 같다."

엘리제의 펜끝이 멈췄다.

살아 있는 것 같다.

그 말은 이상하게 깊었다.

"그럼 평소엔 죽어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

칼릭스는 즉시 답했다.

"평소에는 버티는 것 같다."

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정말 이상하게 정확했다.

그녀는 이 세계에 온 뒤 계속 버티고 있었다. 사형장에서, 계약서 앞에서, 낯선 성에서, 모두의 시선 속에서. 주방에 있을 때만 잠시 살아난다.

칼릭스는 그것을 본 것이다.

엘리제는 시선을 기록지에 박았다.

"공작님, 사람을 너무 많이 보시면 피곤합니다."

"피곤하지 않다."

"그럼 제가 피곤합니다."

칼릭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 덜 보겠다."

그 대답이 너무 순순해 엘리제는 오히려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네가 피곤하다면."

그 말이 또 이상하게 따뜻했다.

엘리제는 괜히 빵 접시를 정리했다.

"그런데 덜 보면 미각 재활 기록이 부정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보겠다."

"방금 덜 보겠다면서요."

"필요하면 본다."

"공작님은 정말 자기 합리화가 빠르시네요."

칼릭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빵을 한입 더 먹었다.

"북부에서는 적응이 중요하다."

"그 말 너무 자주 쓰시는 거 아닙니까?"

"유용하다."

엘리제는 작게 웃었다.

그녀는 웃다가 문득 깨달았다.

사형장에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자신은 이 남자 앞에서 웃고 있다.

그 사실이 조금 무서웠다.

가까워지는 건 위험하다.

계약 상대는 언제든 목숨줄을 쥔 사람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칼릭스는 공작이고, 그녀는 누명을 벗지 못한 악녀다. 이 관계는 안전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가 자신의 괜찮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가 손을 잡을 때, 짜증보다 먼저 심장이 반응하는 것도 문제였다.

엘리제는 속으로 말했다.

'정신 차려. 강서진. 아니, 엘리제.'

살아남아야 한다.

설레는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칼릭스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공작님을 어떻게 재활시킬지요."

"거짓말."

"왜 매번 맞히세요?"

"네 눈이 주방에서와 다르다."

엘리제는 항복하듯 손을 들었다.

"좋습니다. 조금 복잡한 생각이었습니다."

"나 때문인가."

"반쯤은요."

칼릭스의 시선이 고정됐다.

"그건 좋은가, 나쁜가."

엘리제는 잠시 고민했다.

"아직은 위험합니다."

"위험한 맛인가."

"아주요."

칼릭스는 그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그럼 기록해라."

"뭘요?"

"엘리제는 나를 위험한 맛으로 분류했다."

엘리제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기록은 안 합니다."

"왜."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요."

칼릭스는 그녀의 웃음을 보며 빵을 내려놓았다.

"후회."

"네. 사람은 가끔 너무 솔직하게 기록하면 후회합니다."

"나는 후회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것도 나중에 배우실 겁니다."

"네가 가르치나."

"아마도요."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배우겠다."

그 말에 엘리제는 또 잠시 멈췄다.

이 남자는 모르는 게 많다.

하지만 모른다고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배우겠다고 한다.

맛도, 감정도, 낯선 단어도.

그게 이상하게 마음을 끌어당겼다.

***

밤의 시식은 빵 한 조각으로 끝나지 않았다.

엘리제는 남은 꿀물에 산미 열매 껍질을 아주 조금 넣어 따뜻하게 데웠다. 단맛과 산미가 섞인 가벼운 차였다. 칼릭스는 그것을 천천히 마셨다.

"이건 단맛과 다른가."

"산미가 들어갔으니까요."

"혀가 깨어나는 느낌이다."

"좋아요. 그 표현도 기록하죠."

엘리제는 적었다.

산미 반응. 혀가 깨어나는 느낌.

칼릭스가 말했다.

"네가 웃을 때도 비슷하다."

펜끝이 다시 멈췄다.

"공작님."

"말해라."

"그런 식으로 아무거나 제게 연결하지 마세요."

"아무거나가 아니다."

"그럼요?"

"내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아직 적다. 네가 그중 하나다."

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서툴렀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했다.

마치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감정이 그녀의 앞에 작은 그릇으로 놓인 것 같았다.

엘리제는 그 그릇을 열어보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칼릭스는 그녀를 보았다.

"이번에도 도망치는군."

"전략적 후퇴라고 했잖아요."

"기억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주방 문 앞에서 멈췄다.

"엘리제."

"네."

"황실 미식회에 가면."

엘리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위험하다.

가지 마라.

도망쳐라.

그런 말.

그러나 칼릭스는 다른 말을 했다.

"무서우면 말해라."

엘리제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말하면요?"

"내가 듣겠다."

"해결은요?"

"같이 찾는다."

그 말은 단순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이상하게도, 오늘 들은 모든 말 중 그 말이 가장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무서우면 말해라.

내가 듣겠다.

같이 찾는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칼릭스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했다.

"좋다."

그가 떠난 뒤, 엘리제는 주방에 혼자 남았다.

아니, 이상하게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기록지 마지막 줄에 적었다.

밤의 시식. 산미 반응 양호. 칼릭스, 감정 표현을 맛과 연결하기 시작.

잠시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위험한 맛.

그 글자를 쓰고 나니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엘리제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때 창밖으로 황궁 방향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내일이면 준비가 시작된다.

그리고 곧, 황실 미식회의 식탁이 열린다.

