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는 은근히 최지습에게 경고하고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형인 자신이 난처하지 않게 조금은 생각해 주었어야지.하지만 최지습이 그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먼저 김단을 저격한 건 중전 마마입니다. 그리고 서원도 마찬가지지요. 형님께서야 말로 그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전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서원은 짐이 버릇을 잘못 들인 게 맞다. 허나 이제 와서 성격이 고쳐지겠느냐? 어차피 시집갈 날도 멀지 않았으니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짐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그 태도는 마치 무책임하게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뜻 같았다.최지습의 입꼬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전하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최지습을 떠보기 시작했다.“그래서 너는 김단을 계속 네 저택에서 지내게 할 생각이냐?”“네.”최지습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제 저택은 넓습니다.”“헛소리!”전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최지습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그 낭자가 네 저택에 머무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제대로 된 명분도 없는 여자가 남자 집에 머무는 건 또 무슨 도리이더냐?”최지습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그 아이는 제 의남매입니다. 그 명분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전하는 혀를 끌끌 찼다.“그건 네 법칙이고. 의남매이니 의형제이니 하는 거 말이다. 그게 어디 대명천지에 내놓을 수 있는 이름이더냐? 내 차라리 김단에게 군주 작위를 내려주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최지습은 전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밤의 어둠은 꽤 깊었으나 그 눈빛 속에 엿보이는 날카로움은 가려지지 않았다.최지습은 차분하게,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물었다.“군주로 봉하고 군주부를 내려주고 난 후 단이를 소한에게 맡기시려는 속셈입니까?”전하는 잠시 당황하며 눈동자를 굴렸다.그가 자신의 얕은 꾀를 단숨에 간파할
전하는 최지습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그에게 최지습은 남아있는 유일한 동생이었다.그런 동생이 여덟 해 동안 실종되었다가 가까스로 돌아왔으니 자기가 한발 물러나야지 뭐 어쩌겠는가?전하는 화가 나서 속이 뒤집히는 듯했지만 그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어휴 마음대로 하거라 이 무능한 놈아. 며칠 뒤 내 구 낭자와의 자리를 마련할 테니반드시 나가거라!”“소인 물러가겠습니다.”최지습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하도 마음속에 억눌렀던 답답한 감정이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최지습의 등장으로 인해 전하는 여덟 해 동안 꽁꽁 묶어두었던 감정들을 하나둘씩 드러내기 시작했다.그는 자신의 동생이었다. 이복형제였지만 같은 아버지의 피를 나눈 유일한 혈육이었다.한때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둘렀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홀로 싸웠던 존재이다.그로 인해 많은 사람을 죽였고 여덟 해 동안 죄책감에 몸부림쳤던 사람.자신은 지금 임금이 되어 만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그러니 이제는 그가 최지습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비록 최지습이 크고 건장한 사내로 자랐다고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던 소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어리숙하고 연약했던 그 소년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다.궐에서 나오는 길, 최지습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이 궐은 너무도 많은 추억을 품고 있었다.좋은 기억, 나쁜 기억, 따스했던 순간, 그리고 처참했던 순간까지도그러나 결국 그 모든 기억은 피비린내로 물들어 있었다.청회색 벽돌 하나까지도 피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그는 청석으로 된 작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바로 이곳에서 그는 여섯 번째 형님을 죽였다.그리고 달빛이 비치는 높다란 궁궐 벽에서 그는 열 번째 형님을 장창으로 죽여버렸다.조금 더 걸어가니 궐문이 보였다.그때 그는 저곳에서 저항하던 여덟 번째 형님을 말에서 끌어내려 그의 가슴을
오늘 연회 자리에서 최지습은 술을 꽤 많이 마셨다.하지만 그의 주량으로 봐서는 그 정도로 취할 리가 없었다.그러니 김단은 지금 최지습의 상태가 몹시 걱정되었다.혹시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다 중전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로 인해 전하가 그에게 이상한 것을 먹인 건 아닐까?원래는 궐문을 나선 후 쉽게 다시 들여놓지 않지만 궐을 지키는 병사가 마침 소하의 부하였고 최지습과도 잘 아는 사이였기에 김단을 허락해 주었다.조심스럽게 최지습을 부축한 후 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그의 손은 뜨거웠고 맥은 고르게 뛰고 있었다.비록 정식으로 의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소가에서 유 대인과 함께 지내며 맥 짚는 법 정도는 익혀두었기에 맥박을 측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최지습의 맥은 고르고 평온했다.그러니 몸에 해로운 것을 먹은 것은 아닌 듯했다.그렇다면 정말로 술에 취한 것일까?궐 안의 술이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그런데 그 순간, 최지습은 김단이 얇디얇은 어깨로 자신의 팔을 받쳐주려 애쓰느 모습을 보고 문득 그녀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자신의 체중의 반을 실어 그녀에게 기대보았다.뜻밖에도 김단은 그 무게를 감당하며 버티고 서있었다.작은 체구라 힘겨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았다.“대군 자가, 조금만 버티세요. 마차가 바로 밖에 있어요.”김단은 이를 악물고 무게를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최지습의 단단한 근육과 다부진 체격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러 아팠지만 김단은 묵묵히 버텼다.다행히도 궐문까지는 몇 걸음 남지 않았다.최지습은 그런 김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작고 여린 몸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강단과 결의가 느껴졌다.그녀의 땀방울이 이마를 적셨고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최지습의 입가에 어느새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나는 괜찮소.”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순간 김단은 어깨에 실린 무게가 줄어든 듯한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최지습이 일부러 무리해서 버
