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식탁 위 휴대전화 화면이 어두워졌다. 재민은 잠시 화면을 다시 켜 답장이 없는 대화창을 확인하고는 전화기를 엎었다. 누구도 어머니의 전화기에 손대지 않았다.
“죄송해요. 정리하시러 왔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됩니다.”
내가 말하자 재민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는 못 하겠어요.”
그는 남길 물건을 적는 종이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던 칸에 사진틀이라고 썼다. 그다음 줄에서는 펜이 멈췄다.
우리는 부엌 서랍부터 함께 열었다. 재민은 유통기한을 확인했고, 나는 깨진 용기와 쓸 수 있는 용기를 나눴다. 나리는 뚜껑이 맞는 것을 찾아 끼웠다. 손이 바빠지자 재민이 조금씩 말을 했다.
“엄마한테 돈 보내면 제가 얼마나 남는지는 안 물었거든요. 엄마도 안 물었고.”
그가 뚜껑 없는 통을 내려놨다.
“집에 오면 반찬은 다 싸줬어요. 그런데 반찬 말고 그냥, 이번 달은 괜찮냐고 한 번 물어봤으면 했어요.”
나는 통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타까지 사놓은 걸 보니까 그런 생각한 것도 미안해요.”
재민은 웃는 얼굴을 만들려다 말았다.
“계속 좋은 엄마였던 거잖아요. 저만 몰랐고.”
“재민 씨가 그때 힘들었던 건 없어지지 않잖아요.”
나리가 말했다. 들고 있던 통을 재민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건 가져가실래요?”
재민은 잠깐 통을 보더니 받았다. 뚜껑 가장자리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워진 글씨 위에 어머니가 다시 써놓은 이름이었다.
“이거 매번 안 돌려줬는데.”
그가 뚜껑을 닫았다. 한쪽이 잘 맞지 않아 두 번 눌러야 했다.
우리는 오래된 약봉투를 의료 서류 옆에 따로 놓았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열쇠는 버리지 않았다. 재민은 처음엔 모두 필요 없다고 하다가, 나리가 물을 때마다 하나씩 대답했다.
중간에 악기점에서 전화가 왔다.
“예약서 사진이 필요합니다. 원본은 저희도 보관해야 해서요.”
재민이 내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이거만 찍으면 되는 거죠?”
“네. 고객님 성함이랑 금액이 보이게요. 다른 서류는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리가 휴대전화를 받지 않고 물었다.
“재민 씨, 제가 촬영해도 될까요?”
“해주세요. 자꾸 글씨가 흔들려서.”
“다 보낸 뒤에는 전송 내역도 보여드릴게요.”
“어머니가 뭘 바꾸셨는지는 전화로 물으면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확인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약 내용 가운데 요청하신 게 더 있거든요.”
재민이 전화를 끊었다.
“또 뭔가 남겨두신 거네요.”
나는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맨손에 모서리가 닿았다.
갈색 서류 봉투가 다시 눈앞에 놓였다. 남자의 입이 움직이고 소리가 뭉개졌다. 잔금 30만 원 입금 확인. 반창고를 붙인 손이 예약서를 꺼냈다.
나는 다음에 나올 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다 낸 거죠?”
파란 테이프. 상자 위에 머무는 손. 아들이 찾으러 올 거라는 말.
이번에는 상대의 얼굴을 더 보려고 했다. 시선은 내 뜻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탁재민이라는 이름을 쓴 메모가 보이다가 거실로 돌아왔다.
나는 싱크대에 손을 짚고 있었다. 나리가 내 앞을 막아 섰다. 재민은 통화 중이라 이쪽을 보지 않았다.
“또 그래요?”
“잠깐만요.”
나리가 종이를 집어 투명 파일에 넣었다. 나는 싱크대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재민에게 내가 잠깐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말한 뒤 현관까지 따라왔다.
나는 신발을 고쳐 신었다.