엘리제는 자신이 적은 마지막 문장을 손끝으로 가렸다.

위험한 맛.

그것이 황실을 뜻하는지, 칼릭스를 뜻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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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궁의 정오를 알리는 거대한 청동 종소리가 제국의 심장부를 무겁게 울렸다.블레이크 공작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 열린 황실 안동의 귀빈 대기실은 대연회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순금 문양의 휘장들과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백색의 불빛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고, 바닥에 깔린 붉은 벨벳 카펫은 발소리 하나조차 완벽하게 집어삼키며 은밀한 정적을 자아내고 있었다.“공작부인 전하, 예복의 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리겠습니다.”황실 최고위 하녀장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엘리제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졌다.칼릭스가 직접 골라 입힌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레이스가 목끝까지 촘촘하게 짜여 있어 단 한 치의 살결도 밖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완벽한 폐쇄성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과 유려하게 떨어지는 골반의 곡선을 노골적으로 부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을 옥죄듯 감싸 안은 블레이크 가문의 핏빛 루비 초커는, 그녀가 제국의 구원자이기 전에 오직 한 사내의 지독한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사슬과 같았다.엘리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단추를 목끝까지 채운 드레스는 주방의 화구 열기를 견디던 전생의 가운보다 훨씬 더 답답하게 심장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 답답함의 진짜 원인은 옷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에서부터 마차, 그리고 이 황궁의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자신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쥔 채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던 남자의 파괴적인 독점욕 때문이었다.스윽.그때, 대기실 안쪽의 대리석 기둥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황실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국의 검이자 북부의 지배자다운 오만한 아우라가 공간을 단숨에 압도하자, 황실 하녀들은 공작의 서슬 퍼런 기운에 질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칼릭스의 투명하면서도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엘리제에게로 향했

  • 단두대 위의 미슐랭   [외전-4] 오만의 마침표, 탐닉의 시작

    황궁 귀빈실의 높은 창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가늘고 길게 조각되어 쏟아졌다.수도 위를 수놓은 창백한 새벽안개가 황금빛 태양에 녹아내리는 시간이었지만, 두꺼운 암막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어둡고 진득한 밤의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순백의 실크 드레스 자락,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공작의 제복 훈장들, 그리고 벽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의 매캐한 잔향이 방 안의 밀도를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으음…….”엘리제는 얕은 신음을 삼키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마디마디를 타고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던 지난밤의 흔적이었다. 온전한 감각을 되찾은 괴물이 십수 년의 굶주림을 보상받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탐닉해 온 결과물은 엘리제의 하얀 피부 위로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뒤틀자마자, 허리를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더 누워 있어라.”낮고 잠긴, 짐승의 르누아르 같은 목소리가 엘리제의 귓가를 긁어내렸다.칼릭스는 언제나처럼 소리도 없이 눈을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려 야성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실크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넓고 탄탄한 어깨와 흉판에는 엘리제가 쾌감에 겨워 가늘게 긁어내린 손톱자락 자국이 붉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거울처럼 투명해진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오직 엘리제 한 사람만을 담은 채 기묘한 포만감과, 여전히 가시지 않은 지독한 독점욕으로 일렁였다.“칼릭스, 날이 벌써 다 밝았어요. 황실 시종들이나 하녀들이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 팔 좀 놓아주세요.”엘리제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올렸으나, 칼릭스는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붙잡아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검은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 지문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손

  • 단두대 위의 미슐랭   [외전-3] 밤의 장막과 귀빈실의 지배자

    황궁의 온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창백한 달빛은 두 사람의 엉킨 그림자를 은밀하게 비추고 있었다.온실 안을 가득 채운 진득한 장미 향은 엘리제의 가쁜 숨결과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차가운 대리석 돌벽에 등이 밀착된 엘리제는 전면에서 저돌적으로 밀려드는 칼릭스의 거대한 신체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칼릭스는 그녀의 두 손목을 조리대 벽 위로 거칠게 잡아 내리누른 채, 마치 사냥감을 온전히 가두어둔 맹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칼릭스…… 하아, 사람들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올지 몰라요. 제발 이 손 좀……”엘리제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그치려 했으나, 칼릭스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린 열망은 이미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깊숙이 숙여, 엘리제의 새하얀 목덜미와 핏빛 루비 초커가 닿아 있는 그 예민한 경계선을 사정없이 입술로 핥아 내렸다. 쪽, 소리와 함께 질척한 점막의 마찰음이 온실의 정적을 집요하게 깨부수었다.“흐읏……! 아, 칼릭스……!”엘리제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거칠게 살을 파고드는 남자의 맨손 악력과, 전신을 불덩이처럼 달구는 배덕감이 그녀의 척추 뼈마디를 타고 뇌수까지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모든 미각과 감각을 회복한 칼릭스에게 엘리제라는 존재는 이제 단순히 맛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원색을 뛰어넘어, 자신의 피와 살을 통째로 지배하는 지독한 마약이자 유일한 구원이었다.칼릭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엘리제의 붉게 퉁퉁 부어오른 입술 점막을 강하게 비벼대며, 가쁜 숨을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했을 텐데, 엘리제. 세상이 선명해질수록 내 식욕은 너 하나만을 향해 폭주한다고. 저 연회장에 서 있는 천박한 놈들이 네 어깨와 등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제국 전체를 불태워버리고 싶었다.”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뇌리를 긁어내렸다. 칼릭스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엘리제의 허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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