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꿈의 주인이 오고 있다.”
마흔세 명. 잠들어 있던 북부 병사들이 동시에 눈을 뜨고. 같은 말을 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 에드윈이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침실 안에는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세이아는 카일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은빛으로 빛나던 날개 문양 아래. 검은 깃털 하나가 떠 있었다. 작았다. 그러나. 불길할 정도로 선명했다. “아버지.” “보고 있다.” 에드윈이 가까이 다가왔다. “대공 전하.” “말씀하십시오.” “손을 조금만.” 카일이 손을 내밀었다. 에드윈이 마력을 흘려보냈다. 보랏빛 빛이 검은 깃털을 감쌌다. 순간. 치이익——! “……!”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에드윈이 급히 손을 뗐다.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반응했어요.” “그래.” “아버지 마력에?” “아니다.” 에드윈의 시선이 세이아에게 향했다. “네게.” “…저한테요?” “내 마력이 이 문양을 건드리는 순간.” 그가 낮게 말했다. “안쪽의 힘이 네 쪽으로 움직였어.” 세이아는 잠시 카일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손을 뻗었다. “잠깐.” 카일이 즉시 손을 뒤로 뺐다. 세이아가 눈썹을 올렸다. “왜요?”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만져 보려는 겁니다.” “말이 앞뒤가 안 맞는군.” “전하께서 위험하다고 피하기 시작하면 오늘 해 뜨기 전에 북부는 못 갑니다.” “세이아.” “그리고.” 그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죠.” “뭘.” “전하 혼자 지키는 건 금지라고요.” 카일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그건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 “지금부터 설명하면 되겠네요.” “나는 설명보다 네가 손을 거두는 쪽이 좋다.”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싫은데요.” 그리고.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카일의 손목을 잡았다. “세이아.” 그 순간. 쿵. 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 검은 깃털이 번쩍였다. 파아아앗——! “……!” 세이아의 시야가 뒤집혔다. ⸻ 사아아아— 은빛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세이아가 눈을 떴다. “…또.” 흰 꽃밭. 하지만 조금 전까지 있던 곳과는 달랐다. 하늘에는 검은 균열이 없었다. 꽃도 시들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신전 역시. 무너지기 전이었다. 새하얀 기둥들이 햇빛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그리고. 세이아의 앞. 커다란 은빛 거목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카일. 하지만. 지금 현실에서 손을 잡고 있던 카일은 아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은발. 새하얀 옷. 등 뒤로 펼쳐진 거대한 날개. 그리고. 한 손에 들린 검. 눈처럼 희고. 태양처럼 빛나는 검이었다. 세이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루미에르.”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기억났어?” 세이아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저도 모르겠어요.” “방금 네가 이름을 불렀잖아.” “그냥.” 그녀는 검을 바라보았다. 볼수록 가슴 어딘가가 아렸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 카일이 아주 작게 웃었다. “네가 붙인 이름이니까.” 세이아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제가요?” “빛의 시작.” 카일이 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에 은빛 날개가 새겨져 있었다. “네가 그렇게 이름 붙였어.” 세이아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손이 검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손끝이 검신에 닿는 순간. 기억이 터졌다. ⸻ 『루미에르.』 과거의 세이아가 웃고 있었다. 『왜 그 이름이지?』 카일의 목소리. 『당신에게 잘 어울리잖아.』 『어디가?』 『빛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점이.』 『……좋은 뜻이 아닌 것 같은데.』 『좋은 뜻이야.』 세이아가 카일의 검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어두워지면.』 보랏빛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당신이 찾아올 수 있게 해 주는 빛이라는 뜻이니까.』 카일이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럼 잃어버리지 않겠다.』 『검을?』 『너를.』 ⸻ “…….” 세이아의 손이 검에서 떨어졌다. 숨을 쉬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방금.” “봤어?” “…네.” 카일이 세이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저희.” 세이아가 천천히 물었다. “정말 연인이었습니까?” 침묵. 그 질문만큼은. 카일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세이아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왜 갑자기 입을 다무세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했다.” “예, 아니오면 충분한데요.” 카일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래.” 한 걸음. 그가 다가왔다. “연인이었다.” 쿵. 세이아의 심장이 뛰었다. “그것도.” 