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열 번 숨 쉬기 전에 공모자의 이름을 대라.”
바이렌의 검끝이 에이슬라의 목을 눌렀다.
첫 번째 숨.
핏방울이 검은 수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살아 돌아온 아내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죽어야 할 죄인이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온 왕이었다.
“공모자는 없습니다.”
“벌써 한 번을 낭비했군.”
“검부터 치우세요. 목이 잘리면 대답도 끝납니다.”
“거짓말이 끝나는 편이 빠르지.”
두 번째 숨.
왕실의가 은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타다 남은 조제표, 깨진 약병, 작은 은제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왕비 전하의 위에서 흰 황혼이 검출됐습니다.
처방자는 왕실 약제원 소속 에이슬라 모렌입니다.”
자기 이름이 살인범으로 불렸다.
에이슬라의 입술이 굳었다.
바이렌이 물었다.
“그 약제사는 어디 있지?”
죽었다.
오스테론에게 독을 먹고, 차가운 바닥에서 맥이 멎었다.
하지만 왕비의 얼굴로 그 죽음을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에이슬라라고 밝히는 순간, 진실은 정신이 나간 왕비의 변명이 된다.
세 번째 숨.
“조제표를 보여 주세요.”
“내 질문부터 답해.”
“그 종이가 가짜라면 질문도 틀렸습니다.”
바이렌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왕실의가 조제표를 펼쳤다.
필체는 에이슬라와 닮아 있었다.
약재량을 적는 순서도, 숫자 일곱의 모양도 같았다.
그러나 이름 끝의 획이 아래로 꺾여 있었다.
에이슬라는 언제나 마지막 획을 위로 올렸다.
“위조입니다.”
검끝이 살을 더 눌렀다.
“왕비가 평민 약제사의 서명을 어떻게 알지?”
네 번째 숨.
에이슬라는 대답 대신 은제 숟가락을 가리켰다.
“손잡이 홈을 긁어 보세요.”
왕실의가 가느다란 침으로 홈을 훑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흰 황혼을 저었다면 결정이 남아야 합니다. 저 숟가락은 약에 닿은 적이 없어요.”
“그걸 병만 보고 알았나?”
“약이 아니라 증거를 본 겁니다.”
“네르시아는 약병과 술병도 구분하지 못했다.”
다섯 번째 숨.
에이슬라의 손끝이 멈췄다.
그는 독살범을 찾는 것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선 여자가 정말 네르시아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왕실의가 약병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 검은 백합 꽃잎이 있습니다.”
“흰 황혼은 무색무취예요. 꽃잎을 넣었다면 향으로 다른 독처럼 꾸미려 한 겁니다.
하지만 조제표에는 꽃잎이 적혀 있지 않아요.”
왕실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처방과 실제 독이 다릅니다.”
바이렌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바꿨지?”
여섯 번째 숨.
오스테론의 이름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말할 수 없었다.
그를 지목하려면 약제원 비밀 장부와 자신의 죽음을 설명해야 했다.
네르시아가 알 수 없는 사실뿐이었다.
“확인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벌어 공모자를 도망치게 하려는 건 아니고?”
“공모자가 있다면 이미 제가 살아난 걸 알았을 겁니다.”
“살아난 건가?”
바이렌이 검등으로 그녀의 턱을 들었다.
“아니면 다른 것이 들어온 건가?”
일곱 번째 숨.
에이슬라는 숨을 삼켰다. 바이렌은 아무 근거 없이 던진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약을 알아본 순간부터, 네르시아가 아닌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문가를 보았다.
근위병이 어린 시녀를 끌어냈다. 시녀의 목에는 오래된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아이가 네가 독을 마시는 장면을 봤다.”
“거짓말입니다.”
시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 약을 드신 뒤, 제 목을 조르셨습니다.”
에이슬라는 자기 손톱 밑의 마른 피를 보았다.
여덟 번째 숨.
“왜 그랬죠?”
바이렌의 얼굴에서 마지막 온기가 사라졌다.
“네 죄를 나에게 묻나?”
“기억이 없습니다.”