계단참의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찬 바람을 맞자 내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나리는 내 앞에 서서 한참 얼굴을 살폈다.
“의뢰인보다 먼저 쓰러지면 더 곤란해요.”
“미안해요.”
“사과 말고, 지금 서 있을 수 있는지부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가 난간을 짚던 내 손을 떼어 휴지로 닦았다. 손바닥에 묻은 먼지가 회색으로 번졌다.
“아까 나 잡아준 거.”
그녀가 올려다봤다.
“고마웠어요.”
“그건 나중에 밥으로 받아요.”
나는 웃으려다 말았다. 나리는 억지로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차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고, 비슷한 일이 계속되면 진료를 받자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현관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나리를 불렀다.
“안 물어요?”
“뭘요?”
“왜 이러는지.”
나리가 난간에 기대놓은 내 팔을 봤다.
“물으면 말해줄 거예요?”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가게에 가기 전에 그 안을 봤다고 하면 될까. 죽은 사람의 손을 내 손처럼 보고 있었다고 하면 그녀가 나를 어떻게 볼까.
“설명을 못 하겠어요.”
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만 보고 안심하려는데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럼 못 하겠다고 해요. 괜찮다고 하지 말고.”
나는 그녀의 손목을 봤다. 붉었던 자국은 옅어져 있었다. 서둘러 눈을 돌리자 나리가 소매를 내렸다.
“같이 일하잖아요. 아픈 건 알아야죠.”
“찬오 씨, 남의 물건은 정리해주면서 자기 물건은 그냥 두는 편이에요?”
“제 물건이요?”
“창고에 한 번도 안 여는 상자 있던데. 이름 붙인 채로요.”
나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열어야 할 것 같아요.”
“언젠가가 오늘일 필요는 없죠. 대신 열 생각이 없다면서 괜찮다고 하진 말아요.”
그녀가 먼저 현관으로 갔다. 나는 난간을 놓고 뒤따랐다. 문 안쪽에서 재민이 통화를 끝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자 재민이 영수증 파일을 들고 있었다.
“사장님이 엄마하고 무슨 얘기 했는지 더 물어봤어요.”
그가 파일을 식탁에 놓았다.
“제가 화낸 거 아시냐고 했는데, 모르시겠대요.”
나는 상자 위에 놓였던 손을 떠올렸다. 그 손만으로 재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다렸다고, 화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래도 아드님한테 주려고 끝까지 돈을 내셨으니까…….”
말하다 멈췄다. 재민이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괜찮은 거예요?”
나는 재민이 묻는 뜻을 알았다. 나리의 펜도 멈춰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에 재민이 시선을 내렸다.
“괜찮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제가 아는 건 기타를 남겨두셨다는 것뿐입니다.”
재민은 식탁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먼지가 없는 자리를 오래 문질렀다. 그러다 자기 앞으로 영수증을 당겼다.
“그럼 그것만 확인해요.”
그가 말했다.
“엄마가 마지막에 바꿨다는 부탁. 제가 왜 꼭 쳐봐야 하는지.”
“오늘 가져오기 싫으면 다시 와도 되죠?”
재민이 물었다. 나는 가게에 확인하자고 했다. 그는 그제야 등을 의자에 기댔다. 나리는 펜을 내려놓고 내 앞에 새 장갑을 밀어줬다. 나는 찢어진 것을 작업 가방 깊숙이 넣었다.