그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꽤 오래.” “얼마나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카일이 세이아를 내려다봤다. “알려주기 싫은데.” “왜요?” “억울해서.” 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뭐가요?” “나는 전부 기억하는데.” 그가 낮게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장난처럼 말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세이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안에. 너무 오래된 외로움이 있었다. “카일.”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푸른 눈이 흔들렸다. “그렇게.” “네?” “한 번 더.” 카일이 말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현실에서는 전하라고 부릅니다.” “여긴 현실이 아니야.” “그래도.” “예전에는.” 그가 조금 몸을 숙였다. “네가 나를 전하라고 부르면.” 세이아의 눈앞에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내가 싫어했어.” “왜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숨결이 가까웠다. “거리 두는 것 같아서.” “….” 세이아의 심장이 빨라졌다. 왜. 처음 듣는 말인데. 서운하게 들리지? 오히려. 자신이 저 말을 수없이 들었던 것처럼. “카일.” 이번에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불렀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래.” 대답 역시. 너무 익숙했다. 세이아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은빛 거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 낡은 그네 하나. 세이아의 발이 멈췄다. “….” 그네를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카일도 알아차렸다. “기억나?” “아니요.” 세이아는 천천히 그네로 다가갔다. “그런데.” 손끝으로 낡은 줄을 만졌다. “이상하네요.” “뭐가.” “기다렸던 것 같아요.”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여기서.” 세이아가 눈을 감았다. 바람. 꽃향기.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 그리고. 누군가를 발견하고 웃던 자신의 목소리. “누군가를.” “…….” “아주 오래.” 카일이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세이아의 손 위에.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등 뒤로 그의 체온이 가까워졌다. “나를.”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세이아가 눈을 떴다. “…당신을?” “그래.” “매일?” “거의.” “왜 제가 기다렸죠?” “내가 자주 늦었으니까.” “나쁜 연인이었네요.” “알고 있다.” 세이아가 웃었다. “순순히 인정하시네요.” “그래도.” 카일의 손가락이. 세이아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들어왔다. 손이 맞잡혔다. “항상 왔다.” “…….” “아무리 늦어도.” 세이아는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손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쿵. 은빛 나무가 크게 떨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 검은 깃털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사락. 세이아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 현실의 카일 손등에 나타났던 것과. 똑같았다.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두 번째 날개.” 세이아가 그를 바라봤다. “기억납니까?” “조금.” “누구예요?” “이름은.” 카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떠오르지 않아.” “첫 번째 날개는 전하고.” “그래.” “그럼 두 번째 날개도 여신의 수호자였습니까?” “아니.” 대답은. 놀랍도록 빨랐다. 카일 자신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세이아가 물었다. “그럼요?”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기록자.” “기록자?” “그리고.” 카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문을 지키는 자.” 순간. 세이아의 머릿속에 에드윈이 보여준 오래된 그림이 떠올랐다. 첫 번째 날개. 검. 그리고. 두 번째 날개. 책. “신계를 관리하는 지혜의 존재.” “아마.” 카일이 말했다. “그게 두 번째 날개였을 거야.” “왜 저희를 기다린다고 했을까요?” “모른다.” “그리고 왜.” 세이아가 검은 깃털을 바라봤다. “여신이 돌아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세이아의 몸이 굳었다. 카일의 손이 즉시 검으로 향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렸다. 『그녀가 돌아오면.’ 은빛 나무의 잎이. 하나둘 검게 물들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지.’ “누구야.” 세이아가 차갑게 말했다. 대답 대신. 검은 깃털이 손바닥 위에서 불탔다. 화르륵. 그 안에서. 장면 하나가 나타났다. 거대한 신전. 두 개의 날개. 한쪽은 은빛. 다른 한쪽은. 새하얀 빛. 그리고 그 가운데. 금빛 머리카락의 여자. 세이아. 두 번째 날개는.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렸다. 『이 선택을 하시면.’ 낮고 차분한 남자의 음성.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습니다.’ 과거의 세이아가 웃었다. 『알아.’ 『첫 번째 날개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것도 알아.’ 『그런데도 하시겠다고요?』 『해야 하니까.’ 