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판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 아무도 듣지 못한 이름

Share

아무도 듣지 못한 이름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9 06:39:25

오래된 계약서의 마지막 장이 펼쳐졌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분명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세이아가 글자를 읽으려는 순간 검은 잉크가 물결처럼 일렁이며 획의 모양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낯선 이름처럼 보였고, 다음 순간에는 익숙한 이름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마치 계약서가 누군가를 보여 주려 하면서도, 정작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아래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남아 있었다.

『최초로 필연을 거부한 자.』

세이아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자신들의 삶을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존재에게도 거부당한 순간이 있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마저도 필연이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역할일까. 그녀가 대답을 요구하기도 전에 검은 손이 계약서를 움켜쥐었다. 마지막 장이 접히고, 오래된 이름은 순식간에 다른 문장들 아래로 사라졌다.

『너희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다.』

어둠 속에서 필연의 목소리가 울렸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아무도 듣지 못한 이름

    오래된 계약서의 마지막 장이 펼쳐졌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분명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세이아가 글자를 읽으려는 순간 검은 잉크가 물결처럼 일렁이며 획의 모양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낯선 이름처럼 보였고, 다음 순간에는 익숙한 이름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마치 계약서가 누군가를 보여 주려 하면서도, 정작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그 아래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남아 있었다.『최초로 필연을 거부한 자.』세이아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자신들의 삶을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존재에게도 거부당한 순간이 있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마저도 필연이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역할일까. 그녀가 대답을 요구하기도 전에 검은 손이 계약서를 움켜쥐었다. 마지막 장이 접히고, 오래된 이름은 순식간에 다른 문장들 아래로 사라졌다.『너희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다.』어둠 속에서 필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수천 개의 입이 동시에 같은 말을 반복하자 세이아의 발밑에 검은 원이 생겨났다. 카일과 에이든의 발밑에도 같은 원이 나타났지만, 세 개의 원은 서로 닿지 않았다. 필연은 마치 각자의 삶을 따로 보여 주겠다는 듯 그들 사이에 얇은 벽을 세웠다. 세이아가 곧바로 카일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벽은 완성되지 않았고, 서로의 목소리도 들렸다.“세이아, 저자가 보여 주는 것을 그대로 믿지 마.”“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없어요.”카일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였다. 자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기억을 빼앗기고, 역할을 강요받고,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도록 몰렸지만, 이번 질문은 그 모든 것보다 깊은 곳을 건드렸다. 강요받은 행동은 거부할 수 있었다. 빼앗긴 기억은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의 시작 자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면, 무엇을 근거로 지금까지의 선택을 믿어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놓을 수 있어야 다시 잡을 수 있으니까

    『애초에 사랑은 너희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아무 색도 없는 눈이 아이의 그림자 속에서 떠올랐다. 새하얀 손은 세이아와 카일에게 돌아가려던 보랏빛과 푸른빛을 한꺼번에 움켜쥐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스스로 놓아주려 했던 사랑이었다. 자신에게서 태어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두 사람에게 돌려주기로 선택한 마음.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손이 그 선택을 가로막은 순간, 두 빛은 다시 아이의 가슴 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안 돼.”아이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작은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림자에서 솟은 힘은 오히려 더 강하게 두 감정을 밀어 넣었다. 세이아를 향한 카일의 사랑과 카일을 향한 세이아의 사랑이 다시 한 몸 안에서 뒤엉켰다. 아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돌려주겠다고 했어. 나는…… 이거 돌려주고 싶어.”『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왜?”『사랑은 본래 개인의 것이 아니니까.』“누구 마음대로요?”세이아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감정을 빼앗긴 탓에 심장은 여전히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지만, 판단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림자에서 솟은 손과 무색의 눈을 바라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카일과 제가 서로를 사랑하며 무엇을 선택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나는 알고 있다.』“그 대답은 많이 들었습니다.”세이아가 잘라 말했다.“오르페온도 알고 있다고 했고, 무명도 저희가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을 저희보다 잘 안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의 문장도 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했죠. 이제는 당신입니까?”무색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아이가 비명을 삼키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두 사람의 사랑이 안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이아를 보면 카일의 마음이 뛰었고, 카일을 보면 세이아의 마음이 반응했다. 그 사이에서 정작 아이 자신의 감정은 점점 작아졌다.“나는…….”작은 몸이 휘청거렸다.“나는 어디 있어?”노아가 곧바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벨이 본능적으로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물려받은 사랑은 네 것이 아니다