최지습은 김단이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아마 형님께서는 낭자와 소한을 이어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소.”그 말을 들은 김단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럴 리가요? 소한 도련님께서 청혼하려 했을 때 전하께서 친히 그 혼인을 막아주셨잖아요.” 그때 전하가 김단에게 얼마나 큰 자유를 주었던가.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소가의 둘째 며느리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또 그 고통 속에 갇혀 평생을 힘들게 살았겠지.김단은 그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최지습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아마도 소한이 낭자 때문에 미쳐가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지신 것 같소.”최지습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소한이 전장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기에 오왕의 난을 겪어본 전하마저 크토록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김단에게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김단은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감추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저는 더 이상 소한 도련님과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그 말에 최지습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좋소.”그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그녀를 향한 깊은 신뢰와 존중이었다.이틀 후 전하는 최지습에게 구연평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최지습은 김단을 데리고 나섰다.마차 안에서 김단은 계속 최지습을 곁눈질하며 바라보았다.그가 부탁할 일이 있다며 데리고 나왔지만 정작 그 부탁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만남 장소는 한양 밖의 대나무 정원이었다.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대나무 잎에 걸려 아름다운 금빛 조각이 되어 땅 위로 흩어졌다.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잎은 살랑거리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대나무 정원의 하인이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그들을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정원 깊숙이 자리한 아담한 정자에는 구연평이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그녀는 달빛 같은 흰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부드럽게 흐
말을 마친 최지습은 김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구 낭자를 좀 돌봐주시오.”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최지습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그의 뒷모습은 여느 때처럼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정자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은 그저 어색한 눈빛만 주고받았다.김단은 순간 당황했지만 최지습이 자기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아마도 자신이 너무 단호하게 거절하여 구연평이 상처받을까 봐 김단더러 그녀를 위로해 주어라는 의미일 것이다.최지습은 분명 여자들끼리 대화하는 게 더 수월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정작 김단과 구연평은 그날 궐에서 한 번 본 사이일 뿐이었다.서로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두 사람은 그저 대책 없이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함 속에 갇혀있었다.그때 갑자기 구연평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웃음을 터뜨렸다.“그분, 제가 속상할까 봐 낭자를 남겨둔 거지요?”김단도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얘기했다.“사실 대군자가는 마음이 굉장히 따뜻한 분이에요. 다만 좀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라 차갑게 들리실 수 있습니다.”구연평은 고운 손으로 김단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저는 오히려 그런 단호함이 마음에 듭니다. 괜히 돌려 말하면서 시간 낭비하느니 차라리 한 번에 잘라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사실 저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만남은 전하께서 직접 나서서 주선하신 거라 더 부담스러웠거든요. 할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걱정했는데 그분이 이렇게 단칼에 거절해 주시니 오히려 속이 시원하네요.”사실 구연평도 이 혼사가 달갑지만은 않았다.김단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에요. 저는 언니께서 상처받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습니다.”그날 궐에서 자신을 위해 증언해 주었던 구연평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구연평이 마음 아파하지 않기를 바랐다.김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며 구연평은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눈빛 속엔 결연함과 자신
구연평의 시선이 김단에게로 옮겨졌다.그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웠고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구연평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사실 처음엔 낭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낭자는 어릴 때부터 ‘소한’이라는 자 옆에 바짝 붙어 다녔었죠. 왜 진산군 댁 귀한 아가씨의 인생이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 눈에는 그저 한심하고 답답하게 보일 뿐이었죠.”구연평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김단을 향한 경멸이 아닌 연민과 동정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낭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특히 그날, 낭자가 구서의 눈을 찔러 멀게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비로소 낭자를 다시 보게 되었거든요.”구연평은 대방(大房)의 사람이었다.