두 번째 날개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면.’ 처음으로. 목소리에 감정이 들어갔다. 『저는 막겠습니다.’ 세이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의 뒤에서. 빛이 검게 물들었다. 『신계가 무너져도.’ 장면이 끊겼다. 파앗——! “…….” 세이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일의 표정 역시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저 사람이.” 세이아가 천천히 말했다. “두 번째 날개.” “그래 보이는군.” “그리고.” 입술이 마르게 느껴졌다. “저를 살리기 위해 신계가 무너져도 된다고 했어요.” 카일의 손이 움직였다. 세이아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 말만 믿지 마.” “하지만 기억이었어요.” “일부다.” 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누군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잘라낸 기억일 수도 있어.” 세이아가 그를 바라봤다. “4화에서 봤던 것처럼.” 자신이 카일을 죽였다고. 검은 존재가 왜곡해 보여주려 했던 기억. 세이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니까.” 카일이 말했다.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마.” “전하는요?” “뭐가.” “당신 말도 믿지 말까요?” 카일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건.” 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 된다고 하시게요?” “그래.” “제멋대로시네요.” “알고 있다.” “그런데.” 세이아가 그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왜 계속 손을 잡고 있어요?” 카일의 시선이 내려갔다. 둘의 손가락은. 여전히 맞물려 있었다. 그런데도. 놓지 않았다. “카일.” “왜.” “놓으셔야죠.” “싫어.” “….” 세이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꿈속의 카일은. 정말 너무 솔직했다. “왜요?” “곧 끝날 것 같아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뭐가.” “이 기억.” 세이아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보였다. 은빛 나무의 끝부분부터.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꽃밭도. 하늘도. 멀리 있는 신전도. 빛의 입자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게.” “지금 우리가 들어온 건.” 카일이 말했다. “완전한 꿈이 아니야.” “그럼?” “문양에 남아 있던 기억.” 세이아가 굳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카일도. 꿈속에 남은 과거의 카일. 기억의 형태. “현실의 전하는.” “곧 깨어날 거다.” “당신은요?” 카일은 웃었다. “또 만나겠지.” “대답을 피하시네요.” “사라진다는 말을 하면.” 그가 몸을 조금 숙였다. “네가 싫어하니까.” 세이아의 가슴이 욱신했다. “…기억하네요.” “너에 관한 건.” 그가 말했다. “대부분.” 세이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일의 손이 올라왔다. 금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손끝이 귓불을 스쳤다. 그리고. 자수정 귀걸이 근처에서 멈췄다. “이것도.” “귀걸이요?” “기억한다.” “어디서 났는지 압니까?” 카일의 얼굴이 굳었다. “…….” “카일?” “아니.” “방금 분명히.” “기억이.” 그가 눈을 찌푸렸다. “거기서 끊겨.”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귀걸이와 관련된 기억을 지운 것처럼. “현실에서 확인하죠.” 세이아가 말했다. “북부에 가면.” “그래.” “두 번째 날개도 찾고.” “그래.” “이 귀걸이도.”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있습니까?” 그의 시선이 세이아에게 고정됐다. “우리.” “…우리?” “어떤 사이였는지도.” 세이아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아까 연인이었다면서요.” “그건 안다.” “그런데요?” 카일이 아주 조금 웃었다. “어디까지였는지.” “….”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일.” “왜.” “방금 일부러 그러신 거죠?” “뭘?” “성격 나쁘시네요.” “예전에는.” 그가 한 발 가까워졌다. “네가 더 심했어.” “증거 있습니까?” “많지.” “보여 주세요.” 카일의 시선이 세이아의 입술에 닿았다. “그중에는.” 목소리가 낮아졌다. “보여 주는 것보다 직접 확인하는 게 빠른 것도 있는데.” 세이아의 숨이. 아주 조금 멎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은빛 꽃잎이 천천히 떨어졌다. 카일의 손이. 세이아의 허리를 감쌌다. 아까처럼 보호하려는 급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느리게. 그녀가 피할 시간을 충분히 주면서. 세이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카일.” “응.” “현실의 전하가 이걸 알면.” “싫어할까?” “아니요.” 세이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억울해할 것 같은데요.” 카일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건.” 그가 세이아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나중의 내 사정이지.” 숨결이 가까워졌다. 한 뼘. 그보다 조금 더. 세이아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 위에 올라갔다. 쿵. 심장. 익숙한 박동. “정말.” 세이아가 작게 웃었다. “같은 사람이 맞긴 한가 봐요.” “왜?” “심장은 똑같아서.” 카일의 시선이 깊어졌다. 그의 손이 목덜미로 올라왔다. 엄지가. 귓불 아래를 조심스럽게 스쳤다. 세이아의 숨이 흔들렸다. 입술 사이. 이제는 거의 거리가 없었다. 그리고. 카일이 말했다. “그러면.” “…….” “첫 번째는.”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쩌저적——! 