“독도 기억하지 못하고, 살인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은제 숟가락을 집어 에이슬라의 발치에 던졌다.
“그런데 죽은 약제사의 필체만 기억한다.”
에이슬라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죽은 약제사.
왕실에는 이미 에이슬라가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말이 튀어나온 뒤에야 실수를 깨달았다.
아홉 번째 숨.
바이렌의 검이 목에서 떨어졌다.
안도할 틈도 없이 그의 손이 에이슬라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엄지가 맥 위를 눌렀다.
“시신이 있다는 건 누가 알려 줬지?”
“방금 폐하께서 죽은 약제사라고 했습니다.”
“죽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함정이었다.
에이슬라는 손목을 빼려 했지만 왕비의 왼손이 먼저 움직였다.
손가락이 바이렌의 소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숨겨진 단검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붙잡았다.
“멈춰.”
자기 몸에 내린 명령이었다.
하지만 왼손은 바이렌의 손목을 비틀려 했다.
열 번째 숨.
근위병들이 검을 뽑았다.
바이렌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에이슬라의 손을 자기 심장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 몸은 나를 기억하는군.”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네가 아니라면 누구지?”
대답할 수 없었다.
왼쪽 가슴에서 에이슬라의 심장이 뛰었다.
한 번.
이어 오른쪽 갈비뼈 아래에서 다른 박동이 울렸다.
두 번.
바이렌의 손이 왼쪽 맥을 짚은 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오른쪽 가슴으로 옮겨 갔다.
두 번째 박동이 손길을 피해 더 안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검끝을 왼쪽 심장에 댔다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옮겼다.
“지난번에는 독을 썼고, 그전에는 칼을 썼지.”
두 심장이 서로 다른 박자로 뛰었다.
“이번에는 어느 쪽 심장을 노렸지?”
[네 이름으로 사랑해.]거울 조각에 남은 문장이 빛처럼 흐려졌다.에이슬라는 손가락으로 유리 가장자리를 붙잡았다.“네르시아.”[응.]“당신이 사라지면 이 몸은 어떻게 돼요?”[네가 살아.]“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에이슬라는 금이 간 유리 위에 이마를 댔다.“당신은 어디로 가요?”네르시아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뒤늦게 미소를 지었다.왕비의 초상화에도, 악녀의 기록에도 남지 않았던 편안한 얼굴이었다.[이름을 잃지 않는 곳.]유리 안쪽의 손바닥이 에이슬라의 손과 겹쳤다.[내 죄도 남겨.]“남길게요.”[내가 구하지 못한 아이들도.]“끝까지 찾을게요.”[바이렌에게는 내가 미안했다고 하지 마.]“직접 말해요.”에이슬라는 뒤를 돌아봤다.바이렌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다가오지도,떠나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지켜주고 있었다.그가 거울 앞에 무릎을 꿇었다.네르시아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당신을 죽이고 싶었던 날도 있었어.]바이렌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알고 있다.”[살아달라고 빌었던 날도.]“그건 몰랐군.”[모르는 게 너무 많았지.]“그래.”바이렌은 변명하지 않았다.“그래서 네 죄도, 내가 외면한 일도 전부 다시 기록하겠다.”네르시아가 웃었다.[이번에는 결론부터 쓰지 마.]“약속하지.”그 순간 유리 안쪽에 아침빛이 번졌다.네르시아의 형체가 손끝부터 흩어졌다.에이슬라는 붙잡으려 했지만 손바닥에는 차가운 유리만 남았다.[살아, 에이슬라.]마지막 글자가 사라졌다.가슴 안에서 두 번 울리던 박동이 하나로 줄었다.아프지 않았다.다만 오랫동안 함께 살던 사람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한쪽이 텅 비었다.에이슬라는 그 빈자리를 억지로 채우지 않았다.“잘 가요, 네르시아.”성교회가 무너진 뒤 왕궁은 석 달 동안 잠들지 못했다.에이슬라의 옛 육신은 성교회 지하에서 수습됐다.오스테론이 남긴 검은 흔적을 지운 뒤, 왕실 약제사 에이슬라 모렌의 이름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나를 살릴지, 첫 번째 아이를 죽일지.”