    쿵——!아이의 심장이 울렸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몸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박동이었다. 황실 성역 전체가 흔들리고, 기둥을 타고 가느다란 균열이 번졌으며, 바닥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이 일제히 빛났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 있는 세이아와 카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아이의 손이 닿아 있던 두 사람의 가슴 위로 검은 문장이 뿌리처럼 퍼지고 있었다.『첫 번째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그리고 그 아래, 두 번째 문장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첫 번째 보호자를 죽이고― 그들의 선택을 물려받는다.』세이아의 보랏빛 눈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졌다. 카일의 손에서는 루미에르가 미끄러졌다. 챙——. 은빛 검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세이아!”에드윈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그러나 세이아에게 닿기도 전에 아이의 등에서 투명한 날개가 거칠게 펼쳐졌다. 보이지 않는 충격이 폭발하며 에드윈을 밀어냈고, 그의 몸이 기둥에 부딪히는 순간 보랏빛 보호막이 산산이 깨졌다. 엘리아와 네이라가 동시에 움직여 쓰러지는 그를 받아냈다.“아버지!”헤르미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은빛 힘을 끌어올려 세이아와 카일의 가슴을 뒤덮은 문장에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는 아이의 등 반대편에서 검은 날개가 튀어나왔다. 날개 끝이 칼날처럼 휘둘러졌고, 헤르미아가 급히 장막을 펼쳤다. 쾅! 충격에 그녀의 몸이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건드리지 마.”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모두가 멈췄다. 조금 전까지 ‘헤르미아’와 ‘노아’, ‘리안’을 하나씩 배워 가던 아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음성은 맞았지만, 그 아래에 여러 겹의 울림이 포개져 있었다. 세이아의 부드러운 음색과 카일의 낮은 목소리, 오르페온을 닮은 차가운 울림,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낯선 목소리까지.“지금…….”아이의 양쪽 눈이 번갈아 빛났다. 한쪽은 보랏빛, 다른 한쪽은 푸른빛이었다.“두 번째 계승이 시작됐으니까.”그러나 말을 마친 아이의 얼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생명

    “나도…… 살고 싶어.”아렌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테오르의 제2날개 핵 곁에서 희미하게 떠 있던 회색 의식이 불규칙하게 떨렸다. 몸도, 온전한 핵도, 과거에 자신을 이루었던 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한마디만큼은 이전보다 분명했다. 누군가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도, 테오르의 자리를 빼앗아야만 남을 수 있는 가짜도 아닌, 자신의 이름을 가진 존재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원하고 있었다.세이아는 아렌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앞에 천천히 앉아 시선을 맞추듯 고개를 숙였다.“다시 말씀해 주세요.”회색 빛이 흔들렸다.“……꼭 다시 말해야 해?”“네.”“왜?”“제가 제대로 듣고 싶어서요.”한동안 침묵하던 아렌이 마침내 말했다.“살고 싶어.”이번에는 누구도 잘못 들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제2날개의 핵이 크게 울렸다. 테오르가 숨을 들이켰고, 그의 가슴에서 퍼져 나온 빛이 아렌을 향해 움직였다. 카일이 즉시 루미에르를 들어 둘 사이를 막으려 했지만, 테오르가 먼저 손을 들었다.“잠깐.”“핵이 저쪽으로 움직인다.”“알아.”“네 몸을 유지하는 핵이다.”테오르는 잠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다가 아렌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하고 태어났고, 자신의 기억을 흉내 냈으며, 한때는 자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들어졌던 존재.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얼굴조차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테오르는 전보다 더 확실하게 아렌을 구별할 수 있었다.“내 몸을 저 녀석에게 주겠다는 말은 하지 마.”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할 것 같은 얼굴이었어.”“제가 언제요?”“지금.”세이아가 억울한 얼굴을 하자 카일이 옆에서 낮게 덧붙였다.“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카일까지 왜 그러십니까?”“전적이 많아서.”세이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기 어려웠다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당신 혼자 결정할 수 없게