세계가 갈라졌다. “…!” 세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은빛 나무가.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카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벌써.” “뭐가요?” 그 순간. 나무의 갈라진 틈 안에서. 검은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 위에는. 두 번째 날개의 문양. 그리고. 북부를 상징하는 에스트라드의 설화 문장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저게 왜.” 카일 역시 말을 잃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익——. 차가운 눈보라가. 꿈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 너머. 끝없는 설원. 그리고.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등 뒤로. 새하얀 날개 두 장이 펼쳐져 있었다. 카일의 팔이 세이아의 허리를 더 단단히 감쌌다. 세이아가 낮게 물었다. “…두 번째 날개?” 멀리 있던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분명 웃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북부에서.』 콰아아아아——! 눈보라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 “……!” 세이아가 눈을 떴다. 익숙한 침실. 꺼진 향초. 반쯤 깨진 보호 마법진. 그리고. 바로 앞. 카일. 그의 손이. 세이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세이아 역시. 카일의 제복 앞섶을 붙잡고 있었다. “….” “….” 둘은 동시에 서로의 손을 내려다봤다. 세이아가 먼저 말했다. “이번에는.” “왜.” “제가 먼저 놓을까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이아가 그를 올려다봤다. 푸른 눈동자가. 묘하게 흐려져 있었다. “전하?” 그가. 세이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선이. 입술 근처에서 멈췄다.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긴 침묵. 카일이 낮게 말했다. “조금.” 세이아의 심장이 뛰었다. “뭐가요?” “루미에르.” 세이아의 눈이 커졌다. “검 이름.” “그리고?” 카일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네.” “또요?” “당신이.” 그가 멈췄다. “나를 기다렸다.” 세이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런데. 카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네.” “누군가.” 푸른 눈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당신을 데려가려 했다.” 세이아의 표정도 굳었다. “두 번째 날개.” “그래.” 카일이 그녀를 놓으며 일어났다. 이번에는. 꿈의 여운을 즐길 시간이 없었다. 탁자 위. 북부에서 온 서신이 놓여 있었다. 세이아가 그것을 바라보았다. “동틀 때 출발한다고 했죠?” “그래.” “바꿉시다.” 카일이 돌아봤다. “뭘.” 세이아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지금 출발해요.” “지금?” “저쪽은 이미 기다리고 있잖아요.” “밤길이다.” “대공 전하.” 세이아가 자수정 귀걸이를 다시 걸었다. 달칵. 폭발하던 마력이 가라앉았다. “제가 누구인지 잊으셨습니까?” “꿈의 여행자.” “그것도 맞는데.” 세이아가 망토를 집었다. 그리고. 웃었다. “밤은 제 시간이거든요.” 카일이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좋아.” “결정 빠르시네요.” “누가 기다린다는데.” 그가 검을 집었다. “기다리게 할 이유는 없지.” ⸻ 한 시간 뒤. 트리비아 저택의 정문 앞에는 검은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북부의 설원을 달릴 수 있도록 제작된 에스트라드 대공가의 마차. 기사들이 짐을 싣고 있었다. 에드윈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지 않았다. “내가 반대해도 가겠지.” 세이아가 활짝 웃었다. “역시 아버지.” “칭찬 아니다.” “알아요.” “도착하면 매일 연락해.” “네.” “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알리고.” “네.” “혼자 들어가지 마.” 세이아가 잠깐 멈췄다. 에드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 대답이 늦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생각하지 말고 대답해.” “…네.” “귀걸이 빼놓고 다니지 말고.” “네.” “다치면.” “돌아오겠습니다.” “안 다치는 선택지는?” 세이아가 웃었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에드윈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카일을 바라봤다. “대공 전하.” “말씀하십시오.” “세이아가 무모한 짓을 하면.” “막겠습니다.” “말로는 안 들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세이아가 홱 돌아봤다. “전하.” 카일은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배웠다.” 에드윈이 처음으로 카일을 조금 마음에 들어 하는 눈빛을 보냈다. “부탁드리죠.” “아버지?” “출발하자.” 카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세이아의 등을 밀었다. “잠깐.” “왜.” “지금 두 분이 제 얘기로 합의하신 겁니까?” “그런 것 같군.” “전 동의 안 했는데요.” 카일이 마차 문을 열었다. “타.” “명령하지 마세요.” “부탁이다.” “전혀 그렇게 안 들렸습니다.” 카일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타 주겠나.”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나오시면.”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타 드려야죠.” 카일이 세이아를 마차 위로 올려 주었다. 그런데. 발을 디디는 순간. 