오스테론의 웃음이 아렌의 얼굴 위로 번졌다.에이슬라는 유리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둘 다 아니에요.”“아직도 선택을 피하는군.”“당신이 내놓은 답 중에서 고르지 않겠다는 뜻이에요.”아렌의 오른손이 목을 움켜쥐었다. 작은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었다.오스테론이 아이의 몸으로 스스로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바이렌이 검을 들어 유리관의 잠금 장치를 겨눴다.“깨뜨리면 아이가 버틸 수 있나?”“검은 액체부터 빼야 해요.”에이슬라는 유리관 아래에 연결된 관을 살폈다. 검은 액체는 심장 박동에 맞춰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빠른 박동 하나와 느린 박동 하나.아렌과 오스테론의 심장이 아직 완전히 겹치지 않았다.에이슬라는 거울 조각을 유리관에 붙였다.네르시아가 안쪽에서 아렌을 바라봤다.[내가 끌어낼게.]“그러면 당신이 위험해요.”[내 몸에 들어온 적이 있어.]네르시아의 손가락이 오스테론을 가리켰다.[길을 알아.]에이슬라는 고개를 저었다.“혼자 하지 않아요.”오스테론이 아렌의 입으로 비웃었다.“둘이 힘을 합치면 무엇이 달라질 것 같으냐.”“우리는 당신처럼 다른 사람을 지우지 않아요.”에이슬라는 유리관 아래의 배출구를 열었다.검은 액체가 빠져나오자 아렌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오스테론이 아이의 손을 들어 배출구를 막으려 했다.“아렌!”에이슬라가 유리를 내리쳤다.“네 몸이야. 손을 내려.”손이 중간에서 멎었다.“네 이름을 다시 말해.”아렌의 입술이 움직였다.“아…… 렌.”오스테론의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입 다물어라.”“누가 네 이름을 알려줬지?”“아무도…….”“그럼 네가 정한 거야?”아렌의 새끼손가락이 유리를 긁었다.“꿈에서…… 들었어요.”“누구 목소리였어?”아렌의 눈동자가 에이슬라를 향했다.“제 목소리요.”두 박동의 간격이 벌어졌다.오스테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 이름은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이름에는 당신 허락이 필요 없어요.”에이슬라는 청낭초
“내가 이 몸에서 죽으면, 첫 번째가 눈을 뜰 테니까.”오스테론이 차지한 에이슬라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검은 피가 코와 입에서 쏟아졌다. 손끝부터 빠르게 굳어가고 있었다.에이슬라는 반사적으로 다가갔지만 바이렌이 팔을 붙잡았다.“이미 죽은 몸이에요.”입으로 말하면서도 시선은 자신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오스테론이 아니었다면 저 몸은 평생 자신의 것이었을 육신이었다. 약초를 빻고 아이들의 열을 짚었던 손, 흰 황혼을 삼킨 뒤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했던 몸.그 입술이 마지막으로 움직였다.“일곱 번째.”오스테론의 목소리가 끊기는 순간, 에이슬라의 육신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성교회 방향에서 종이 울렸다.한 번.긴 침묵 뒤에 두 번째 종이 이어졌다.세이라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지하 봉인을 여는 종입니다.”바이렌이 타론에게 명령했다.“구조한 아이들을 왕비궁으로 옮겨라. 나머지는 성교회로 간다.”“폐하께서 직접 가시면 위험합니다.”“그래서 간다. 오스테론이 왕궁까지 뿌리를 내렸다면 내 병력도 전부 믿을 수 없어.”에이슬라는 장부와 해독제를 챙겼다.네르시아가 거울 조각에 모습을 드러냈다.[첫 번째를 죽이면 끝나.]에이슬라는 조각을 천으로 감쌌다.“그 아이도 피해자예요.”[오스테론이 들어가면 모두 죽어.]“그렇다고 아이를 먼저 죽이지는 않아요.”네르시아의 표정이 굳었다.[망설이면 늦어.]“늦지 않게 다른 방법을 찾을 겁니다.”성교회 정문은 열려 있었다.안에는 사제도 경비도 보이지 않았다. 복도 양쪽의 촛불만 지하로 향하는 길을 밝히고 있었다.누군가 그들이 오기를 기다린 흔적이었다.타론이 앞장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지하에는 흰 문 일곱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앞선 여섯 개는 이미 열려 있었고, 안에는 빈 침대와 끊어진 가죽끈만 남아 있었다.마지막 문에는 숫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1.]세이라가 검은 열쇠를 넣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오스테론의 피가 필요합니다.”에이슬라는 작은 병을 꺼냈다.