그래서 이방(二房)에서 나고 자란 그 망나니를 늘 혐오해왔기에 이름조차 입에 담고 싶어 하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그의 이름을 언급할 때 얼굴에 드리운 불쾌감과 혐오감은 감출 수 없었다.“그 인간이 얼마나 많은 여인을 해쳤는지 낭자도 잘 알 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에게 저항하고 상처를 입힌 건 낭자 하나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답방에서 지냈던 그 3년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지만 그래도 버텨내주셨잖습니까. 그 고통을 이겨냈기에 낭자는 이미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낭자의 인생은 세답방을 떠나던 그날부터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그 말에 김단의 눈동자가 떨렸다.가슴속에 쌓아두었던 덩어리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그녀의 말이 옳았다.견뎌냈고 깨어났다. 그것은 새로운 삶이었다.김단은 줄곧 한양을 떠나야만 비로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구연평의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자신의 새로운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세답방을 떠나던 그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진산군 댁과 소한과의 인연을 끊어낸 그순간부터
최지습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김단을 향해 물었다.“그래, 구 낭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이오?”김단은 잠시 머뭇거리며 기억을 떠올렸다.“구 언니가 그러셨어요. 작은 집안에 갇혀서 평생 남을 위해 사느니 차라리 혼자 자유롭게 사는 게 낫다고요.”최지습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다.그는 그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내가 그 낭자를 너무 얕봤던 것 같소.”김단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도령님, 걱정 마세요. 구 언니는 오히려 도령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줘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할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서 곤란했을 거라고 말입니다.”최지습은 그제야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다행이군.”구연평을 거절한 것으로 인해 따르는 책임을 자신이 전부 떠안아도 상관없었다.어차피 그는 어떤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다음 날, 최지습은 약속대로 김단을 내의원으로 데려갔다.심지어 내의원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뛰어난 의술을 자랑하는 의원장 수 어의가 직접 김단을 가르치게 했다.김단은 전보다 더욱 집중하여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그녀의 눈빛은 진지함과 결연함으로 빛나고 있었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중함이 배어있었다.예전에 진산군 댁 어의가 남긴 의서 덕분에 배우는 속도는 빨랐고 이해력도 뛰어났다.수 어의는 매일같이 김단을 칭찬하며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의심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소한의 두 다리는 자신이 직접 진단했고 앞으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었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겠는가?소문에 의하면 그의 다리를 김단이 치료했다고 했다.하지만 김단의 의술은 아직 초보 수준에 불과했다.그녀가 그 어려운 치료를 해냈다는 사실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수 어의는 김단을 슬쩍 떠보듯 물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질문에도 여전히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 어의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재빠르게 소한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손끝으로 뼈의 상태를 더듬으며 집중해 보았다.그러나 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눈가에는 절망스러운 기운만 감돌았다.옆에 있던 군의관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수 어의님, 소 장군께서는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수 어의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군중에서 이런 상황을 본 적이 많으시겠죠. 알다시피, 소 장군의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군의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순간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이미 그는 소한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기에 급히 수 어의를 모셔온 것이었다.그러나 막상 진단 결과를 직접 듣고 나니 더욱 절망스러웠다.“하지만 소 장군은 체격이 건장하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이 말발굽에 짓밟혔으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 텐데 아직 숨이 붙어 있습니다.”수 어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하지만 흉골이 다 부러졌고 그 뼛조각이 폐를 깊게 찌른 것 같습니다. 소 장군을 살리려면 가슴을 갈라서 폐에 박힌 뼛조각을 직접 꺼내야 합니다.”그때였다.김단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그렇다면 즉시 가슴을 열어봐야죠!”그녀의 목소리는 결연했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말은 쉽게 했으나 그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소한의 숨이 붙어있는 한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제가 만들 수 있는 약이 있습니다. 그걸 먹이면 최소한 한 시간은 깊이 잠들게 할 수 있어요.” 수 어의는 놀란 눈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무슨 약을 만든단 말이오? 그게 가능하오?”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의원님께서 남기신 의서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약을 쓰면 한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진다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뼛조각을 꺼내면 됩니다.”수 어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슴을 여는 수술이라니... 너무도 무모한 시도였다.그러나 소한의 희미한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는 점점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