마차 계단에 얇게 얼어 있던 성에 때문에 발이 미끄러졌다. “앗.” 몸이 기울었다. 카일의 팔이 즉시 허리를 감쌌다. 훅. 세이아는 다시. 그의 품 안에 들어왔다. “….” “….” 이제. 너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세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전하.” “왜.” “이번에도 확인입니까?” “아니다.” “그럼요?” 카일의 팔은 여전히 허리에 있었다. “안 떨어지게 잡은 거다.” “이미 안 떨어졌는데요.” “…….” “손은요?” 카일이 조금 늦게 팔을 풀었다. 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생각보다.” “말하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슨 말 할지 안다.” “벌써 저를 그렇게 잘 아십니까?” 그 순간. 카일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그게.” 푸른 눈이 세이아에게 향했다. “문제인 것 같군.” 세이아의 심장이. 쿵. 한 번 뛰었다. 카일은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세이아도 따라 앉았다. 문이 닫혔다. 덜컹. 마차가 움직였다. 북쪽으로. 창밖으로 트리비아 저택의 불빛이 멀어졌다. 세이아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앞에 앉은 카일을 보았다. “전하.” “왜.” “아까.” “뭐지.” “기억난 게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 처음으로. 현실에서. 전하라는 호칭 없이 이름만 불렀다. 그 순간. 마차 안 공기가 변했다. 카일의 눈이. 천천히 세이아에게 향했다. “방금.” “네?” “다시 불러 봐.” 세이아의 심장이 뛰었다. 꿈속의 카일과. 똑같은 말. “…싫다면요?” 카일의 푸른 눈이 조금 깊어졌다. “왜.” “그냥.” 세이아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카일의 손이 뻗어왔다. 턱 아래. 손가락이 가볍게 닿았다. 세이아의 얼굴이 다시 그를 향했다. “…전하?” “꿈에서.”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이 그렇게 부르면.” 세이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좋아했던 것 같아.” “기억난다면서요.” “느낌만.” 카일의 손끝이. 턱선에서 멈췄다. “그러니까.” 그가 조금 몸을 숙였다. “확인해 보고 싶군.” 세이아는. 그를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카일.” 푸른 눈이 깊게 흔들렸다. 세이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때요?” 한참 뒤. 카일이 대답했다. “…좋군.” 세이아의 웃음이 조금 커졌다. “그것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 모양이야.” 그런데. 카일의 손은. 그녀의 턱에서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꿈속에서.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 가까워졌던 순간이. 둘 사이에 동시에 떠오른 듯했다. 세이아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스쳤다. 카일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저 바라봤다. 마치. 확인하고 싶은 것이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것처럼.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세이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카일이 다시 허리를 잡았다. “….” 이번에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이아의 손이 카일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주 가까웠다. “정말.” 세이아가 낮게 속삭였다. “북부까지 이러고 갈 생각은 아니시죠?” 카일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가 올라왔다. “당신이 자꾸 넘어지면.” “마차 탓인데요.” “내 입장에서는.” 허리를 감싼 손에. 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 세이아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다른 것도 기억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카일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그건.” 낮은 목소리. “기억난 뒤에 생각하지.” 세이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성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꿈속의 애틋함만 있는 카일이 아니라.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현실의 카일. 세이아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 더 마음에 들었다. 그 순간. 퍽! 무언가가 마차 창문을 때렸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창밖. 검은 깃털 하나가.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사락. 그리고. 핏빛 글자가 유리 위로 번졌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이아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아래. 한 줄이 더 나타났다. 두 번째 날개가. 마지막으로. 북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검은 문양이 번졌다. 카일의 팔이. 세이아의 허리에서 천천히 풀렸다. 대신. 검 위로 손이 올라갔다. 푸른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세이아.” “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평소 같았으면. 명령하지 말라고 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세이아도 검은 깃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쪽도요.” 