“왕궁 아래에 있는 아이들은 전부 죽는다.”오스테론의 말이 끝나자 바닥 틈에서 흰 연기가 솟구쳤다.스물아홉 번째가 기침하며 장부를 끌어안았다. 세이라가 아이의 코와 입을 소매로 막았다.“젖은 천을 준비해요!”에이슬라는 약장으로 달려가 해독액을 물통에 쏟았다. 타론과 유렌이 천을 적셔 아이들의 얼굴을 감쌌다.바이렌은 오스테론의 목덜미를 눌렀다.“멈추는 방법을 말해라.”“이미 늦었다.”오스테론은 에이슬라의 얼굴로 웃었다.“두 심장이 하나가 된 순간, 지하의 문은 전부 잠겼다. 약이 퍼지고 나면 열어도 시체밖에 없을 거다.”에이슬라는 가슴을 짚었다.두 박동이 완전히 같은 간격으로 뛰고 있었다.약장 유리문 안에서 네르시아가 손을 들었다.[나를 밀어내.]“싫어요.”[내가 나가면 멈춰.]“나간다는 게 사라진다는 뜻이잖아요.”네르시아가 대답하지 못했다.바이렌이 에이슬라의 어깨를 붙잡았다.“다른 방법을 찾아.”“시간이 없어요.”바닥 아래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연달아 울렸다.첫 번째 잠금 장치가 닫힌 소리였다.오스테론이 말했다.“다섯 번 더 울리면 끝이다.”두 번째 충격음이 올라왔다.에이슬라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네르시아, 내 말을 들어요.”유리 안쪽의 자주색 눈이 흔들렸다.“당신이 사라지면 두 심장은 하나가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만 남는 거예요.”[아이들이 죽어.]“그러니까 함께 뛰지 말자는 거예요.”네르시아의 손끝이 멎었다.“당신은 네르시아로 뛰고, 나는 에이슬라로 뛸 거예요. 같은 몸에 있어도 같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요.”세 번째 충격음이 울렸다.에이슬라는 눈을 감았다.스승의 약방에서 처음 약초를 빻던 날을 떠올렸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고, 창밖에는 봄비가 내렸다. 그 기억에는 네르시아가 없었다.심장 하나가 빨라졌다.거울 속 네르시아는 북문을 바라봤다.불이 붙은 마차, 열리지 않던 문, 칼을 들고 달려가던 자신의 발을 기억했다.다른 박동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두 심장의 간격이 처음으로 어긋
“돌려받으러 왔다. 네가 훔쳐 간 내 왕비를.”에이슬라의 얼굴로 오스테론이 웃었다.바이렌의 검이 그의 목을 향해 뻗었다. 오스테론은 피하지 않고 맨손으로 검날을 붙잡았다.손바닥이 찢어졌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상처 가장자리만 검게 변하며 말라붙었다.에이슬라는 자신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 몸에서 나가요.”“네가 먼저 돌려놓아야지.”오스테론의 시선이 네르시아의 몸을 훑었다.“그 몸은 네 것이 아니다.”“내 몸도 당신 것이 아니에요.”“내가 만들고 길렀다. 어떤 약을 먹일지, 무엇을 배우게 할지, 어느 환자를 만나게 할지까지 전부 내가 정했어.”오스테론이 피 묻지 않은 손을 들어 보였다.“이 손이 사람을 살리는 법을 익힌 것도 나를 담기 위해서였다.”“사람을 살린 건 나예요.”“내가 준 지식으로.”“아이들을 실험체로 만든 지식이겠죠.”에이슬라가 한 걸음 다가서자 바이렌이 팔을 뻗어 막았다.