    카일의 손끝이 은빛으로 흩어지고 있었다.“카일.”세이아가 그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하나가 이미 빛이 되어 사라졌고, 남은 손마저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놓치지 않겠다며 단단하게 붙잡던 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빛밖에는 잡히지 않았다.“괜찮아.”“괜찮지 않습니다.”“이번에는 나도 인정해야겠군.”카일이 자신의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 입가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푸른 눈만큼은 웃지 않았다.“정말 조금 위험해.”“조금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농담할 때도 아닙니다.”“당신이 울 것 같아서.”“안 웁니다.”“이미 울고 있는데.”그 말을 듣고서야 세이아는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급히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창조의 힘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가슴에서 힘이 움직이는 순간 오르페온의 은빛 계약이 반응했다. 금빛과 보랏빛이 섞인 빛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꿈도, 시간도, 이름도, 창조도. 오르페온은 그 모든 것의 기원이 자신이라고 주장했고, 적어도 지금 펼쳐진 계약 안에서는 힘을 사용할수록 그의 ‘회수’에 휘말리는 것처럼 보였다.어떻게 해야 하지.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카일이 사라진다. 힘을 사용하면 오르페온의 계약에 먹힌다. 어느 쪽이든 그가 정해 둔 답이었다.“세이아.”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말하지 마세요.”“들어.”“싫습니다.”“당신이 자주 하는 말이군.”“카일.”“그러니까 나도 한 번쯤은 끝까지 말하게 해 줘.”카일이 남은 손을 들어 세이아의 뺨에 댔다. 이미 감각이 거의 남지 않은 손인지 손길이 어색했다. 그래도 세이아는 그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손이 사라진 뒤에도 그 온도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오래 붙들고 싶었다.“내가 없어져도.”“그런 말 하지 마세요.”“끝까지 들어.”푸른 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내가 없어지는 건 당신 선택이 아니야

  • 당신의 밤에 들어가겠습니다   기원은 끝을 정하지 않는다

    “드디어 찾았구나.”오르페온이 손을 내밀었다.“나의 마지막 창조자.”남쪽 폐허에서 열린 검은 문이 황실 성역의 공간을 가르며 완전히 벌어졌다. 그러나 문 너머에 펼쳐진 것은 무너진 신전도, 리안이 잠들어 있던 오래된 관도 아니었다.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얀 궁전과 높게 솟은 기둥, 한 점의 얼룩도 허락하지 않는 바닥이 눈부신 빛 아래 이어져 있었다. 하늘은 지나치게 맑았고 정원에는 흰 꽃이 만개해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으며, 슬픔이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세계였다.그런데 세이아는 곧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바람이 없었다.기둥 사이에 피어난 꽃은 단 한 송이도 흔들리지 않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은 정확히 같은 궤도를 반복해서 돌았다. 구름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도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무엇도 스스로 다음 순간을 선택하지 않았다.헤르미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첫 번째 세계?”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멈췄다. 은빛 눈에 혼란이 번졌다.“아니. 저곳이 정말…….”기억 속의 세계는 무너졌다. 수많은 신과 인간이 죽었고, 끝내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 익숙했다. 기억과 똑같아서 오히려 믿을 수 없었다.오르페온이 웃었다.“남아 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구나.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으니.”세이아가 즉시 물었다.“저곳이 정말 당신들이 말하는 첫 번째 세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오르페온의 은빛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는가?”“직접 본다고 해서 그것의 과거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보존된 일부일 수도 있고, 재현된 공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세계일 가능성도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그들은 기억과 기록, 계약과 이름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오르페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