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세이아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카일이 그 손을 잡았다. 은빛 날개가. 두 사람의 손등 위에서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누구도 먼저 보내지 않는 겁니다.” 카일의 손가락이. 세이아의 손을 단단히 감쌌다. “약속하지.”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북쪽. 검은 별이 떠 있는 곳을 향해. 그리고.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사이. 북부 에스트라드 성. 깨어났던 마흔세 명의 병사들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모두 똑같은 꿈을 꾸면서. 끝없이 펼쳐진 설원. 설원 한가운데 선. 새하얀 날개의 남자. 그리고. 그의 발밑에는. 은빛 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루미에르. 남자는 검의 손잡이를 천천히 쓸었다. 그리고. 멀리 남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십시오.” 바람이 불었다. 새하얀 날개 끝이. 조금씩. 검게 물들었다. “이번에는.” 낮은 목소리가 설원을 뒤덮었다. “제가 먼저 두 분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첫 번째 날개의 계약이 새롭게 맺어졌다.여신의 심장은 검을 선택했다.그리고.두 번째 날개는 심판대에 오른다.은빛 문장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마치 신계의 누군가가 인간계 전체에 판결문을 내린 것처럼.벨로아의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누군가는 기도를 올렸고.누군가는 두려움에 무릎을 꿇었다.조금 전까지 마을을 뒤덮고 있던 검은 안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교회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도 모두 눈을 떴다.하지만.누구도 기뻐하지 못했다.북쪽 하늘에서 타오르는 붉은 불길 때문이었다.라시드 성.에스트라드 대공령의 중심지.카일이 태어나고 자란 성이 붉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불길은 성벽도.지붕도 태우지 않았다.검은 성 전체를 감싼 채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릴 뿐이었다.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거대한 문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하늘과 땅을 이어 붙인 듯한 검은 문.표면에는 수많은 눈과 날개가 새겨져 있었다.세이아는 무너진 종탑 위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다.“두 번째 문.”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카일의 팔은 여전히 세이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계약을 맺은 직후부터 그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입맞춤의 여운 때문만은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에.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감각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쿵.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쿵.또다시.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 박동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껴졌다.가까이 있지 않아도.손을 맞잡지 않아도.마치 자신의 가슴 안에서 두 개의 심장이 함께 뛰는 것처럼.그리고 심장뿐만이 아니었다.분노.불안.초조함.그 모든 감정 사이에 섞인.세이아를 향한 지나치게 강한 보호 본능까지.이제는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거의 집착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아프나?”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니요.”“숨이 불편해졌다.”세이아가 그를 돌아보았다.“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느껴진다.”카일의 시선이 세이아의 가슴으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세이아는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벨로아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평소라면 늦은 시간까지 여관에서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야 할 마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사람들은 모두 문을 잠근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검은 장막이 드리운 북쪽 하늘에서는 달빛조차 내려오지 않았다.마을 전체가 거대한 그림자 아래 갇힌 것 같았다.세이아는 침대 위에 이불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누군가 밖에서 보면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뒤 여행용 망토를 걸쳤다.허리에는 작은 단검을 찼다.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무기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아무것도 들지 않고 적이 부른 장소로 향하는 것보다는 나았다.세이아는 마지막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카일이 문밖에 서 있었다.그가 떠나는 발소리도 들었다.그런데 이상했다.카일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었다.특히 세이아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면 더욱 그랬다.