오스테론이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이번에는 왕의 뒤에 숨는구나.”“숨는 게 아니라 함께 서 있는 겁니다.”바이렌의 검끝이 오스테론의 목에 닿았다.“그 몸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이면 벤다.”“베어라.”오스테론이 목을 내밀었다.“이 여자의 몸이 죽어도 상관없다면.”바이렌의 검이 멎었다.오스테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매에서 작은 은침을 꺼냈다.에이슬라가 외쳤다.“오른손목을 쳐요!”바이렌이 검등으로 손목을 내리쳤다. 은침이 바닥을 굴렀다.타론이 뒤에서 오스테론의 팔을 꺾었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몸을 틀어 타론을 밀쳐냈다.동작은 에이슬라가 알던 자신의 몸에서 나올 수 없는 힘이었다.하지만 오른쪽 발목이 늦었다.에이슬라는 그 차이를 알아봤다.“몸이 당신을 거부하고 있군요.”오스테론의 표정이 굳었다.“상처에서 피가 나오지 않고, 관절이 움직임을 따라오지 않아요. 영혼이 자리 잡은 게 아니라 시체를 억지로 움직이는 거예요.”“그래도 충분하다.”“아니요. 오래 버티지 못해요.”에이슬라는
제60화. 내 얼굴로 웃었다[그가 기다린 것은, 에이슬라가 이 몸에서 깨어나는 날이다.]장부의 문장을 읽는 순간, 벽에 꽂힌 약병들이 일제히 기울었다.세이라가 스물아홉 번째를 끌어안았다.“엎드리십시오!”“깨지는 병부터 막아야 해요.”에이슬라는 장부를 아이의 품에 밀어 넣고 벽으로 달려갔다.약병을 받치는 금속대가 하나의 축으로 연결돼 있었다. 어느 병이 먼저 깨져도 나머지가 따라 떨어지는 구조였다.병 속 액체는 투명했지만 바닥의 검은 가루와 섞이면 흰 황혼의 증기가 만들어질 터였다.“세이라, 등잔을 꺼요.”세이라가 소매로 불꽃을 덮었다.어둠이 내려앉자 병 표면에 희미한 얼굴이 떠올랐다.네르시아였다.그녀가 다급히 손가락을 움직였다.왼쪽.세 번째.에이슬라는 벽돌을 더듬었다. 세 번째 벽돌만 가장자리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그것을 밀자 바닥 아래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곧 벽 틈에서 물이 쏟아져 검은 가루를 쓸어갔다.첫 번째 약병이 바닥에 떨어졌다.유리가 깨지며 달콤하고 서늘한 냄새가 퍼졌지만, 액체는 물에 희석돼 연기를 만들지 못했다.“밧줄을 내려라!”천장 너머로 바이렌의 목소리가 울렸다.스물아홉 번째가 밧줄을 붙잡자 세이라가 아이의 허리를 단단히 묶었다.“먼저 올라가.”“장부는요?”“네가 들고 가야 해.”아이는 장부를 품에 안고 위로 끌려 올라갔다.에이슬라는 남은 병들을 확인했다. 금속대의 움직임이 멈췄지만 언제 다시 작동할지 알 수 없었다.세이라가 밧줄을 잡으며 말했다.“왕비님부터 올라가십시오.”“당신이 먼저 가요.”“저를 아직 믿으십니까?”“아니요.”에이슬라는 세이라의 허리에 밧줄을 묶었다.“그래서 살아서 조사받으라는 거예요.”세이라가 위로 올라간 뒤 에이슬라가 마지막으로 밧줄을 잡았다.위에서 바이렌이 직접 그녀의 팔을 붙잡아 끌어올렸다.에이슬라의 발이 기도실 바닥에 닿자 바이렌은 손을 놓지 않았다.“다친 곳은?”“없어요.”“확실한가.”“네. 아이부터 봐요.”스물아홉 번째는 장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