나는 악기점 번호를 찾아 재민에게 보여줬다.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돈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받지 않겠다는 건가요, 읽지 않겠다는 건가요?”내가 묻자 나리는 메모를 다시 읽었다.“아직 구분이 안 돼요. 소개한 분한테 확인해야겠어요.”그녀는 봉투를 열지 않고 빈 파일에 넣었다. 어제까지 꽃이 있던 자리에 서류가 쌓여 있었다. 나는 병을 책상 안쪽으로 옮겼다. 나리가 꽃잎을 손으로 받쳐 파일에 눌리지 않게 했다.모임 담당자가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 그는 우리가 분류해놓은 자료를 한 장씩 확인했다. 목록의 수량이 맞자 서명을 하고 자기 가방에 넣었다.“꽃 일은 잘 끝났습니까?”나는 앞으로의 배송은 받지 않기로 했고, 이미 받은 꽃은 의뢰인이 보관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안심한 얼굴로 창가의 꽃을 봤다.“형수님이 주셨나 보네요.”“네.”그는 모임에서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그 남편이 늘 농담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어떤 농담이었는지 물었다.“아내 앞에서는 배에 힘주지 말라고요. 혼자만 멀쩡하게 나오면 나중에 혼난다고.”남자는 자기 배를 두드렸다. 나리가 웃었다. 그는 사진이 창고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나는 그 말도 인계 목록 옆에 적었다.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남자는 메모를 보고 사진은 가족에게도 나눠줘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사진을 찾으면 누구 것인지부터 확인하자고 이야기했다.담당자가 봉인된 편지를 가리켰다
딸은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왔다.우리가 서류를 챙겨 나가려던 때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벌써 왔느냐며 일어났다. 딸은 양손에 종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캐리어 없다고 했잖아. 빌려왔어.”여자는 침실 쪽을 가리켰다. 딸은 바닥의 작은 가방을 보고 웃었다.“이걸로 가려고?”“왜. 다 들어가는데.”지퍼는 끝까지 잠기지 않았다. 딸이 옷을 한 장 꺼냈다.“이거 안 입잖아. 두고 가.”“거기 가서 추우면 입을 거야.”“바닷가라고 다 추운 건 아니잖아.”“바람 불면 추울 수 있지.”딸이 한숨을 쉬자 여자가 웃었다.“네가 어릴 때도 내가 그렇게 싸줬지.”“그때는 엄마가 알아서 해주니까 편했는데.”“이제는 내가 나갈 건데 왜 네가 내 옷을 골라.”딸은 꺼낸 옷을 접어 가방 위에 올려놨다.“엄마가 아빠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까 봐 그랬어.”“엄마도 그렇게 생각한 날이 있었어.”“지금은?&
여자의 집에는 작은 여행 가방이 열려 있었다.현관에서 발을 멈추자 그녀가 들어오라며 웃었다. 꽃다발은 이미 포장이 벗겨져 있었다. 길이가 다른 병 세 개에 꽃이 나뉘어 꽂혀 있었다.“꽃병이 하나뿐이라서요.”그녀는 남편이 늘 마시던 음료수병도 쓸모가 있다고 했다. 병에 붙은 종이를 불려 떼다가 덜 떨어진 부분을 손톱으로 긁었다.나리는 식탁 위에 서류를 펼쳤다. 모임에 돌려줄 자료와 가족이 보관할 자료가 섞여 있는지만 확인하는 방문이었다. 여자는 남편이 쓰던 서랍을 열어 파일 두 개를 꺼냈다.“이름 적힌 건 제 것인지 모임 것인지 모르겠어요.”우리는 의뢰 목록과 파일 표지를 대조했다. 개인 편지처럼 보이는 봉투는 여자 앞으로 밀었다. 그녀는 안을 확인하고 여행 가방 옆으로 옮겼다.“옷이 다 안 들어가네요.”나리가 여행 날짜를 묻자 여자는 주말에 딸하고 하루 자고 올 거라고 했다. 딸이 숙소를 알아보는 중이었다.“아까 전화해서 그러더라고요. 나가고 싶으면 그때 얘기하지 그랬느냐고.”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자기도 말을 안 해놓고.”휴대전화가 울렸다. 딸이 보내온 숙소 사진이었다. 여자는 안경을 쓰고 사진을 확대했다. 침대가 두 개 있는 방과 하나 있는 방을 번갈아 보다가 답장을 썼다.각자 자는 방. 너 자면서 발로 차.