‘아직 복도에 있는 건 아니겠지.’세이아는 조용히 기척을 살폈다.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기사들의 발소리도.카일 특유의 묵직한 마력도 없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창틀 위로 올라섰다.방은 여관 이층이었다.바닥까지 거리는 높지 않았다.세이아가 손끝을 움직이자 보랏빛 마력이 창 아래로 길게 늘어났다.빛은 투명한 계단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세이아는 소리 없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발이 땅에 닿는 순간 계단은 빛가루가 되어 사라졌다.망토의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북쪽의 버려진 종탑.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위치를 알 수 있었다.멀리 검은 장막 아래로 오래된 탑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탑 위에는 금이 간 종이 매달려 있었다.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종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세이아는 마을의 좁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집집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가끔 커튼 틈 사이로 사람의 눈이 보였다.그러나
“적어도 질투는.” 카일의 손이 세이아의 뺨을 감쌌다. 거칠게 검을 잡아 온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옅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정작 그녀의 피부에 닿는 손길은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웠다. “온전히 내 감정인 것 같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세이아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카일의 엄지가 뺨 아래를 느리게 스쳤다. 턱선. 그리고 입술에서 손가락 하나 떨어진 곳까지.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이상하게 숨이 얕아졌다. “…전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세이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손은 안 떼십니까?” 카일의 시선이 자신이 만지고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떼야 하나?”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보통이 아닌 모양이군.” “그건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세이아가 웃었다. 그러나 카일은 웃지 않았다. 푸른 눈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눈. 코. 그리고. 입술. 그곳에서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세이아는 이제 그 시선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또 보시네요.” “뭘.” “제 입술.” 카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예전이라면 부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래.” 너무 쉽게 인정했다. 세이아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왜.” 카일이 물었다. “보면 안 되나?” “…안 된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럼 됐군.” 그의 손이 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세이아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막상 손길이 떨어지고 나니. 조금 아쉬웠다. 그 사실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공 전하.” “왜.” “꿈에서 돌아오고 난 뒤로 조금 뻔뻔해지신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군.” “설마 저라고 하시려고요?” “당신 말고 누가 있지?”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까.” 세이아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수업료는 비쌉니다.” “내겠다고 했잖아.” “무엇으로요?”
마차 유리창에 붙어 있던 검은 깃털이.사락.천천히 재로 변했다.기다리고 있습니다.핏빛으로 번졌던 글씨도 뒤따라 흐려졌다.두 번째 날개가.마지막 한 획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세이아와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덜컹.마차가 어두운 길을 달렸다.밤은 깊었고.수도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는 사람 사는 불빛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오직 마차 앞에 매달린 마도등만이 희미한 빛을 뿌렸다.세이아는 창문에서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그리고.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카일이 아직 잡고 있었다.조금 전.‘누구도 먼저 보내지 않는다.’그렇게 약속하며 맞잡은 손.은빛 날개 문양은 이미 희미해졌지만.체온은 그대로였다.세이아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카일의 시선이 바로 내려왔다.“왜.”“아직 잡고 계셔서요.”“놓으라고 했나?”“아니요.”“그럼.”카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그대로 있지.”세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대공 전하.”“왜.”“꿈에서 돌아오고 나서 조금 달라지신 것 같은데요.”“뭐가.”“예전 같으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순간 먼저 놓으셨을 것 같아서요.”카일의 엄지가.자신도 모르게 세이아의 손등을 한 번 쓸었다.그리고.움직임이 멈췄다.두 사람 모두 그것을 느꼈다.“….”“….”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이것도 기억 때문입니까?”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모른다.”“정말요?”“그래.”“아까부터 전하께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으시네요.”“당신은 다 아나?”“적어도.”세이아가 그의 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제가 잡고 싶은 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죠.”카일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세이아는 그 반응을 보고 웃었다.“왜요?”“아니.”“또요?”“당신이.”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생각보다 거리낌이 없군.”“전하한테만 그런 것 같습니다.”카일의 손에.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전하?”“그런 말.”낮은 목소리였다.“쉽게 하
“꿈의 주인이 오고 있다.”마흔세 명.잠들어 있던 북부 병사들이 동시에 눈을 뜨고.같은 말을 했다.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에드윈이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침실 안에는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세이아는 카일의 손등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은빛으로 빛나던 날개 문양 아래.검은 깃털 하나가 떠 있었다.작았다.그러나.불길할 정도로 선명했다.“아버지.”“보고 있다.”에드윈이 가까이 다가왔다.“대공 전하.”“말씀하십시오.”“손을 조금만.”카일이 손을 내밀었다.에드윈이 마력을 흘려보냈다.보랏빛 빛이 검은 깃털을 감쌌다.순간.치이익——!“……!”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에드윈이 급히 손을 뗐다.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반응했어요.”“그래.”“아버지 마력에?”“아니다.”에드윈의 시선이 세이아에게 향했다.“네게.”“…저한테요?”“내 마력이 이 문양을 건드리는 순간.”그가 낮게 말했다.“안쪽의 힘이 네 쪽으로 움직였어.”세이아는 잠시 카일의 손을 바라보았다.그러다.손을 뻗었다.“잠깐.”카일이 즉시 손을 뒤로 뺐다.세이아가 눈썹을 올렸다.“왜요?”“위험할 수 있다.”“그래서 만져 보려는 겁니다.”“말이 앞뒤가 안 맞는군.”“전하께서 위험하다고 피하기 시작하면 오늘 해 뜨기 전에 북부는 못 갑니다.”“세이아.”“그리고.”그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아까도 말씀드렸죠.”“뭘.”“전하 혼자 지키는 건 금지라고요.”카일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그건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지금부터 설명하면 되겠네요.”“나는 설명보다 네가 손을 거두는 쪽이 좋다.”세이아가 피식 웃었다.“싫은데요.”그리고.이번에는 묻지 않았다.카일의 손목을 잡았다.“세이아.”그 순간.쿵.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검은 깃털이 번쩍였다.파아아앗——!“……!”세이아의 시야가 뒤집혔다.⸻사아아아—은빛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세이아가 눈을 떴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검은 존재의 목소리가 꽃밭 전체에 스며들었다.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무엇을.”검은 안개 속.여섯 장의 날개가 천천히 펼쳐졌다.검게 썩은 깃털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하나.둘.셋.기분 나쁠 정도로 많은 눈이.모두 세이아를 향했다.『당신이.』낮은 웃음.『첫 번째 날개를 직접 죽였다는 것을.』순간.바람이 멎었다.세이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꽃잎이 떨어지는 소리도.하늘이 갈라지는 소리도.바로 옆에 서 있는 카일의 숨소리조차.오직.한 문장만이 머릿속에 남았다.내가.첫 번째 날개를.죽였다.“…뭐라고?”세이아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검은 존재가 웃었다.『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군.』“헛소리하지 마.”이번에는 카일이었다.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은빛 검끝이 검은 존재를 향했다.『첫 번째 날개.』“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내 이름은 카일이다.”검은 존재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다.『이름.』킥킥.금속 긁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역할보다 이름을 먼저 말하는군.』“그래서?”『이번에는 꽤 다른 모양이야.』카일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검을 들었다.그 순간 세이아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잠깐만요.”카일이 돌아봤다.세이아는 검은 존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방금 말.”그녀가 천천히 물었다.“무슨 뜻이지?”『어느 부분을 묻는 거지?』“내가.”세이아의 손끝이 조금 굳었다.“첫 번째 날개를 죽였다는 말.”카일의 표정이 굳었다.“세이아.”“확인해야 합니다.”“저것이 진실을 말한다고 누가 보장하지?”“아무도요.”세이아가 대답했다.“그래도 듣기는 해야죠.”검은 존재가 즐거운 듯 웃었다.『역시.』“뭐가?”『그 눈은 같군.』세이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누구랑.”『과거의 당신과.』순간.머릿속에.장면 하나가 번쩍였다.피로 물든 손.은빛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