“그 말씀도 적혀 있습니까?”내가 묻자 주인은 서류를 다시 꺼냈다. 마지막 수정 날짜 옆에 수령인 의사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서명은 앞장의 서명보다 작았다.“제가 적고 확인받은 겁니다. 아까는 꽃 종류 바꾸는 얘기인 줄 알고 그쪽만 설명했네요.”나는 의뢰인에게 전화했다.“남편분이 꽃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 그 뜻을 따라달라고 요청하셨어요.”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그 말이 서류에 있나요?”“네. 수정한 날짜와 확인 서명이 있습니다.”“그것 좀 사진으로 보내줄래요?”“따님께 보여드리려고요?”입 밖에 내고 나서 질문을 후회했다.“아니요. 제가 보고 싶어서요.”“죄송합니다. 괜한 걸 여쭸어요.”“딸한테 보여줄지는 제가 정할 거예요. 남편이 마지막에 쓴 글씨를 다시 보고 싶어요.”“원본은 가게에 있고, 허락받은 부분만 촬영해 보내드리겠습니다.”“고마워요. 꽃은 안 받고 싶지만 그 사람이 한 말을 버리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나는 전화를 끊고 주인에게 사진 촬영 범위를 다시 확인
식당 문을 열자 나리가 먼저 창가 자리를 골랐다.나는 맞은편에 앉아 작업 가방을 내려놨다. 나리는 메뉴판을 펼쳤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건 의자에 올려놔요. 국물 튀어요.”나는 옆 의자로 가방을 옮겼다. 주문을 받으러 온 사람이 두 사람 몫의 전골을 권했다. 나리가 내게 매운 것을 먹는지 물었다.“같이 일한 지가 얼만데 그걸 몰라요?”“찬오 씨는 늘 아무거나 먹는다고 하잖아요.”그녀는 메뉴판을 내 쪽으로 돌렸다.“오늘은 골라봐요.”나는 맵지 않은 쪽을 짚었다. 나리는 그것과 공깃밥 두 개를 주문했다. 수저를 꺼내 내 앞에 놓으면서 웃었다.“이제 알았네요.”“매운 거 먹기는 해요.”“좋아하는 거 물었어요.”나는 물컵을 가져와 둘 사이에 놓았다. 그녀가 자기 컵을 당겼다. 사무실에서 매일 보던 손인데 작업 장갑 자국이 없으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이야기가 끊겼다. 내가 오늘 주문서 이야기를 꺼내자 나리는 듣다가 물었다.“쉬는 날에도 그런 생각 해요?”“가끔요.”“가끔이 아닌 것 같은데.” 
전화 너머에서 딸이 숨을 들이마셨다.“나는 엄마가 좋아할 줄 알았어.”“작년에는 좋았어.”여자가 말했다.“올해는 안 받고 싶었고.”딸은 그 말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작년 사진을 보내줬던 일을 이야기했다. 꽃 옆에서 웃고 있었다고, 그 사진을 보고 주문한 거라고 했다.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기억나. 네가 예쁘다고 했잖아.”“그런데 왜 지금은 싫어?”여자는 대답을 고르는 동안 꽃 줄기를 만졌다. 물기가 묻은 손가락을 손수건에 닦았다.“올해는 그날 집에 있기 싫었어.”나는 접수 용지를 내려다봤다. 배송 중단이라는 글자 옆으로 번진 점이 있었다.“친구들이랑 나가려고 했는데, 꽃 온다고 연락받고 기다렸어. 네 전화도 올 것 같아서.”“나 저녁에 전화했잖아.”“그러니까 기다렸다고.”목소리가 높아지자 여자는 말을 멈췄다. 꽃집 주인이 물컵을 놓았다. 그녀는 물을 마신 뒤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너한테도 내가 좋아하는 얼굴을 해줘야 할 것 같았어. 아빠가 보내준 건데 웃어야지, 싶어서.&r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